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8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18) 명법품(明法品) ㅡ 2
열 다섯,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킨다(度脫無量無邊衆生)”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은,
10 가지 장엄을 통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발심한 것이 헛되지 않게 견자발심무공과(見者發心無空過)를 밝힌 분이다.
열 여섯, “불자야” 이하 “이같은 자재력을 얻는다(如是自在力)”에 이르기까지 23행의 경문은,
보살이 초발심 때, 부처님과 더불어 평등한 법을 얻어 대법사가 됨을 감당함을 밝힌 분이다.
열 일곱째, “가령 불가설 세계의 광대한 도량” 이하 “그리고 법을 수호해 지니기 때문이다(及護持法故)”에 이르기까지 13행 반의 경문은, 대중에 처하여 두려움이 없고 설법이 자재해서 몸을 영폐(映蔽)함이 없음을 밝힌 분이다.
열 여덟째, “이때” 이하 1행의 경문은 법혜가 게송으로 법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열 아홉째, 이처럼 게송으로 법을 찬탄한 가운데 20행의 게송이 있는 것은, 2행1게송은 경문과 같아서 스스로 그 뜻을 갖추고 있으니, 경문을 따라 찬탄함이 옳은 것이다.
스 물, 가장 마지막 1행의 경문은, 법을 듣고 환희하면서 대중들이 받들어 행함을 밝힌 분(分)이다.
제2의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해석(隨文解釋)을 설명하면,
올바로 법을 설하는 정설분(正說分)에서 “불자야, 보살” 이하 20단락의 경문은,
단지 경문을 따라 그 뜻이 은밀하고 말이 유현(幽玄)한 곳은 비로소 해석여야 할 것이며,
경문이 스스로 분명한 곳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해석하지 않겠다.
경문에서 “깊은 선정에 머물러서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다(住於深定不沈不擧)”고 했는데,
'가라앉지 않는다는 불침(不沈)'은 성문의 멸진정(滅盡定)을 여의는 것이며,
또한 위에 있는 2계(二界, 색계와 욕계)의 식려선(息慮禪, 사념을 쉬는 선)을 여의는 것이니,
곧 색계의 초선(初禪)은 아래에 있는 욕계의 수우(愁憂, 근심)을 소멸시켜 낳지 않기 때문에 한 푼의 경쾌하고 편안한 적정인 경안적정(經安寂靜)을 얻는 것으로, 욕계의 애착은 없지만 적정(寂靜)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에 물의 재앙이 문득 이르는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는 “진윤(津潤, 윤택하게 함)의 망상(妄想)이 능히 안팎의 수계(水界)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애착으로 진윤(津潤)을 삼기 때문에 물의 재앙이 이르는 것이다.
또 색계의 제2선(第二禪)은 능히 욕계의 근심과 우고(憂苦, 고통)을 소멸시켜 낳지 않기 때문에,
한 푼의 경쾌하고 편안한 적정을 얻을 수 있지만,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것이라서 오히려 청정한 경계에 반연함이 있어서 불의 재앙이 문득 이르게 된다.
또 제3선(第三禪)은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는, 선열(禪悅)의 즐거움만 있어서 마음에 기쁨의 동요가 있기 때문에 바람의 재앙이 문득 이르게 되고,
또 제4선(第四禪)은 몸과 마음이 적멸하니, 들숨과 날숨을 여의어서 기쁨의 동요도 없기 때문에 3재(三災)가 이르지 않고,
오직 묘한 빛깔의 몸의 빛이 백은(白銀)과 같이 청정하고 순결하여서 옷도 금빛 색깔과 같은 것이다.
이 4선(四禪)의 몸은 신장이 20리(里)이고 옷의 길이는 40리이며,
이하 3개의 선(禪)은 곱으로 반감되는 것이니 초회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이처럼 4선(四禪) 모두가 마음이 쉬고 청정한 식심영정(息心令靜)하게 하는 것으로서 그 세분(勢分)을 삼으며,
나아가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 모두가 승진을 타파해 없애고 염(念)을 낳게 하지 않음으로써 적정(寂定)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색계(色界)의 청정한 정색(淨色)을 타파해서 무색계(無色界)의 공식(空識)을 이루게 하고,
또 공(空)을 보는 식(識)도 공(空)하다고 타파하는, 그러한 것의 명칭이 식처정(識處定)이며,
또 공(空)을 식(識)하는 견(見) 역시도 없다고 타파하는 것의 명칭이 무소유정(無所有定)이며,
또 무소유의 마음을 타파해서 무상(無想)의 상(想)마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이라 한다.
이와 같이 상계(上界)에서 수행하는 선(禪) 모두는 뜻을 짓는 작의(作意)이고, 정(情)을 가지고 마음을 조복해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지, 성품에 맡긴 무위(無爲)가 불침(無沈, 가라앉지도 않음)이고, 무도(無掉, 들뜨지도 않음)로써 진(眞)에 칭합한 이지(理智)의 작용이 자재로워서 작위가 없는 정(定)은 아닌 것이다.
저 욕계의 선정이 5욕(欲)에 반연하는 것을 이름하여 들뜸의 도(掉, 흔들다 요동하다)라 하며,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은 그 명칭이 가라앉음의 침(沈)이며,
또 성문과 연각의 선정은 그 명칭이 가라앉음의 침(沈)이며,
공관(空觀)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여서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그 명칭이 들뜸의 도(掉)이니,
이와 같이 삼승(三乘)의 선정에는 모두 가라앉음의 침(沈)과 들뜸의 도(掉)가 있는 것은, 더러움과 청정함의 구정(垢淨)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아서 도를 보는 것이 참되지 못하여 좋고 싫어함이 있기 때문이다.
2승(二乘)의 선정은 비록 삼계에서 현행(現行)하는 미혹은 없지만, 모두 근심하고 싫어하는 염환(厭患)으로 대치하여 복멸(伏滅, 굴복시켜 소멸시킴)하는 무위(無爲)로서, 능히 미혹을 일으키지 않아서 아생(我生)이 생기지 않고, 비지(悲智) 또한 없기 때문에, 멸진정에 머무는 자의 머리 위에서 북을 친다 할디라도 듣고 알지 못하며, 변화의 불(火)로 부모의 분단신(分段身)을 태우는 자는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2승이 미혹을 끊어 분별하지 않는 단혹불분별법(斷惑不分別法)은 그 의세(意勢)가 서로 같으나,
혹 성문의 경우에는 12연생으로 도를 얻기도 하나니, 이러한 3승의 관행(觀行)인 연각과 성문과 정토보살이 도를 얻은 것은 모두 세간을 벗어난 출세(出世)인 것이다.
3승(三乘)이 서로 작용하여 9승(九乘)이 되는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으로서 대체적으로 요약한다면,
삼계의 번뇌를 조복하여 일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의생신(意生身)을 얻는 것이니,
이는 분단(分段)의 생사는 없지만 변역(變易)생사를 얻는 것이며,
또 진(眞)에 응하고 지(智)에 맡겨 자재한 것이니, 들어오고 나는 체(體)가 없지도 않은 것이며,
지(智)에 맡겨서 중생에 응하여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이 쉬지 않는 것이니, 승만경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 그리고 3승의 선은 가라앉음도 있는 유침(有沈)이고 들뜸도 있는 유도(有掉)인 것이다.
대승 가운데에서 미혹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은 도(道) 이전인 30심(三十心) 보살의 습종성(習種性)과 성종성(性種性)과 도종성(道種性)을 세운 뒤에야 비로소 성종성(聖種聖)에 들어가게 되는데,
4섭법(四攝)과 4무량심(四無量心)과 37조도품관(三十七助道觀)과 10바라밀(十波羅蜜)의 명목은 서로 같지만,
교화하는 경계와 부처님을 보는 수량과 의생신(意生身)과 지생신(智生身)과 성불하는 인과로써 볼 때에는, 그러한 모두 같지 않은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미혹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이 닦는 선정 또한 가라앉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는 것이라,
다만 세 종류의 의생신을 얻을 뿐, 여래의 지생신은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7ㆍ8ㆍ9ㆍ10지(地)에 구생무행작의생신(俱生無行作意生身)의 종류를 얻은 보살이라 할지라도,
삼계의 번뇌에서 공관(空觀)으로 형행을 굴복시켜 일어나지 않게 함을 얻었서 의생신의 자재함을 얻었을 뿐,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여래의 일체종지 가운데에서 닦아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성불은 절대적으로 3기(三祈)에서 원만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며,
보는 바의 부처님 경계인 소견불경(所見佛境)도,
초지(初地)의 보살은 다만 백불(百佛)세계를 공양하고 교화해서 오직 백 가지의 법이 분명한 백법명문(百法明門)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엄경은 초발심 보살이 처음부터 여래 일체종지의 마음을 발하는 것을 보리심이라 칭하고 있으니,
가령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 처음으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인 대지혜의 집안인 불일체종지혜대지가(佛一切種智慧大智家)에 태어나서 ‘초발심 때 문득 정각을 성취한다(初發心時便成正覺)’고 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가 자기 스스로 지혜와 더불어 하나라는 것을 회통한 때문이며,
성불이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지혜의 경계에 늦고 빠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교화의 경계가 백불찰미진수와 다백불(多百佛)에 두루한 것은, 지혜의 경계와 덕의 작용이 무진하고 무한하고, 겹겹으로 겹쳐서 다함이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진수(進修)를 말로 한 것이니,
체(體)가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곧 일체가 무한인 것이니, 이는 마치 10지(十地) 중 초지 보살이 다백불(多百佛)과 다백천불(多百千佛)에게 공양하는 수가 비록 백수(百數)를 여의지는 않지만, 다백(多百, 백이 많음)이 바로 무한으로써 단백(單百, 일백)과 더불어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4념처와 4섭법과 4무량심과 10바라밀, 하나하나의 법이 모두 무한한 것이며,
따라서 이 10주(十住) 보살이 닦는 선정의 업도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가라앉거나 들뜨는 선정(沈掉之定)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으로 깊은 선정에 머물러서 가라앉지도 않는 불침(不沈)이고 들뜨지도 않은 불거(不擧)의 경계를 모두 해석하였다.
경문에서는 깊은 선정에 들어가 부처님의 불신통(佛神通)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마치 앞에서 말한 색계와 무색계의 천(天)과 3승의 신통 가운데에서 색계와 무색계의 신통은, 마음이 쉬는 식심상(息心想)의 청정한 과보로 얻은 신통과 같은 것이며,
2승의 신통은 선정 이전의 염(念)한 바에 의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정토 보살의 신통은 청정의락신통(淸淨意樂神通)을 얻는 것이니, 예컨대 세 종류의 의생신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 깊은 선정에 들어가 부처님의 신통을 얻는다(入深禪定得佛神通)는 것은,
마음이 이(理)에 칭합해 근본적으로 출입이 없음으로써 체(體)에 정란(靜亂, 고요함이나 시끄러움)이 없고,
체가 무조작(無造作)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理)에 맡겨 스스로의 자진(自眞)인 것이라서, 낳지도 않고 조복시키지도 않는 것이며,
참된 이의 지혜인 이진지(理眞智)가 응하여서,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서 일시에 삼세와 시방에 널리 응하고 색신을 대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혜에 따라 응하여 군품(群品)을 교화하면서도 오고 감이 없으며, 아울러 변화하지도 않는 것을 부처님의 불신통이라 칭하는 것이니, 지혜가 의지함도 없고 형색(形色)도 없으며, 체(體)에 오고 가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 삼세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능히 삼세의 법에 널리 응하는 것을 신통(神通)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전에서는 “지혜가 삼세에 들면서도 오고 감이 없다(智入三世,而無來往)”고 한 것이니,
삼세가 중생의 정(情)의 망녕으로 세운 것이지 실유(實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지혜의 지체(智體)는 무색(無色)이며 조작이 없는 불조작(不造作)이나, 군품(群品)에 응하는 것을 신(神)이라 칭하는 것이며,
시방으로 두루 원만하여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근기마다 알아채지 못함이 없는 것을 통(通)이라 칭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작위가 없는 무작문(無作門)에 의거해서 모든 청정한 행을 닦는다(依無作門修諸淨行)’고 한 것은,
이 작위가 없는 무작문(無作門)을 통해서 법계ㆍ허공계의 행해(行海)에 두루하게 청정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즉 지혜가 하는 바가 없는, 지무소위(智無所爲)를 수(修)라 이름하고,
근기를 알아서 행을 함께하는 동사(同事)를 행(行)이라 이름하며,
행이 이롭게 하지 않음이 없지만 작위도 없고 낳음도 없는 것을 무작문(無作門)이라 이름하고,
항상 시방의 일체의 삼계에 처하는 생(生)을 받아서 세속을 이롭게 하면서도 오염이나 청정이 없는 것을 정행(淨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삼세의 부처님과더불어 체성(體性)이 동일하다(與三世佛同一體性)’고 한 것은,
법신의 지혜가 같기 때문이니, 삼세의 광대한 겁이 일념과 같아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현이 함께 대지혜와 대자비를 행하여 원만한 것이다.
경전에서 ‘열 가지 법이 모든 보살로 하여금 조속히 모든 지(地)에 들게 한다(有十種法令諸菩薩速入諸地)’고 한 것은,
초발심주(初發心住)의 지위일지라도 모든 주(住)와 모든 행(行)과 모든 회향과 모든 지(地)의 법문을 두루 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인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일체즉일(一切卽一)이기 때문이며,
인에 즉하는 인즉(因卽)이고, 결과에 즉하는 즉과(即果)이기 때문이니,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나자 미륵보살이 문득 문수사리를 보게 한 것은 인과(因果)가 다르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음을 밝힌 것으로, 이 또한 초발심의 지위에서부터 불과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일념으로 가지런히 나아가면서도 일념(一念)을 벗어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의 인과와 보살행을 닦아서 다 원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재 동자의 일생(一生, 한 생)과 용녀가 1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3생(三生)에 성불하는 것이 서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생에 성불한다(一生成佛)’고 말한 것은 금생은 부모의 분단신(分段身)으로서 신심(信心)과 견도(見道)의 수행으로 살다가 분단신(分段身)을 버리고 변역(變易)의 생에 들어가는 것을 일생(一生, 한 생)이라 칭하는 것이며,
‘또한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不出剎那際)’고 한 것은 고금의 성품이 없고, 분단의 성품이 없으며, 변역의 성품이 없는 것으로, 만상(萬相)이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고 화현(化現)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생멸이 아니기 때문이며, 삼세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초주(初住)에서 두루 모든 지위의 제주(諸住)와 모든 제지(諸地)를 닦기 때문에, 제법(諸法)을 관통해서 총체적으로 일시(一時)이자 일법(一法)인 것이니, 이는 많고 적음의 다소(多少)나, 늦고 빠름의 연촉(延促)이 자재롭고 걸림이 없어서, 1찰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이 이와 같기 때문인 것이니 정(情)을 버리고 지혜로써 관(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전에서 ‘일체 중생과 모든 여래의 체성이 동일함이 안다(知一切衆生與諸如來同一體性)’고 한 것은,
3승(三乘)의 보살은 일체 중생이 여래의 불성이성(佛性理性, 바탕의 법신)을 똑같이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경전에서는 일체 중생이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사事를 판단하는 지혜)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가령 경전의 경문에서, '경권(經卷)이 삼천대천세계와 같아서 소중생(小衆生)의 몸 속에 들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성불하면서 이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이 경권(經卷)을 낸다'고 한 것은 미진만한 크기의 중생들 모두에게도 부처님의 일체종지가 있기 때문에 보살이 성불하여 화(化)하면서 총체적으로 여래의 일체종지를 얻음을 말한 것이니,
이(理)를 요달한 지혜의 명칭이 일체지(一切智)이며 차별지의 명칭이 일체종지(一切終智)인 것이다.
경문에서 ‘모든 불국토를 듣고 다 왕생하기를 바란다(聞諸佛土悉願往生)’고 한 것은 하나의 티끌(먼지) 속을 벗어나지 않고 지혜로 두루 응하여 나타나서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도 오고 감이 없는 것이다.
경문에서 말한 ‘모든 차제(次第)의 선정(諸次第定)’이란 것은, 보살이 색계의 4선(四禪)에 차례대로 능히 들어가고,
무색계의 4선에도 능히 순조롭게 들어가는 것이며, 혹은 간격을 초월해서 들고 나는 것이니,
마치 열반경(涅槃經)의 사유분(闍維分)에서 설한 바와 같이,
초선으로부터 들어가서 3선의 정(定)에서 나오고(從初禪入三禪定出),
공처(空處)에 들어가서 무소유처에서 나오고(空處入無所有處出),
비상처(非想處)에 들어가서 공처에서 나오는(非想處入空處出) 것이 간격을 초월한 것이며 이같은 차제(次第)인 것이니,
이 경전에서는 방망삼매(方網三昧)가 일방(一方)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시방에서 일어나고, 시방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일방(一方)에 일어나는 등과 같은 것이니, 자세히는 10신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삼마발저지인(三摩鉢底智印)이란, 공적의 작용이 똑같이 일어나서 모든 만법에 인(印)쳐서 명료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마치 대해의 물에 만상이 비추어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청정한 지혜가 일체의 만법에 널리 인(印)을 쳐서 능히 요달하여 명백하게 알지만, 능(能)과 소(所)가 없으며, 작위하는 자도 없는 무작자(無作者)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경문에서 ‘모든 법을 잘 관해서 실상(實相)의 인(印)을 얻는다(善觀諸法得實相印)’라고 한 것은,
작위도 없고 의지함도 없고 상념도 없는 대지혜의 인(印)으로 모든 만법에 인(印)을쳐서,
오로지 법만이 일어날 뿐, 무명의 삼세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실상인(實相印)이라 이름한 것이다.
경문에서 ‘입진삼매(入眞三昧)’라고 말한 것은 삼계 및 3승에 오염과 청정, 가라앉음과 들뜸이 없는 것이 해당된다.
‘온갖 편벽된 견해를 여읜다(離諸僻見)’는 것은 유(有)와 무(無)의 두 견해가 이에 해당되며,
내견(內見)과 외견(外見), 신견(身見)과 변견(邊見), 계취(戒取)와 견취(見取)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되며,
나아가 62견(見)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62견(六十二見)이란, 일체법을 계교한 것으로 인한 네 가지의 4견(四見)이 있으니,
첫째 항상하다는 상(常),
둘째 무상(無常),
셋째 상(常)이기도 하고, 무상(無常)이기도 하다는 것이며(亦常,亦無常),
넷째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님 것(非常,非無常)이며,
5음(五陰)에 이러한 각각의 4견(四見)으로, 4 X 5로써 20개가 되고,
삼세의 5음을 모두 합하면, 60개가 되고, 여기에 근본의 2견(見)을 더하면 62견이 되는 것으로,
일체의 편벽된 견해는 이 62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보문혜(普門慧)란, 중생의 모든 제근(諸根, 근기)과 법을 두루 아는 지혜이며,
일체지지(一切智智)는 갖가지의 차별지(種種差別智)이다.
색계의 중생은 선정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관(觀)을 일으키게 하고,
무색계의 중생은 무상관(無相觀)을 닦게 되기 때문에 미묘한 지혜의 묘지(妙智)를 가르치는 것이니, 상(相)이 정(情)에 해당되지 않아 지혜가 날카롭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의 육화경법(六和敬法)이란, 첫째 신(身)이며, 둘째 구(口)이며, 셋째 의(意)이며, 넷째 계(戒)이며, 다섯째 시(施)이며, 여섯째 견(見)으로서, 그 명칭이 6화경법인 것이다.
중생의 밭(衆生田)에 부처님의 불종자(佛種子)를 심는다는 것은,
일체 중생의 보리이지(菩提理智)를 보여주는 때문이며, 아울러 미묘한 선근(善根)이 뛰어난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6통(通)은 앞에서 이미 다 해석했으며, 십통품(十通品)에서 10신통(十神通)은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하 게송 중 2행 1게송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 있으니, 경문에 따라 찬탄한 것이며, 마지막의 긴 행인 1행은 대중들이 듣고 환희하면서 받들어 행함을 밝힌 분(分)이다.
이 1회(會)는 승도리천궁품(昇忉利天宮品)이 서분(序分)이며,
게찬품(偈讚品)이하는 정설분(正說分)이며,
대지를 진동하는 것과 공양을 일으키는 것은 유통분(流通分)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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