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2
或復內識轉似外境,我、法分別熏習力故,諸識生時變似我、法。
혹은 다시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 즉 견분(見分, 주관)이 전변하여 외부의 대상으로의 사현(似現, 인식작용)하는, 즉 상분(相分, 객관)으로 자아(我)와 법(法)으로 분별하면서 훈습하는 힘 때문에,
모든 식이 일어날 때에 변하여 자아(我)와 법(法)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십대논사 중에서 난타(難陀, Nanda) 등의 견해이며, 그는 2분(分)을 건립하지 않고 견분을 능변의 식체(識體)로 하고, 이 식 자체, 즉 견분이 전변하여서 마음 밖에 대상으로 사현(似現)하는데, 이 변화된 것을 상분이라 하며, 이것에 의지해서 자아와 법을 시설한다고 하였다.
此我、法相雖在內識,而由分別似外境現。諸有情類無始時來,緣此執爲實我、實法,如患、夢者,患、夢力故,心似種種外境相現,緣此執爲實有外境。似 같을 사, 닮을 사
이 자아(我)와 법(法)의 모습은 비록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에 있지만, 분별에 의해서 외부대상으로 현현하는 것이니, 모든 유정의 무리는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사아사법(似我似法)의 상(相)을 반연하여 집착하여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으로 삼으니,
마치 환자나 꿈을 꾸는 사람이 병이나 꿈의 힘에 의해서 마음이 갖가지 외부대상의 모습으로 현현하고, 이것을 반연해서 집착하여서 참으로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식이 전변된 식소변(識所變)이라는 용어를 자세하게 해설한 것으로, 흔히 실체로서의 자아나 법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실아실법(實我實法)이 아니라 사아사법(似我似法)이며, 세간과 성교(聖敎)에서 이것을 자아와 법이라고 가설한 것이다.
愚夫所計實我實法都無所有,但隨妄情而施設,故說之爲假,內識所變似我、似法,雖有而非實我、法性,然似彼現,故說爲假。外境隨情而施設,故非有如識,內識必依因緣生故,非無如境,由此便遮增、減二執。
어리석은 범부가 의식 작용으로 여러 사물을 잘 헤아려 분별하여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이라고 하는 것 모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다만 허망한 생각을 따라서 시설된 것으로, '삼십송'의 제1게송에서 그것을 임시적인 가(假)라고 말하였다.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이 전변하여 사현된 자아인 사아(似我)와 사현된 법인 사법(似法)은 존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참다운 자아와 법의 성품이 아닌 것이나 그것으로 사현되기 때문에 ‘임시적인 가(假)’라고 말하는 것이다.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은 허망한 생각인 정(情)을 따라 시설된 것이므로, 식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은 반드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처럼 존재하지 않는 비무(非無)이며,
이러한 까닭에 문득 증익(增)과 감소(減)의 두 가지 집착을 막는 것이다.
외경(外境)은 변계소집성으로서 유(有)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외경실유(外境實有)라는 증익(增益)의 집착을 막으며,
내식(內識)은 의타기성으로서 무(無)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손멸(損滅)의 집착을 막는 것이다.
境依內識而假立,故唯世俗有,
외부대상은 내식(內識)에 의지해서 가립(假立)되는 것이므로 오직 세속제에서만 존재하는 세속유(世俗有)이며,
세속제(世俗諦)는 범부 소견의 경지이고, 승의제(勝義諦)는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경지이다.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사속일진설(四俗一眞說)에 바탕을 두고 4중(重)의 세속ㆍ승의 2제(諦)를 건립하여서 세간세속제(世間世俗諦)ㆍ세간승의제(世間勝義諦)ㆍ도리승의제(道理勝義諦)ㆍ증득승의제(證得勝義諦)ㆍ승의승의제(勝義勝義諦)로 구분하며,
본문에서의 세속제는 세간세속제를 말하며 마음 밖의 대상이란 세간세속제의 허망한 경계인 망경(妄境)일 뿐인 것이다.
識是假境所依事故,亦勝義有。
식(識)은 허망한 대상이 의지하는 자체인 소의사(所依事)이므로 역시 승의제(勝義諦)에서도 존재하며,
여기서는 세간승의제(世間勝義諦)를 가리키며, 식이 전변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은 세간승의제인 의타기법일 뿐이다.
云何應知實無外境,唯有內識似外境生?實我、實法不可得故。
참으로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은 없고 오직 내식(內識)만이 있어서 외부대상으로 현현(生)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에 대한 집착을 논파하는 것으로, '유식삼십송'의 취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실아(實我)에 대한 집착을 논파하는 것으로, 세 부류의 외도의 국집된 견해를 열거하고 그것들을 논파하며,
무아(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실아(實我)로 집착하면, 근본적으로 이러한 아치(我痴)에 의한 아집(我執)을 없애지 않고는 참다운 해탈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如何實我不可得耶?
諸所執我略有三種:一者執我體常周遍,量同虛空,隨處造業,受苦樂故;二者執我其體雖常,而量不定,隨身大小有卷舒故;三者執我體常至細如一極微,潛轉身中作事業故。
▷묻습니다; 어찌하여 실아(實我)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입니까?
▷답한다; 모든 집착된 자아에는 대략으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아는 본체가 상주하고 널리 두루하며, 크기가 허공과 같다고 집착하여서 거처하는 곳을 따라 업을 짓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며,
인도철학사상에서 상캬(Sāṁkhya, 數論)학파나 와이세시까(Vaiśeṣika, 勝論)학파 등의 견해
둘째는, 자아는 그 본체가 상주하지만 그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신체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감기고 펴짐이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며,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에서 무참외도(無慙外道)인 빠꾸다 깟짜야나와 니간타 나따뿟따의 견해로써, 사람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으로, 무참외도라고 부른다. 나간타 나따뿟따의 자이나교에서는 나체(裸體)로 걸식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무참외도라 한다.
셋째는, 자아라는 본체가 상주하고 지극히 미세해서 하나의 극미와 같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신체 속에 내재하면서 옮겨 다니면서 업을 짓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주(獸注)ㆍ변출(遍出) 등의 외도의 견해이다.
初且非理,所以者何?執我常遍,量同虛空,應不隨身受苦樂等。又常遍故,應無動轉,如何隨身能造諸業?又所執我,一切有情爲同爲異?若言同者,一作業時一切應作,一受果時一切應受,一得解脫時一切應解脫,便成大過。
첫 번째의 주장은 바른 논리가 아니니,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집착된 자아가 상주하고 두루하는 것이며, 크기가 허공과 같다고 한다면, 몸을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 등을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수론(數論)을 인명논리의 방법인 인명작법(因明作法)으로 논파한 것이다
또한 상주하고 두루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신체를 따라 능히 여러 가지 업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인가?
승론(勝論)을 논파한 것이다.
또한 집착된 자아는 모든 유정이 같은 것도 되고 다른 것도 된다는 것에서
만약 같다고 말한다면, 한 사람이 업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짓는 것이어야 하고,
한 사람이 과보를 받는 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받는 것이어야 하며,
한 사람이 해탈할 때에 모든 사람이 해탈해야 하는 것이니, 곧 큰 오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의 동이(同異)를 쌍(雙)으로 논파한 것으로, 외도들이 자아가 상주하여서 법계에 두루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모든 유정의 자아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묻고는, 그 둘 모두의 모순점을 들어서 논파한 것이다.
若言異者,諸有情我更相遍故,體應相雜,又一作業一受果時與一切我處無別故,應名一切所作所受。若謂作、受各有所屬無斯過者,理亦不然,業、果及身與諸我合,屬此非彼不應理故。一解脫時一切應解脫,所修證法一切我合故。
만약 다르다고 말한다면, 모든 유정의 자아는 서로 두루하기 때문에 본체가 서로 뒤섞여야 하며,
또한 한 사람이 업을 짓고 한 사람이 과보를 받을 때, 모든 사람의 자아와 처소, 즉 자아의 주처(住處)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체가 짓고 받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에 각각 속하는 바가 있어서 이러한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이치 또한 바른 것이 아닌 것으로, 업(業)과 과(果) 및 몸(身)은 모든 자아와 합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속하지만 거기에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의 정리(正理)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니,
한 사람이 해탈할 때, 모든 사람이 해탈해야 하며, 닦고 증득한 법이 그 모든 자아와 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中亦非理,所以者何?我體常住,不應隨身而有舒卷,旣有舒卷,如橐籥風應非常住。又我隨身應可分析,如何可執我體 一耶?故彼所言如童豎戲。
두 번째의 주장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니니, 자아는 본체가 상주한다고 말하는 까닭에 몸(身)을 따라 펴지고 감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펴고 감는 일이 있다고 말한 까닭에 자루나 피리 속의 바람처럼 상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또한 자아는 몸(身)을 따른다고 말하는 까닭에 분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니, 어떻게 자아의 본체가 하나라고 집착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어린 노비들이 모래밭에서 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린 노비들이 모래밭에서 씨름하며 놀 때, 비록 매우 애를 쓰지만 실제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실아(實我)도 역시 그러하다는 조롱어린 신랄한 비판이다.
後亦非理,所以者何?我量至小如一極微,如何能令大身遍動?若謂雖小而速巡身,如旋火輪似遍動者,則所執我非一非常,諸有往來非常一故。
세 번째의 주장 역시도 바른 논리가 아니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자아의 크기가 지극히 작아서 하나의 극미와 같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능히 큰 몸의 대신(大身)을 두루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작기는 하지만 신속히 몸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횃불을 돌려서 바퀴 모양과 같은 원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두루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곧 집착된 자아는 하나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나니, 왕래가 있는 모든 것은 상주하거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유정의 신체는 1만 6천 유순(由旬)의 큰 몸의 대신(大身)이라 하는데, 자아의 크기가 극미(極微)와 같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한다면, 한 찰나 중에 어떻게 큰 대신을 두루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비판이다.
又所執我復有三種:一者卽薀,二者離薀,三者與薀非卽非離。
또한 집착된 자아에 다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의 범부들이 자아의 체(體)가 오온(五蘊)이라고 집착하는 견해의 5온에 즉하는 자아의 즉온아(卽蘊我)이고,
둘째는 오온과 별개의 자아인 이온아(離蘊我, 異蘊我)이며,
여기서 이(離)는 이(異)의 뜻으로, 자아의 체는 5온과 달리 별도로 있다고 집착하는 외도들의 견해로써, 그들이 온(蘊)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보면 역시 온(蘊)에 해당하는 것이다.
셋째는 오온에 즉함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 자아의 비즉비이온(非卽非離蘊)이다.
소승의 독자부(犢子部)와 경량부(經量部)에서 주장한 것으로, 자아의 체는 5온도 아니고 그렇다고 5온을 떠나서 별도의 체가 있는 것도 아닌, 다만 5온을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해서 상속ㆍ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初卽薀我,理且不然,我應如薀,非常一故。又內諸色定非實我,如外諸色有質礙故。心、心所法 亦非實我,不恒相續,待衆緣故,餘行、餘色,亦非實我,如虛空等,非覺性故。
첫 번째의 오온에 즉하는 자아의 즉온아(卽蘊我)라는 주장 또한 바른 이치가 아니니,
자아가 온(蘊)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상주하는 것이거나 하나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내부의 모든 색법, 즉 오근의 승의근과 그 부진근(扶塵根)은 반드시 실아(實我)가 아닌 것이니,
외부의 모든 색법처럼 장애함이 있기 때문이며,
5온(蘊) 중에서 먼저 색온(色蘊)의 자아(我)를 논파한 것이다.
6식의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법 역시도 실아(實我)가 아니니, 항상 상속하지 않으며
또한 안식(眼識)은 9연(緣), 이식(耳識)은 8연(緣) 등의 중연(衆緣)을 기다려서 심법이 현기(現起)하는 것과 같이, 여러 중연(衆緣)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나머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과 나머지 색법인 오경(五境)과 무표색(無表色)도 역시 실아가 아니니,
허공 등과 같이 인식주체의 성질인 각성(覺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각(覺)은 심왕과 심소의 총칭이다.
中離薀我理亦不然,應如虛空,無作、受故。
두 번째의 5온과 별개인 자아라는 이온아(離蘊我, 異蘊我)라는 주장 역시도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허공과 같이 업을 짓거나 과보를 받음이 없기 때문이다.
외도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5온을 떠나서 어딘가에 실재하며 항상하고 편재한 것으로, 마치 허공과 같은 절대적인 자아는 변화와 생멸이 없는 것으로, 신체를 따라 업을 짓고 고락(苦樂) 등의 과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참다운 의미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으로, 실아(實我)의 관념인 절대성은 지니지만, 현실적인 작용성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자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後俱、非我理亦不然,許依薀立,非卽離薀,應如甁等,非實我故。
세 번째의 5온에 즉함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 자아의 비즉비이온(非卽非離蘊)이라는 주장도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오온에 의하여 건립되기는 하지만, 5온에 즉함도 아니고 5온과 별개도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병(甁) 등의 물체와 같이 실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又旣不可說有爲、無爲,亦應不可說是我非我。故彼所執實我不成。
또한 유위법(有爲法)이라고도 무위법(無爲法)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면, 역시 자아(我)라고도, 자아가 아닌 비아(非我)라고도 말할 수 없어야 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들이 집착한 실아(實我)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독자부(犢子部)가 주장하는 3세장(世藏)ㆍ무위법장(無爲法藏)ㆍ불가설장(不可說藏)의 5법장(法藏) 중에서 불가설장을 논파한 것이다.
又諸所執實有我體爲有思慮,爲無思慮?若有思慮。應是無常。非一切時,有思慮故。若無思慮,應如虛空,不能作業。亦不受果。故所執我理俱不成。
또한 대부분 집착하듯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아의 본체는 주의깊게 생각하는 사려(思慮)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사려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상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니, 어느 때나 항상 사려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수론(數論)학파의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만약 사려가 없다고 말한다면, 허공과 같이 업을 지을 수 없어야 하고 역시 과보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승론(勝論)학파 등의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따라서 집착된 자아라는 집아(執我) 모두는 바른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又諸所執實有我體,爲有作用,爲無作用?
若有作用,如手足等,應是無常。若無作用,如兔角等,應非實我。故所執我二俱不成。
또한 대부분 집착하듯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아의 본체는 작용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작용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손이나 발처럼 무상(無常)한 것이어야 하며,
만약 작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토끼의 뿔처럼 실아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집착된 자아의 작용(作用) 무작용(無作用), 둘 다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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