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緣起經) 一卷

()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6. 촉(觸, sparśa, Contact)

 

六處緣觸者,云何爲觸?

육처(六處) (觸, sparśa, Contact) 간접적인 원인의 () 되는 육처연촉(六處緣觸)이니무엇이 ()인가?

 

謂六觸身:一者眼觸,二者耳觸,三者鼻觸,四者舌觸,五者身觸,六者意觸,是名爲觸。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인, 촉()이란, 6근 · 6경 · 6식의 화합의 육촉(六觸)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안촉(眼觸), 둘째는 이촉(耳觸, 이촉신), 셋째는 비촉(鼻觸, 비촉신), 넷째는 설촉(舌觸, 설촉신), 다섯째는 신촉(身觸, 신촉신), 여섯째는 의촉(意觸, 의촉신)으로이를 ()이라고 한다.

 

촉(觸, sparśa, Contact)은 6입연촉(六入緣觸)과 촉연수(觸緣受)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6입연촉은 연6입촉(緣六入觸)이라고도 하며 촉연수는 연촉수(緣觸受)라고도 한다.

6입연촉 또는 연6입촉은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고,

촉연수 또는 연촉수는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뜻이다.

 

●잡아합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촉(觸)은 안촉신(眼觸身) · 이촉신(耳觸身) · 비촉신(鼻觸身) · 설촉신(舌觸身) · 신촉신(身觸身) · 의촉신(意觸身)의 6촉신(六觸身)을 말하며, 

여기에서의 신(身, kāya)은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들'로서 사용되었으며, 촉(觸)은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을 말한다.

6촉신(六觸身): 6가지 촉(觸)들, 6가지 촉(觸)의 집합; 6촉(六觸)은 6근 · 6경 · 6식의 화합들을 말하고, 

6촉신(六觸身)은 이러한 화합들의 집합을 총칭한다.

6촉과 6촉신은 사실상 같은 말이며, 6촉은 6촉신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다.

6근 · 6경 · 6식의 화합의 상태는 6식 즉 인식대상에 대한 6가지 인식 또는 요별 가운데에서 개별 또는 다수가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안촉신(眼觸身): 안촉(眼觸)들, 즉 안촉(眼觸)의 집합이며, 안촉(眼觸)은 안근 · 색경 · 안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안식 즉 인식대상의 색경(색깔과 크기와 모습)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눈으로 대상의 색깔과 크기와 모습을 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촉신(耳觸身): 이촉(耳觸)들, 즉 이촉(耳觸)의 집합이며, 이촉(耳觸)은 이근 · 성경 · 이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이식 즉 인식대상의 성경(소리)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즉 귀로 대상의 소리를 듣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비촉신(鼻觸身): 비촉(鼻觸)들, 즉 비촉(鼻觸)의 집합이며, 비촉(鼻觸)은 비근 · 향경 · 비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비식 즉 인식대상의 향경(냄새)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코로 대상의 냄새를 맡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설촉신(舌觸身): 설촉(舌觸)들, 즉 설촉(舌觸)의 집합이며, 설촉(舌觸)은 설근 · 미경 · 설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설식 즉 인식대상의 미경(맛)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 있는 것으로, 혀로 대상의 맛을 감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신촉신(身觸身): 신촉(身觸)들, 즉 신촉(身觸)의 집합이며, 신촉(身觸)은 신근 · 촉경 · 신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신식 즉 인식대상의 촉경(촉감)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몸으로 대상의 촉감을 감촉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의촉신(意觸身): 의촉(意觸)들, 즉 의촉(意觸)의 집합이며, 의촉(意觸)은 의근 · 법경 · 의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의식 즉 인식대상의 법경(정신적 측면)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것으로, 의식으로 대상의 정신적 측면을 감지 또는 요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의식 즉 제6의식은 의근을 통해 단지 법경만을 요별하지 않으며 의근을 통해 5경에 대해서도 요별하는데, 이 경우 의촉은 의근 · 6경 · 의식의 화합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인식대상에 대한 제6의식의 전체적 · 종합적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제6의식이 대상을 전체적 · 종합적으로 감지 또는 요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6입연촉(六入緣觸) 또는 연6입촉(緣六入觸), 즉 6입(六入)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것은, 촉은 마음과 항상 같이 일어나는 마음작용(변행심소 또는 대지법)으로, 그 자체로서는 바르지도 그릇되지도 않은,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이지만,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촉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상태의 근 · 경 · 식 3사화합'이 생겨난다. 

특히, 마지막의 의근 또는 뜻은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 즉 과거 경험의 총체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위들이 누적되어서 현재의 6근의 상태를 형성하고, 6근의 작용의 발동근거가 되는데,

현재의 그릇된 상태의 6근은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이 생겨나게 한다.

'그릇된 상태의 근 경 식의 3사화합'은 대상에 대한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에 대한 진실한 인식 즉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전도(顚倒)라 하고,

부파불교(상좌부와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교학(아비달마)에서는 비리작의(非理作意: 그릇된 작의) 또는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라 하고,

특히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상태라고 하고 선종에서는 망상(妄想)이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는 《디가 니까야》 제22경 〈대념처경〉에서 열반을 증득하기 전의 상태, 즉 유전연기의 상태, 즉 무명에 바탕하여 비리작의에 처해 있는 상태, 즉 4성제의 집제의 상태와, 환멸연기를 통해 즉 37도품 · 6바라밀 등의 수행을 통해 점차 무명을 극복하여 비리작의를 짓는 상태를 여리작의(如理作意: 바른 작의)를 짓는 상태로 변형함으로써 마침내 열반을 증득한 후의 상태 즉 4성제의 멸제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의근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의근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안식은 … 이식은 … 비식은 … 설식은 … 신식은 … 의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러한 갈애는 어디에서 없어지고, 어디에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의근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의근의 대상인) 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안식은 … 이식은 … 비식은 … 설식은 … 신식은 … 의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 각묵스님 옮김(2015) 《디가 니까야》 제2권 제22경 〈대념처경〉 초기불전연구원.  


위의 인용문에서 고타마 붓다는 18계를 말씀하셨는데, 18계는 곧 일체법이다.

즉 5온이고 12처이며 일체의 만물이다.

부처님은 일체법이 조금의 변경도 없이 그대로 번뇌이며 그대로 열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즉, 번뇌와 보리, 윤회와 열반, 생멸과 진여 사이에 일호의 간격도 없는 것이 제법실상이라는 것이다.

일호의 간격도 없으니 번뇌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고 보리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으므로,

번뇌도 없고 보리도 없으며,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생멸도 없고 진여도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서,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리작의 즉 망상이 있으면 이들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점점 벌어져 번뇌도 있고 보리도 있으며, 윤회도 있고 열반도 있으며, 생멸도 있고 진여도 있게 되는, 즉 번뇌와 보리, 윤회와 열반, 생멸과 진여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종에서는 다만 망상을 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중관학파에서는 윤회와 열반 사이에 간격이 없는 것을 승의제 또는 진제라 하고 간격이 있는 것을 속제라고 한다.

간격이 있거나 더 벌어지는 것을 선종에서는 특유의 용어로 분별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별심이 없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비리작의 즉 망상이 있을 때, 그만큼 보리 · 열반 · 진여와 분리된 번뇌 · 윤회 · 생멸은 단지 심리의 일부인 논리 공간의 개념 즉 철학적 이해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로서 존재하고 현실의 삶에서 6근을 통해 마음이 실감하는 그만큼의 실제의 추(愁: 걱정) · 탄(歎: 한탄) · 고(苦: 괴로움) · 우(憂: 근심) · 뇌(惱: 번뇌, 고요하지 못함)를 일으키는 것이며, 이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고 상속하는 것은 엄격한 인과의 법칙, 즉,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 혹업고의 3도의 법칙, (동시인과이건 이시인과이건) 연기의 법칙을 따른다.

유전연기는 이와 같이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는 실제의 과정 즉 점점 더 제법실상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의 과정 즉 점점 더 그릇되어 가는 현실의 삶, 즉, 출세간의 마음을 획득하지 못하여 3유에서 윤회하는 삶을 밝힌 것이다.

6입연촉(六入緣觸) 또는 연6입촉(緣六入觸)은 또한 이미 발생한 촉(觸)의 그릇된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근 경 식의 3사화합'이 있다면, 

즉 그릇된 상태의 안촉 · 이촉 · 비촉 · 설촉 · 신촉 · 의촉이 이미 발생한 상태라면,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미 발생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6근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서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수행이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건 그 모두는 6근 즉 몸과 마음을 비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에서 여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로 변화시킴으로써 열반과 계합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37도품은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총칭하는 것인데 37도품 중 대표적인 것이 4념처 수행이다. 고타마 붓다는 열반에 들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머물렀는데, 여래께서 이미 열반하시고 나면 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합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해 유훈으로

"4념처를 의지하여 마음을 매우 철저히 바르게 다스림으로써 머물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4념처, 간화선, 또는 염불과 같은 수행을 통해 비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를 여리작의를 일으키는 상태로 6근 즉 몸과 마음을 변화시켜가는 매일의 노력이야말로 진정 의지하여야 할 의지처라고 뜻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아난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서 몸과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였다. 슬피 울어 목이 쉬었고, 근심의 바다에 깊이 빠져 온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어둡고 어지럽고 흐릿하여 여래 앞에 쓰러지는데,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이때 아니루두(阿泥樓逗)가 아난을 위로하여 그 슬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하였다. “어허, 어찌 근심으로 괴로워만 합니까? 여래께서 열반하실 때에 이르렀으니, 오늘은 비록 계시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대로 여래께 이와 같은 네 가지 질문을 드리십시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여섯 무리의 비구가 더러운 다른 집에 가는 것과 포악한 성질의 차닉(車匿)과 어떻게 함께 머물면서 가르침을 보여야 합니까? 

여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세존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로써 스승을 삼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머물렀는데, 여래께서 이미 열반하시고 나면 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합니까?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 법장(法藏)을 결집(結集)하매 모든 경전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놓아야 합니까?”

이때 아난은 꿈속에서 아니루두가 그 마음을 위로하고 네 가지 질문을 여쭙게 하는 것을 듣는 것 같아서 차츰 깨어났으나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으나, 위의 물음을 빠뜨리지 않고 차례차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난아, 네가 물은 것과 같이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무엇으로써 스승을 삼을까 한 것은 이러하다. 

아난아, 시바라밀(尸波羅蜜)인 계율이 너의 큰 스승이니 이것을 의지해 닦고 행하면, 세상을 벗어나서 매우 깊은 선정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아난아, 네가 물은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 열반한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여 머물까 한 것은 이러하다. 

아난아, (6근 즉 몸과 마음이 진리 즉 열반과 점점 더 계합하는 상태가 되게끔) 4념처(念處)를 의지하여 마음을 매우 철저히 바르게 다스림으로써 머물러라.

몸의 성상(性相)이 허공과 같음을 관하는 것을 신념처(身念處)라고 이름한다.

경계에서 받아들임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관하는 것을 수념처(受念處)라고 이름한다.

마음은 다만 명자(名字)가 있을 뿐이고 명자와 성(性)이 서로 분리된다고 관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이름한다.

법(法)은 선법(善法)을 얻지 못하며 불선법(不善法)도 얻지 못한다고 관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일체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4념처를 의지해 머물러야 한다
 야나발타라(若那跋陀羅) 한역, 심삼진 번역. 《대반열반경후분》 (大般涅槃經後分) 상권,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촉(觸)은 6입과 명색과 식이 접촉하는 것이다.

'연기(緣起)'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기경(緣起經) 애(愛)  (0) 2024.12.18
연기경(緣起經) 수(受)  (0) 2024.12.18
연기경(緣起經) 육처(六處)  (0) 2024.12.17
연기경(緣起經) 명색(名色)  (0) 2024.12.17
연기경(緣起經) 식(識)  (2) 2024.12.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