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7. 수(受, vedanā, sensation, feeling)  

 

觸緣受者,云何爲受?

() (受, vedanā, sensation, feeling) 간접적인 원인의 () 되는 촉연수(觸緣受)이무엇이 (受, vedanā, sensation, feeling)인가?

 

受有三種,謂樂受、苦受、不苦不樂受,是名爲受。

()에는  가지가 있으니,

즐거움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낙수(樂受),

괴로움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고수(苦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 말하나니이를  (受, vedanā, sensation, feeling)라고 한다.

 

Vedanā as sixfold, vision, hearing, olfactory sensation, gustatory sensation, tactile sensation, and intellectual sensation (thought). Vedanā is also explained as pleasant, unpleasant and/or neutral feelings that occur when our internal sense organs come into contact with external sense objects and the associated consciousness.  

 

7번째 지분인 () 6번째 지분인 ( sparśa, phassa) 바탕으로 4번째 지분인 명색(名色),  정신적 · 물질적 인식대상에 대하여 () (등의 느낌 · 지각 또는 정서를 느끼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 따르면() 다른 마음작용인 (, sparśa, phassa) 발생할 때, 촉을 바탕으로 하여 동시 1찰나 내에 생겨나는 마음작용으로, 마음(6 또는 8 심왕 심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하여 '괴롭다(苦)즐겁다(樂)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不苦不樂)

또는 '나쁜 고(苦)좋은 낙(樂)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불고불락(不苦不樂)이다' 느끼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 마음작용이 5온의 수온(受蘊) 해당한다.

 

●잡아합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수(受)는 고수(苦受) · 낙수(樂受)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를 말하며, 

수(受)는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촉(觸) 즉 '근경식 3사화합'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다.

촉연수(觸緣受) 또는 연촉수(緣觸受), 즉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것은 촉(觸)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수(受)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그릇된 상태의 고수 · 낙수 · 불고불락수의 3수(三受)가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릇된 상태의 3수는 전도된 상태의 3수를 말하는 것으로 고(苦)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낙(樂) 또는 불고불락(不苦不樂受)의 대상이라 여기고,

낙이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고 또는 불고불락의 대상이라 느끼고, 불고불락이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고 또는 낙의 대상이라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촉연수(觸緣受) 또는 연촉수(緣觸受)는 또한 이미 발생한 수(受)의 그릇된 상태 즉 전도된 3수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촉(觸)의 그릇된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안촉 · 이촉 · 비촉 · 설촉 · 신촉 · 의촉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교학적으로 수(受) 즉 3수(三受)는 더욱 세밀하게 탐구되어서

심수 · 신수의 2수(二受), 낙수 · 고수 · 희수 · 우수 · 사수의 5수(五受) 또는 5수근(五受根) 등의 여러 가지로 재분류되어 불교의 번뇌론과 수행론과의 관련하에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5수 가운데 낙수와 희수는 색계의 제3정려인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와 관련되어 논의되고 있다.

'이희묘락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희수(喜)를 떠나고 묘한 낙수(樂)가 있는 장소'이다.

또한 제4정려인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염(念)을 버린 청정한 장소'인데 '

염을 버린 상태의 사념(捨念)'은 3수 또는 5수 가운데 사수(捨受)를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수(受)는 6입과 명색과 식의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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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6. 촉(觸, sparśa, Contact)

 

六處緣觸者,云何爲觸?

육처(六處) (觸, sparśa, Contact) 간접적인 원인의 () 되는 육처연촉(六處緣觸)이니무엇이 ()인가?

 

謂六觸身:一者眼觸,二者耳觸,三者鼻觸,四者舌觸,五者身觸,六者意觸,是名爲觸。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인, 촉()이란, 6근 · 6경 · 6식의 화합의 육촉(六觸)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안촉(眼觸), 둘째는 이촉(耳觸, 이촉신), 셋째는 비촉(鼻觸, 비촉신), 넷째는 설촉(舌觸, 설촉신), 다섯째는 신촉(身觸, 신촉신), 여섯째는 의촉(意觸, 의촉신)으로이를 ()이라고 한다.

 

촉(觸, sparśa, Contact)은 6입연촉(六入緣觸)과 촉연수(觸緣受)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6입연촉은 연6입촉(緣六入觸)이라고도 하며 촉연수는 연촉수(緣觸受)라고도 한다.

6입연촉 또는 연6입촉은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고,

촉연수 또는 연촉수는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뜻이다.

 

●잡아합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촉(觸)은 안촉신(眼觸身) · 이촉신(耳觸身) · 비촉신(鼻觸身) · 설촉신(舌觸身) · 신촉신(身觸身) · 의촉신(意觸身)의 6촉신(六觸身)을 말하며, 

여기에서의 신(身, kāya)은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들'로서 사용되었으며, 촉(觸)은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을 말한다.

6촉신(六觸身): 6가지 촉(觸)들, 6가지 촉(觸)의 집합; 6촉(六觸)은 6근 · 6경 · 6식의 화합들을 말하고, 

6촉신(六觸身)은 이러한 화합들의 집합을 총칭한다.

6촉과 6촉신은 사실상 같은 말이며, 6촉은 6촉신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다.

6근 · 6경 · 6식의 화합의 상태는 6식 즉 인식대상에 대한 6가지 인식 또는 요별 가운데에서 개별 또는 다수가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안촉신(眼觸身): 안촉(眼觸)들, 즉 안촉(眼觸)의 집합이며, 안촉(眼觸)은 안근 · 색경 · 안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안식 즉 인식대상의 색경(색깔과 크기와 모습)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눈으로 대상의 색깔과 크기와 모습을 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촉신(耳觸身): 이촉(耳觸)들, 즉 이촉(耳觸)의 집합이며, 이촉(耳觸)은 이근 · 성경 · 이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이식 즉 인식대상의 성경(소리)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즉 귀로 대상의 소리를 듣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비촉신(鼻觸身): 비촉(鼻觸)들, 즉 비촉(鼻觸)의 집합이며, 비촉(鼻觸)은 비근 · 향경 · 비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비식 즉 인식대상의 향경(냄새)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코로 대상의 냄새를 맡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설촉신(舌觸身): 설촉(舌觸)들, 즉 설촉(舌觸)의 집합이며, 설촉(舌觸)은 설근 · 미경 · 설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설식 즉 인식대상의 미경(맛)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 있는 것으로, 혀로 대상의 맛을 감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신촉신(身觸身): 신촉(身觸)들, 즉 신촉(身觸)의 집합이며, 신촉(身觸)은 신근 · 촉경 · 신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신식 즉 인식대상의 촉경(촉감)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몸으로 대상의 촉감을 감촉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의촉신(意觸身): 의촉(意觸)들, 즉 의촉(意觸)의 집합이며, 의촉(意觸)은 의근 · 법경 · 의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의식 즉 인식대상의 법경(정신적 측면)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의식으로 대상의 정신적 측면을 감지 또는 요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의식 즉 제6의식은 의근을 통해 단지 법경만을 요별하지 않으며 의근을 통해 5경에 대해서도 요별하는데, 이 경우 의촉은 의근 · 6경 · 의식의 화합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인식대상에 대한 제6의식의 전체적 · 종합적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제6의식이 대상을 전체적 · 종합적으로 감지 또는 요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6입연촉(六入緣觸) 또는 연6입촉(緣六入觸), 즉 6입(六入)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것은, 촉은 마음과 항상 같이 일어나는 마음작용(변행심소 또는 대지법)으로, 그 자체로서는 바르지도 그릇되지도 않은,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이지만,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촉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상태의 근 · 경 · 식 3사화합'이 생겨난다. 

특히, 마지막의 의근 또는 뜻은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 즉 과거 경험의 총체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위들이 누적되어서 현재의 6근의 상태를 형성하고, 6근의 작용의 발동근거가 되는데,

현재의 그릇된 상태의 6근은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이 생겨나게 한다.

'그릇된 상태의 근 경 식의 3사화합'은 대상에 대한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에 대한 진실한 인식 즉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전도(顚倒)라 하고,

부파불교(상좌부와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교학(아비달마)에서는 비리작의(非理作意: 그릇된 작의) 또는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라 하고,

특히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상태라고 하고 선종에서는 망상(妄想)이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는 《디가 니까야》 제22경 〈대념처경〉에서 열반을 증득하기 전의 상태, 즉 유전연기의 상태, 즉 무명에 바탕하여 비리작의에 처해 있는 상태, 즉 4성제의 집제의 상태와, 환멸연기를 통해 즉 37도품 · 6바라밀 등의 수행을 통해 점차 무명을 극복하여 비리작의를 짓는 상태를 여리작의(如理作意: 바른 작의)를 짓는 상태로 변형함으로써 마침내 열반을 증득한 후의 상태 즉 4성제의 멸제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의근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의근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안식은 … 이식은 … 비식은 … 설식은 … 신식은 … 의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러한 갈애는 어디에서 없어지고, 어디에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의근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의근의 대상인) 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안식은 … 이식은 … 비식은 … 설식은 … 신식은 … 의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 각묵스님 옮김(2015) 《디가 니까야》 제2권 제22경 〈대념처경〉 초기불전연구원.  


위의 인용문에서 고타마 붓다는 18계를 말씀하셨는데, 18계는 곧 일체법이다.

즉 5온이고 12처이며 일체의 만물이다.

부처님은 일체법이 조금의 변경도 없이 그대로 번뇌이며 그대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즉, 번뇌와 보리, 윤회와 열반, 생멸과 진여 사이에 일호의 간격도 없는 것이 제법실상이라는 것이다.

일호의 간격도 없으니 번뇌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고 보리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으므로,

번뇌도 없고 보리도 없으며,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생멸도 없고 진여도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서,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리작의 즉 망상이 있으면 이들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점점 벌어져 번뇌도 있고 보리도 있으며, 윤회도 있고 열반도 있으며, 생멸도 있고 진여도 있게 되는, 즉 번뇌와 보리, 윤회와 열반, 생멸과 진여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종에서는 다만 망상을 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중관학파에서는 윤회와 열반 사이에 간격이 없는 것을 승의제 또는 진제라 하고 간격이 있는 것을 속제라고 한다.

간격이 있거나 더 벌어지는 것을 선종에서는 특유의 용어로 분별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별심이 없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비리작의 즉 망상이 있을 때, 그만큼 보리 · 열반 · 진여와 분리된 번뇌 · 윤회 · 생멸은 단지 심리의 일부인 논리 공간의 개념 즉 철학적 이해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로서 존재하고 현실의 삶에서 6근을 통해 마음이 실감하는 그만큼의 실제의 추(愁: 걱정) · 탄(歎: 한탄) · 고(苦: 괴로움) · 우(憂: 근심) · 뇌(惱: 번뇌, 고요하지 못함)를 일으키는 것이며, 이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고 상속하는 것은 엄격한 인과의 법칙, 즉,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 혹업고의 3도의 법칙, (동시인과이건 이시인과이건) 연기의 법칙을 따른다.

유전연기는 이와 같이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는 실제의 과정 즉 점점 더 제법실상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의 과정 즉 점점 더 그릇되어 가는 현실의 삶, 즉, 출세간의 마음을 획득하지 못하여 3유에서 윤회하는 삶을 밝힌 것이다.

6입연촉(六入緣觸) 또는 연6입촉(緣六入觸)은 또한 이미 발생한 촉(觸)의 그릇된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근 경 식의 3사화합'이 있다면, 

즉 그릇된 상태의 안촉 · 이촉 · 비촉 · 설촉 · 신촉 · 의촉이 이미 발생한 상태라면,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미 발생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6근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서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수행이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건 그 모두는 6근 즉 몸과 마음을 비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에서 여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로 변화시킴으로써 열반과 계합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37도품은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총칭하는 것인데 37도품 중 대표적인 것이 4념처 수행이다. 고타마 붓다는 열반에 들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머물렀는데, 여래께서 이미 열반하시고 나면 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합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해 유훈으로

"4념처를 의지하여 마음을 매우 철저히 바르게 다스림으로써 머물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4념처, 간화선, 또는 염불과 같은 수행을 통해 비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를 여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로 6근 즉 몸과 마음을 변화시켜가는 매일의 노력이야말로 진정 의지하여야 할 의지처라고 뜻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아난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서 몸과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였다. 슬피 울어 목이 쉬었고, 근심의 바다에 깊이 빠져 온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어둡고 어지럽고 흐릿하여 여래 앞에 쓰러지는데,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이때 아니루두(阿泥樓逗)가 아난을 위로하여 그 슬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하였다. “어허, 어찌 근심으로 괴로워만 합니까? 여래께서 열반하실 때에 이르렀으니, 오늘은 비록 계시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대로 여래께 이와 같은 네 가지 질문을 드리십시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여섯 무리의 비구가 더러운 다른 집에 가는 것과 포악한 성질의 차닉(車匿)과 어떻게 함께 머물면서 가르침을 보여야 합니까? 

여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세존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로써 스승을 삼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머물렀는데, 여래께서 이미 열반하시고 나면 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합니까?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 법장(法藏)을 결집(結集)하매 모든 경전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놓아야 합니까?”

이때 아난은 꿈속에서 아니루두가 그 마음을 위로하고 네 가지 질문을 여쭙게 하는 것을 듣는 것 같아서 차츰 깨어났으나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으나, 위의 물음을 빠뜨리지 않고 차례차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난아, 네가 물은 것과 같이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무엇으로써 스승을 삼을까 한 것은 이러하다. 

아난아, 시바라밀(尸波羅蜜)인 계율이 너의 큰 스승이니 이것을 의지해 닦고 행하면, 세상을 벗어나서 매우 깊은 선정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아난아, 네가 물은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 열반한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여 머물까 한 것은 이러하다. 

아난아, (6근 즉 몸과 마음이 진리 즉 열반과 점점 더 계합하는 상태가 되게끔) 4념처(念處)를 의지하여 마음을 매우 철저히 바르게 다스림으로써 머물러라.

몸의 성상(性相)이 허공과 같음을 관하는 것을 신념처(身念處)라고 이름한다.

경계에서 받아들임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관하는 것을 수념처(受念處)라고 이름한다.

마음은 다만 명자(名字)가 있을 뿐이고 명자와 성(性)이 서로 분리된다고 관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이름한다.

법(法)은 선법(善法)을 얻지 못하며 불선법(不善法)도 얻지 못한다고 관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일체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4념처를 의지해 머물러야 한다
 야나발타라(若那跋陀羅) 한역, 심삼진 번역. 《대반열반경후분》 (大般涅槃經後分) 상권,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촉(觸)은 6입과 명색과 식이 접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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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5. 육처(六處, ṣaḍāyatana, 6입 六入)

 

名色緣六處者。云何六處?

명색(名色) 육처(六處, ṣaḍāyatana, 6입 六入) 간접적인 원인의 () 되는 명색연육처(名色緣六處)이니, 무엇이  육처(六處)인가?

 

謂六內處:一眼內處,二耳內處,三鼻內處,四舌內處,五身內處,六意內處,是謂六處。

육처란 육내처(六內處)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안내처(眼內處), 둘째는 이내처(耳內處), 셋째는 비내처(鼻內處), 넷째는 설내처(舌內處), 다섯째는 신내처(身內處), 여섯째는 의내처(意內處)이니이를 육처(六處)라고 한다.

 

The six senses are baseed on the eye, ear, nose, tongue, body, and mind (intellect).

 

6내처(六內處), 6가지 내적인 발동근거 또는 의지처 또는 도구인 육처(六處)는 6식의 내적인 처(處), 6식과 관련하여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6가지 내적인 것으로,

*안내처(眼內處): 눈(眼)이라는 내적인 발동근거 또는 의지처 또는 도구인 처(處), 즉 안식(眼識)이며, 안식과 관련하여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것이며, 


*이내처(耳內處): 귀(耳)라는 내적인 발동근거 또는 의지처 또는 도구인 처(處), 즉 이식(耳識)이며, 이식과 관련하여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것이며, 


*비내처(鼻內處): 코(鼻)라는 내적인 발동근거 또는 의지처 또는 도구인 처(處), 즉 비식(鼻識)이며, 비식과 관련하여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것이며, 

 

*신내처(身內處): 몸(身)이라는 내적인 발동근거 또는 의지처 또는 도구인 처(處), 즉 신식(身識)이며, 신식과 관련하여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것이며, 

 

*의내처(意內處): 뜻(意)라는 내적인 발동근거 또는 의지처 또는 도구인 처(處), 즉 의식(意識)이며, 의식과 관련하여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것이다.

 

●6처(六處, ṣaḍāyatana, six sense gates, six sense bases)은 6입(六入) · 6입처(六入處) · 내6입(內六入) · 내6입처(內六入處) · 6내입처(六內入處) · 6정(六情) · 제입(諸入) · 6촉입처(六觸入處) · 6촉처(六觸處) · 6갱락처(六更樂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한다.

6처(六處)는 명색연6처(名色緣六處)과 6처연촉(六處入緣觸)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명색연유처는 연명색육처(緣名色六處)라고도 하며 6처연촉은 연6처촉(緣六處觸)이라고도 한다.

명색연6처 또는 연명색6처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처(六處) 즉 6입(六入)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고,

6처연촉 또는 연6처촉은 6처 즉 6입 즉 6근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서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는

6입(六入)을 6입처(六入處)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소경(小經)에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6입처는 안입처(眼入處) · 이입처(耳入處) · 비입처(鼻入處) · 설입처(舌入處) · 신입처(身入處) · 의입처(意入處)의 6내입처(六內入處)를 말한다.

입처(入處)라는 낱말은 입(入)과 처(處)가 합쳐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입(入)은 거두어 들이는 섭입(涉入) 또는 재촉하여 들이는 촉입(趨入)의 뜻으로 6근(六根)과 6경(六境)이 서로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리키며, 

처(處)는 소의(所依) 즉 발동근거 · 의지처 · 도구라는 뜻으로, 6경에 대하여 6식이 생겨날 때 6근이 소의 즉 발동근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입처(入處)는 6식의 수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6근과 6경이 서로를 거두어 들여서 6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6식의 능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입처(入處)는 6식이 6근을 통해 6경을 거두어들임으로써 6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앎 또는 요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마음작용들이 일어나는 것도 포함하는 말이다.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처(處)는 생장문(生長門)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과 마음작용이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하는, 즉 6근은 6식 즉 마음의 단순한 인식도구가 아닌 것으로, 6근은 마음의 인식도구일 뿐만 아니라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을 현행하게 하고 그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특히 6근 가운데 의근(意根)의 경우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6내입처(六內入處): 6가지 내적인 입처(入處), 즉 6식이 6경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6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것이며,


*안입처(眼入處): 눈(眼), 즉 안식(眼識)의 입처이며, 안식이 색경(색깔과 형태)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안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이며,


*이입처(耳入處): 귀(耳), 즉 이식(耳識)의 입처이며, 이식이 성경(소리)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이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이며, 


*비입처(鼻入處): 코(鼻) 즉, 비식(鼻識)의 입처이며, 비식이 향경(냄새)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비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이며,


*설입처(舌入處): 혀(舌), 즉 설식(舌識)의 입처이며, 설식이 미경(맛)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설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이며,


*신입처(身入處): 몸(身), 즉 신식(身識)의 입처이며, 신식이 촉경(감촉)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신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이며, 


*의입처(意入處): 뜻(意), 즉 의식(意識)의 입처이며, 의식이 법경(법, 정신적 존재, 즉 명색의 명)을 비롯한 6경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의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이다.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또는 연명색6입(緣名色六入), 즉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이 있다는 것은,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있기 때문에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6식 즉 마음이 6경을 인식할 때 6근이 인식도구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때로는 그릇된 방향으로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또는 연명색6입(緣名色六入)은 또한 이미 발생한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서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현대의 해석으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6입(六入)은 6처(六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하며 6개의 감각기관으로서 이 감각기관을 통해 식(識)이 작용하게 되어 명색을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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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4. 명색(名色)

 

識緣名色者,云何爲名?

식(識)은 명색(名色, nāmarūpa, name and form ) 간접적인 원인의 () 되는 식연명색(識緣名色)이니, 무엇이 (名, 정신적)인가?

 

謂四無色薀:一者受薀,二者想薀,三者行薀,四者識薀。

()이란 사무색온(四無色蘊)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지각의 수온(受蘊), 둘째는 표상의 상온(想蘊), 셋째는 욕구와 의지 행온(行蘊), 넷째는 마음과 의식의 식온(識薀)이다.

 

云何爲色?무엇이 (色, 물질적)인가

謂諸所有色,一切四大種,及四大種所造,此色前名摠略爲一,合名名色,是謂名色。

이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물질) 말하는 것으로,

모든 ()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사대(四大) 이루어진, 사대종소조(四大種所造)이니, 

 () 앞의 () 하나로 통합하여 명색(名色)이라 하는 것이니, 이를 곧 명색(名色)이라 한다.

 

"Feeling, perception, intention, contact, and attention are called name.

The four great elements, and the body dependent on the four great elements are called form."

Sanskrit Vibhaṅganirdeśa define nama differently as the other four skandhas (feeling, perception, saṃskāra, consciousness)

 

명(名, nāma)과 색(色, rūpa)의 두 낱말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복합어이며,

명(名, nāma)은 온갖 정신적 요소 또는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며, 수온(受蘊) · 상온(想蘊) · 행온(行蘊) · 식온(識蘊)의 4무색온(四無色蘊) 또는 4무색음(四無色陰)에 해당하고 

색(色, rūpa)은 온갖 물질적 요소 또는 물질적 사물을 가리키며, 색온(色蘊)에 해당한다

 

*수온(受蘊)은 느낌 · 지각 · 정서의 적집, 집합 또는 무더기라는 뜻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여러 작용 중 감수작용(感受作用)과 그 세력의 쌓을 뜻한다.

*상온(想蘊);

1. 상(想)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인식대상의 물질적 · 정신적(개념적) 차별상(差別相)을 파악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즉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개념화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상(表象)을 뜻한다.
2. 상(相, laksana)은 사물의 모습 · 모양 · 형상 · 상태 · 성격 · 성질 · 본질 등을 말하며, 영어로는 form, appearance, state, condition, aspect, mark, token, sign, characteristic, attribute 등의 뜻이 있다. 사물은 서로 상(相)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각각의 사물을 다른 사물과 다른 것으로 표상(식별)할 수 있다.

한편,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이러한 표상작용과 그 세력(적집, 집합)을 상(想) 또는 상온(想蘊)이라 한다.

*행온(行蘊);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수(受) · 상(想)이외의 모든 작용. 특히, 마음의 능동적 작용으로서의 의지(意志)나 욕구(欲求)의 쌓임이다.

행(行)은 범어 삼스카라(saṃskāra)의 역어로, '만드는 것'과 '이변(異變)하는 것'의 뜻이 있다고 하며, 12연기(十二緣起)의 제2행(行)은 '만드는 것'의 업(業)의 뜻이고,

제행무상이라고 할 때에는  '이변(異變)하는 것'의 모든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修行)이란 뜻에서의 행은 그 원어가 다르다.

*식온(識蘊); 식(識)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대상에 대한 지각(受) · 표상(想) · 의지(思) · 분석 · 판단(慧) 등의 갖가지 마음작용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대상을 종합적으로 인식하여 요별(了別)하는 힘이다.

즉, 명색(名色)은 5온(五蘊)의 모든 요소, 즉 색온(色蘊) · 수온(受蘊) · 상온(想蘊) · 행온(行蘊) · 식온(識蘊)을 통칭하는 말이며, 유정에 있어서 명색은 심신(心身) 즉 정신과 육체 또는 몸과 마음을 뜻하며, 여기서의 '정신' 또는 '마음'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 마음작용(심소법) · 법경(법처소섭색은 제외)을 합한 개념이다.

그리고 '육체' 또는 '몸'은 안 · 이 · 비 · 설 · 신의 5근과 색 · 성 · 향 · 미 · 촉의 5경과 법처소섭색(무표색)을 합한 개념이다.

명색(名色)이 5온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불교 전반에서 의견이 일치하지만, 12연기설의 4번째 지분으로서의 명색(名色) 즉 5온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12연기설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불교 부파 또는 종파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12연기설에 대한 해석인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에서, 명색(名色) 즉 5온은 수태(受胎) 후 약 1개월 사이의 기간(엄밀히는 28일)을 말한다.

즉, 명색(名色)은 수태 후에, 신근(身根)과 의근(意根)만 있을 뿐 안근(眼根) · 이근(耳根) · 비근(鼻根) · 설근(舌根)의 4색근(四色根)이 아직 발생하지 않아서 6내처(六內處) 즉 6근(六根) 모두가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는 태내5위(胎內五位) 중 갈라람(羯邏藍: 1~7일) · 알부담(頞部曇: 8~14일) · 폐시(閉尸: 15~21일) · 건남(鍵南: 22~28일)의 4가지 위의 총 28일간에 해당한다.

한편, 설일체유부에서는, 태내5위 중 5번째 위인 발라사(鉢羅奢)는 태내에서의 29~266일의 기간으로 12연기설의 5번째 지분인 6입(六入) 또는 6처(六處)에 해당한다고 보며, 이 지분을 6내처(六內處) 즉 6근(六根)이 완전히 갖추어져 가는 기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12연기설의 3번째 지분인 식(識)은 수태(受胎)하는 찰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의 설명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명(名)과 색(色) 즉 정신과 물질 또는 마음(心)과 육체(身)를 통칭한다.

명(名) 즉 정신 또는 마음(心)은 5음(五陰) 가운데에서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4무색음(四無色陰)을 말한다.

색(色) 즉 물질 또는 육체(身)는 5음(五陰) 가운데 색음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색을 말한다.

여기서, 색음 ·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5음(五陰)은 색온 ·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5온(五蘊)의 구역(舊譯)이며,

대상을 제외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볼 때, 여기서의 마음(心) 또는 정신(名) 즉 4무색음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합한 개념이다.

육체(身) 또는 물질(色)은 안 · 이 · 비 · 설 · 신의 5근을 말한다.

식연명색(識緣名色) 또는 연식명색(緣識名色), 즉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것은 그릇된 식, 즉 그릇된 마음, 즉 그릇된 6식, 즉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있기 때문에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정신(名)과 육체(色)'의 그릇된 상태,
즉 '마음 · 마음작용 · 육체'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그릇된 식(識) 즉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 가운데 그릇된 하나 또는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서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해석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정신적인 명(名)과 물질적인 색(色)으로서 이 현상세계의 존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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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3. 식(識, vijñāna, consciousness)  

 

行緣識者,云何爲識?

행은 (識, vijñāna, consciousness) 간접적인 원인의 () 되는 행연식(行緣識)이니무엇이 ()인가.

 

식(識, vijñāna, consciousness), 산스크리트어 비즈냐나(vijñāna)는 '다르게 알다'라는 뜻으로 '요별(了別)'로 번역되었다.
요별(了別)은 '분명하게 분별한다'는 뜻으로, 대상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판단하여서 인식(認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요별(了別)은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생각하고 헤아리는 사량(思量)을 바탕으로 현재의 인식 대상 또는 마음작용으로 대상에 대하여 아는 능력 또는 측면 또는 분별하는 능력 또는 측면, 즉 지식의 능력 또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파란색은 소리가 아니라 색깔이라는 것을 아는 능력과 파란색이 노란색과는 다른 색깔이라는 것을 아는 능력이 있으며,

다른 예로는, 음계의 '도'가 색깔이 아니라 소리라는 것을 아는 능력과 '도'가 '레'와는 다른 음정이라는 것을 아는 능력이 등의 능력과 그 작용을 통칭하여 아는 지식의 요별(了別)이라 한다.

 

謂六識身,一者眼識,二者耳識,三者鼻識,四者舌識,五者身識,六者意識,是名爲識。

()이란 육식신(六識身)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안식(眼識), 둘째는 이식(耳識), 셋째는 비식(鼻識), 넷째는 설식(舌識), 다섯째는 신식(身識), 여섯째는 의식(意識)이니, 이것을 ()이라 하며,

 

There are six types of consciousness: eye-consciousness, ear-consciousness, nose-consciousness,

tongue-consciousness, body-consciousness, intellect (or mind) consciousness.

 

●신(身)의 기본적인 뜻은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의 kāya에 해당하는 몸 또는 신체이지만, 이외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kāya를 음역하여 가야(迦耶)라고 한다.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가야(迦耶, kāya)라는 낱말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화합하여 쌓임이나 쌓인 것의 화합적취(和合積聚)  또는 쌓임이나 쌓인 것의 적집(積集)을 뜻한다.

6식신(六識身) ·  6촉신(六觸身) · 6수신(六受身) · 6애신(六愛身) · 6상신(六想身) · 6사신(六思身)이나 식신(識身) · 촉신(觸身) · 수신(受身) · 애신(愛身) · 문신(文身) · 명신(名身) · 구신(句身) 등에서의 신(身)은 복수형 접미사 ‘들’이나 집합(合集) 또는 총설(總說,  samukti)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5가지 오염된 견해인 5견(五見) 중의 하나인 유신견(有身見)에서 신(身, kāya)은 '몸'이 아니라 '나' 또는 '자아'를 뜻한다. 유신견(有身見)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몸이 있다는 견해'가 아니라 '나 또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이다.

 

●모든 객관적 대상을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의 육경(六境)으로 나누는데,

6식은 이 6경에 대하여 보고(見) · 듣고(聞) · 냄새 맡고(嗅) · 맛보고(味) · 감촉하고(觸) · 아는(知) 인식작용이다.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육식은 식 즉 요별이 일어날 때 그 의지처인 근(根) 또는 인식기관인 근(根)이 되는 안근(眼根) · 이근(耳根) · 비근(鼻根) · 설근(舌根) · 신근(身根) · 의근(意根)의 6근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식(識) 즉 요별이 일어날 때의 그 대상인 색경(色境) · 성경(聲境) · 향경(香境) · 미경(味境) · 촉경(觸境) · 법경(法境)의 6경에 따라 구분하여서 색식(色識) · 성식(聲識) · 향식(香識) · 미식(味識) · 촉식(觸識) · 법식(法識)으로 명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에서 지각 또는 의식을 구분할 때 시각 · 청각 · 후각 · 미각 · 촉각 · 의식(생각) 등으로 주로 인식대상을 기준으로 명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6식(六識)의 각각은 식(識) 즉 요별(了別: 앎)의 뜻을 바탕으로 보통 다음과 같이 정의 되나, 주의할 점으로는, '요별의 작용', '앎' 또는 '지식'외에 별도의 행위자, 아는 자 또는 지식을 소유한 자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요별→ 앎 →  지식 →  마음 →  요별하는 자 →  아는 자 →  지식을 소유한 자'이다.

안식(眼識): 안근(眼根)을 발동근거인 소의(所依)로 하여서 색경(色境)을 요별(了別)하는 작용, 즉 앎, 지식
이식(耳識): 이근(耳根)을 발동근거인 소의(所依)로 하여서 성경(聲境)을 요별(了別)하는 작용, 즉 앎, 지식
비식(鼻識): 비근(鼻根)을 발동근거인 소의(所依)로 하여서 향경(香境)을 요별(了別)하는 작용, 즉 앎, 지식
설식(舌識): 설근(舌根)을 발동근거인 소의(所依)로 하여서 미경(味境)을 요별(了別)하는 작용, 즉 앎, 지식
신식(身識): 신근(身根)을 발동근거인 소의(所依)로 하여서 촉경(觸境)을 요별(了別)하는 작용, 즉 앎, 지식
의식(意識): 의근(意根)을 발동근거인 소의(所依)로 하여서 법경(法境)을 요별(了別)하는 작용, 즉 앎, 지식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고 하며, 의식(意識)을 제6식(第六識), 제6 의식(第六意識) 또는 제6의식(第六意識)이라고도 한다.

 

●아비달마품류족론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논서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에서는 식(識)과 6식의 각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식(識) 즉 마음은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신(六識身) 즉 6식(六識)을 말한다.

안식(眼識)은 안근(眼)과 색경(色)을 연(緣, 원인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생겨나는 안근의 인식인 안식(眼識)을 말한다. 이 때 안근이 증상(增上) 즉 소의(所依)가 되고 색경이 소연(所緣)이 된다.

안근(眼根)에 의하여 인식(識)되는 색경에 대한 어안소식색(於眼所識色)은 과거의 요별인 이요별(已了別) · 현재의 요별인 정요별(正了別) · 미래의 요별인 당요별(當了別)의 모든 이정당요별(已正當了別)을 통칭하여 안식(眼識)이라 이름한다.

이식(耳識)은 이근(耳)과 성경(聲)을 연(緣, 원인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생겨나는 이근의 인식인 이식(耳識)을 말한다. 이 때 이근이 증상(增上) 즉 소의(所依)가 되고 성경이 소연(所緣)이 된다.

이근(耳根)에 의하여 인식(識)되는 성경(聲境)에 대한 어이소식색(於耳所識色)은 과거의 요별인 이요별(已了別) · 현재의 요별인 정요별(正了別) · 미래의 요별인 당요별(當了別)의 모든 이정당요별(已正當了別)을 통칭하여 이식(耳識)이라 이름한다.


비식(鼻識)은 비근(鼻)과 향경(香)을 연(緣, 원인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생겨나는 비근의 인식인 비식(鼻識)을 말한다. 이 때 비근이 증상(增上) 즉 소의(所依)가 되고 향경이 소연(所緣)이 된다. 

비근(鼻根)에 의하여 인식(識)되는 향경(香境)에 대한 어비소식색(於鼻所識色)은 과거의 요별인 이요별(已了別) · 현재의 요별인 정요별(正了別) · 미래의 요별인 당요별(當了別)의 모든 이정당요별(已正當了別)을 통칭하여 비식(鼻識)이라 이름한다.


설식(舌識)은 설근(舌)과 미경(味)을 연(緣, 원인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하여 생겨나는 설근의 인식인 설식(舌識)을 말한다. 이 때 설근이 증상(增上) 즉 소의(所依)가 되고 미경이 소연(所緣)이 된다. 

설근(舌根)에 의하여 인식(識)되는 미경(味境)에 대한 어설소식색(於舌所識色)은 과거의 요별인 이요별(已了別) · 현재의 요별인 정요별(正了別) · 미래의 요별인 당요별(當了別)의 모든 이정당요별(已正當了別)을 통칭하여 설식(舌識)이라 이름한다.


신식(身識)은 신근(身)과 촉경(觸)을 연(緣, 원인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하여 생겨나는 신근의 인식인 신식(身識)을 말한다. 이 때 신근이 증상(增上) 즉 소의(所依)가 되고 촉경이 소연(所緣)이 된다. 

신근(身根)에 의하여 인식(識)되는 촉경(觸境)에 대한 어신소식색(於身所識色)은 과거의 요별인 이요별(已了別) · 현재의 요별인 정요별(正了別) · 미래의 요별인 당요별(當了別)의 모든 이정당요별(已正當了別)을 통칭하여 신식(身識)이라 이름한다.


의식(意識)은 의근(意)과 법경(法)을 연(緣, 원인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하여 생겨나는 의근의 인식인 의식(意識)을 말한다. 이 때 의근이 증상(增上) 즉 소의(所依)가 되고 법경이 소연(所緣)이 된다. 

의근(意根)에 의하여 인식(識)되는 법경(法境)에 대한 어의소식색(於意所識色)은 과거의 요별인 이요별(已了別) · 현재의 요별인 정요별(正了別) · 미래의 요별인 당요별(當了別)의 모든 이정당요별(已正當了別)을 통칭하여 의식(意識)이라 이름한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의 설명에 따르면, 식(識)은 안식신(眼識身) · 이식신(耳識身) · 비식신(鼻識身) · 설식신(舌識身) · 신식신(身識身) · 의식신(意識身)의 6식신(六識身)을 뜻한다. 

여기서 신(身, 산스크리트어: kāya)은 이 단어의 일반적 의미인 몸 즉 신체의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라,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들'로서 사용된 경우이다. 따라서, 안식신은 안식들 또는 안식들의 집합을 뜻하는데, 온갖 시각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식신 · 비식신 · 설식신 · 신식신은 각각 온갖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하며, 의식신은 온갖 정신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한다. 그리고 6식신(六識身)은 이들 6가지 식신(識身) 즉 이들 6가지 식(識)들의 집합을 말한다. 이들 6가지 식신(識身)들은 일반적으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이라고 불리며, 6식신(六識身)은 6식(六識)이라고 불린다.

초기불교에서의 6식은 곧 마음 심(心, citta)을 말하는 것으로, 부파불교에서 마음 즉 6식은 심의식 또는 심 · 의 · 식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6식은 하나의 마음의 6가지 다른 모습 또는 작용일 뿐이라고 보며, 이러한 견해를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을 심의식 또는 심 · 의 · 식이라고도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6식은 더 심층의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마음이 6식에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더해진 8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교학을 가지고 있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는 8식은 그 체가 각각 별도라는 심체별설 또는 식체별설의 견해와 8식의 체는 하나라는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의 견해가 둘 다 존재한다. 

행연식(行緣識) 또는 연행식(緣行識), 즉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것은 그릇된 행, 즉 그릇된 3행(三行), 즉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6식신, 즉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또는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그릇된 행 즉 신업 · 구업 · 의업 가운데 그릇된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설명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마음(의식)은 행위인 행(行)과 업(業) 또는 운동을 바탕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원적 연기관계에서 볼 때, 마음(의식)이 행위를 낳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마음(의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정이 행하는 행위 즉 몸 · 말 또는 뜻으로 행하는 행위는 단순히 행위 자체에 그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유정 속에서 어떤 마음(의식)을 낳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식(識)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의 전5식(前五識)에 의한 감각작용과 제6의식에 의한 지각(知覺) · 추리(推理) · 기억(記憶) · 판단(判斷) 등 일체의 의식작용 및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모든 행위(行)가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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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2. 행(行, saṃskāra, Mental formations or Fabrications)

 

云何爲行?行有三種,謂身行、語行、意行,是名爲行。

무엇이 행(行)인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몸에 관한 신행(身行)과

말하는 어행(語行)과

마음의 작용의 의행(意行)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행(行)이라 하는 것이다.

 

행(行), These are called fabrications of which bodily fabrications, verbal fabrications, mental fabrications, and volitional formations, constructions, choices.

행(行), Saṅkhāra means 'formations' or 'that which has been put together' and 'that which puts together'.

 

행(行)은 무명연행(無明緣行)과 행연식(行緣識)의 연기관계를 이루며,

무명연행은 연무명행(緣無明行)이라고도 하며, 행연식은 연행식(緣行識)이라고도 한다.

무명연행 또는 연무명행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뜻이고, 행연식 또는 연행식은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뜻이며,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되어서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 따르면,

행(行)은 신행(身行) · 구행(口行) · 의행(意行)의 삼행(三行)을 뜻하며,

삼행은 신업(身業) · 구업(口業) · 의업(意業)의 삼업(三業, trīṇi karmāṇi)과 같은 말이다.

무명연행(無明緣行) 또는 연무명행(緣無明行), 즉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것은 무명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삼행(三行)의 잘못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행(行)은 부파불교의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업(業) 또는 업력(業力)에 해당하고, 업 또는 업력이 저장되는 곳은 무표색(색色, 루파, Rūpa)과 마음(心)이 과거로 낙사(落謝)한 의근(意根)을 말한다.

행(行)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알라야 비즈냐나, ālaya vijñāna)에서 아뢰야식에 보관된 종자, 특히 업종자에 해당한다.

무명연행(無明緣行) 또는 연무명행(緣無明行), 즉 
'이미 발생한 그릇된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 의거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과거인 전제(前際), 미래인 후제(後際), 또는 과거와 미래인 전후제(前後際)를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몸, 말 또는 뜻으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안(內, 육근), 밖(外, 육경), 또는 안팎(內外, 육근과 육경)을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업(業), 과보의 보(報), 또는 업과 과보인 업보(業報)를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사성제(四聖諦)를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몸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직접적인 원인의 인(因) 또는 원인이 일으키는 결과인 법(法)을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몸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선(善, kuśala, 유익함)과 불선(不善, akuśala, 해로움)을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죄가 되는 유죄(有罪)와 죄가 되지 않는 무죄(無罪), 익혀야 할 응습(應習)과 익히지 않아야 할 불습(不習), 열(劣)한 것과 뛰어난 승(勝), 또는 염오(染污)와 청정(清淨) 등에 대한 분별(分別)과 서로를 인하여 일어나는 연기(緣起)의 관계를 알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지은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완전히 알지 못한 개실불지(皆悉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6촉입처(六觸入處, 육근), 즉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하게 실답게 관찰하여서 알지 못한 불여실각지(不如實覺知)이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와 계합하는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지 못한 불지(不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위에서 열거한 모두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불지(不知)이거나,

위에서 열거한 모두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라도 보지 못하는 불견(不見)이거나,

위에서 열거한 모두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 실천적으로 아는 지(知)에 '간격없이 동등한 무간등(無間等)' 즉 '완전한 계합'이 없는 불지(不知)이거나,

위에서 열거한 모두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어리석고 어두운 치암(癡闇)하여서 불지(不知)이거나,

위에서 열거한 모두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이라서 불지(不知)이거나,

위에서 열거한 모두 가운데에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크게 어두운 대명(大冥)하여서 불지(不知)인 까닭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이미 발생한 그릇된 신(身) · 구(口) · 의(意)의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연기경》에 의거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과거인 전제(前際), 미래인 후제(後際), 또는 과거와 미래인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안(內, 육근), 밖(外, 육경), 또는 안팎(內外, 육근과 육경)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업(業), 이숙(異熟), 또는 업과 이숙의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사성제(四聖諦)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직접적인 원인의 인(因) 또는 원인이 일으키는 결과인 법(法)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선(善, kuśala, 유익함)과 불선(不善, akuśala, 해로움)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죄가 되는 유죄(有罪)와 죄가 되지 않는 무죄(無罪)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반드시 닦아 익혀야 하는 응수습(應修習)과 결코 닦아 익혀서는 안 되는 불응수습(不應修習)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저열하여 하열(下劣)한 것과 뛰어난 상묘(上妙)한 것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나쁜 행동인  흑(黑), 즉 나쁜 행동의 악업인 흑업(黑業)과 착한 행동인 백(白), 즉 착한 선업인 백업(白業)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에 있어서 차이와 분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유이분(有異分)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었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연(緣)으로 인하여 이미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에 대하여 여실히 통달하여 일관되게 앎이 없는 무지(
無知)이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즉, 연(緣)으로 인하여 이미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를 진리에 계합하여 여실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지 못한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며)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여실(如實)하게 앎이 없는 여실무지(如實無知)이며,

또는,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바른 견해가 없는 무견(無見)이며,

또는,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확실히 바르게 앎이 없는 무현관(無現觀)이거나,

또는,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어리석은 우치(愚癡)이거나,

또는,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이거나,

또는,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몹시 캄캄한 상태의 흑암(黑闇)이기 때문에

신(身) · 구(口) · 의(意)로 짓는 그릇된 3업이 발생한 것이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행(行)은 행위와 그 행위 경험의 모임인 축적(蓄積)을 뜻하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행(行) 즉 업(業) 또는 업력(業力)이란 경험과 경험치를 의미한다.

또는, 학자에 따라서, 행(行) 즉 업(業) 또는 업력(業力)은 조건지워진 상태 또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특히 정신적인 기질 또는 성향을 의미하며,

또한 현대의 승려 비쿠 보디(Bhikkhu Bodhi)에 따르면, 행은 능동적인 측면에서 의지적인 행위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정신적인 기질 또는 성향은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형성되고 또 현재의 의지적인 행위는 미래의 의지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인과 연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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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1. 무명(無明,  avidyā, Ignorance, 치癡) 2

 

於因無知,결과를 낳는 내적인 직접적 원인인 (因, hetu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연(緣, pratyaya)은 이를 돕는 외적인 간접적 원인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나무의 직접적 원인인 인(因)이고, 햇빛 · 공기 · 수분 · 온도 등은 간접적 원인인 연(緣)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씨앗에서 나무가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며, 일반적으로 양자를 합쳐서 원인으로 사용한다.

 

於果無知, 결과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因已生諸法無知, 직접적인 원인인 ()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제법(諸法)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善無知,착한 (, kuśala, 유익함, 37 조도법, 육바라밀 등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부파불교에서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과보인 낙보(樂報)를 받을만한 법(法) 특히 마음작용, 즉 자리(自利)의 법을 선(善)이라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법(法), 특히 마음작용, 즉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법, 즉 37 조도법과 육바라밀 등을 말하며, 선의 성질을 선성(善性)이라 한다. 

순익(順益)에서 순(順)은 '편안하게 하다, 안락하게 하다, 도리(道理)에 따르게 하다'의 뜻이며,

익(益)은 '이롭게 하다, 돕다, 넉넉하게 하다, 향상되게 하다'의 뜻이다.  

 

於不善無知착하지 못한 불선(不善, akuśala, 해로움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불선(不善)은 악(惡)이라고도 하며, 현세나 내세에 자기와 남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성질을 가진 법(法), 특히 마음작용)을 말하거나, 또는 '평화롭지 않은 불안은(不安隱)'을 본질적 성질로 하여 현세나 내세를 좋지 않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어두운 성질의 법(法), 특히 마음작용을 말하며, 불선 또는 악의 성질을 불선성(不善性) 또는 악성(惡性)이라 한다.  

 

於有罪無知,죄가 있는 유죄(有罪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無罪無知; 죄가 없는 무죄(無罪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불교에서의 죄(罪)는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苦)의 과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於應修習無知,반드시 닦아 익혀야 할 응수지(應修習)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不應修習無知, 반드시 닦아서 익히지 않아야 할 불응수지(不應修習)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下劣無知, 저열하고 하열(下劣)한 것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上妙無知, 뛰어나고 미묘한 상묘(上妙) 것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黑無知,나쁜 행동인  흑(黑), 즉 나쁜 행동의 악업인 흑업(黑業)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白無知, 착한 행동인 백(白), 즉 착한 선업인 백업(白業)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有異分無知,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에 있어서 차이와 분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유이분(有異分)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緣已生或六觸處,如實通達無知。연(緣)으로 인하여 이미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에 대하여 여실히 통달하여 일관되게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연(緣)으로 인하여 이미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를 진리에 계합하여 여실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지 못하며, 

 

如是於彼彼處如實無知,無見無現觀,愚癡無明黑闇,是謂無明。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여실(如實)하게 아는 것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바른 식견이 없는 무견(無見)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확실히 바르게 아는 것이 없는 무현관(無現觀)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어리석어서 우치(愚癡)하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밝게 아는 것이 없는 무명(無明)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몹시 캄캄하여서 아는 것이 없는 흑암(黑闇)인 것을 말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느니라.

 

현관(現觀)은 '진리의 제(諦)를 직접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만 대승불교의 6현관 등의 교의에서의 현관은 '진리의 제(諦)를 직접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수행도 의미한다.

 

무명(無明)이란;

'잡아함경'에서는 무명(無明)에 대한 정의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업, 번뇌성의 마음작용(특히, 부정사유와 무명과 갈애(집착, 애욕))의 관계를 설하는 부처님의 설법에서,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에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하여, 육근의 대상인 육경(六境), 즉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서 해당하는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가 일어나는 것으로, 즉 구체적으로는 불선한 욕구, 원함, 희망, 특히 탐욕의 악욕(惡欲)에  성냄의 진에(恚,瞋) · 해치고자 하는 해(害) 등의 번뇌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부정사유로 인하여 해당되는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어리석음)가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설법에서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라고 하며, 또한, 무명은 갈애(집착, 애욕)의 원인이 되며, 다시 갈애(집착, 애욕)는 염오업(染污業)의 원인이 되며, 염오업(染污業)은 오염된 마음, 즉 3계에 속박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부정사유(不正思惟)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지만, 이렇게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는 다시 더욱 더 큰 또는 더욱 오염된 부정사유(不正思惟)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의 부처님의 설에 따른 무명이란;

*과거인 전제(前際)를 알지 못하는 불지(不知)이며, 미래인 후제(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인 전후제(前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안(內)을 알지 못하는 것, 밖(外)을 알지 못하는 것, 안팎의 내외(內外)를 알지 못하는 것
*업(業)을 알지 못하는 것, 과보(報)를 알지 못하는 것, 업과 과보인 업보(業報)를 알지 못하는 것
*불보인 불(佛)을 알지 못하는 것, 법보인 법(法)을 알지 못하는 것, 승보인 승(僧)을 알지 못하는 것
*고제(苦諦)를 알지 못하는 것, 집제(集諦)를 알지 못하는 것, 멸제(滅諦)를 알지 못하는 것, 도제(道諦)를 알지 못하는 것
*원인의 인(因)을 알지 못하는 것, 원인이 일으키는 법(法) 즉 결과를 알지 못하는 것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지 못하는 것
*죄가 됨과 죄가 되지 않음, 익혀야 할 것과 익히지 않아야 할 것, 열(劣: 저열한 것)과 승(勝: 뛰어난 것), 염오(染污)와 청정(清淨), 그리고 이들의 분별(分別: 식별하는 것, 식별력)과 연기관계의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들 모두를 남김없이, 완전히 알지 못하는 개실부지(皆悉不知)이며,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의 6촉입처(六觸入處), 즉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히 즉 실답게 관찰하고 알지 못하는 것, 즉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와 계합하는 여여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는 각지(覺知)하지 못하는 것으로,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불지(不知),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라도 보지 못하는 불견(不見),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의 앎(知: 실천적 앎)에 대해서라도 '간격없이 동등함의 무간등(無間等)' 즉 '완전한 계합'이 없는 무무간등(無無間等),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어리석고 캄캄하여 치암(癡闇)한 것,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크게 어두운 대명(大冥)이라 하였다.

 

《잡아합경》 13 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무엇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 · 有緣 · 有縛法經)〉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안식(眼)에는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안식(眼)의 인(因), 안식의 연(緣), 안식을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이 안식의 인(因)이고, 업이 안식의 연(緣)이며, 업이 안식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업의 인, 업의 연, 업을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가 업의 인이며, 업의 연이며, 안식의 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인,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를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무명(無明)이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인이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연이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무명(無明)에도 () 있고 () 있으며 속박시키는 () 있으니,

무엇이 무명의 , 무명의 , 무명을 속박시키는 ()인가?

부정사유(不正思惟) 무명의 인이며, 무명의 연이며, 무명을 3(三界) 색경(色境) 속박시키는 ()이다.

부정사유(不正思惟)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부정사유의 인, 부정사유의 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안식(眼)과 색경(色)을 연(緣)하여 부정사유가 생기고, 그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어리석음의 치(癡)가 다시 부정사유의 인(因)이며, 부정사유의 연(緣)이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안식과 색경을 인연하여 부정사유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을 일으킬  어리석음의 () 바로 무명(無明)이다.

바로 이 어리석음의 치(癡)를 바탕으로하여 구하고 원하는 것의 구욕(求欲)을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이라 하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에 바탕하여 짓는 소작(所作)을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부정사유(不正思惟)는 무명(無明)을 원인[因]으로 하여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가 생기고,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를 원인으로 하여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이 생기고, 염오업(染污業)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즉 3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識)이 생기나니,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의식(意識또한 이와 같다.

이러함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緣 · 有縛法經〉이라 한다.

 

● 《잡아함경》 18 490 〈염부차경(閻浮車經)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명(無明)이라고들 말하는데, 무명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명이라는 것은 과거의 전제(前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미래인 후제(後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과거의 전제(前際) · 미래의 후제(後際) · 현재의 중제(中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괴로움의 고(苦) · 괴로움의 발생의 집(集) · 괴로움의 소멸인 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道)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안(內)에 대해서도 앎이 없고 밖(外)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혹은 이러이러한 일의 피피사(彼彼事, 개개의 사물, 특히 앞에 나열한 이치들과 관련된 개개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어두운 암(闇)이며, 막힌 장(障)인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어둠이 크게 쌓여서 모인 대암적취(大闇積聚)이겠군요.
또 물었다. 사리불이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무명을 끊게 되는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있습니다. 이른바 8정도(八正道)입니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 3 4품〈삼법품(三法品)

(문) "우치의 불선근인 우치불선근(癡不善根)"이라 하였는데, 우치의 치(癡)란 어떠한 것인가?
(답) 전제(前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후제(後際)에 대하여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안(內)에 대하여 앎이 없고 바깥(外)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업(業)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이숙(異熟)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선(善)을 지을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악(惡)을 지을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무기(無記)를 지을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다.
원인의 인(因)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원인으로 생긴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불(佛)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법(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승가(僧)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괴로움(苦)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원인인 집(集)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괴로움의 소멸인 멸(滅)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도(道)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착한 선법(善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착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니,

죄가 있는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죄가 없는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닦아야 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하열한 법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법을 알지 못하며, 검은 흑법(黑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백법(白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적대가 있는 적대법(敵對法)을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생긴 연생법(緣生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6촉처(六觸處)를 사실대로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고, 소견이 없는 무견(無見)이며,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 아닌 비현관(非現觀)이며, 몹시 어두운 흑암(黑闇)이며, 어리석고 못난 우치(愚痴)이며, 밝고 총명하지 못한 무명(無明)이며, 눈이 먼 맹명(盲冥)이며, 가리워져서 갇힌 조망(罩網)이며, 감겨서 싸인 전리(纏裏)이며, 미련하고, 혼탁(渾濁)하며, 가리고 덮힌 장개(障蓋)되었으며,

소경이 되어서 무명(無明)을 일으키며, 무지(無智)를 일으켜서 뛰어난 지혜의 승혜(勝慧)를 없애고,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무명루(無明漏)와 무명폭류(無明暴流)의 무명의 멍에와 무명의 독 뿌리와 무명의 독 줄기와 무명의 독 가지와 무명의 독 잎사귀와 무명의 독 꽃과 무명의 독 열매와 치(癡), 등치(等癡), 극치(極癡)와 개(改), 등개(等改), 극개(極改) 등 치(癡)의 종류와 치로 생기는 것과 개(改)의 종류와 개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서 우치의 치(癡)라 한다.

 

어떤 것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行)이 생기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라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알아야 한다. 무명을 인(因)으로 하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탐냄의 탐(貪) · 성냄의 진(瞋) · 어리석음의 치(癡)가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이 탐(貪) · 진(瞋) · 치(癡)의 성품을 바로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다'고 한다.

《아비달마법온족론》 11 21품〈연기품(緣起品)

또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을 앞의 행의 전행(前行)으로 하고, 무명을 표식의 치(幟)로 삼기 때문에 무량한 종류의 악한 법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무참(無慚) · 무괴(無愧) 등이다.

이 무참 · 무괴로 말미암아 모든 삿된 사견(邪見)을 일으키고, 삿된 사견으로 말미암아 삿된 생각의 사사유(邪思惟)를 하며,  삿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삿된 말의 사어(邪語)를 하고, 삿된 말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의 사업(邪業)을 일으키며, 삿된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생활의 사명(邪命)을 하고, 삿된 생활로 말미암아 삿된 노력의 사근(邪勤)을 하며, 삿된 노력으로 말미암아 삿된 기억의 사념(邪念)을 일으키고, 삿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삿된 선정의 사정(邪定)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 이 삿된 소견 · 삿된 생각 · 삿된 말 · 삿된 행위 · 삿된 생활 · 삿된 노력 · 삿된 기억 · 삿된 선정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라고 한다.

 

●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護法) 등의 《성유식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이(理, 이치, 본질)와 사(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인 성(性)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 무치(無癡)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가 되는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의 업(業)으로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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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1. 무명(無明,  avidyā, Ignorance, 치癡) 1

 

云何名爲緣起差別?謂無明緣行者。

무엇을 연기의 차별된 것이라고 하는가? 즉 무명은 행(行)의 간접적인 원인의 연(緣)이 되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니,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는 무명에 대한 설명에서 알지 못하는 '부지(不知)'즉 '라는 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반면, '연기경'에서는 앎이 없는 '무지(無知)'가 사용되고 있다.

無知무지, 1.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  2. 미련하고 어리석음

不知부지, 알지 못함

 

云何無明?무엇이 무명(無明)인가? 무명(無明)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즉,

 

무명(無明, Ignorance, nescience) Not knowing suffering, not knowing the origination of suffering,

not knowing the cessation of suffering, not knowing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It leads to action, or constructing activities.

무명(無明, Ignorance, nescience) can also be added lack of knowledge regarding numerous other topics, including karma and its results, the three jewels, moral goodnes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purity and impurity, arising by causal conditions. 

 

謂於前際無知,전제(前際, 과거)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後際無知, 후제(後際, 미래)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前後際無知,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3세(三世, trayo-dhvanah)는 과거(過去) · 현재(現在) · 미래(未來)이며, 불교 용어로는 전세(前世) · 현세(現世) · 내세(來世), 또는 전제(前際) · 중제(中際) · 후제(後際), 또는 과거세(過去世) · 현재세(現在世) · 미래세(未來世)라고 한다.

과거 또는 과거세는 숙세(宿世)라고도 하며, 한자어 숙(宿)은 '자다, 숙박하다, 묵다, 오래 되다, 한 해 묵다는 등의 뜻이 있다.
설일체유부 · 유식유가행파 · 법상종을 비롯하여 공통되게, 일체 유위법의 생멸변화의 상속상(相續相)에 근거하여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三世)의 시간을 가설(假設)한 것, 즉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단순히 편의상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과거(過去)는 어떤 법(法)이 이미 멸(滅, nirodha)했거나, 그 작용을 그친 것이며, 
현재(現在)는 어떤 법(法)이 이미 생겨났지만 아직 작용을 그치고 과거로 사라지는 낙사(落謝)하지 않은 것이며, 
미래(未來)는 어떤 법(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於內無知, 안의 내법(內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眼耳鼻舌身意)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外無知,밖의 외법(外法,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色聲香味觸法)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內外無知, 안과 밖의 내외(內外, 내외법, 12입)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業異熟無知; 이숙의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히 즉 실답게 관찰하고 알지 못하는 불여실각지(不如實覺知)이니, 즉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實)와 계합하는 여여(如如)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지 못하는 것

 

於業無知,업(業)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異熟無知,다르게 성숙하는, 이숙(異熟)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다르게 익는다는 이숙(異熟, vipāka)은 선(善)이 쌓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선이 고가 되고 악이 낙이 된다는 의미는 없다.)

이숙(異熟, vipāka)은 음역하여 비파가(毘播伽)라고도 하며, 모니어 윌리엄스에 따르면, 비파카(vipāka)는 익은 · 숙성한(ripe), 성숙된(mature), 요리(cooking), 드레싱(dressing), 익힘 · 숙성시킴(ripening), 특히 행위의 결과를 성숙시킴(maturing, esp. of the fruit of actions), 결과(effect, result)의 뜻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① 원인과 다른 성질로 성숙됨을 뜻한다. 뿌린 원인, 즉 업은 그 성질이 선 또는 악(불선)이었는데, 윤회하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때 타고나는 과보는 선업에 대해서는 낙(樂), 악업(불선업)에 대해서는 고(苦)를 타고난다는 것을 말한다.

낙(樂)과 고(苦) 그 자체로는 선도 악(불선)도 아닌 무기(無記)이므로 선 또는 불선의 성질이 다른 성질인 무기로 성숙되어 나타났다는 뜻에서 이숙(異熟)이라고 한다. 즉, 선한 원인은 즐거운 결과를 낳는 선인낙과(善因樂果), 악한 원인은 괴로운 결과를 낳는 악인고과(惡因苦果)의 불교의 인과사상적인 교의를 말한다.

이와 같이 선업과 악업이 각각 낙(樂)과 고(苦)로 성숙되어 나타나는 것을 업이숙(業異熟)이라고 한다.
② 과보(果報)를 뜻하며, 
③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於佛無知,부처님의 불보(佛寶)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法無知,법의 법보(法寶)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僧無知;승의 승보(僧寶ㅒ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苦無知,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괴로움의 고(苦)는 크게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해서,

첫 번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괴로움과 즐거움의 관점에서 나누어서, 괴로운 느낌의 고수(苦受), 즐거운 느낌의 낙수(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로 나눈, 고수(苦受)의 괴로운 고(苦)를 말하고, 

두 번째는 세상의 즐거움을 다른 관점에서 고통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을 말한다.

즉, 비록 그 성질상 즐거운 것일지라도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바뀌는 것이므로, 궁극적 즐거움 또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며, 궁극적 즐거움인 열반을 찾고자 할 때, 세상의 즐거움에 맛들여서 집착하는 상태는 열반으로 나아감에 있어 극심한 장애가 된다. 따라서 열반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의 가장 우선적인 것이 세상의 즐거움에 집착 당하지 않는 상태, 맛들임 당하지 않는 상태, 즉, 탐욕으로부터 일부라도 해탈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두 번째의 해석이 4성제의 고제의 관점에의 고(苦)를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에서 살펴보면, 세친의 '대승오온론'에 따르면 고수(苦受)의 고(苦: 괴로움)는 어떤 일 또는 대상이 생겨날 때 그것과 떨어지려는 욕구가 있는 것으로 정의되고,

낙수(樂受)는 어떤 일 또는 대상이 사라질 때에 그것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가 있는 것으로 정의되며,

불고불락(不苦不樂) 즉 사수(捨受)는 이들 2가지 욕구가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고(苦) 즉 괴로움이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또는 사물(이별, 질병, 죽음 등)을 만나게 되거나, 만나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의 즐거움(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관점에서 볼 때,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것은 과도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성질상 즐거운 것인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는 것은 즐거움이 과도하여 고통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즉 성질상 즐거운 것이 현실의 사용에서도 즐거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중용 즉 절제가 요구되며,

이것은 인과의 법칙 또는 연기의 법칙에 따른 것으로, 씨가 발아하여 싹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이라는 원인(因, 生因)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온도, 물, 산소라는 원인(緣, 起因)이 더해져야 하듯이, 성질상 즐거운 인(因, 生因생인)이 현실의 사용에서 즐거운 과(果, 有유)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때와 장소에 적절한 중용의 연(緣, 起因기인)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질상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동요를 최대한 가라앉히고 직면하여서 그것을 경감시키는 방안을 행하고, 불가피한 것이라면 극단적이지 않게 의연하게 맞이하는 태도, 즉 수양으로서의 중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에 대한 중용의 태도는 훌륭한 것이지만,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로서는 만약 삶이 이번 한 번뿐이라면 이러한 중용이 나름 최선의 해결책이겠지만, 삶은 내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반복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중용의 태도가 훌륭하긴 하나, 근원적인 해결책으로서의 중도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관점 즉 근원적인 해결책을 구한다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잡아함경' 제2권 제58경 〈음근경(陰根經)〉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에 따르면, 고(苦)는 본질상 무상(無常)한 것, 즉 본질상 영원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을 만날 때와 같이, 그 자체의 성질이 괴로운 것인, 고수(苦受)와 연결된, 괴로움의 고고(苦苦)이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와 같이, 낙수(樂受)와 연결된 이차적인 괴로움의 괴수(壞苦)이건, 혹은 무상한 것이므로 해탈이 아니어서 머물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수(捨受)와 연결된, 성인의 뛰어난 괴로움의 느낌의 행고(行苦)이건 간에, 고(苦) 즉 괴로움이란 고수(苦受), 괴로움의 느낌 그 자체 또는 괴로움의 느낌을 일으키는 사물을 말한다.

즉,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건, 해탈이 아니라서 머물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건, 이 모두, 열반으로 나아가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러한 일 또는 대상에서 떨어지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켜야하는 일 또는 대상인 것이다.

즉, 고(苦)는 기꺼이 안주하여서 즐길만한 것이 아닌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이 다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염세(厭世) 즉 좌절을 겪은 욕구(선욕 또는 악욕)에 무지가 함께하는 불선한 마음인 염(厭)이 아니라, 싫어하는 마음을 닦는 수염(修厭) 즉 무탐(無貪)과 지혜(慧)가 함께하는 선한 마음인 염(厭)을 닦으라고 하신 것이다.

때문에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변하고 바뀌는 변이법(變易法)에 대하여, 이것은 나라는 시아(是我, This is my self). 이것은 나의 것이라는 이아(異我, This is mine). 나는 이러한 존재라는 상재(相在, This is what I am)'라고 보지 않거나 보지 않을 수 있는, 즉 고제(苦諦)에 대하여 미혹하게 하는 번뇌를 실제로 끊는 지혜인 고제현관(苦諦現觀) 또는 고지(苦智)를 가져야 하는 것을 뜻하며, 

고(苦)는 특히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5온과 함께 설하여지는데, 5온은 변하고 바뀌는 변이법(變易法) 즉 유위법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유위법'이란 곧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와 동일한 것으로, 3계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변하고 바뀌는 변이법(變易法)이라고 보아서 미혹하게 하는 번뇌를 끊는 지혜인 고제현관(苦諦現觀) 또는 이를 통하여 증득된 고지(苦智)를 뜻하는 것으로, 즉 고지(苦智)는 고제현관(苦諦現觀) 등의 수행을 통하여 삼계에 대한 무상의 진리 즉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를 체득한 상태의 무루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불교 교의에 따르면, 유위법이지만 무루인, 출세간의 무루법인 4성제 · 37도품 · 6바라밀 · 12연기설 등은 비록 유위법이지만 그 성질상 맛들임 · 집착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고에 속하지 않으며, 이에 따른 즐거움은 고제의 관찰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 즉 열반을 구하는 불교의 용어로서의 고(苦)는 항상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4성제(四聖諦)의 문맥 속에서의 첫 번째 진리로서의 고(苦)를 의미하며, 

유루(有漏) 즉 번뇌에 속박된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과보로서의 3계에서의 삶을 성자의 눈으로 실상 그대로 관찰한 3계에서의 삶의 본질은 고(苦: 무상한 것, 괴로운 것, 변하고 바뀌는 것)로서 안락하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고제(苦諦) 즉 괴로움의 진리라 하는 것이다.

즉, 고는 괴로움의 느낌인 고수(苦受)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 또는 고성제(苦聖諦)를 뜻하며,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는 방편으로서의 고제현관(苦諦現觀) 등의 수행과 이러한 진리를 깨우친 상태의 무루지인 고지(苦智)를 뜻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진리를 실천적으로 깨우치기 위하여 보다 구체적인 방편으로 4념처를 비롯한 37도품을 제시하고 있으며, '구사론' '대승아비달마집론' '천태사교의' 등의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논서들에 따르면, 불교의 우주론 즉 유정세간과 기세간은 유정의 현실세계 또는 유정의 실제 모습으로서의 현재 상태를 밝히는 것으로 곧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에 해당한다. 달리 말하여,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우주론이란 '괴로움의 현실이라는 진리인 고제(苦諦)' 즉 무상(無常)의 진리를 밝히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於集無知,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인 집제(集諦, Samudaya Satya)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집제(集諦, Samudaya Satya),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 · 괴고 · 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번뇌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또는 탐(貪, rāga, lust, attachment) 또는 집착(執著)하는 망집(妄執)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보는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 ·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을 고통의 주 원인으로 본다.

 

於滅無知,괴로움이 소멸하는 진리인 멸제(滅諦, Nirodha Satya)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멸제(滅諦, Nirodha Satya),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 ·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으로,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이라 한다.

 

於道無知,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인 도제(道諦, Mārga Satya)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도제(道諦, Mārga Satya)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 즉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음"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하며, 모든 불교의 교의는 사실상 도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원시 불교에서는 도제를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하며,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도제를 팔정도를 포함하는 사념처(四念處) · 사정근(四正勤) · 사여의족(四如意足) · 오근(五根) · 오력(五力) · 칠각지(七覺支) · 팔정도(八正道)의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인 것으로 설명하며, 
대승불교에서는 도제를 37조도품 외에 보살의 보살의 서원과 수행의 보살행 과 보살도인 원행(願行)을 담은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 원(願) · 역(力) · 지(智)의 네 가지를 추가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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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경(緣起經) 一卷

당(唐)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一時,薄伽梵在室羅筏,住誓多林給孤獨園,與無量無數聲聞、菩薩、天人等俱。

어느 한 때, 박가범(薄伽梵, 부처님)께서 실라벌(室羅筏, 슈라바스티śrāvastī) 서다림(誓多林, jetavana )의 급고독원(給孤獨園) 머무르고 계실 , 무량하고 무수한 성문과 보살 그리고 하늘과 사람들이 함께하였다.

 

●박가범(薄伽梵)바가바트(bhagavat)는 원래는 "바가반(Bhagavan: 주, Lord, 하느님, God)에 관련된 (pertaining to Bhagavan)"이란 뜻의 힌두교 용어인 산스크리트어 바가바타(bhāgavata)에서 유래한 말이며, 보편적인 신의 추상적 개념을 내며, 같은 말로써, 불교권에서는 불교적인 개념을 담아서 바가바트(bhagavat)라고 표기한다는 견해가 있으며, 부처님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니어 윌리엄스의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에 따르면, 바가바타(bhāgavata)의 뜻이 오히려 '비슈누나 크리슈나 등의 바가바트에 관련된 또는 바가바트로부터 온 (relating to or coming from Bhagavat i.e. Vishnu or Krishna)'이라는 뜻이 되며, 바가바트(Bhagavat)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재산 · 행운 · 번영 · 행복을 가진 (possessing fortune , fortunate , prosperous , happy)

눈부시도록 빛나는, 저명한, 신성(神性)한, 경배할 만한, 공경할 만한 (glorious, illustrious, divine, adorable, venerable)

(신 · 반신 또는 성인에 적용되는 의미로) 성스러운, 신성(神聖)한 (holy [applied to gods, demigods, and saints as a term of address, either in voc. bhagavan, bhagavas, bhagos])

불교 경전의 제목에 흔히 붙는 성스러움의 뜻의 접두어 (with Buddhists often prefixed to the titles of their sacred writings)

비슈누, 크리슈나 등의 신 또는 경배할 존재 (the divine or adorable one of Vishnu-Krishna Bhag. BhP.)

부처 또는 보살 또는 자이나교의 깨달은 자(a Buddha or a Bodhi-sattva or a Jina Buddh)를 뜻한다- 위키

 

●실라벌(室羅筏, 슈라바스티)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마을이다. 옛날 코살라 왕국의 두번째 수도였으며 오늘날의 불교의 팔대성지이며,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신 곳으로, 가장 많은 경이 설해진 곳으로 알려져있다.

 

爾時,世尊告苾芻衆:“吾當爲汝宣說緣起初差別義,汝應諦聽,極善思惟。吾今爲汝分別解說。”

苾芻衆言:“唯然願說,我等樂聞。” 

그때 세존께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남자 승려들이신, 필추중(苾芻衆)들에게 말씀하셨으니,

“나는 그대들에게, 연기의 시작인 연기초(緣起初)와 그 차별된 이치의 차별의(差別義)를 말하리니, 그대들은 반드시 자세히 듣고 잘 사유하도록 하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여러 필추(승려)들이 답하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듣고자 하오니 부디 말씀하여 주십시오.”

 

佛言:“云何名緣起初?謂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연기의 시작인 연기초(緣起初)라 하는 것인가?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이며,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이 생기는,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을 말하는 것이니,

 

"If this exists, that exists, if this ceases to exist, that also ceases to exist".

The basic principle is that all things (dharmas, phenomena, principles) arise in dependence upon other things.

 

所謂 無明緣行, 이른바 무명(無明, Ignorance, 치癡)으로 인하여 일으키게 되는 (行, mental formations) () 되어서 무명연행(無明緣行)이 되고,

영적인 무지인 무명으로 인하여 무상(無相) · 고(苦) · 무아(無我) · 공(空) · 연기(緣起) · 중도(中道)에 밝지 않아서, 환영 즉 망상에 잡히는 원인이 되어서 그릇된 멘탈(Mental)의 형성물인 행(行), 즉 업(業)이 일어나며,

 

무명(無明, Ignorance, nescience)은 어둠, 막힘, 미혹(迷惑), 치(癡), 암(闇), 장(障), 미(迷), 우치(愚癡), 무지(無知),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하며, 사전적으로는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또는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인데, 불교 사전들의 정의에 따르면

미(迷)는 사(事)와 이(理)에서 잘못이 있는 것을 말하고,

혹(惑)은 사(事)와 이(理)에 밝지 못한 것을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치(癡) 즉 어리석음, 어리석은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 작용으로, 우치(愚癡), 사리(事理)를 알지 못하는 무지(無智) 또는 사리가 은폐되어 있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하며, 

명지(明知)가 없어서 사리를 바르게 깨치지 못하여서 괴로움의 근본이 되며, 불만족하여서 항상 탐욕하여서 애착하는 것이다. 

 

行緣識(, Fabrications, choices) () 연이 되는 행연식(行緣識)이며

그릇된 멘탈(Mental) 형성물인 (),  () 원인이 되어서 의식,  분별하는 (), 고정관념, 분별심 등의 의식인 ''라는 자아 의식이 일어나며

 

무명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3행(三行), 즉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행(行)은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업(業) 또는 업력(業力)에 해당하고, 업 또는 업력이 저장되는 곳은 무표색과 의근이며, 행(行)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에서 아뢰야식에 보관된 업종자에 해당한다.

 

識緣名色(,  Consciousness) 명색(名色) 연이 되어서 식연명색(識緣名色)이 되며

그릇된 의식이 원인이 되어 그릇된 이름과 형상(명색)이 일어나며, 

 

() 안식신(眼識身) · 이식신(耳識身) · 비식신(鼻識身) · 설식신(舌識身) · 신식신(身識身) · 의식신(意識身) 6식신(六識身) 뜻하며일반적으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六識)이라 한다.
() 일반적 의미인 신체의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라,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로서 사용된 경우이다. 따라서, 안식신은 안식들 또는 안식들의 집합을 뜻하는데, 온갖 시각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식신 · 비식신 · 설식신 · 신식신은 각각 온갖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하며, 의식신은 온갖 정신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한다.   

() () · () · () · () · () 5(前五識) 의한 감각작용과 6의식에 의한 지각(知覺) · 추리(推理) · 기억(記憶) · 판단(判斷) 일체의 의식작용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과거의 모든 행위(行)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것이다.

 

名色緣六處,명색(名色,  name and form)은 육처(六處, 육입) 연이 되어서 명색연육처(名色緣六處)가 되며, 

 

명(名)은 오온 가운데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사무색온(四無色蘊)을 말하고,

색(色)은 오온 가운데 색온(色蘊)을 말하며, 이것은 곧 제소유색(諸所有色) 즉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4대종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질을 말하며,

또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정신적인 것의 명(名)과 물질적인 것의 색(色)으로서 이 현상세계의 존재를 가리킨다.

 

六處緣觸,안입처(眼入處) · 이입처(耳入處) · 비입처(鼻入處) · 설입처(舌入處) · 신입처(身入處) · 의입처(意入處)의 육처(六處, 육입,  six sense gates, six sense bases)는 () 연이 되어서 육처연촉(六處緣觸)이 되며,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안입처(眼入處) · 이입처(耳入處) · 비입처(鼻入處) · 설입처(舌入處) · 신입처(身入處) · 의입처(意入處)의 6내입처(六內入處) 즉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고,  

입처(入處)에서 입(入)이란 거두어들이는 섭입(涉入) 또는 재촉하여 들이는 촉입(趨入)의 뜻으로 6근(六根)과 6경(六境)이 서로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처(處)는 소의(所依) 즉 발동근거 · 의지처 · 도구라는 뜻으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에 대하여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六識)이 생겨날 때, 6근이 발동근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입처(入處)는 6식의 수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6근과 6경이 서로를 거두어 들여서 6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또한, 6식의 능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입처(入處)는 6식이 6근을 통해 6경을 거두어들임으로써 6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앎 또는 요별하는 것과 함께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마음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의 처(處)는 생장문(生長門)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과 마음작용이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한다. 즉, 6근은 6식 즉 마음의 인식도구일 뿐만 아니라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을 현행하게 하고 그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6근 가운데 의근(意根)의 경우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觸緣受,안촉신(眼觸身) · 이촉신(耳觸身) · 비촉신(鼻觸身) · 설촉신(舌觸身) · 신촉신(身觸身) · 의촉신(意觸身)의 촉(觸, contact, 육촉)은 () 연이 되어서 촉연수(觸緣受)가 되며,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고, 촉(觸)은 안촉신(眼觸身) · 이촉신(耳觸身) · 비촉신(鼻觸身) · 설촉신(舌觸身) · 신촉신(身觸身) · 의촉신(意觸身)의 6촉신(六觸身)을 말하며, 여기에서 신(身)은 일반적 의미인 몸 즉 신체의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라,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들'로서 사용되며, 촉(觸)은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을 말한다.

 

受緣愛,고수(苦受) · 낙수(樂受)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수(受, sensation, feeling)는 () 연이 되어서 수연애(受緣愛)가 되며, 

 

수(受)는 고수(苦受) · 낙수(樂受)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를 말하며, 불교 일반에 따르면, 수(受)는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촉(觸) 즉 '근경식 3사화합'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수(受)는 6입과 명색과 식의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다.

 

愛緣取,애착(愛著) · 탐(貪) 또는 집착(執著)하는 애(愛, craving, desire, thirst)는 () 연이 되어서 애연취(愛緣取)가 되며,

 

애(愛)는 애착(愛著) · 탐(貪) 또는 집착(執著)하는 것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릇된 좋아함의 욕(欲)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그 대상에 들러붙러 떠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애(愛), 문자 그대로의 뜻에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으나, 12연기설에서의  애(愛)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12연기설의 애(愛) 즉 탐(貪)은 그 성질이 불선(不善)인, 본질적으로는 번뇌이다.

이에 비해 자비(사랑)의 자(慈)는 무진(無瞋)의 마음작용이고,

비(悲)는 불해(不害)의 마음작용으로서, 둘 다 본질적인 선(善)이다.

불교에서는 탐(貪)으로서의 애(愛: 갈애, 애착, 집착)는 증(憎: 증오, 미워함)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즉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애(愛)가 증(憎)을 낳기도 하며 반대로 증(憎)이 애(愛)를 낳기도 한다고 본다. 그러나 자비 또는 사랑으로서의 애(愛)에는 이러한 면이 없다.
그리고 12연기설의 12지 가운데 제1지분인 무명(無明)과 제8지분인 애(愛)와 제9지분인 취(取)는 선 · 불선 · 무기의 3성에 따라 살펴보면 그 성질이 본질적으로 불선 또는 번뇌이나, 나머지 지분들의 성질은 무기이기 때문에 나머지 지분들은 선이 될 수도 있고 불선이 될 수도 있다. 즉 바른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그릇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청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오염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取緣有,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취(取, attachment, 사취, 번뇌)는 () 연이 되어서 취연유(取緣有)가 되며,

온갖 집착과 번뇌가 원인이 되어서 물질계인 욕계에 묶인 삶의 유(有)가 일어나며, 

 

취(取)는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계금취) · 아취(我取, 아어취)의 4취(四取)를 말한다. 
취(取)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가짐 또는 취함인데, 모니어 모니어윌리엄스(Monier Monier-Williams)의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에 따르면 취(取)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우파다나(upādāna)의 일반적인 의미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the act of taking for one's self),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전용(轉用)하는 행위(appropriating to one's self), 받아들임(accepting), 허용함(allowing), 취함(taking), 획득함(acquiring) 등이 있고,

불교 용어로서는 '갈애 즉 탐욕이 원인이 되어 존재를 꽉 붙잡는 것 또는 집착하는 것으로, 유 즉 새로운 태어남들의 원인이 되는 것(grasping at or clinging to existence caused by tṛṣṇā, desire, and causing bhava, new births)'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현대의 불교 사전들에 따르면, 취(取)는 잡아서 가짐, 잡아서 지님, 잡은 후 버팀, 잡은 후 유지하는 집지(執持) 또는 잡아서 가짐, 잡아서 취함, 잡은 후 받아들임, 잡은 후 의지함의 집취(執取)인데, 좁은 뜻으로는 꽉 붙잡은 후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고 집착(執著)하는 번뇌를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번뇌(煩惱)를 뜻한다.  

 

有緣生,유(有)는 욕유(欲有) · 색유(色有) · 무색유(無色有)의 유(有, becoming, 삼유, 삼계)는 () 연이 되어서 유연생(有緣生)이 되며,

물질계에 묶인 삶이 원인이 되어 물질계로 태어남의 생(生)이 일어난다.

 

유(有)는 욕유(欲有) · 색유(色有) · 무색유(無色有)의 3유(三有)는 세계라는 측면에서는 3계를 뜻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의 측면에서는 욕계의 유정 · 색계의 유정 · 무색계의 유정을 뜻한다.

유정이란 명색의 화합체 즉 5온의 화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유전연기의 관점에서는 취(取) 즉 온갖 번뇌에 물들어 있는 5온, 즉 5취온을 말한다. 따라서, 유전연기의 관점에서는 유(有)는 5취온을 말하는, 번뇌로 인해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는 상태 즉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의 삶을 말한다

유(有)가 있다는 것은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4취(四取) 즉 108번뇌에 물든 상태가 있기 때문에 5취온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갖가지 번뇌가 있기 때문에 욕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색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무색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취연유(取緣有) 또는 연취유(緣取有)는 또한 이미 발생한 유(有) 즉 욕유(欲有) · 색유(色有) 또는 무색유(無色有)로서의 존재가 있고 이러한 존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취(取)가 존재한다는 것,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生緣老死,(生, birth) 노사(老死) 연이 되어서 생연노사(生緣老死)가 되나니,

 

생(生)은 각각의 중생(衆生)이 각각의 몸의 종류로 한 번의 생을 넘어 화합하여 태어나서는, 음(陰)을 득하고, 계(界)를 득하고, 입처(入處)를 득하고, 명근(命根)을 득하는 것을 말한다.

유연생(有緣生) 또는 연유생(緣有生)은 욕유 · 색유 · 무색유의 3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존재, 즉 5취온의 상태가 있으므로, 즉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는 상태가 있으므로 태어남이 생겨난다는 것 즉 다른 일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5취온은 죽음으로 그냥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상속되고 유전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생, 즉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여 받은 삶이 있다면, 즉 자신이 3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유(有)가 존재한다는 것, 즉 5취온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起愁歎苦憂惱,걱정()ㆍ한탄()ㆍ괴로움()ㆍ근심()ㆍ번뇌() 일으키는 것으로

是名爲純大苦蘊集,이를 이름하며 순수하게  괴로움의 모임인 순대고온집(純大苦蘊集)이라 하며,

如是名爲緣起初義。이와 같은 것을 연기의 이치가 시작되는 연기초의(緣起初義)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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