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緣起經) 一卷
당(唐)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1. 무명(無明, avidyā, Ignorance, 치癡) 2
於因無知,결과를 낳는 내적인 직접적 원인인 인(因, hetu) 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연(緣, pratyaya)은 이를 돕는 외적인 간접적 원인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나무의 직접적 원인인 인(因)이고, 햇빛 · 공기 · 수분 · 온도 등은 간접적 원인인 연(緣)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씨앗에서 나무가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며, 일반적으로 양자를 합쳐서 원인으로 사용한다.
於果無知,그 결과 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因已生諸法無知,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제법(諸法)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善無知,착한 선(善, kuśala, 유익함, 37 조도법, 육바라밀 등) 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부파불교에서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과보인 낙보(樂報)를 받을만한 법(法) 특히 마음작용, 즉 자리(自利)의 법을 선(善)이라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법(法), 특히 마음작용, 즉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법, 즉 37 조도법과 육바라밀 등을 말하며, 선의 성질을 선성(善性)이라 한다.
순익(順益)에서 순(順)은 '편안하게 하다, 안락하게 하다, 도리(道理)에 따르게 하다'의 뜻이며,
익(益)은 '이롭게 하다, 돕다, 넉넉하게 하다, 향상되게 하다'의 뜻이다.
於不善無知, 착하지 못한 불선(不善, akuśala, 해로움) 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불선(不善)은 악(惡)이라고도 하며, 현세나 내세에 자기와 남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성질을 가진 법(法), 특히 마음작용)을 말하거나, 또는 '평화롭지 않은 불안은(不安隱)'을 본질적 성질로 하여 현세나 내세를 좋지 않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어두운 성질의 법(法), 특히 마음작용을 말하며, 불선 또는 악의 성질을 불선성(不善性) 또는 악성(惡性)이라 한다.
於有罪無知,죄가 있는 유죄(有罪) 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無罪無知; 죄가 없는 무죄(無罪) 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불교에서의 죄(罪)는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苦)의 과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於應修習無知,반드시 닦아 익혀야 할 응수지(應修習)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不應修習無知, 반드시 닦아서 익히지 않아야 할 불응수지(不應修習)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下劣無知, 저열하고 하열(下劣)한 것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上妙無知, 뛰어나고 미묘한 상묘(上妙)한 것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黑無知,나쁜 행동인 흑(黑), 즉 나쁜 행동의 악업인 흑업(黑業)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白無知, 착한 행동인 백(白), 즉 착한 선업인 백업(白業)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有異分無知,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에 있어서 차이와 분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유이분(有異分)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緣已生或六觸處,如實通達無知。연(緣)으로 인하여 이미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에 대하여 여실히 통달하여 일관되게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연(緣)으로 인하여 이미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를 진리에 계합하여 여실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지 못하며,
如是於彼彼處如實無知,無見無現觀,愚癡無明黑闇,是謂無明。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여실(如實)하게 아는 것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바른 식견이 없는 무견(無見)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확실히 바르게 아는 것이 없는 무현관(無現觀)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어리석어서 우치(愚癡)하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밝게 아는 것이 없는 무명(無明)이며,
이와 같이 곳곳에서 열거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어느 하나에 대하여서라도 몹시 캄캄하여서 아는 것이 없는 흑암(黑闇)인 것을 말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느니라.
현관(現觀)은 '진리의 제(諦)를 직접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만 대승불교의 6현관 등의 교의에서의 현관은 '진리의 제(諦)를 직접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수행도 의미한다.
무명(無明)이란;
'잡아함경'에서는 무명(無明)에 대한 정의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업, 번뇌성의 마음작용(특히, 부정사유와 무명과 갈애(집착, 애욕))의 관계를 설하는 부처님의 설법에서,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에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하여, 육근의 대상인 육경(六境), 즉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서 해당하는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가 일어나는 것으로, 즉 구체적으로는 불선한 욕구, 원함, 희망, 특히 탐욕의 악욕(惡欲)에 성냄의 진에(恚,瞋) · 해치고자 하는 해(害) 등의 번뇌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부정사유로 인하여 해당되는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어리석음)가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설법에서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라고 하며, 또한, 무명은 갈애(집착, 애욕)의 원인이 되며, 다시 갈애(집착, 애욕)는 염오업(染污業)의 원인이 되며, 염오업(染污業)은 오염된 마음, 즉 3계에 속박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부정사유(不正思惟)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지만, 이렇게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는 다시 더욱 더 큰 또는 더욱 오염된 부정사유(不正思惟)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의 부처님의 설에 따른 무명이란;
*과거인 전제(前際)를 알지 못하는 불지(不知)이며, 미래인 후제(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인 전후제(前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안(內)을 알지 못하는 것, 밖(外)을 알지 못하는 것, 안팎의 내외(內外)를 알지 못하는 것
*업(業)을 알지 못하는 것, 과보(報)를 알지 못하는 것, 업과 과보인 업보(業報)를 알지 못하는 것
*불보인 불(佛)을 알지 못하는 것, 법보인 법(法)을 알지 못하는 것, 승보인 승(僧)을 알지 못하는 것
*고제(苦諦)를 알지 못하는 것, 집제(集諦)를 알지 못하는 것, 멸제(滅諦)를 알지 못하는 것, 도제(道諦)를 알지 못하는 것
*원인의 인(因)을 알지 못하는 것, 원인이 일으키는 법(法) 즉 결과를 알지 못하는 것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지 못하는 것
*죄가 됨과 죄가 되지 않음, 익혀야 할 것과 익히지 않아야 할 것, 열(劣: 저열한 것)과 승(勝: 뛰어난 것), 염오(染污)와 청정(清淨), 그리고 이들의 분별(分別: 식별하는 것, 식별력)과 연기관계의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들 모두를 남김없이, 완전히 알지 못하는 개실부지(皆悉不知)이며,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의 6촉입처(六觸入處), 즉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히 즉 실답게 관찰하고 알지 못하는 것, 즉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와 계합하는 여여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는 각지(覺知)하지 못하는 것으로,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불지(不知),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라도 보지 못하는 불견(不見),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의 앎(知: 실천적 앎)에 대해서라도 '간격없이 동등함의 무간등(無間等)' 즉 '완전한 계합'이 없는 무무간등(無無間等),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어리석고 캄캄하여 치암(癡闇)한 것,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
위에 열거한 모두에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크게 어두운 대명(大冥)이라 하였다.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무엇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 · 有緣 · 有縛法經)〉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안식(眼)에는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안식(眼)의 인(因), 안식의 연(緣), 안식을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이 안식의 인(因)이고, 업이 안식의 연(緣)이며, 업이 안식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업의 인, 업의 연, 업을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가 업의 인이며, 업의 연이며, 안식의 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인,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를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무명(無明)이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인이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의 연이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무명(無明)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무명의 인, 무명의 연, 무명을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부정사유(不正思惟)가 무명의 인이며, 무명의 연이며, 무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부정사유(不正思惟)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박(縛)이 있으니,
무엇이 부정사유의 인, 부정사유의 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인가?
안식(眼)과 색경(色)을 연(緣)하여 부정사유가 생기고, 그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어리석음의 치(癡)가 다시 부정사유의 인(因)이며, 부정사유의 연(緣)이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박(縛)이다.
안식과 색경을 인연하여 부정사유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을 일으킬 때, 그 어리석음의 치(癡)가 바로 곧 무명(無明)이다.
바로 이 어리석음의 치(癡)를 바탕으로하여 구하고 원하는 것의 구욕(求欲)을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이라 하며,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에 바탕하여 짓는 소작(所作)을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부정사유(不正思惟)는 무명(無明)을 원인[因]으로 하여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가 생기고, 갈애의 애(愛, 집착, 애욕)를 원인으로 하여 업(業), 즉 염오업(染污業)이 생기고, 염오업(染污業)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즉 3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識)이 생기나니,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ㆍ 의식(意識)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함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緣 · 有縛法經〉이라 한다.
●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명(無明)이라고들 말하는데, 무명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명이라는 것은 과거의 전제(前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미래인 후제(後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과거의 전제(前際) · 미래의 후제(後際) · 현재의 중제(中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괴로움의 고(苦) · 괴로움의 발생의 집(集) · 괴로움의 소멸인 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道)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안(內)에 대해서도 앎이 없고 밖(外)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혹은 이러이러한 일의 피피사(彼彼事, 개개의 사물, 특히 앞에 나열한 이치들과 관련된 개개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어두운 암(闇)이며, 막힌 장(障)인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어둠이 크게 쌓여서 모인 대암적취(大闇積聚)이겠군요.
또 물었다. 사리불이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무명을 끊게 되는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있습니다. 이른바 8정도(八正道)입니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삼법품(三法品)〉
(문) "우치의 불선근인 우치불선근(癡不善根)"이라 하였는데, 우치의 치(癡)란 어떠한 것인가?
(답) 전제(前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후제(後際)에 대하여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안(內)에 대하여 앎이 없고 바깥(外)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업(業)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이숙(異熟)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선(善)을 지을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악(惡)을 지을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며,
무기(無記)를 지을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다.
원인의 인(因)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원인으로 생긴 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불(佛)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법(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승가(僧)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괴로움(苦)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원인인 집(集)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괴로움의 소멸인 멸(滅)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도(道)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착한 선법(善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착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니,
죄가 있는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죄가 없는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닦아야 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하열한 법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법을 알지 못하며, 검은 흑법(黑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백법(白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적대가 있는 적대법(敵對法)을 알지 못하고, 인연으로 생긴 연생법(緣生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6촉처(六觸處)를 사실대로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이고, 소견이 없는 무견(無見)이며,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 아닌 비현관(非現觀)이며, 몹시 어두운 흑암(黑闇)이며, 어리석고 못난 우치(愚痴)이며, 밝고 총명하지 못한 무명(無明)이며, 눈이 먼 맹명(盲冥)이며, 가리워져서 갇힌 조망(罩網)이며, 감겨서 싸인 전리(纏裏)이며, 미련하고, 혼탁(渾濁)하며, 가리고 덮힌 장개(障蓋)되었으며,
소경이 되어서 무명(無明)을 일으키며, 무지(無智)를 일으켜서 뛰어난 지혜의 승혜(勝慧)를 없애고,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무명루(無明漏)와 무명폭류(無明暴流)의 무명의 멍에와 무명의 독 뿌리와 무명의 독 줄기와 무명의 독 가지와 무명의 독 잎사귀와 무명의 독 꽃과 무명의 독 열매와 치(癡), 등치(等癡), 극치(極癡)와 개(改), 등개(等改), 극개(極改) 등 치(癡)의 종류와 치로 생기는 것과 개(改)의 종류와 개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서 우치의 치(癡)라 한다.
어떤 것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行)이 생기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라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알아야 한다. 무명을 인(因)으로 하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탐냄의 탐(貪) · 성냄의 진(瞋) · 어리석음의 치(癡)가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이 탐(貪) · 진(瞋) · 치(癡)의 성품을 바로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다'고 한다.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
또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을 앞의 행의 전행(前行)으로 하고, 무명을 표식의 치(幟)로 삼기 때문에 무량한 종류의 악한 법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무참(無慚) · 무괴(無愧) 등이다.
이 무참 · 무괴로 말미암아 모든 삿된 사견(邪見)을 일으키고, 삿된 사견으로 말미암아 삿된 생각의 사사유(邪思惟)를 하며, 삿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삿된 말의 사어(邪語)를 하고, 삿된 말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의 사업(邪業)을 일으키며, 삿된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생활의 사명(邪命)을 하고, 삿된 생활로 말미암아 삿된 노력의 사근(邪勤)을 하며, 삿된 노력으로 말미암아 삿된 기억의 사념(邪念)을 일으키고, 삿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삿된 선정의 사정(邪定)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 이 삿된 소견 · 삿된 생각 · 삿된 말 · 삿된 행위 · 삿된 생활 · 삿된 노력 · 삿된 기억 · 삿된 선정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라고 한다.
●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護法) 등의 《성유식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이(理, 이치, 본질)와 사(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인 성(性)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 무치(無癡)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가 되는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의 업(業)으로 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