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緣起經) 一卷
당(唐) 사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1. 무명(無明, avidyā, Ignorance, 치癡) 1
云何名爲緣起差別?謂無明緣行者。
무엇을 연기의 차별된 것이라고 하는가? 즉 무명은 행(行)의 간접적인 원인의 연(緣)이 되는 무명연행(無明緣行)이니,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는 무명에 대한 설명에서 알지 못하는 '부지(不知)'즉 '라는 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반면, '연기경'에서는 앎이 없는 '무지(無知)'가 사용되고 있다.
無知무지, 1.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 2. 미련하고 어리석음
不知부지, 알지 못함
云何無明?무엇이 무명(無明)인가? 무명(無明)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즉,
무명(無明, Ignorance, nescience)은 Not knowing suffering, not knowing the origination of suffering,
not knowing the cessation of suffering, not knowing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It leads to action, or constructing activities.
무명(無明, Ignorance, nescience) can also be added lack of knowledge regarding numerous other topics, including karma and its results, the three jewels, moral goodnes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purity and impurity, arising by causal conditions.
謂於前際無知,전제(前際, 과거)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後際無知, 후제(後際, 미래)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前後際無知,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3세(三世, trayo-dhvanah)는 과거(過去) · 현재(現在) · 미래(未來)이며, 불교 용어로는 전세(前世) · 현세(現世) · 내세(來世), 또는 전제(前際) · 중제(中際) · 후제(後際), 또는 과거세(過去世) · 현재세(現在世) · 미래세(未來世)라고 한다.
과거 또는 과거세는 숙세(宿世)라고도 하며, 한자어 숙(宿)은 '자다, 숙박하다, 묵다, 오래 되다, 한 해 묵다는 등의 뜻이 있다.
설일체유부 · 유식유가행파 · 법상종을 비롯하여 공통되게, 일체 유위법의 생멸변화의 상속상(相續相)에 근거하여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三世)의 시간을 가설(假設)한 것, 즉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단순히 편의상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과거(過去)는 어떤 법(法)이 이미 멸(滅, nirodha)했거나, 그 작용을 그친 것이며,
현재(現在)는 어떤 법(法)이 이미 생겨났지만 아직 작용을 그치고 과거로 사라지는 낙사(落謝)하지 않은 것이며,
미래(未來)는 어떤 법(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於內無知, 안의 내법(內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眼耳鼻舌身意)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外無知,밖의 외법(外法,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色聲香味觸法)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內外無知, 안과 밖의 내외(內外, 내외법, 12입)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業異熟無知;업과 이숙의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히 즉 실답게 관찰하고 알지 못하는 불여실각지(不如實覺知)이니, 즉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實)와 계합하는 여여(如如)한 상태에 있게끔 제어하지 못하는 것
於業無知,업(業)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異熟無知,다르게 성숙하는, 이숙(異熟)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다르게 익는다는 이숙(異熟, vipāka)은 선(善)이 쌓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선이 고가 되고 악이 낙이 된다는 의미는 없다.)
이숙(異熟, vipāka)은 음역하여 비파가(毘播伽)라고도 하며, 모니어 윌리엄스에 따르면, 비파카(vipāka)는 익은 · 숙성한(ripe), 성숙된(mature), 요리(cooking), 드레싱(dressing), 익힘 · 숙성시킴(ripening), 특히 행위의 결과를 성숙시킴(maturing, esp. of the fruit of actions), 결과(effect, result)의 뜻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① 원인과 다른 성질로 성숙됨을 뜻한다. 뿌린 원인, 즉 업은 그 성질이 선 또는 악(불선)이었는데, 윤회하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때 타고나는 과보는 선업에 대해서는 낙(樂), 악업(불선업)에 대해서는 고(苦)를 타고난다는 것을 말한다.
낙(樂)과 고(苦) 그 자체로는 선도 악(불선)도 아닌 무기(無記)이므로 선 또는 불선의 성질이 다른 성질인 무기로 성숙되어 나타났다는 뜻에서 이숙(異熟)이라고 한다. 즉, 선한 원인은 즐거운 결과를 낳는 선인낙과(善因樂果), 악한 원인은 괴로운 결과를 낳는 악인고과(惡因苦果)의 불교의 인과사상적인 교의를 말한다.
이와 같이 선업과 악업이 각각 낙(樂)과 고(苦)로 성숙되어 나타나는 것을 업이숙(業異熟)이라고 한다.
② 과보(果報)를 뜻하며,
③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於佛無知,부처님의 불보(佛寶)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法無知,법의 법보(法寶)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僧無知;승의 승보(僧寶ㅒ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於苦無知,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괴로움의 고(苦)는 크게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해서,
첫 번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괴로움과 즐거움의 관점에서 나누어서, 괴로운 느낌의 고수(苦受), 즐거운 느낌의 낙수(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로 나눈, 고수(苦受)의 괴로운 고(苦)를 말하고,
두 번째는 세상의 즐거움을 다른 관점에서 고통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을 말한다.
즉, 비록 그 성질상 즐거운 것일지라도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바뀌는 것이므로, 궁극적 즐거움 또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며, 궁극적 즐거움인 열반을 찾고자 할 때, 세상의 즐거움에 맛들여서 집착하는 상태는 열반으로 나아감에 있어 극심한 장애가 된다. 따라서 열반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의 가장 우선적인 것이 세상의 즐거움에 집착 당하지 않는 상태, 맛들임 당하지 않는 상태, 즉, 탐욕으로부터 일부라도 해탈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두 번째의 해석이 4성제의 고제의 관점에의 고(苦)를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에서 살펴보면, 세친의 '대승오온론'에 따르면 고수(苦受)의 고(苦: 괴로움)는 어떤 일 또는 대상이 생겨날 때 그것과 떨어지려는 욕구가 있는 것으로 정의되고,
낙수(樂受)는 어떤 일 또는 대상이 사라질 때에 그것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가 있는 것으로 정의되며,
불고불락(不苦不樂) 즉 사수(捨受)는 이들 2가지 욕구가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고(苦) 즉 괴로움이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또는 사물(이별, 질병, 죽음 등)을 만나게 되거나, 만나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의 즐거움(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관점에서 볼 때,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것은 과도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성질상 즐거운 것인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는 것은 즐거움이 과도하여 고통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즉 성질상 즐거운 것이 현실의 사용에서도 즐거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중용 즉 절제가 요구되며,
이것은 인과의 법칙 또는 연기의 법칙에 따른 것으로, 씨가 발아하여 싹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이라는 원인(因, 生因)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온도, 물, 산소라는 원인(緣, 起因)이 더해져야 하듯이, 성질상 즐거운 인(因, 生因생인)이 현실의 사용에서 즐거운 과(果, 有유)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때와 장소에 적절한 중용의 연(緣, 起因기인)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질상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동요를 최대한 가라앉히고 직면하여서 그것을 경감시키는 방안을 행하고, 불가피한 것이라면 극단적이지 않게 의연하게 맞이하는 태도, 즉 수양으로서의 중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에 대한 중용의 태도는 훌륭한 것이지만,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로서는 만약 삶이 이번 한 번뿐이라면 이러한 중용이 나름 최선의 해결책이겠지만, 삶은 내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반복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중용의 태도가 훌륭하긴 하나, 근원적인 해결책으로서의 중도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관점 즉 근원적인 해결책을 구한다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잡아함경' 제2권 제58경 〈음근경(陰根經)〉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에 따르면, 고(苦)는 본질상 무상(無常)한 것, 즉 본질상 영원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을 만날 때와 같이, 그 자체의 성질이 괴로운 것인, 고수(苦受)와 연결된, 괴로움의 고고(苦苦)이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와 같이, 낙수(樂受)와 연결된 이차적인 괴로움의 괴수(壞苦)이건, 혹은 무상한 것이므로 해탈이 아니어서 머물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수(捨受)와 연결된, 성인의 뛰어난 괴로움의 느낌의 행고(行苦)이건 간에, 고(苦) 즉 괴로움이란 고수(苦受), 괴로움의 느낌 그 자체 또는 괴로움의 느낌을 일으키는 사물을 말한다.
즉,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건, 해탈이 아니라서 머물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건, 이 모두, 열반으로 나아가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러한 일 또는 대상에서 떨어지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켜야하는 일 또는 대상인 것이다.
즉, 고(苦)는 기꺼이 안주하여서 즐길만한 것이 아닌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이 다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염세(厭世) 즉 좌절을 겪은 욕구(선욕 또는 악욕)에 무지가 함께하는 불선한 마음인 염(厭)이 아니라, 싫어하는 마음을 닦는 수염(修厭) 즉 무탐(無貪)과 지혜(慧)가 함께하는 선한 마음인 염(厭)을 닦으라고 하신 것이다.
때문에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변하고 바뀌는 변이법(變易法)에 대하여, 이것은 나라는 시아(是我, This is my self). 이것은 나의 것이라는 이아(異我, This is mine). 나는 이러한 존재라는 상재(相在, This is what I am)'라고 보지 않거나 보지 않을 수 있는, 즉 고제(苦諦)에 대하여 미혹하게 하는 번뇌를 실제로 끊는 지혜인 고제현관(苦諦現觀) 또는 고지(苦智)를 가져야 하는 것을 뜻하며,
고(苦)는 특히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5온과 함께 설하여지는데, 5온은 변하고 바뀌는 변이법(變易法) 즉 유위법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유위법'이란 곧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와 동일한 것으로, 3계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변하고 바뀌는 변이법(變易法)이라고 보아서 미혹하게 하는 번뇌를 끊는 지혜인 고제현관(苦諦現觀) 또는 이를 통하여 증득된 고지(苦智)를 뜻하는 것으로, 즉 고지(苦智)는 고제현관(苦諦現觀) 등의 수행을 통하여 삼계에 대한 무상의 진리 즉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를 체득한 상태의 무루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불교 교의에 따르면, 유위법이지만 무루인, 출세간의 무루법인 4성제 · 37도품 · 6바라밀 · 12연기설 등은 비록 유위법이지만 그 성질상 맛들임 · 집착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고에 속하지 않으며, 이에 따른 즐거움은 고제의 관찰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 즉 열반을 구하는 불교의 용어로서의 고(苦)는 항상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4성제(四聖諦)의 문맥 속에서의 첫 번째 진리로서의 고(苦)를 의미하며,
유루(有漏) 즉 번뇌에 속박된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과보로서의 3계에서의 삶을 성자의 눈으로 실상 그대로 관찰한 3계에서의 삶의 본질은 고(苦: 무상한 것, 괴로운 것, 변하고 바뀌는 것)로서 안락하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고제(苦諦) 즉 괴로움의 진리라 하는 것이다.
즉, 고는 괴로움의 느낌인 고수(苦受)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 또는 고성제(苦聖諦)를 뜻하며,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는 방편으로서의 고제현관(苦諦現觀) 등의 수행과 이러한 진리를 깨우친 상태의 무루지인 고지(苦智)를 뜻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진리를 실천적으로 깨우치기 위하여 보다 구체적인 방편으로 4념처를 비롯한 37도품을 제시하고 있으며, '구사론' '대승아비달마집론' '천태사교의' 등의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논서들에 따르면, 불교의 우주론 즉 유정세간과 기세간은 유정의 현실세계 또는 유정의 실제 모습으로서의 현재 상태를 밝히는 것으로 곧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에 해당한다. 달리 말하여,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우주론이란 '괴로움의 현실이라는 진리인 고제(苦諦)' 즉 무상(無常)의 진리를 밝히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於集無知,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인 집제(集諦, Samudaya Satya)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집제(集諦, Samudaya Satya),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 · 괴고 · 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번뇌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또는 탐(貪, rāga, lust, attachment) 또는 집착(執著)하는 망집(妄執)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보는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 ·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을 고통의 주 원인으로 본다.
於滅無知,괴로움이 소멸하는 진리인 멸제(滅諦, Nirodha Satya)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멸제(滅諦, Nirodha Satya),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 ·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으로,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이라 한다.
於道無知,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인 도제(道諦, Mārga Satya)에 대하여서도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며,
도제(道諦, Mārga Satya)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 즉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음"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하며, 모든 불교의 교의는 사실상 도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원시 불교에서는 도제를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하며,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도제를 팔정도를 포함하는 사념처(四念處) · 사정근(四正勤) · 사여의족(四如意足) · 오근(五根) · 오력(五力) · 칠각지(七覺支) · 팔정도(八正道)의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인 것으로 설명하며,
대승불교에서는 도제를 37조도품 외에 보살의 보살의 서원과 수행의 보살행 과 보살도인 원행(願行)을 담은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 원(願) · 역(力) · 지(智)의 네 가지를 추가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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