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1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5)십회향품(十廻向品) ㅡ 6
제7 등수순일체중생(等隨順一切衆生) 회향은 방편바라밀을 체(體)로 삼아서 대비문(大悲門)을 주재하는 것이니,
이전의 6 바라밀은 생사를 벗어나는 마음을 닦는 것이며, 이 제7 이후의 4바라밀은 이 방편의 지혜로 생사 속에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법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의 선재동자의 지식(知識)인 관세음보살을 이 제7의 일체 중생을 수순하는 대자비의 회향의 행으로 삼은 것이며, 이 신경(新經)에서 관세음보살이라 이름한 것이 옳은 것이다.
시방 세계가 다 함께 하나의 불국(佛國)이 되는 것이지 서방에 별개의 따로 아미타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여래의 방편 시설이 유위(有爲)의 몽매한 이를 이끄는 방편으로서 마음을 따라 전념(專念)하여, 그 남은 악심(惡心)을 다스리면서도 심념처(心念處)를 따라서 화불(化佛)을 보아 스스로의 심량(心量)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거늘, 모든 대덕(大德)들이 잘못 이해하여서 이 시바세계에 관세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니, 그러한 때문에 구경(舊經)의 판본을 고쳐서 관자재(觀自在)를 지은 것이니,
관자재(觀自在)라 말한 것은 단지 명칭을 기준으로하여 행을 드러내는 가운데, 세간과 출세간을 관조하는 무상(無相)의 이지(理智)가 자재함을 드러낸 것일 뿐, 자비행(慈悲行)을 밝힌 것은 아니다.
관세음보살과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 이 세 분의 법은 3세(三世) 고금(古今)의 일체 모든 부처의 공통된 공행(共行)이라서 시방으로 공통된 것이니,
문수(文殊)는 법신의 묘혜(妙慧)의 이(理)를 주재하고,
보현(普賢)은 지신(智身, 지혜의 몸)으로서 근기를 알아 만행(萬行)의 문을 성취함을 밝히고 있으며,
관세음(觀世音)은 대자비로 생사에 처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세 분의 법이 한 분의 덕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비로자나(毘盧遮那)라 칭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이 세 가지의 삼법(三法)에 의지하기에, 그것을 칭하여 불(佛)이라 하는 것이니, 하나라도 빠진다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이 일위(一位)는 옛 번역에 의거하는 것이며, 새로운 번역에는 의거하지 않는 것이다.
또 범본(梵本)에서 관세음보살(光世音菩薩)이라 말한 것은, 교광(教光, 가르침의 광명)과 행광(行光, 행의 광명)과 대자비광(大慈悲光, 대자비의 광명)이 중생과 동등하면서도 사물을 이롭게 함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일체처가 문수이고 일체처가 보현이며 또한 일체처가 관세음이란 이름을 얻는 것이다.
이제 관세음이라고 말한 것은 정념심(正念心, 정념의 마음)이 성취되면서 마음에 의거하여 응현(應現)하는 것을 취하여 명칭을 세운 것이니, 관자재로서 법을 나타내는 바의 표법(表法)를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관자재란, 명칭을 잡아 법을 나타내는 표법의(表法義) 가운데에서 제6 반야바라밀의 지위를 나타낸 것이니,
이 방편바라밀로 생사에 들어가 중생과 함께 하는 행인 4섭법(四攝法)과 4무량심(四無量心)으로써 번뇌를 끊지 않는 명칭은 아니니, 이는 번역한 자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세음은 보달락가(補怛洛迦)에 거주하는데, 보달락가는 한역하면 소백화수산(小白華樹山)이다.
관세음보살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자비경(慈悲經)을 설하시는데, 그 산에는 소백화수가 많으며, 그 꽃은 매우 향기롭다.
경문에서 “산서아(山西阿)에 거주한다”고 말한 것은 서쪽이 금(金)이 되고 백호(白虎)가 되어서 살위(殺位)를 주재하는 것이니, 살위로써 자비문을 주재함을 밝힌 것이다.
정취(正趣)보살이 동쪽에서 오는 것은 지혜의 지위를 밝힌 것이니, 경문에 이르면 해석하겠다.
경문에서 “불자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등수순일체중생 회향이라 말하는 것인가?(佛子 云何爲菩薩摩訶薩等隨順一切衆生迴向)” 이하 게송을 설함에 이르기까지 20 단락으로 장과하겠다.
1. 처음의 “불자야” 이하 “일체 세간의 선근(一切世間善根)”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보살이 스스로 이상의 32 가지의 32종무변선근(三十二種無邊善根分)을 모으는 것을 밝힌 분이다.
2. “불자야” 이하 “일체의 선근을 수습함(修習一切善根)”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이 닦은 32 가지의 무한한 복전(福田)의 선근 회향이 일체 중생의 공덕장이 됨을 밝힌 분이다.
3. “불자야” 이하 “영원히 퇴전(退轉)하지 않는다(永不退轉)”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은 선근을 염(念)해서 작위가 없는 무작(無作)이고 의지함이 없는 무의(無依)의 보리심을 쌓은 것을 여의지 않고 일체 중생을 연민(憐愍)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4. “불자야” 이하 “또한 다시 이와 같다(亦復如是)”에 이르기까지 11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발원하는, 그 원(願)이 위와 같이 닦은 무한한 선근이 소유한 과보와 미래겁이 다하도록 닦은 위와 같은 선근들 모두를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면서도 시방 세계로 하여금 온갖 보배가 충만하게 하여서 중생들에게 무한한 은혜을 베푸는 것을 밝힌 분이다.
5. “불자야” 이하 “항상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여 일체지지심(常行惠施住一切智智心)'에 이르기까지 5행의 경문은,
보살이 다섯 가지 마음의 오종심(五種心)없이 항상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여서 다섯 가지 마음의 오종심(五種心)을 성취하는 것을 밝힌 분이니,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이, 거짓이 없는 마음의 무허위심(無虛僞心)으로서 상수를 삼은 것이니,
이상의 다섯 단락에서 앞의 서른두 가지 선근을 매듭지어 마치는 것이다.
6. “불자야” 이하 “모두 이렇게 베푼다(皆如是施)”에 이르기까지 18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이와 같은 등의 아승기상마왕기녀(阿僧祇象馬王妓女)와 자신 등의 십종(十種)의 헤아릴 수 없는 물건의 불가수물(不可數物)로서 헤아릴 수 없는 불가수겁(不可數劫)이 다하도록 항상 베푸는 것을 밝힌 분이다.
7. “불자야” 이하 “손가락을 한번 튀기는 사이라도 권태로운 마음을 내지 않는다(無有一彈指頃生疲倦心)”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은 열 가지 보시의 십종시(十種施)로써 무한한 중생을 만족하게 하면서도 무한한 겁이 다하도록 일념의 피로도 없음을 밝힌 분이다.
8. “불자야” 이하 “일체지지심에 들어간다(入一切智智心)”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이 보시할 때, 열 가지 집착이 없는 해탈심의 십종무착해탈심(十種無著解脫心)으로서 시자(施者, 배풂의 주체)를 삼음을 밝힌 분이다.
9. “불자야” 이하 “일체지를 얻는다(得一切智)”에 이르기까지 8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은 십종무한시(十種無限施, 10 가지 무한한 보시)로 심종무한원(十種無限願, 열 가지 무한한 소원)을 일으켜서 일체 중생이 일체지를 얻기를 바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10. “불자야” 이하 “모든 유(有) 중에서 가장 존귀하고 뛰어나기 때문이다(於諸有中最尊勝故)”에 이르기까지 116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은 두 단락의 무한한 보시업(布施業)으로써 널리 일체의 무한한 갖가지의 중생들을 위하여 110종(一百一十種)의 광대하고 무한한 소위(所爲)인 중생 등의 소연(所緣)한 바의 사업을 일으켜서 위와 같은 시원(施願)의 회향을 행함을 밝힌 것이다.
이상으로 이전의 32정무한선근(三十二種無限善根)과 그 다음의 상마(象馬, 코끼리와 말) 등의 열 가지 십종시(十種施)와 대원회향(大願迴向)과 중생 등을 위하는 경계를 총체적으로 매듭지어 마친다.
11. “불자야” 이하 “10력(力)을 구족해서 중생을 조복한다(具足十力調伏衆生)”에 이르기까지 24행의 경문은,
보살이 중생을 자비로 연민하기 때문에 고(苦)에 들어가 행을 같이 하면서 대원으로 중생을 제접함을 밝힌 분이다.
12. “불자야” 이하 “일체법이 없는데도 집착하지 않는다(不著無一切法)”에 이르기까지 3행의 경문은,
보살이 비록 시원(施願)으로 회향해서 고(苦)에 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하여도 그 마음에는 십종불착(十種不著) 임을 밝힌 분이다.
13. “불자야” 이하 “3세의 부처 종자를 증장(增長)해서 성취한다(增長成就三世佛種)”에 이르기까지 3행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은 일체의 선근으로 일체 중생이 지종(智種, 지혜의 종자)을 얻기를 바라는 것을 밝힌 분이다.
무엇을 부처의 지혜 종자에 들어가는 입불종지(入佛智種)라 하는 것인가?
네 가지 사법(四法)이 있으니,
첫째 청정심(淸淨心)을 얻는 것이요,
둘째 지혜의 명료함의 지혜명료(智慧明了)요,
셋째 내심의 고요함의 내심적정(內心寂靜)이요,
넷째 외부의 연(緣)에 흔들리지 않는 외연부동(外緣不動)이니,
이와 같이 닦고 다스려서 능히 3세의 모든 부처님의 지종(智種, 지혜의 종자)를 증장하기 때문이다.
14. “불자야” 이하 “모든 보살 등과 더불어 똑같은 견이다(與諸菩薩等同一見)”에 이르기까지 17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위와 같은 회향을 수행할 때 신통의 지력(智力)과 다라니문(陁羅尼門)이 세상의 찬탄을 능가함을 밝힌 분이다.
15. “불자야” 이하 “신통의 경계가 평등하고 청정하다(神通境界平等淸淨)”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보살이 이 같은 보살행을 수행할 때의 공덕이 사량(思量)을 출과(出過)하거늘, 하물며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겠는가를 밝힌 것이다.
이 단락은 공덕으로 짓는 공덕작법(功德作法)의 보응도 오히려 무한하여서 사량을 출과(出過)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작위 없이 자재로운 보리의 무작자재이지(無作自在理智)로 어찌 능히 성취할 수 없겠는가를 밝힌 것이니, 이는 공(功)의 지나침을 밝힌 것이다.
16. “불자야” 이하 “보살행을 어기지 않는다(不違菩薩行)”에 이르기까지 15행의 경문은,
보살이 법과 3세의 체상(體相)이 평등함을 봄을 밝힌 분이다.
17. “불자야” 이하 “제7 등수순일체중생 회향(第七等隨順一切衆生迴向)”에 이르기까지 10행의 경문은,
보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때 법(法)과 업(業)과 찰(刹)과 3세(三世)의 평등을 얻어서, 이미 일체의 모든 부처를 받들어 섬기게 되고 일체의 온갖 청정한 회상의 도량에 들어가게 됨을 밝힌 분이다.
18. “보살마하살” 이하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수순해서 이렇게 회향한다(等隨順一切衆生如是迴向)”에 이르기까지 9행의 경문은,
위와 같은 회향의 시원(施願)으로 얻은 덕(德)의 업용(業用)을 성취한 것을 총체적으로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19. “이 때” 이하 1행의 경문은 금강당보살이 대중을 관(觀)하고서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20. 그 게송에는 42행이 있으니, 경문에서 스스로 그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해석하지는 않겠다.
둘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어찌하여 그 명칭이 등수순일체중생 회향(等隨順一切衆生迴向)이 되는 것인가?
이 제7 방편바라밀이 대비문(大悲門)을 주재해서 바라밀에서 닦은 지혜의 힘으로 생사의 바다에 들어가서 일체 중생의 근품(根品)에 따라 행을 같이 하는 동행(同行)을 하면서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밝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등수순(等隨順)인 것이니,
가령 10주에서의 제7주(第七住)인 대비위(大悲位)에서 휴사(休捨) 우바이가 “나에게는 동행하는 권속이 8만 4천 나유타가 있는데 항상 이 정원에 거처한다”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 대의(大意)를 설명하자면, 일체 중생의 8만 4천과 불가설(不可說)의 번뇌를 같이하면서 함께 동행하는 것이며,
또한 이 지위의 제7 회향과 아울러 선재동자가 본 관음이 이 지위이니, 이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한 단락의 회향에는 모두 스무 단락의 경문이 있으니,
나머지 19 단락은 경문에서 스스로 그 뜻을 갖추어져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시 해석하지는 않겠다.
가령 제16 단락에서 법업(法業)이 평등하여 3세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知法業平等三世互不相違)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간략하게 해석한다면,
경문에서 “일체의 불찰이 평등청정하고 일체의 중생이 평등청정하다(一切佛剎平等淸淨,一切衆生平等淸淨)”고 말한 것은,
이지(理智)를 기준으로 해서 일체의 선근이 평등청정함을 설한 것이며,
나아가 4행의 경문 역시도 이지를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을 밝힌 것이다.
또 제17 단락에서 중생이 일체의 찰(刹)을 어기지 않는다는 (衆生不違一切剎)것은, 의보가 서로 비슷함을 밝힌 것이니,
찰(刹)이 심업(心業)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剎從心業起故)
중생 마음의 차별한 중생심차별(衆生心差別)은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에서 자세히 밝혀 놓은 것과 같으며,
사념이 마음을 어기지 않는다는 사불위심(思不違心)이란 것은,
사념이 마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사념이 바로 마음인 것이니, 나머지 마음은 이에 의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업이 과보를 어기지 않는다는 업불위보(業不違報)란 것은,
과보가 업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과보가 바로 업과(業果)인 것이니, 나머지는 이에 의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업(業)은 업의 길을 어기지 않는다는 업불위업도(業不違業道)란 것은, 내생에서 생을 받는 것과 현세에 업을 짓는 것이 서로 비슷함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는 이러한 법에 의거하도록 하라.
성품이 상(相)을 어기지 않는다는, 법성불위상(法性不違相)이란 것은, 무성(無性, 자체성 없음)으로 상(相)으로 삼고, 무상(無相)으로서 상(相)을 삼는 것이니, 무성(無性) 중의 실상(實相)은 여래의 신색(身色, 몸의 색깔)과 묘경(妙境, 묘한 경계)이 이에 해당되며, 중생이 무성(無性)을 요달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꾸며낸 허상은 천(天)과 사람(人)과 용(龍)과 귀(鬼)와 축생(畜生) 등이 이에 해당된다.
저마다 자기 마음이 낳는 자심소생업상(自心所生業相)을 따라서 칭하는 것이니, 나머지는 이에 의거하라.
생(生)이 성품을 어기지 않는다는 생불위성(生不違性)이란 것은,
생(生)이 바로 무생(無生)이니 무생을 생으로 삼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찰(刹)의 평등이 중생의 평등을 어기지 않는다는 찰평등불위중생평등(剎平等不違衆生平等)이란 것은,
이(理)에 청정함이나 더러움이 없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하는 대체적으로 마찬가지다.
일체 중생이 안주하는 일체중생안주평등(一切衆生安住平等)이 욕망을 여읜 평등을 어기지 않는 불위이욕제평등(不違離欲際平等)이라는 것은,
중생 보거(報居)의 경계와 해탈 열반의 제(際, 사이)가 둘이 없는 무이(無二)인 것이니,
이성(理性)이 때(時)가 같아서 두 성품이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미래를 어기지 않는다는 과거불위미래(過去不違未來)란 것은,
총체적으로 3세의 성품이 때가 같은 무이성(無二性)이기 때문에 3세의 체(體)가 서로 어긋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는 예를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처의 평등이 보살행의 평등을 어기지 않는다는 불평등불위보살평등(佛平等不違菩薩平等)이란 것은,
부처의 이지(理智)와 보살의 체용이 무성(無性)을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때, 업평등(業平等)을 얻고 과보의 보평등(報平等)을 얻는, 이와 같은 10평등법(十平等法)은 회향으로 원력(願力)의 장엄을 발하여서 스스로 이 10평등과(十平等果)를 과보로 얻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 선재동자의 지식(知識)을 10주 제7에선 휴사 우바이로써 자비의 지위를 나타내고,
10행의 제7위에선 자비를 만족왕(滿足王)으로써 나타내어서 스스로 그 몸을 화하여 모든 죄역(罪逆)을 짓고, 스스로 그 몸을 화하여서 잡아와서 죽이거나 벌함으로써 중생의 악역(惡逆)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 10회향의 제7에서는 관세음으로 자비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니, 무릇 큰 가르침은 현유(玄悠)해서 문장이 꽃과 같고, 뜻이 넓어서 법문의 명구(名句)가 명백하고 완연하다.
그리하여 십십(十十)의 수가 서로를 따르고, 만만천천(萬萬千千)이 차례이니, 조그마한 연못을 거대한 바다에 첨가해선 안 될 것이며, 그 깊은 곳에 이르기에는 만족하지 않고, 미약한 등불을 켜서 태양의 광명에 더하나니, 어찌 멀리까지 비추는 것에 능히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이 경문은 뜻이 넓고 언어가 구비되고 이(理)가 갖추어져 있고 언사(言詞)가 풍부하기 때문에 우선 그 대의(大意)만을 대략적으로 해석하였을 뿐, 은밀한 지혜는 그윽하게 잠겨 있으니, 따라서 약간의 지취(旨趣)만을 편 것이라.
나머지 경전의 법상(法相)을 더해서 이 묘장(妙章)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뜻을 얻어 수행하는 자라면, 이(理)가 정(定)으로부터 발해지고, 지(智)가 이(理)로써 밝아지고, 자비가 원(願)을 빌려 일어나는 것이니, 행(行)이 성취되니 원(願)이 발하여지고, 이(理)가 넓어지니 지(智)가 해박하여지고,
원(願)이 확장되니 자비가 넉넉하여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
불종(佛種, 부처의 종자)이 이로 인하여 태어나서 이 연(緣)을 통하여 법계를 제도하는 것이니,
결론을 이렇게 맺고 나머지 뜻은 뒤의 경문에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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