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21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25)십회향품(十廻向品) ㅡ 3

 
제3의 일체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迴向)이란,

인바라밀(忍波羅蜜)로 체(體)를 삼고 그 나머지의 아홉의 바라밀로서 반(伴, 보조)으로 삼으며,

이 법을 표하는 가운데에서는, 선재동자가 본 가락성(可樂城)의 동쪽 대장엄당무우림(大莊嚴幢無憂林)의 무상승(無上勝) 장자(長者)가 이에 해당된다.

 

성(城)의 명칭이 가락(可樂)인 것은 주(主)가 행하는 바의 행적에 의거해서 그 명칭을 정하기 때문이니,

법을 얻어 인(忍)을 성취하였으므로 가락(可樂:즐거워함)하여 보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성의 동쪽에 머문 것은 인(忍)이 각행(覺行)의 첫머리임을 밝힌 것으로, 동방의 각(角)ㆍ항(亢)ㆍ저(氐)ㆍ방(房)의 지위가 온갖 선(善)의 첫 머리를 주재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방(房)은 청룡으로, 매우 경사로운 일을 주재하는 지위가 되기 때문에 동방으로서 양(陽)을 삼아 만물을 낳는 첫머리가 되듯이, 인(忍)이 만행의 첫머리가 되서 온갖의 모든 복(福)을 낳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성의 동쪽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며, 

대장엄당(大莊嚴幢)이란, 거슬리는 경계를 따라야 할지라도 인내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 당(幢)의 뜻이며, 

무우림(無憂林)이란, 인(忍)이 성취되고 행이 원만하여 진 것이 숲의 광대한 그늘과 같음을 밝힌 것이며,

무상승(無上勝)이라 호칭한 것은, 온갖 행이 인(忍)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이니, 일체의 모든 행에 인(忍)이 없으면 행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 나머지의 자세한 것은 경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두 가지 뜻은 앞에서와 같으며,

첫 번째 해당되는 단락의 경전 뜻을 장과(長科)하면, 이 한 단락의 경문에서 대략10 단락으로 나눈다.
1. “불자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일체 모든 부처와 동등한 회향이라 말하는가?” 이하 “모든 근(根)이 청량하다(諸根淸涼)”에 이르기까지 5행 반의 경문은, 모든 부처님들의 불회향(佛迴向)을 배워서 마음이 자유자재하고 청량하게 됨을 밝힌 분(分)이다.
2. “불자야” 이하 “변이(變異)하지 않는 즐거움이다(不變異樂)”에 이르기까지 7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부처님의 불락(佛樂)에 회향하는 분이다.
3. “불자야” 이하 “살바야(薩婆惹)를 증득하니, 이를 일체지(一切智)라 말한다”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보살의 행원(行願)에 회향함을 밝힌 분이다.
4. “불자야” 이하 “일체지를 증득(證得)한다(證一切智)”에 이르기까지 10행의 경문은,

일체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苦)를 여의게 함을 밝힌 분이다.
5. “불자야” 이하 “구족하고 충만케 하다(具足充滿)”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보살행이 원(願)으로 말미암아 광대하고 충만하여 짐을 밝힌 분이다.
6. “불자야” 이하 “모든 부처의 위없는 보리에 회향한다(迴向諸佛無上菩提)”에 이르기까지 18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본래의 대자비로써 세속에 처하여서도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무염착(無染著)을 밝힌 분이다.
7. “불자야” 이하 “여래의 구경지(如來究竟之地)”에 이르기까지 25행의 경문은,

축생에게 먹이를 주면서 온갖 고통을 영원히 여의고 즐거움을 얻기를 염원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8. “불자야” 이하 “제3 일체 모든 부처와 동등한 회향(第三等一切諸佛迴向)”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보살이 일체의 모든 부처와 동등하게 회향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9. “보살마하살” 이하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心無所著)”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보살이 부처의 불공덕(佛功德)에 깊이 들어가고, 법계에 깊이 들어가고, 보살의 수행차제(修行次第, 수행 단계)를 잘 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10. “이 때” 이하 1행의 경문은 금강당(金剛幢)보살이 대중을 관찰하고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두 번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면, 
어찌하여 명칭을 일체 모든 부처와 동등한 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迴向)이라 하는 것인가?

이 제3의 회향은 인문(忍門)을 성취하기 때문이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탐진치(貪嗔癡)가 없어져 3업(業)이 부처와 같아짐으로써, 부처가 행하는 불행원(佛行願)을 모두 다 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일체 모든 부처와 동등한 회향”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는 원행(願行)을 한결같이 부처와 같게 하기 때문이며,

앞에서 불괴회향(不壞廻向)이라 말한 것은 차례대로 일체의 모든 부처와 동등해지는 회향이니, 차례가 마땅히 그러함을 밝힌 것이다.

 

이하 48행의 게송은 2행이 한 게송으로, 앞에서 게송을 읊은 법은 경문에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시 해석하지 않겠다.


제4 일체처에 이르는 일체처회향(一切處廻向)이란, 정진바라밀로 체(體)를 삼고, 그 나머지 아홉을 반(伴, 보조)으로 삼는다.

선재동자가 본 사자빈신(師子頻申)이란 이름의 비구니가 윤나국(輪那國)에 머문 것을 한역하면 용맹(勇猛)이 되며,

성(城)의 명칭이 가릉가림(迦陵迦林)인 것을 한역하면 투쟁시(鬪爭時)이니,

이 비구니가 능히 투쟁을 평화롭게 끊은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제4 회향의 행에서 정진의 업(業)으로 사물을 이롭게 하는 상(相)을 나타낸 것이다. 비구를 나타낸 것은 오염을 여읜 청결을 밝힌 것이며, 니(尼)란 것은 자비의 소리이니 이 정진의 행문(行門)이 오염 없는 자비로써 행의 체(體)를 삼음을 밝힌 것이다.

 

명호가 사자빈신(師子頻申)인 것은 이미 4무애지(無碍智)를 얻었으며 또한 이미 4무외(四無畏)를 얻음을 밝힌 것으로,

사자(師子)란,은 지혜로서 두려움 없음을 밝힌 것이며,

빈신(頻申)이란 펴고 거두는 것이 자재로운 것이니,

이는 청정한 대지혜로 용맹하고 자재롭게 펴고 거두는 설법으로 중생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투쟁을 잘 끊고, 무량한 모든 중생들의 부동(不同)한 견문(見聞)을 조복함을 밝히는 것으로, 경문에서 자세히 설한 바 그대로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제4 회향 중에서 정진의 행을 행할 때, 지혜와 자비의 상(相)을 나타내기 때문에 오염 없는 자비로 법을 설하는 것이 자재로움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자비가 항상 고(苦)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지혜가 늘 오염되지 않음이 니(尼)의 뜻임을 나타낸 것이다.

4무애지(四無㝵智)란 것은, 첫째 의무애지(義無碍智), 둘째 법무애지(法無碍智),

셋째 사무애지(辭無碍智), 넷째 요설무애지(樂說無碍智)이다.

사무외(四無畏)한, 첫째 일체지(一切智)의 무외이며, 둘째 누진(漏盡)의 무외이며,

셋째 장애의 장도(障道)를 설하는 무외이며, 넷째 고(苦)를 멸진하는 고진도(盡苦道)를 설하는 무외이다.
두 가지 뜻은 앞에서와 같으니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 단락의 경문을 장과하는데 그 뜻을 여덟 단락으로 나누면, 
1. “불자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일체저회향에 이르렀다고 말하는가?” 이하 “가없는 세계(無邊世界)”에 이르기까지 12행의 경문은, 보살이 닦는 바의 선근(善根)은 여실제(如實際)한 것이라서 삼세에 두루 하면서 공양함을 밝힌 분(分)이다.
2. “불자야” 이하 “광대한 위덕(威德)의 종성(種性) 중에(廣大威德種性中)”에 이르기까지 12행의 경문은,

부처가 세상에 나온 것이 법신이 두루 한 것과 같이 차별이 없으며 광대하게 이익을 준다는 것을 밝힌 분이다.
3. “불자야” 이하 “일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을 호지(護持)하기 때문이다(護持一切諸佛教)”에 이르기까지 64행의 경문은,

보살이 수없이 많고 무진하여서, 여법성(如法性)한 공양운(供養雲)으로써 여법성(如法性)하고 무변하게 수없이 많은 여래에게 공양하여서 모든 선근을 널리 거둠을 밝힌 분이다.
4. “불자야” 이하 “훌륭한 방편으로 회향의 도를 닦는다(以善方便修迴向道)”에 이르기까지 16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회향을 닦을 때 무소득(無所得)으로 방편을 삼아서 일체의 선근을 닦음을 밝힌 분이다.
5. “불자야” 이하 “일체 공덕을 구족한다(具足一切功德)”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이상의 공양 공덕을 총체적으로 매듭지은 분이다.

6. “불자야” 이하 “제4 일체처회향에 이르다(第四至一切處迴向)”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이상의 일체처에 두루 하는 회향으로 지은 바가 부처의 불종(佛種)을 끊이지 않게 함으로써,

널리 불잘(佛剎)을 엄중하고 청정하게 함을 모두 매듭지음을 밝힌 분이다.
7. “보살마하살” 이하 “능히 선근으로 이같이 회향한다(能以善根如是迴向)”에 이르기까지 12행의 경문은,

이 회향에 머물 때, 몸과 말과 뜻의 신어의업(身語意業)이 시방 일체처에 두루 하게 됨을 밝힌 분이다.
8. “이 때” 이하 1행의 경문은 금강당보살이 대중을 관하고서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두 번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면,  
무엇을 일체처에 이르는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迴向)이라 하는 것인가?

대략 그 지위에 11 가지가 있으니,

1. 법신이 일체처(一切處)에 이르는 것이며,

2. 지신(智身)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3. 대원(大願)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4. 모든 부처님들께 공양하는 것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5. 제법을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견문청수(見聞聽受)하는 것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6. 색신(色身)을 두루 나타냄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7. 중생을 깨우치는 것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8. 모공(毛孔)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9. 시방으로 편만(遍滿)하여서 법계와 동등하면서도 가고 옴이 없는, 무거래(無去來)이면서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10. 한 중생의 몸과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에 들어가는 것과 같음이 일체처에 이르는 것이며,

11. 한 불신(佛身)의 모공에 들어가는 것이 일체 불신의 모공에 들어가는 것과 같음이 일체처에 이르는 회향이다.

 

또한 회향(迴向)이란 것에 10 가지의 회향십법(迴向十法)이 있으니,

1. 작위 없는 무작법(無作法)으로써 작위 있는 유작법(有作法)에 회향하는 것이며,

2. 작위 있는 유작법(有作法)으로써 작위 없는 무작법(無作法)에 회향하는 것이며,

3. 하나의 일법(一法)으로 많은 다법(多法)에 회향하는 것이며,

4. 많은 다법(多法)으로 하나의 일법(一法)에 회향하는 것이며,

5. 모든 유법(有法)에서 무법(無法)으로 회향하는 것이며,

6. 무법(無法)에서 유법(有法)으로 회향하는 것이며,

7. 세간법으로 출세간법에 회향하는 것이며,

8. 출세간법으로 세간법에 회향하는 것이며,

9. 일체자성(一切自性)의 무회향(無廻向)으로 방편회향(方便迴向)의 법으로 삼는 것이며,

10. 일체의 유회향법(有廻向法)으로 자성(自性)의 무회향법으로 삼는 것이니,
이는 유(有)와 무(無)에 걸려 있는 자를 자재롭게 하기 때문이며, 

생사와 열반에 장애가 없게 하기 때문이며,

대신통을 얻어서 사물에 얽매이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 하나와 많음의 일다(一多)와, 같고 다름의 동별(同別)이 모두 자재함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성실한 마음으로 대원(大願)의 구름을 일으켜 법계와 허공계를 두루 덮고서 갖가지 공구(供具)를 일으켜 3세의 모든 부처에게 공양함으로써, 모두가 자타(自他)의 복덕이 원만하기를 바라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문에 그 명칭이 일체처에 이르는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迴向)인 것이니,

가령 세계종(世界種)이 바로 화장세계종(華藏世界種)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선덕(先德)이 말하기를 “삼천대천세계를 세어서 1항하사수(一恒河沙數)에 이르는 것이 1세계해가 되고, 

또 해세계(海世界)의 수를 세어서 1항하사에 이르는 것이 세계성(世界性)이 되고, 

또 세계성을 세어서 1항하사에 이르는 것이 1세계종(世界種)이 된다”고 하였다. 

종종세계(種種世界)는 잡다하게 많음을 말한 것이며,

전세계(轉世界)라는 것은 원형(圓形)이 구르는 것이나 강물처럼 유전(流轉)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며, 또 해나 달 등이 해당되는 것으로, 모두 머묾이 없는 마음을 전(轉)이라 이름한 것이다.
측세계(側世界)는 4천왕천이 수미산 곁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며, 

앙세계(仰世界)는 알 수 있는 것이며, 

복세계(覆世界)는 벌집과 같은 것이 해당되는 것이니, 이 역시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에서 설한 바 그대로이다.

 

이하는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으니,

그 대의(大意)는 10주와 10행에서 법신의 이지(理智)를 닦아 얻어서, 바로 그 법에 의거하여 대원과 대자비를 일으켜서 무작(無作)의 없는 이지(理智)에 의거하여 신통행을 일으킴으로써,

오염과 청정에 걸리지 않게 하여서 오염과 청정의 두 법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신통과 제법의 법성(法性)을 자리(自離)하여 스스로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하 22행의 게송은 2행이 하나의 게송이니, 경문에서 스스로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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