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0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3) 승도솔천궁품 ②
(여덟 번째. “이때 일체 보장엄전” 이하 “그리고 게송을 설한다(而說頌言)”에 이르기까지 13행 반의 경문을 대략 두 단락으로 나누면, ㅡ 제 19 권)
8ㅡ1, “이때 일체 보장엄전” 이하 “다 모든 천(天)의 공양을 초과한다(悉過諸天供養)”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여래께서 청을 받아들여 전(殿)에 들어감으로써 부처님의 자기선근(自己善根)의 의과(依果)가 모든 천(天)보다 뛰어나서 비할 바가 없음을 밝힌 분(分)이니, 이는 가행(加行)으로 뛰어난 지위를 회통한 그 덕이 부처님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加行會勝位德如佛).
8ㅡ2, “그때 도솔천궁에서” 이하 “그리고 게송을 설한다(而說頌言)”에 이르기까지 5행반의 경문은,
모든 천(天)의 기악(妓樂)이 치열하게 쉬지 않고, 모든 천(天)이 환희하면서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이니,
이는 법에 들어간 기쁨의 입법열락(入法悅樂)을 밝힌 것이다.
아홉 번째, 20행의 게송은 과거의 여래께서 이 전(殿)에 들어온 것을 찬탄한 분(分)이니,
길상(吉祥)이라 말한 것에서, 온갖 중선(衆善)을 모은 것을 길(吉)이라 이름하며,
온갖 복(福)을 더한 것을 상(祥)이라 이름하며,
금색전(金色殿)이라 말한 것은, 전(殿)에 금색의 광명이 있는 것이며,
또한 법신에 더러움이 없는, 법신무구(法身無垢)를 이름한 것이며,
연화전(蓮華殿)이라 말한 것은, 전(殿)에 온갖 색깔(衆色)의 연화(蓮華) 장엄이 있는 것이며,
또한 법에 오염이 없는, 법무염(法無染)이 바로 연화의 뜻임을 나타낸 것이며,
산왕전(山王殿)이란 것은, 덕을 쌓음이 산왕(山王)과 같이 높음을 밝힌 것으로, 전(殿)에 산이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는 마치 경문에서 말한 보배가 귀한 귀덕(貴德)을 보배라 하는 것으로, 보옥(寶玉)과 관련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그 나머지의 경문의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과거의 왕석여래(往昔如來)를 찬탄한 것에 3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 도솔천왕이 과거 자분(自分)의 선근력이 고(古, 옛)에 합치하는 것을 염(念)한 것이며,
둘째, 옛날이나 지금의, 고금(古今)의 모든 부처님의 제불도(諸佛道)의 자취가 널리 두루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 여래도(如來道)의 자취가 옛날(古)과 다르지 않아서 천(天)ㆍ마(魔)ㆍ범(梵)이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신입(信入, 믿어 들어감)하게 함을 밝힌 것이니, 이 10불(十佛) 역시도 가행으로 행을 따라 명칭을 성취한 것이다.
열 번째, 2행의 경문은 도솔천왕이 부처님을 찬탄하고 아울러 시방이 이와 똑같다고 매듭지음을 밝힌 분(分)이다.
열한 번째, 품의 말미에 있는 13행 반의 경문을 대략 두 단락으로 나누면,
11ㅡ1, “이때 세존께서는” 이하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셨다(爲衆說法)”에 이르기까지 6행 반의 경문은,
여래께서 법좌에 처해서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11ㅡ2, “불가설의 모든 보살 대중” 이하 “모두 다 이와 같다”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시방의 보살이 내집(來集)하여 모여들어서 법좌에 처하니, 전(殿) 안의 장엄한 묘호(妙好)가 모든 천(天)보다 뛰어남과 일체 시방의도솔천도 모두 이와 같이 운집하여서 장엄된 것을 밝힌 분이다.
법좌의 체(體)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으며,
‘사자좌 상(上)의 결가부좌(結跏趺坐)’란 것에 2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세간의 위의(威儀)이며,
두 번째는, 이 10회향의 이(理)와 사(事)가 서로 사무침을 회통하는 것이다.
여래 법좌의 체(體)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부사의한 지혜가 의주(依住, 의지하거나 머묾)함이 없는 대자대비로써 법좌의 체(體)를 삼는 것이니, 의주함이 없는 무의주(無依住) 지혜의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 허공과 더불어 동등하여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불거불래(不去不來)이면서 색신을 대현(對現)하는 것이 중생의 수(數)와 더불어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기의 차별에 따라 감응하고, 따라 조복하게 함으로 교화하여 제도함에도 조작하는 바가 없는 무조작(無造作)이니, 가령 경문에서 “법신이 청정하고 묘용(妙用)이 자재롭다(法身淸淨妙用自在)”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삼세의 부처님과 더불어 경계가 동일해서 일체지(一切智)에 머문다(三世佛同一境界住一切智)’는 것은,
지헤의 체(體)가 안과 밖, 중변(中邊, 중심과 변두리)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께서 함께 머무는 경계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일체의 부처님과 더불어 하나의 성품에 똑같이 들어간다(與一切佛同入一性)’란 것은,
자체성 없는 무성(無性)의 성품(性)으로 들어오고 나감이 없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이 이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눈이 명료하다(佛眼明了)’란 것은,
일체법이 유(有)도 무(無)도 아님을 깨달아서 능히 지혜로 일체제법(一切諸法)을 두루 안다는 것이다.
‘커다란 위력으로 법계에 널리 노닐면서 일찍이 쉰 적이 없다(有大威德普遊法界未嘗休息)’란 것에서,
작위 없고 의지함도 없는 이지(理智)로써 일체의 집착을 타파해서 모두 없애는 것을 ‘위력(威力)’이라 칭하는 것이며,
지혜에는 표리(表裏, 겉과 속)가 없고 성품이 허공과 같이 두루해서 감응으로 형태를 나타내지만, 가고 옴이 없는 것을 노니는 유(遊)라 칭한 것이며,
세속에 진(眞)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을 법계(法界)라 칭하는 것이며,
일념(一念)사이에 삼세 고금의 정(情)이 다하여 중생을 교화하지만,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일찍이 쉰 적이 없다는 미상휴식(未嘗休息)’이라 칭한 것이니, 이는 시간이 변천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대신통(大神通)을 갖추었다(具大神通)’란 것에서,
대지혜가 의지함도 없고 형태도 없어서 성품에 생멸이 없는 것을 신(神)이라 칭하는 것이며,
지혜로 요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을 통(通)이라 칭하는 것이다.
‘교화할 수 있음을 따라서 모두 다 능히 두루 간다(隨有可化悉能遍往)’는 것은,
지혜는 가고 옴이 없는 무거래(無去來)이고, 중심과 변두리의 중변(中邊)이나, 표리(表裏, 겉과 속)가 없어서 시방 중생의 감(感)에 응하여 모두 보지만, 모두가 다 같지 않은 것을 ‘두루 간가는 편왕(遍往)’이라고 칭함을 밝힌 것이다.
‘일체 모든 부처님의 걸림 없는 장엄으로 그 몸을 장엄한다는(以一切諸佛無礙莊嚴而嚴其身)’는 것에 2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4무애지(四無碍地智)의 장엄이며,
둘은, 부처님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인 두 가지 복(福)의 장엄이니,
일체의 상호(相好)와 수호(隨好)가 이에 해당되는 것이며,
여래신(如來身)은 정보(正報)이며, 그 국토인 연화장세계는 의보(依報)인 것이다.
지혜 스스로의 선업(善業)으로 장엄하여 자신과 경계가 지혜가 됨으로써, 법 그대로 스스로 가없는 공덕을 갖추게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97 종(種)의 대인상(相)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명에 덮여 있기 때문에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여서 그 과보로 얻은 의과(依果)란 바로 수화광명(隨好光明)의 공덕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니, 즉 부처님의 대인상(大人相)은 십화장(十華藏世界) 세계미진수의 수호(隨好)가 무한하지만, 경전에서는 간략하게 한 종류의 수호(隨好) 공덕만 말할 뿐이니, 그 이름이 원만왕(圓滿王)이며, 갖고 있는 이익은 경전에서 자세히 갖추어 설하고 있다.
또 의주(依住)함이 없는 무의주지(無依住智)는 그 체(體)가 자타(自他)와 안팎의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소유한 의보와 정보로 장엄된 몸(身)과 국토의 일체 경계가 서로서로 맞추어 들어가서 함입(含入)하는 것이 마치 백천(百千) 개의 밝은 거울의 영상이 서로 서로 받아들여서 겹겹으로 겹치면서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며,
겹겹이 겹치면서 다함이 없는 몸과 국토의 온갖 경계가 서로 들어가면서 다함없이 무진한 것이, 마치 제석천의 보망(寶網, 보배 그물)에 모든 하늘의 권속이 그 보망에 겹치는 것 같아서, 온갖 상(像)이 서로 들어가서 몸과 경계가 걸림이 없으며,
몸이 찰토(刹土)를 내고 찰토가 신운(身雲)을 냄으로써 함께 불사(佛事)를 나타내며,
한 종류가 자재로우면 모든 제법이 다 마찬기지로 자재로워서, 지혜의 경계에서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
경문에서 “그 때를 잘 알아서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한다(善知其時爲衆說法)”는 것은,
근기의 생소하고 익숙함을 요달해서 그 감응하는 바를 따라 제도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묻겠습니다.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심(衆生心)의 시(時)와 비시(非時)를 아시는 것입니까?
답한다.
여래의 마음과 일체 중생의 마음은 본래 다르지 않은 심본불이(心本不異)이기 때문이니, 즉 하나의 일심(一心)이고 하나의 지혜인 일지혜(一智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時)와 비시(非時)를 아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깨달아서 중생과 함께 하지만, 중생은 미혹 되어서 스스로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심의 지혜로써 정각을 성취하셨지만, 일체 중생은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미혹하여서 중생을 짓는 것이며, 나아가 성불할 때에는 또한 ‘중생의 이(理)를 미혹한 부처님(衆生迷理之佛)’을 성취하기 때문에 설하는 법문도 중생심의 ‘부처님을 미혹한 중생(裏迷佛衆生)’을 이해하는 것이니, 이러하게 다르지 않음으로서 중생심을 아는 것이다.
경문에서 “불가설의 모든 보살이 저마다 타방(他方)의 갖가지 국토로부터 다 함께 모여들었다(不可說諸菩薩各從他方種種國土而共來集)”고 말한 것에서,
만행(萬行)의 차별(差別)을 잡아서 타방(他方)이라 칭하는 것이며,
법으로 근기를 따라 사물에 응하여 조복하게 하는 것을 ‘갖가지 국토(種種國土)’라 칭하는 것이며,
여래의 대원명지(大願明智)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다 함께 모여들었다(而共來集)’이라고 칭한 것이다.
‘대중의 모임이 청정하다(集衆會淸淨)’는 것은 정식(情識)이 없다는 것이며,
‘법신이 둘이 없다(法身無二)’는 것은 부처님과 더불어 체성(體性)이 동일하며, 성품도 무성(無性)으로 동등하다는 것이며,
‘의지하는 바가 없다(無所依止)’란 것은 얻음도 없고 증명함도 없는 무득무증(無得無證)인 것이며,
‘능히 자재로워서 부처님의 신행(身行)을 일으킨다(而能自在起佛身行)’는 것은, 자위 없는 무작(無作)의 지혜가 부처님과 같다는 것이며,
‘이 법좌에 앉았다(坐此座已)’는 것은, 이 10회향 법계의 근본에 회통하는 것이며,
‘전(殿)에서 수호(殊好)를 낸다(殿出殊好)’는 것은 지혜로써 감응하는 것이며,
‘모든 천(天)을 넘어섰다(出過諸天)’는 것은 지혜로써 과보가 감응하기 때문에 정(情)의 작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해석하기를 ‘보살의 보상(報相)은 그 소행(所行)의 행(行)으로 낳은 것을 잡은 것’이니,
논주(論主, 통현장자)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보살은 인(忍)을 수만(垂鬘)으로 삼으며, (菩薩以忍爲垂鬘)
참괴(慙愧)는 항상 의복의 장식이며, (慚愧恒爲衣服飾)
계품(戒品)은 도향(塗香)과 말향(末香)이 되며, (戒品塗香及末香)
자비로 널리 덮음은 그 덮개(蓋, 일산)가 되며, (慈悲普覆爲其)
정심(正心)이 부동하여 흔들림 없음이 선정의 깃발이 되며(蓋正心不動禪定幢)
지혜의 깃발이 모든 삿된 견해를 타파하나니, (智慧幡破諸邪見)
방편으로 항상 생사의 바다에 머무는 것이며(方便常住生死海)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이 기악(妓樂)이 되며(饒益衆生爲妓樂)
총지(總持)로서 묘한 법의 음성을 펼쳐서(㧾持演暢妙法音)
듣는 자가 해탈하는 것이 노래와 음악이 되는도다.(聞者解脫爲歌樂)
이상은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니, 이 단락에는 불가설(不可說)의 타방 보살 대중이 있다.
이 1단락에서 모든 천(天)과 도솔천궁에 머무는 보살 대중이 총체적으로 150개의 백만억 대중이 있고,
저 타방에서 온 보살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으며,
모든 천(天)이 장엄한 높은 법좌와 궁전의 색류(色類)도 180종류의 차별이 있어서 일류(一類)가 백만억이 있고,
여래와 보살이스스로의 복으로 장엄한 것이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 회상이 거느리는 이와 같은 대자비와 이와 같은 지혜와 이와 같은 만행은 단지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 처음으로 부처님 집안에 태어난 지혜와 대자비를 길이 장양(長養)하여서 익숙하게하고 자재롭게 한 때문에,
시(時)도 고치지 않고(時亦不改), 법도 다르지 않고(法亦不異), 지혜도 변천하지 않는(智亦不遷) 것이
마치 죽위(竹葦, 대나무와 갈대)가 옛(舊)에 의거해서 이루어질 때 처음의 생김과 마지막 종결이 거칠거나 세밀함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 어린 아이가 자랄 때 처음 생긴 그대로 자라는 것이지,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는 다만 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로써 양도(養道, 도를 기르는)의 방편으로 삼기 때문에 불과가 초발심에 있는 것이요,
또한 10주(住) 중 1주(住)가 10주의 공용을 갖추고 있고, 아울러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가 모두 10주 중에 모두 구족하여 있기 때문에
이는 마치 신룡마왕(神龍馬王)이 낳은 그 신구(神駒)가 그 당에 태어나서 아비와 더불어 늦고 빠름이 비슷하면서도 오직 역용(力用)만이 어미와 같지 않은 것과 같이,
저 초발심의 보살도 여래의 일체지승(一切智乘)을 타고서 부처님의 불가(佛家)에 처음 태어날 때, 부처님과 더불어 지혜가 같으면서도 오직 신통의 도력(道力)이 같지 못한 때문에 대자비 만행의 오랜 양육을 기다리는 것이다.
비록 장양(長養)한 공(功)이 종결된다 할지라도 법이 다른 것이 아닌, 법불이(法不異)이며,
때도 옮기지 않은 시불천(時不遷)이라서, 마침내 초발심 때 역용(力用)의 공(功)이 마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가령 용녀가 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일생(一生)에 성불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며,
또 선재동자가 일생(一生)에서 불과를 얻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니, 일생(一生)이란 뜻은 무생(無生)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제 간략하게 무생(無生)에 10 가지가 있음을 세우겠다.
1. 모든 온(蘊)은 그 자체가 무생인 것이며(諸蘊自體無生),
2. 온갖 견(見)도 그 자체는 무생이며(諸見自體無生),
3. 공(空)이 무생이며(空無生),
4. 성품이 무생이며(性無生),
5. 시겁(時劫)이 변천하지 않는 것이 무생이며(時劫不遷無生),
6. 열반과 생사가 무생이며(涅槃生死無生),
7. 법을 설하는 음성의 적묵(寂黙)함이 무생이며(說法音聲寂默無生),
8. 지혜의 분별이 무생이며(智慧分別無生),
9. 신통 도력의 성품이 스스로 두루함이 무생이며(神通力性自周遍無生),
10. 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삼세가 다한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겁에서 일체 중생 앞에 대현(對現)하는 몸이 무생이니(不出剎那際對現三世盡古今劫一切衆生前身無生),
이러한 10 가지의 무생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일생에 반드시 보리를 얻는다(一生當得菩提)’는 것이다.
이 경문의 뜻은 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 법의 방편으로 초발심의 불과를 자량하여 전후의 정(情)으로 바라는 바의 정소망(情所望)을 끊는 것이니, 자량(資糧)과 불과(佛果)가 동시에 서로 체용이 되면서 서로를 돕기 때문에 그 명호가 ‘각(覺)과 행이 서로 장엄함(覺行互嚴)’이 되는 것이다.
이 경문은 과(果)로써 행(行)을 자량하여 행에 집착이 없게 하고,
행(行)으로써 과(果)를 자량하여 대용이 갖추어지게 하는 것이니,
가령 3승의 의생신(意生身) 보살로서 부처님의 일체지승(一切智乘)을 탔다고 설하지 못하는 것은, 불과를 11지(十一地) 이후 3기(三祈)의 겁이 종결할 때까지 미루기 때문이니,
즉 지(地) 이전의 3현(三賢)이 자량이 되고, 10지가 견도(見道)가 되고, 불과는 11지 이후 3기(三祈)의 겁이 종결되는 데 있지만,
이 가르침에서는 3승의 5위행상(五位行相)과는 1배(一倍)나 뒤바뀌어서 행상(行相)이 같지 않은 것이니, 나중에 다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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