大智度論 論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을 풀이함 ② 2
問曰:平等者,於般若波羅蜜相已具足,何以故更說“離等是般若波羅蜜相”?
묻나니, 평등(平等)이란, 반야바라밀의 상(相)에 이미 두루 갖추어진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여읨의 이(離) 등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經中但說“諸法等故般若等”,行者取是平等相而生著,
是故說:“般若波羅蜜平等相自性離,色等諸法自相離故。”離義,如「相無相品」中說。
답하나니, 경에서는 다만 “제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도 평등하다”고 말하였을 뿐인데,
수행하는 행자가 이 평등한 상(相)을 취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평등한 평등상(平等相)이라서 스스로의 성품을 여의는 자성이(自性離)이다”고 말하는 것이니, 물질(色) 등의 제법은 스스로의 성품을 여의는 자성이(自性離)이기 때문이다.
여읨의 이(離)의 뜻에 대해서는 '상무상품(相無相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得此諸法平等,又於平等離,安住空中,空中則不動 戲論不能動,諸煩惱山亦不能動,無常時亦不能動。所以者何?於一切法得實相故。
菩薩住是二空,得不動般若波羅蜜,是則究竟。若有念,卽是有相著處;是故說:“諸法無念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念。”無動相是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諸相滅故。
이 제법의 평등을 얻었으며, 또 평등하게 여의는 평등이(平等離)에서 공(空) 가운데에 안주하나니,
공(空)한 가운데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이라서, 희론으로도 움직일 수 없고, 모든 번뇌의 산(山)으로도 움직일 수 없으며, 덧없는 무상시(無常時)로도 움직일 수 없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의 실상(實相)을 얻었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 두 가지의 이공(二空)에 머무르면서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 반야바라밀을 얻나니, 이것이 곧 궁극의 경지인 구경(究竟)인 것이니,
만약 생각(念)이 있으면, 상(相)이 있고 집착할 곳이 있게 되나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제법은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라고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무동상(無動相)이 곧 반야바라밀이니, 반야바라밀은 모든 상(相)이 소멸한 것이기 때문이다.
若不念是般若,或迷悶無所趣向,有戲論者,在大衆中則生怖畏;或於涅槃中不了故,亦生怖畏。
是故說“無怖畏相是般若波羅蜜”。
만약 생각하지 않는 불념(不念)이 바로 반야라면, 미혹과 번민이 향하여 나아갈 곳이 없으며,
희론(戲論)을 펴는 이는 대중 가운데에 있으면서 두려운 생각을 내기도 하며, 혹은 열반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도 역시 두려운 생각을 내기도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두려워함이 없는 무외상(無畏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한 것이다.
是人雖不決定取諸法相,而深入法性故,於大衆中有難論諸相者,心無所畏,於諸法得無相故。
又入無生法忍時,知一切法不可得,於是中亦無所畏。所以者何?是菩薩善通達一切法故。
復次,一切法一相,所謂性空;是故般若波羅蜜隨一切法故,亦性空一味。
이러한 사람은 비록 결정적으로 제법의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에 깊이 들었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서 모든 상(相)에 대하여 힐난하는 이가 있어도 마음으로 두려워함이 없으니, 제법에서 무상(無相)을 얻었기 때문이며,
또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갈 때, 일체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임을 아나니, 이 가운데서도 또한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일체법을 잘 통달한 때문이며,
또 일체법은 한 모양의 일상(一相)이라서 이른바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일체법을 따르며, 따라서 역시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과 한 맛의 일미(一味)인 것이다.
問曰:上已說諸法平等,今何以更說一味?
묻나니, 앞에서 이미 제법은 평등하다고 설명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한 맛의 일미(一味)’를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空,或時有味,或時無味。若行者,爲諸見取相分別好醜籌量,爾時得是諸法平等空 心大歡喜故名爲味。如人爲熱渴所逼,得淸冷水,以爲眞味無比,隨時用故名味。眞實畢竟空,則無味、不味。
답하나니, 공(空)은 때로는 맛이 있는 유미(有味)이기도 하고, 때로는 맛이 없는 무미(無味)이기도 하니,
만약 수행하는 행자의 소견으로 상(相)을 취하면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것을 분별하고 헤아리던 때에 이 제법의 평등공(平等空)을 얻게 되면, 마음이 크게 기뻐지기 때문에 이것을 맛의 미(味)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몹시 덥고 목이 마를 때, 맑고 시원한 물을 얻으면, 비교할 데 없이 맛있는 진미(眞味)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때에 따라 작용하기 때문에 맛의 미(味)라 하지만, 진실로 필경공이라면 맛의 미(味)도 맛이 없는 것도 아닌, 불미(不味)인 것이다.
復次,一味者,菩薩行般若波羅蜜時,所緣、所觀皆爲一味;空智力大故,餘法皆隨而爲空。譬如煮石蜜欲熟時,雖異物和合,皆爲石蜜。又如大海,百川歸之,皆爲一味,所謂畢竟空味。
色等諸法亦如是,凡夫心中各各別異;入般若波羅蜜中,皆爲一味。邊名爲相,若有、若無。實觀色等諸法非有非無故無相,無相卽是無邊;觀是已,卽是無邊般若波羅蜜。
또 ‘한 맛의 일미(一味)’라 함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반연할 바의 소연(所緣)과 관찰할 바의 소관(所觀) 모두 한 맛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이니, 공에 대한 지혜의 힘이 크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들도 모두 따라서 공하게 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석밀(石蜜)을 불에 끓일 때, 비록 다른 물질이 화합하였을지라도 모두가 석밀이 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마치 대해(大海)에는 온갖 하천의 물이 그 곳으로 흘러들어가서 모두가 한 맛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과 같나니,
이른바 필경공의 맛인 필경공미(畢竟空味)인 것이며,
물질(色) 등의 제법 또한 이와 같아서 범부의 마음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반야바라밀의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모두가 한 맛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이다.
치우친 변(邊)을 상(相)이라 하나니, 있다는 유(有)거나 없다는 무(無)라는 것이며,
물질(色) 등의 제법을 실관(實觀)한다면 있다는 유(有)도 아니요, 없다는 무(無)도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며,
무상(無相)인 것은 곧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관찰한다면, 그것이 곧 끝이 없는 무변(無邊)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復次,有人言:邊有二種:常邊、斷邊,世間邊、涅槃邊,惡邊、善邊等。此中無如是等諸邊故,名爲無邊般若波羅蜜。復次,有人言:邊名前際、後際。世閒無始故無前際,入無餘涅槃故有前際;不復更出故無後際。如是等分別諸邊,著世閒故畏涅槃。是故般若波羅蜜中無是一切邊,但聞諸法實相無入無出。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치우침의 변(邊)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항상하다는 치우침의 상변(常邊)과 아주 없다는 치우침의 단변(斷邊)이요,
세간에 대한 치우침인 세간변(世間邊)과 열반에 대한 치우침인 열반변(涅槃邊)이며,
나쁜 것에 대한 치우침인 악변(惡邊)과 착한 것에 대한 치우침인 선변(善邊) 등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치우친 소견의 변(邊)이 없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는 무변(無邊)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치우침의 변(邊)을 전제(前際, 과거)와 후제(後際, 미래)라 한다”고 하며,
세간은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이기 때문에 전제가 없으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기 때문에 전제가 있으며,
또 다시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후제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치우침을 분별하면서 세간에 집착하기 때문에 열반을 두려워하 되며,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러한 일체의 치우침이 없으며, 다만 제법의 실상에는 들어가는 것도 없는 무입(無入)이고 나오는 것도 없는 무출(無出)이라고 들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問曰:諸法平等、諸法離皆是無邊,何以復別說?
묻나니, 제법의 평등과 제법의 여읨인 이(離) 모두에는 치우침이 없는 무변(無邊)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별도로 설명하는 것입니까?
答曰:有人知諸法平等、知諸法離,則不須說;若有人取相,著是一味,故說無邊。
曇無竭非但爲薩陁波崙故說,薩陁波崙亦不但自爲故問,但爲衆生有種種心、種種行故,於般若波羅蜜相中略說。
無生、無滅,如先種種因緣“破生滅”中說。虛空無邊,如摩訶衍虛空譬喩中說。
大海水無邊、須彌莊嚴,先未說故,今當略說。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제법의 평등을 알고, 제법의 여읨(離)도 알고 있으므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지만,
어떤 사람은 상(相)을 취하여 이 일미(一味)에 탐착하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는 무변(無邊)을 설명하는 것이다.
담무갈은 다만 살타파륜만을 위하여 설한 것이 아니며, 살타파륜 역시도 자신만을 위하여 물은 것이 아니나,
다만 중생들은 갖가지 마음의 종종심(種種心)과 갖가지 행동의 종종행(種種行)이 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상(相) 가운데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며,
‘나는 것이 없는 무생(無生)이고, 멸하지도 않는 무멸(無滅)’이라 함이란, 앞에서 갖가지 인연으로 생멸을 깨뜨리는, 파생멸(破生滅)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허공이 끝이 없다는 허공무변(虛空無邊)’이란, 마하연(摩訶衍)의 허공비유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큰 바닷물이 끝이 없다는 대해수무변(大海水無邊)’과 ‘수미산의 장엄’에 대해서는 앞에서 아직 설명하지 않았기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問曰:虛空,無爲、常法故無得其邊者,可言無邊。大海水在四天中,繞須彌山,有由旬數量,有人能渡,何以言無邊?
묻나니, 허공은 무위(無爲)라서 항상 있는 상법(常法)이기 때문에 그 끝을 얻는 이가 없으므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할 수 있지만,
큰 바닷물의 대해수(大海水)는 동의 지국천(持國天), 남의 증장천(增長天), 서의 광목천(廣目天), 북의 다문천(多聞天)의 4천(天, 사천왕) 가운데에 있으며,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어서 유순(由旬)의 수량이 있으므로 사람으로서 건널 수 있는 이도 있거늘, 무엇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無邊有二種:一者、實無邊,二者、人不能到故無邊。
海亦有二種:一者、可渡;二者、繞須彌山在九寶山裏,廣八萬二千由旬,世閒人不能得邊,故言無邊。如小海,舩力可渡;大海水,舩力不可渡,唯有神通者能渡。如外道凡夫能生禪定舩,度欲界、色界海;無色界如大海,深廣則不能渡,以不能破我心故。諸賢聖人智慧、禪定翅力,破諸法邪相、得實相,故能度,是故說大海譬喩。翅 날개 시
답하나니,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요, 둘째는 사람으로서는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이며,
바다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건널 수 있는 가도(可渡)요,
둘째는 수미산을 둘러싼 구보산(九寶山) 속에 있는 것으로, 그 너비가 8만 2천 유순이라서 세간 사람으로서는 그 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다’고 말하며,
마치 작은 바다는 배의 힘으로도 건널 수 있으나, 큰 바닷물은 배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고 오직 신통이 있는 이만이 건널 수 있는 것과 같으며,
마치 외도(外道)의 범부는 선정의 배를 타고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바다는 건널 수 있지만, 무색계(無色界)의 큰 바다는 깊고 넓어서 건널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을 깨뜨리지 못한 때문이다.
모든 성현은 지혜와 선정이라는 날개의 힘인 시력(翅力)으로 제법의 삿된 사상(邪相)을 깨뜨리고 실상을 얻어서 건널 수 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대해(大海)를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問曰:須彌山一色,何以言莊嚴?
묻나니, 수미산은 한 가지 색의 일색(一色)이거늘 무엇 때문에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外書說須彌山一色,純是黃金。六足阿毘曇中說:須彌山四邊,各以一寶成,金、銀、頗梨、琉璃莊嚴。若諸鳥隨所至方,各同其色。難陁、婆難陁龍王兄弟,以身圍繞七帀。山頂有三十三天宮,其城七重,名爲憙見,九百九十九門,一一門邊皆有十六靑衣大力鬼神守護。
답하나니, 외서(外書)에서 “수미산은 한 가지 빛깔이어서 순수하게 그것은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육족아비담(六足阿毘曇)에서는 “수미산의 네 둘레는 각각 하나의 보배로 되어있고 금ㆍ은ㆍ파리ㆍ유리로 장엄되어 있으며, 모든 새들은 그 가는 방향을 따라 각각의 빛깔과 같아지며,
난타(難陀)와 바난타(婆難陀) 용왕의 형제가 몸으로 일곱 겹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의 정상에는 33천(天)의 궁전이 있으며, 그 성(城)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어서 이름을 희견(喜見)이라 하며,
이성에는 9백 99개의 문이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문마다에는 열여섯 명의 푸른 옷을 입고 있는 힘이 센 귀신들이 있어서 성을 수호한다.
城中高處作殿,名曰最勝,四邊有四大園。四天王在四邊,有山名遊乾陁,各高四萬二千由旬,四天王治其上。四大海水,諸阿修羅宮及諸龍王宮殿;遊乾陁等九寶山,日月、五星、二十八宿及諸餘星圍繞莊嚴。如是等種種雜飾以爲莊嚴,視之無厭。
그 안의 높은 곳에는 전각이 있는데, 이름을 최승(最勝)이라 하고,
그 네 둘레에 네 개의 큰 동산이 있으니, 4천왕(天王)이 살고 있으며,
그 네 둘레에는 산이 있는데 이름은 유건타(游乾陀)라 하고,
각각의 높이는 4만 2천 유순이며 4천왕이 그 위를 다스리고 있으며,
사대해(四大海)의 바닷물 속에는 모든 아수라의 궁전들과 모든 용왕(龍王)들의 궁전이 있으며,
유건타 등의 아홉의 보배산에는 해와 달과 5성(星)ㆍ28숙(宿)이며 그 밖의 모든 다른 별들이 주위를 에워싸서 장엄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갖가지로 꾸며져서 장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는 이는 싫증냄이 없다”고 하나니,
般若波羅蜜亦如是。六波羅蜜果報故,作轉輪王、梵、釋天王、淨居天王、大自在天 如是等果報,行般若波羅蜜未具足時,受此果報莊嚴。
般若波羅蜜具足時,則有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辟支佛道、阿毘跋致菩薩、諸佛道果莊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6바라밀의 과보 때문에 전륜왕(轉輪王)과 범천왕(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정거천왕(淨居天王)과 대자재천(大自在天)들이 되며, 이와 같은 등의 과보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서 아직 완전하게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러한 과보의 장엄(莊嚴)을 받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에는 곧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비발치(阿毗跋致)의 보살과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도과(道果)의 장엄이 있게 되는 것이다.
如須彌山,上、下皆有莊嚴。般若波羅蜜莊嚴亦爾,未具足時,諸天王等莊嚴;具足已,諸道果莊嚴。
如須彌山者,劫初立時,四邊大風吹,聚地之精味,積爲須彌山;更有風吹,令堅而成寶。
般若波羅蜜亦如是,一切善法中第一堅實牢固和合以爲般若。
마치 수미산의 위아래가 모두 장엄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의 장엄도 또한 그러하나니,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는 모든 천왕(天王) 등의 장엄이 있으나, 완전히 갖춘 뒤에는 모든 도과(道果)로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수미산은 겁초(劫初)에 이루어질 때, 네 둘레에서 큰 바람이 불어서 땅에 모인 정미(精味)를 한 곳에 쌓아 올려서 수미산을 만들었고, 다시 바람이 불어서 그 산을 견고 하게 하고 보배가 되게 한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착한 선법들 가운데에서 제일 견실하고 단단한 것만이 화합한 것을 반야라 하는 것이다.
如須彌山,四邊大風吹、大海水波所不能動;般若波羅蜜亦如是,邪見、外道、戲論及諸魔民所不能動。
如須彌山頂四園,諸天到者,受種種樂;般若亦如是,行者能登般若頂,到四禪等諸定園中,受種種樂。
마치 수미산은 사변에서 부는 큰 바람이나 큰 바닷물의 파도로도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外道)의 희론으로나 모든 악마의 백성들로서는 움직일 수가 없으며,
마치 수미산 정상에 있는 네 개의 동산에 하늘들이 이르게 되면 갖가지의 즐거움을 받는 것과 같이,
반야 또한 이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가 반야의 정상에 오르면 4선(禪) 등의 모든 선정의 동산에 이르게 되어 갖가지의 즐거움을 받는 것이다.
復次,有人言:須彌山,衆鳥到者皆同一色;般若波羅蜜亦如是,諸法入中皆同一相,所謂無相。
如虛空無分別者,虛空無分別是內是外、是遠是近、是長是短、是淨是不淨等;般若波羅蜜亦如是,諸法入般若中,亦無內外、善不善等分別。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미산에 여러 종류의 새들이 이르게 되면 모두가 동일한 색의 일색(一色)이 되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제법이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가 동일한 일상(一相)이 되나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다”라고 하는 것이며,
‘마치 허공이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인 것과 같다’고 함이란, 허공에서는 ‘이것은 안(內)이다, 밖(外)이다. 이것은 멀다(遠), 가깝다(近). 이것은 길다(長), 짧다(短). 이것은 깨끗하다(淨), 깨끗하지 않다(不淨)’라고 분별함이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또한 이와 같아서 제법이 반야에 들어가면, 역시 안과 밖이라거나 착하고 착하지 않다는 등의 분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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