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18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17) 초발심공덕품② ㅡ 3


두 번째의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해석(隨文解釋)을 한다면,

앞에서 초발심 공덕을 비교하여 헤아리는 40단락의 경문 속에서

최초의 1단락은, 제석천이 청한 것으로서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고,

제2 단락의 경문에서는 초발심에 있는 열 가지 광대함의 십종광대(十種廣大)와 알기 어려운 난지법(難知法)이라는 것을 들어 천명한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제3 단락은 공양의 광대함을 바르게 들어 천명한 것이고, 
제4 단락은 사람이 공양한 바로서 교량할 수 없음을 바르게 밝힌 것이니,

가령 가라분(歌羅分)이라는 것은 많음(多)으로서 적음(少)에 비교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비유이니,

말하자면 사람 몸의 털을 분석해서 100으로 나눈다면, 앞 사람이 지은 공덕으로도 초발심 보살의 100분모(分毛) 중 1분모 정도의 공덕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우파니사타분(優波尼沙陀分)이라 말한 것은 약간은 서로 근접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한계가 없는 선근에 한계가 있는 선근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대비(對比)한 것이며, 그 나머지는 경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제5 단락에서 교수십선도(敎修十善道)라 말한 것은 신(身)의 세 가지(무살생, 무투도, 무사음)와

구(口)의 네 가지(무망어, 무기어, 무양설, 무악구)와 의(意)의 세 가지(무탐욕, 무진에, 무사견)로서,

욕계의 천(天)에 태어나는 선(善)이며,

그 이상에서 4선(禪)이라고 말한 것은 색계의 업으로서,

초선(初禪)은 근심(優)을 멸하고, 2선은 괴로움(苦)을 멸하며,

3선은 기쁨(喜)을 멸하고, 4선은 오직 적정(寂靜)일 뿐이다.
교주사무량심(敎住四無量心)이라 말한 것은 유위(有爲) 중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고,

교주사무색정(敎住四無色定)이라 말한 것은 이는 무색계의 선정으로, 이상은 3계(界)의 선업(善業)이다.

교주수다원과(敎住須陀洹果)라 말한 것은 소위 처음으로 견혹(見惑)을 끊고 이생(異生)의 성품을 버리고, 처음 성성(聖性)을 얻어 성행(聖行)의 흐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명칭이 ‘흐름에 들어가는 입류([入類)’인 것이다.

교주사다함과(敎住斯陀含果)라 말한 것은, 한역하면 일래(一來)이니, 이른바 이 성자가 비록 욕계 6품의 미혹을 끊었을지라도 나머지 3품은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니, 이 성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욕계에 태어나게 하는 가닭에 그 명칭이 일래과(一來果)인 것이다.

교주아나함과(敎住阿那含果)라 말한 것은 한역하면 불환(不還)인데, 이른바 욕계의 9품 미혹을 모두 끊어서, 이로부터는 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라서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명칭이 불환(不還, 불래 不來)인 것이니, 이는 10사(使) 중 견도(見道)의 의심이 능히 명료하지 못해서 아라한과(果)에 들지 못한 것이다.


10사번뇌(十使煩惱)는 1. 신견(身見), 2. 변견(邊見), 3. 견취(見取), 4. 계취(戒取), 5. 사견(邪見)의 5 가지는 이사(利使)가 되고,

그 이후의 5 가지는 둔사(鈍使)로서 견제(見諦)에서 끊어지는 것으로, 6. 탐냄(貪), 7. 성냄(瞋), 8. 어리석음(癡), 9. 아만(慢), 10. 의심(疑)의 5 가지 둔사(鈍使)는 능히 행에 따라 사(事)를 미혹시키는 것이다.

 

이 10사(十使) 중 다섯 가지 이사(利使)는 수다원이 견제(見諦) 뒤에 조복시켜서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나중의 다섯 가지 둔사(鈍使)는 희박하여 지고, 
사다함(斯陀含)은 욕계(欲界)의 육종혹(六種惑, 여섯 가지 미혹)을 끊었지만, 색계의 탐심이 없지 않으며, 성냄(瞋), 어리석음(癡),  아만(慢)의 3 가지는 희미하고 엷어져서 현행하지는 않으나 종자가 없지는 않으며,
위의 색계와 무색계 2계(界)의 과보로 성냄(瞋)이 없게 되는 것은 선정을 닦아 조복해서 현행하지 않는 것이다.

수다원과 사다함의 2과(二果)는 환난(患難)을 싫어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으로써 항상 세간을 벗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로써 삼계에 빠지는 종자(種子)를 이루지 않는 것이다.
아나함(阿那含)은 염리(厭離, 싫어해서 벗어남)함으로서 영원히 쉬게 하지만, 오직 견도(見道)의 의심만이 있는 것이라서 견도가 분명하지 못한 때문에 능히 삼계의 업과(業果)를 단박에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라한(阿羅漢)은 견도에 의심이 없어서 삼계의 업과가 일시에 소진하는 것이니, 이전의 삼과(三果)와 비교하면, 설령 9가지의 번뇌를 끊을지라도 오직 의심(疑)만은 존재하는 것이라서, 아직 번뇌를 끊었다고 이름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견제(見諦)의 무명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염복(厭伏, 싫어해서 조복시킴)이라 칭하는 것이며, 끊음의 단(斷)이라 칭하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辟支佛)은 다만 세간을 벗어나는 것만을 기뻐하고, 정토보살과 공관보살도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기뻐하면서 6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현행의 무명을 꺾어 굴복시킨 것이지, 번뇌를 영원히 끊었다고 칭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공관(空觀)으로 무명을 꺾어 굴복시킬 뿐, 무명이 본래로부터 온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는 것을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을 요달하지 모하고 공(空)으로 꺾어서 굴복시켜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10지(十地)에 이르게 될지라도 다만 의생신(意生身) 등을 얻을 수 있을 뿐, 여래의 일체종지생신(一切種智生身)이라 이름하이지 못하며,

10진여(十眞如) 등의 관(觀)을 지어서 10 가지의 추중(麤重)을 끊었을지라도 ‘무명이 본래 여래의 근본지라서 대용(大用)이 항상 공적함’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승불과(一乘佛果)의 가르침에서는, 불과에 의거하여 발심함으로써 초발심(初發心) 때에 근본무명이 바로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라는 것을 요달하고 차별지의 대용법문(大用法門)을 성취하여서 초발심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타시는 승문(乘門)을 원만케 하는 것을 ‘일체지승(一切智乘)을 타는’ 것이라 칭하는 것이니,

만약 지비(智悲)와 원행(願行)이 털끝만큼이라도 부처님과 같지 않다면 신심(信心) 또한 성취하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에 머물 수 있으며,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부처님의 참된 진자(眞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불사(佛事)를 갖추어서 지혜가 다르지 않을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 겁의 차별이 일념(一念)과 더불어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이와 같은 선정과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불보살이 올바른 선지식에 의거하고, 근본지(根本智)에 의거한 발심(發心)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아래의 경문에서 겨우 발심한 보살이 능히 시방으로 몸을 나타내어 성불하는 것은 초발심 때 여래의 부사의일체지승(不思議一切智乘)을 타고, 부처님의 종지(種智)를 얻어서, 여래 법계의 집안에 태어나, 일분(一分)의 부처님 지혜와 대자비의 세분(勢分)을 타는 까닭에 능히 이와 같이 성불하여서 시신(示身, 몸을 나타냄)하는 것이다.

 

그 아래의 게송에서 “보살이 비록 부처님의 10력(十力)을 증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의심이 없어서, 보살이 하나의 모공(毛孔) 가운데에서 널리 시방의 무량찰(無量刹)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총체적으로는 초발심 보살의 덕(德)이 일분(一分)의 여래 지력(智力)을 얻음으로써 세분(勢分)이 이와 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마치 윤왕(輪王)의 태자가 권위로 왕정을 통치함에 있어서 일분(一分)의 자재로움을 얻어서 부왕과 같아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지가 진동하고 공양을 일으키는 것은 법의 위력을 밝힌 것이며,

또한 대중들에게 법열(法悅)과 심열(心悅, 마음의 기쁨)으로 대지가 진동함을 밝힌 것이며,

마음과 경계의 체(體)가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니,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시방으로 각각 만불찰미진수(萬佛刹微塵數)를 지나 동명(同名)의 법혜(法慧) 부처님들이 그 앞에 와서 나타나는 것은, 시방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더불어 합(合)한 것을 밝히는 때문이며,

만불찰진(萬佛剎塵)이란 수행의 승진으로 미혹을 열어서 깨달은 법의 양(量)이 10신(十信)ㆍ십십(十十)주ㆍ백십(百十)행ㆍ천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는 것으로 밝힌 것이니, 이는 승진의 견제(見諦)로 미혹을 풀고 법을 깨닫는 명칭을 밝힌 것이다.


그 아래에서 만불찰미진수(萬佛刹微塵數) 보살이 발심하자, 천불가설(千不可說)의 겁을 지나 성불의 수기를 주면서도 모두가 같은 명호인 청정심(淸淨心)인 것은 역시 이와 같은 천불가설 겁량(劫量)의 법문을 요달해서 모두 청정하다는 것을 밝히는 까닭으로 부처님의 명호가 청청심(淸淨心)인 것이다.

이는 실로 정(情)으로 보는 길고 먼 겁이 아니며, 총체적으로는 해당되는 지위의 미오법(迷悟法)을 따르는 명칭으로, 그 교량(校量)의 설을 간직해서 망정(妄情)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로부터” 이하 품의 말미에 이르기까지는 경문 자체에 갖추고 있어서 경문대로 칭찬한 것이다.
“여시(如是)” 이하 242행의 게송과 168행은 모두 불과(佛果) 및 신(信, 믿음) 등의 6위 법문을 찬탄한 것이며,

이하 74행은 이 품에서 발심의 공덕이 광대해서 비교하기 어려움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찬탄한 것이니, 경문에 스스로 갖추고 있으며 경문에 따라 찬탄하고 있다.
4행과 1게송은 예에 준거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초발심의 공덕을 비교하여 헤아려 보자면, 설령 허공과 동등한 무한 경계에서 일체의 낙구(樂具)로 무량하게 많은 중생들에게 모두 공양하여서 그 모두로 하여금 인천(人天)의 뛰어난 즐거움을 얻게 하고, 또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와 벽지불과(辟支佛果)와 3승(三乘)의 세간을 벗어난 출세보리(出世菩提)를 얻게 할지라도,

말하자면 이와 같은 허공의 경계와 제도 받는 중생이 비록 동등하지만 제도 받는 중생으로 하여금 성불을 얻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가르침에서 초발심 때 여래의 대지혜를 타고 부처님께서 행하는 불소행(佛所行)과 동등하여서 널리 중생을 교화하여 그 모두를 성불하게 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발하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 있으므로, 들어가는 경계의 넓고 좁음이 같지 않고, 교화받는 중생의 성불함과 성불하지 못함이 같지 않은 것이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이 품의 아래 경문에서, “초발심 보살이 삼세에서는 조금도 얻는 바가 있지 않으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인 듯하고, 모든 불법(佛法)인 듯하고, 보살인 듯하고, 보살법인 듯하고, 독각인 듯하고, 독각의 법인 듯하고, 성문인 듯 하고, 성문의 법인 듯하고 나아가 널리 설해진 경전과 같은 것이나, 다만 오로지 일체지(一切智)만을 구하기 때문에 모든 법계에 대하여 마음으로 집착하는 바 없이 보리심을 발한다”고 한 것이다.

 
대략 보리를 설한 법에 4 가지가 있으니,

첫째 성문의 보리(聲聞菩提), 둘째 연각의 보리(緣覺菩提), 셋째 권교의 보리(權教菩提), 넷째 1승 보살의 불과보리(佛果菩提)이다.

앞의 3 가지는 세간을 벗어난 출세보리(出世菩提)이지만, 불과보리는 법신의 대지혜와 대자비의 진(眞)과 속(俗) 만행(萬行)으로서 법계에 원만한 보리이니 출입(出入)이 없기 때문이다.

3승의 보리는 비록 4제(四諦)와 12연(十二緣)을 관(觀)할지라도 4제와 12연의 실체(實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비단 2승만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 보살이 10지(地)의 지위에 오를지라도 여전히 능히 다 알지 못하나, 오로지 1승의 보살만이 지혜로써 비로소 아는 것이니, 십지품(十地品)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간략하게 그 대강만을 말한다.


3승에서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와 12연생(十二緣生)을 관하고,

6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고(苦)를 싫어하고 진(眞)을 기뻐해서 단지 세간을 벗어나는 것만을 구하고,

대자비의 보살이라야 비로소 미혹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윤택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1승 보살은 지혜로써 4제와 12연생을 관하여 무명이 바로 지혜이고, 고제(苦諦)가 바로 성제(聖諦)라서, 생사와 열반에 풀고 묶이는 성품의 해박성(解縛性)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서는 그 명칭이 고성제(苦聖諦)이며 집성제(集聖諦)인 것이니, 이와 같은 10성제(十聖諦)와 12인연이 모두 법계 자성(自性)의 속박도 없고 풀림도 없는, 무박무해(無縛無解)의 자재로운 연(緣)이기 때문에 무명이라 이름하지 못하고 고제(苦諦)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법(萬法)이 이러하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1승(一乘)이라 하는 것이니,

법계의 연기는 지혜와 자비가 자재로워 성품에 맡겨 연(緣)이 생기는 것이므로, 일체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眼、耳、鼻、舌、身)이 모두 법계 연기의 자재로운 법문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일체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신통력이 이러함으로서 있는 것이니, 다만 선정관조(禪定觀照)의 모든 바라밀로서 이를 드러내어서 발현(發顯)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학자(學者)는 마땅히 이와 같이 닦아야 하며,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하 게송의 경문이 4행 1게송인 것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 있으니 번거롭게 다시 해석하지는 않겠다.

지혜로운 선비는 경문을 따라 찬탄해서 대중으로 하여금 발심하게 하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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