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20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24) 도솔천궁중게찬품(兜率天宮中偈讚品)

장차 이 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략 3 가지의 삼문(三門)으로 나누면,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며,
둘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이며,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을 설명하면,

금강당(金剛幢) 등의 10보살(十菩薩)들 저마다 각각 이불찰(異佛剎, 다른 불찰)로부터 와서 도솔천궁에 처하여 여래의 처소에 이르러서 각각 묘한 보배의 묘보장(妙寶藏) 사자좌를 변화로 만들어 내고,

각각 10회향 법문의 인과로 게찬(偈讚, 게송으로 찬탄함)하는 것을 밝히는 까닭에 그 명칭이 ‘게찬품(偈讚品)'인 것이며,

다른 불찰의 이불찰(異佛剎)이란 10행(十行)으로부터 와서 10회향(十迴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을 설명하면,

이 품은 10회향 중의 인과법문(因果法門)을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 품이 온 것이다.

 

셋째, 경문에 따라 뜻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뜻을 둘로 나누겠으니,

첫 번째는 경문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경문을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문의 뜻을 장과함에 있어서, 이 한 품의 대의(大意)를 앞과 뒤로 모두 11 단락을 장과하겠다.
1. “이때 부처님의 신력 때문에” 이하 “그리고 게송을 설했다(而說頌言)”에 이르기까지 52행의 경문은,

금강당(金剛幢) 등 10보살 대중들이 시방으로부터 모여와서 인(因)을 드러내고 과(果)를 보이는 것이 둘이 아님을 밝힌, 인시과불이분(因示果不二分)이다.

2. “여래께서 세간에 나오지 않아서” 이하 10행의 게송은 부처님께서 실(實)로써 권(權)을 보이는, 실시권분(實示權分)이다.

3. “이때 견고당(堅固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불신(佛身)의 성(性)과 상(相)이 비할 데 없음을 찬탄함으로써, 항상 가까이에서 공양하여서 싫증을 내지 않으며, 대원이 원만히 성취되어야 비로소 능히 부처님께서 행한 불소행도(佛所行道)를 실천할 수 있음을 밝힌 분이다.

4. “이때 용맹당(勇猛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부처님과 법은 요컨대 청정한 마음과 청정한 행이라야 비로소 요달하는 것이니, 부처님을 보는 것은 유위(有爲)로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힌 분이다.

5. “광명당(光明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하나의 일불신(一佛身)으로 많은 다불신(多佛身)을 낳는 것이 마치 여환(如幻)과 같이 생기(生起)한다는 것을 밝힌 분(分)이다.  

6. “이때 지당(智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부처님의 지혜가 의지함도 없는 무의(無依)요, 작위도 없는 무작(無作)이요, 조작함도 없는 불조(不造)요,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불내불외(不內不外)이면서도, 능히 형상을 나타내어 널리 두루함을 밝힌 분이다.

7. “이때 보당(寶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여래가 응현(應現)하는 것이 정(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 없는 지혜의 지무공(智無功)에 맡겨서 중생들이 스스로의 자업(自業)으로 응견(應見)하여 마땅히 본다는 것을 밝힌 분이다. 이 단락은 스스로 수행한 행(行)으로 지혜가 나타나서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분(時分)의 지혜가 아니며,

시분(時分)을 세우는 것은 바로 정(情)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든 적은 시간이든 모두 정(情)인 것이다.

8. “이때 정진당(精進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불신(佛身)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비내외(非內外)이니, 시방의 부처님들께서 동등하게 안팎이 없는 무내외신(無內外身)으로 중생의 업을 대하여 나타내는 것을 밝힌 분이다.

9. “이때 이구당(離垢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무심(無心)이고, 사념도 없는 무사(無思)의 무의(無依)의 여래의 지혜를 통하는 성품에 무표리(無表裏, 겉과 속)가 없으니. 시방으로 근기에 따라 널리 대현(對現)하여 응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10. “이때 성수당(星宿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여래께서 심의식(心意識)이 없게(無) 된 것을 이름하여 부처라 하는 것이니, 중생으로서 심의식이 있으면서(有) 적멸심에 머무는 자 모두는 부처라 볼 수 없음을 밝힌 분이다. 
11. “이때 법당(法幢)보살” 이하 10행의 게송은 차라리 온갖 고통을 받을지언정 여래를 버리지 않을 것을 밝힌 분이다.

 

이상으로 각각 하나씩의 법을 설하여서 다 함께 10회향심을 성취한 것이니,

다만, 유(有)를 설하면 중생이 유(有)에 집착하고, 무(無)를 설하면 중생이 무(無)에 집착하기 때문에,

경문에서 성수당(星宿幢)보살의 게송에서는

“중생은 부처님이다 세계이다라고 분별하지만, 법성을 요달한 자는 부처님도 없고 세계도 없다(衆生有分別,是佛是世界,了達法性者,無佛無世界)”라고 하였으며,

그 아래 경문의 법당(法幢)보살의 게송에서는

“차라리 일체 세간의 고통을 항상 받을지언정 결코 여래를 멀리하여 자재력(自在力)을 보지 못하게 되지는 않겠다(寧可恒具受,一切世間苦,終不遠如來,不睹自在力)”고 하였으니,

이 두 게송은 서로가 유(有)나 무(無)를 성취하여 변견(邊見)에 떨어질까 두려워한 것이니, 그 나머지는 유사하니 비교하면 알수 있으리라.

 

'시방을 관한다(觀十方)'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체 뜻의 같고 다름을 관하는 것이며,

또한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법이 동일해서 둘이 아닌 불이(不二)라는 것을 관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문에 따라 해석하는 것에서,

제일 처음의 52행 경문의 뜻을 열 단락으로 나누면, 
1. “이때 부처님의 신력 때문에” 이하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렀다(來詣佛所)”에 이르기까지는 모든 대중이 모여 온 분(分)이다.
2. “그 명칭을” 이하 “법당보살(法幢菩薩)”에 이르기까지는, 모여든 10보살(十菩薩)의 명호를 거양한 분이다.

3. “말미암아 온 바의 국토” 이하 “묘향세계(妙香世界)”에 이르기까지는, 모든 보살들이 떠나 온 국토 분이다.
4. “저마다 부처님의 처소에서 범행(梵行)을 청정히 닦으니” 이하 “관찰당불(觀察幢佛)”에 이르기까지는,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의 명호를 든 분이다.
5. “그 모든 보살” 이하 “무량한 공덕(無量功德)”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도래한 모든 보살들이 법좌를 화작한 후, 앉아서 광명을 놓고 덕을 드러내서 요익하게 함을 밝힌 분이다.
6. “이른바” 이하 “마치 허공과 같다(猶若虛空)”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도래한 모든 보살들은 의지함이 없는 무의지(無依止)의 청정법신의 지혜를 보았으며, 시방으로 두루 노닐면서 부처님을 섬김에 자재롭고 걸림이 없음을 밝힌 분이다.
7. “이같은 세계” 이하 “차별이 없다(無有差別)”에 이르기까지는, 시방이 이와 똑같이 내집(來集)하여 모인 것으로 매듭지어서 밝힌 분이다.
8. “이때 세존께서는” 이하 “신변(神變)의 상(相)”에 이르기까지는, 여래의 광명이 시방에 두루 비추어서 피차(彼此)의 대중들 모두가 서로를 보게 되는 것을 밝힌 분(分)이다.
9. “이같은 보살” 이하 “모두 회상에 모였다(皆來集會)”에 이르기까지 16행의 경문은, 도래한 모든 보살들의 왕인(往因, 과거의 인)이 부처님의 선근과 같아서 법구경(法究竟, 법의 궁극적인)의 자재로움에 이름을 밝힌 분이다.
10. “부처님의 처소에 계시니, 광명으로 인하여 보는 바가” 이하 게송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시방이 이 세계의 보살 집회와 똑같다고 매듭지음을 밝힌 분(分)이다.

두 번째의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를 함에 있어서, 이 50행의 경문을 대략 10 가지의 십문(十門)으로 나누면,

1. 시방 보살이 온 바의 법을 밝히는 것이다.

2. 보살의 명칭 아랫 글자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3.10세계가 표현한 바를 해석하는 것이다.

4. 10불(十佛) 명호의 인과(因果)를 해석하는 것이다.

5. 10보살(十菩薩)이 부처님의 처소에 와서 화현한 바 법좌의 체(體)를 해석하는 것이다.

6. 보살신(菩薩身)의 광명의 인(因)을 해석하는 것이다.

7. 보살이 어떠한 법을 얻어서 능히 자재하면서 화현(化現)하여 시방에 충만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8. 여래께서 광명을 놓은 처소의 법을 나타냄을 해석하는 것이다.

9. 도래한 모든 보살중해(菩薩衆海)가 누구로부터 발심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10.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인과를 밝히는 것이다.

 
첫째, 보살이 온 바의 법을 밝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경전에서 “하나하나 제각각이 만불찰미진수와 더불어(一一各與萬佛剎微塵爲數)”라고 말한 것은 승진의 법을 밝힌 것이니,

지혜의 지견(知見)이 이전의 지위보다 나아진 때문에 10주에서는 백(百)이라 하고, 10행에서는 천(千)이라 하고, 10회향에서는 만(萬)이라 하는 것이다.

'다 함께 만불찰미진수국토 밖의 모든 세계로부터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렀다는 것(俱從萬佛剎微塵數國土外諸世界中來詣佛所)'은, 법을 미혹한 것을 외세계(外世界)라 말하고,

지혜를 요달한 것을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렀다(來詣佛所)’고 밝힌 것이니,

만(萬)불찰미진수라 말한 것은 바로 미혹과 깨달음의 수(數)이다.


둘째, 보살 명칭의 아랫 글자의 뜻을 해석한다면, 그 명칭을 금강당보살이라 말한 것에서 보살은 앞에서 이미 해석한 것이며,

금강당(金剛幢)이란,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앞의 10행위에서 보살을 임(林)이라 이름붙인 것은 행의 그늘을 드리움이 넓고 많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이 지위의 보살을 당(幢)이라 칭한 것은 생사의 대해(大海)에 처해서 대자비의 행이 능히 일체 중생의 번뇌를 타파하면서도 스스로의 지혜는 기울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10행은 행(行)으로써 스스로를 낮추어 원(怨)을 융화하는 뜻임을 밝힌 것이며,

10회향은 대지혜가 굳고 강해서 자비를 따라 원(怨)을 타파하는 것이 자재롭다는 뜻을 밝힌 것이니,

이는 단(檀, 보시)바라밀의 행에 근거한 것이다.

 

견고당(堅固幢)보살이란 대자비로 계(戒)의 체(體)가 되는 것이며,

용맹당(勇猛幢)보살이란 대자비로 인(忍)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용맹의 뜻이며,

광명당(光明幢)보살이란 대자비가 정진의 체(體)가 되는 것에 근거한 것이니, 생사의 밤에 길이 처해서 지혜로써 광명을 발하기 때문이다.
지당(智幢)보살이란 생사 가운데에서도 이 지위의 대지혜가 항상 밝아서 항상 어둠을 타파하기 때문에 이로써 선정의 체(體)를 삼는 것이며,

보당(寶幢)보살이란 대자비와 대지혜로써 교망(教網, 가르짐의 그물)을 잘 베푸는 것을 ‘보당’이라 칭하는 것이니, 이는 가르침이 고귀한 것이라서 세간의 보배가 아닌, 비세보(非世寶)임을 밝힌 것이다.
정진당(精進幢)보살이란 이 지위가 제7의 방편행으로, 능히 근기를 잘 알아서 동사(同事)를 하고, 세속에 처해서도 미혹하지 않고, 진(塵)을 같이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 바로 정진당의 뜻이다.
이구당(離垢幢, 무구당 無垢幢)보살이란 제8의 원(願)바라밀이며, 스스로 생사가 없으면서도 지혜로써 원(願)을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항상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성수당(星宿幢)보살이란 바로 역(力)바라밀의 법왕위(法王位)에 차별지(差別智)를 이루는 것이니, 중생의 근기를 잘 아는 것이 마치 성수(별)가 크든 작든 모두 밝음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법당(法幢)보살은 지(智)바라밀이며, 제법(諸法)을 잘 안립하여서 능히 깨뜨릴 자가 없다는 것이 법당의 뜻이다.

이상은 능히 행을 행하는 사람이다.

 

셋째, 세계의 명칭을 해석하면,

좇아온 국토를 묘보(妙寶)세계라고 말한 것은, 묘한 법으로 중생들에게 널리 베푸는 것이 고귀하다는 뜻을 밝힌 것이며,

묘락(妙樂)세계라 이름한 것은 대자비가 계(戒)가 되니 생사에 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여서 큰 즐거움을 얻게 하여 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묘은(妙銀)세계란 법신의 이지(理智)로 말미암아 인(忍)의 체(體)를 이루는 것이니, 마치 백은(白銀)과 같이 부드럽고 밝고 청정함과 같음을 밝힌 것이며,

묘금(妙金)세계란 정진으로 세속을 이롭게 하면서도 게으름이 없어서 진리를 훼손하지 않고 황중(黃中)으로 복을 이루는 것이 모두 금색임을 밝힌 것이다.

묘마니(妙摩尼)세계란 법성이 순백으로 청정하게 작용하면서도 더러움 없이 자재로운 것을 선정의 체(體)로 삼는 것을 밝힌 것이며,

묘금강(妙金剛)세계란 무성(無性)의 묘혜(妙慧)가 능히 허망을 타파하면서도 그 자체는 파괴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묘파두마(妙波頭摩)세계란 바로 적련화(赤蓮華)이니, 대자비로써 능히 색향(色香)을 같이하면서도 오염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묘우발라화(妙優鉢羅華)세계란 청련화색(淸蓮華色)이니, 제8의 지혜로서 자비를 따르는 행이 청결하여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진흙에 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처니불오(處泥不污)의 청련화색으로 나타낸 것이다.

묘전단(妙旃檀)세계란, 이 법사위(法師位)로서 법을 설하는 향(香)을 설취하는 것이며, 

묘향(妙香)세계란 이 지위의 대지혜와 대자비가 지위를 따라 공덕이 종결되니, 의지함도 없고 작위도 없는 무의무작(無依無作)의 미묘지(微妙智)로써 시방에 충만하여, 오고 감이 없는 지혜의 법음(法音)이 그에 따라 두루하면서도 형태가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다만 묘향이라 말할 뿐, 형류(形類)를 말하지 않은 것이니, 이전의 유적(有迹)보다 뛰어남(表勝前有迹故)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으로 10세계(十世界)의 명칭은 바로 10회향위에서의 행(行)의 법(法)인 것이니,

묘향세계(妙香世界)라고 말한 것은 생사를 따라서 중생을 교화하는 이지(理智)의 묘용으로, 세간은 토지와 산하로써 세계를 삼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지덕(智德)의 묘용으로 세계를 삼는다는 것이다.

 

넷째, 10불(十佛) 명호의 인과를 해석한다면,

경전에서 “저마다의 부처님의 처소에서 범행(梵行)을 청정히 닦는다(各於佛所淨修梵行)”고 말한 것은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가행(加行)의 불과를 밝힌 것이니, 바로 다음과 같은 열 분의 부처님이 이에 해당한다.
무진당불(無盡幢佛)이란 이 10회향 대자비의 지위에서 베푸는 바가 다함이 없음으로써 불과를 성취한 명호를 밝힌 것이니, 그 베풂은 아래의 회향품(迴向品)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풍당불(風幢佛)이란 손괘(巽)가 바람(風)이 되며, 순백의 청정이 되고 언설(言說)이 되고 적(赤)이 되고 태양(日)이 되고 명(明)이 되고 순백의 청정이 됨을 밝힌 것이니, 즉 바람은 형태나 색깔이 없으면서도 향기와 냄새를 다 불어서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손괘는 닭(鷄)이 되어서 때(時)를 알아 울기 때문에 근기를 알아서 가르침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니,

위로 천문(天門)을 만나는 것은 온갖 선(善)을 여는 것이다.

또 손괘는 사(巳)가 되어서 성양(盛陽)의 시초이자 시비를 정하는 때(時)이니, 재계(齋戒) 법칙의 때임을 밝히는 것이다.

또 손괘는 언설이 되고 구(口, 입)가 되고 면문(面門, 얼굴)이 되니, 온갖 선(善)을 말하여서 능히 신(辛)ㆍ축(丑)을 다스리는데, 축(丑)은 소남(小男)이 되므로 온갖 언설로써 동몽(童蒙, 어린이)를 교화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풍당불은 바로 계바라밀(戒波羅蜜)의 풍화(風化, 교화)인 과(果)의 명호인 것이다.

 

해탈당불(解脫幢佛)이란 것은 인위(忍位) 중의 과(果)이니, 인력(忍力)이 이미 원만히 성취되니 해탈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서방이니, 태(兌)는 비하(卑下)의 뜻이 된다.
위의당불(威儀幢佛)은 북방을 주재하는 불과(佛果)이니, 신위(信委) 중 북방의 위의지불(威儀智佛)과 명호가 같다. 이는 북방의 사범위(師範位)를 주재하는데, 이 위의가 펼쳐져서 어린 아이를 제접하기 때문에 행을 잡아서 과(果)의 호칭을 삼은 것이다.
명상당불(明相幢佛)은 10신위 중 동북방의 명상지불과 더불어 호칭이 같으며, 감(坎)은 다스리는 바가 되며, 축(丑)은 신심이 되며, 인(寅)은 이(理)에 계함해서 비로소 밝아짐을 잡은 것이니, 이는 방위를 빌려서 법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즉, 축(丑)이 산이 되고, 산(山)이 부동(不動)이 되고, 부동이 바로 정(靜)이고, 정이 능히 명(明)을 발함을 주재하는 것이다.

명(明)은 선(禪)의 시초라서 선정에 들어가는 시초에 바른 지혜가 열리는 것이니,

이는 10회향의 지위가 10신이 믿는 바의 법을 여의지 않고 그 법에서 안립한 때문이며, 이는 10회향의 선정의 체(體)가 대자비로 세속을 이롭게 하는 명혜(明慧, 밝은 지혜)를 능히 발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상당불(常幢佛)은 10신 중 제6의 구경지불(究竟智佛)과 더불어 서로 같으니, 총체적으로는 지위에 따라 승진하는 바라밀 위에 불과의 명호를 세운 명칭이 모두 10신이 믿는 과(果)를 여의지 않음에 근거한 것이다.

가령 선재동자가 한결 같이 미륵의 불과에 이르자 또한 선재를 가리켜 문수를 보도록 한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니, 이는 문수가 이 계몽의 과(果)를 믿는 지위인 것으로, 행을 발하여 닦아 나아감에 있어서 구적(舊迹, 옛 자취)를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제 문수보살이 청량산에 머문 것은 염부제 한 경계의 동북방이 간위(艮位)를 주재하는 것이니, 이는 계몽을 발명(發明)하는 시작의 첫머리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동자 보살이 된 것으로, 실제로는 시방 모든 부처님의 무성리(無性理)의 묘혜(妙慧)로써 성불하는 데에는 이를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문(門)은 일체 중생이 다 갖고 있는 것이지만, 이(理)를 미혹해서 스스로 미혹하여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만약 이(理)를 깨달은 자라면 현행(現行)의 분별에 해당되어서, 선정으로 비추어야만 비로소 분명하기 때문에 간(艮)이 지(止)가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예에 준거해서 명칭에 따라 지위를 회통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섯 째, 모든 보살이 온 후에 화현한 법좌의 체(體)를 해석한다면,

경전에서 “묘보장(妙寶藏) 사자좌를 변화로 만들어 낸다(化作妙寶藏師子之座)”고 말한 것은 법보(法寶)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교행(敎行)의 그물이기 때문에 보배 그물로써 법좌 위를 덮은 것이니,

10신위 중 법좌의 체(體)는 과(果)를 근거로 해서 명칭한 것이기 때문에 보련화장(寶蓮華藏)을 체(體)로 삼으며,

10주위 중에서는 여래의 지혜와 자비를 근거로 해서 체를 이루기 때문에 비로자나장(毘盧遮那藏)을 체(體)로 삼는 것이니 곧 사자좌의 명호가 비로자나장인 것이며,

10행위에서는 청정한 행으로 더러움을 여의니 사자좌가 연화장을 체로 삼고 있으며,

10회향위에서는 대자비로 생사에 처하여 가르침의 교행(教行)을 시설하여 만법을 총괄할 뿐, 하나의 일법(一法)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법좌의 체가 다만 보(寶)로써 명칭을 삼고, 색류(色類)에 국한되지 않는 가르침의 행이 두루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법좌에 보배 그물로서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이다.


여섯 째, 보살의 몸의 광명(菩薩身光)을 해석한다면, 이 지위의 보살이 대자비행으로 세상에 처하여 사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지혜에 맡겨 중생을 비추는 것이 바로 청정한 광명의 정광(淨光)이 항상 항조(恒照)하여 비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일곱 째, 보살이 어떠한 법을 얻어서 자재로운 것인가?(菩薩得何法而自在者)를 밝혀서 설명하면,

경전에서 “의지함이 없는 무의지(無依止)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을 보고, 지신(智身)으로써 무량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씀이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는 법의 의지함이 없는 성품을 보니, 문득 일체의 무명이 묘용(妙用)의 지혜가 되어서 곧바로 신통변화의 방위가 없게 된 것을 밝힌 것이다.

 

여덟번 째, '여래께서 광명을 놓은 처소의 법을 나타냄(如來放光處所表法)’의 해석을 설명하면,

10신에서 발 밑의 족하륜(足下輪)으로 광명을 놓은 것은, 신(信, 믿음)을 기초로 삼는 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10주에서 발가락 끝의 족지단(足指端)으로 광명을 놓은 것은, 성위(聖位)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밝힌 것이며,

10행에서 발 등의 족부(足趺) 광명을 놓은 것은 성성(聖性)의 법신에 의지해 행을 일으킴을 밝히는 것이며,

10회향에서 무릎의 슬상(膝上) 광명을 놓은 것은, 무릎은 사람이 앉았다, 일어났다, 돌렸다, 굽혔다, 폈다 하는 자재롭게 한다는 것에 말미암는 바이니, 이는 이 회향위의 법문이 진(眞)을 돌이켜 세속에 처해서 해탈하여 물듦이 없는 무염(無染)의 대지(大智)와 비원(悲願)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함에, 생사에 처하여서도 항상 열반이고, 열반에 처해서도 생사와 함께하는 것에 걸림없이 자재롭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광명을 놓는 처소로써 나타낸 것이며, 10지에서의 미간은 중도(中道)의 과광(果光)을 나타낸 것이다.

 

아홉 째, 모든 보살이 누구로부터 발심한 것인가?(諸菩薩從誰發心)를 밝힌다면,

모두가 스스로의 자심(自心)이 비롯함이 없는 분별무명(分別無明)을 발심의 시초로 삼아서, 이 비롯함이 없는 무시무명(無始無明)이 대원경지(大圓境智)가 된다는 것을 요달한 까닭에 시방의 비로자나 여래와 더불어 선근이 같은 것이니,

만약 이 지혜를 여의었다면 성불할 기약이 없을 것이며, 견불(見佛)할 날도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전에서 “이와 같은 보살들 모두는 비로자나 여래와 더불어 과거에 선근이 같은 것이다(如是菩薩皆與毘盧遮那往昔同善根)”라고 한 것이니, 이는 자기의 무명을 요달하여 대지혜의 체(體)를 성취함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이 지혜화 함께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열 째,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인과(隨位進修因果)를 밝힌 것을 설명하면,

금강당(金剛幢菩)보살은 수행하는 사람이고, 묘보(妙寶)세계는 닦는 바의 행이며, 무진당불(無盡幢佛)은 행한 바의 과(果)임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 아홉의 보살도 이러함을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하 10단락의 게송이 있는데 1단락이 10행이고 1행이 1게송이니, 송(頌)한 바의 법은 해당 지위인 10회향의 지위에서 모두 다스리는 강기(綱紀)의 문이니, 경문 자체에서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해석을 가한다면, 문장이 번거롭고 뜻이 침체되어서 표현한 법을 알기 어렵게 되기 때문에 해석을 생략하겠으니, 나머지는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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