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經卷第二十一 十行品第二十一之二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 三藏沙門(삼장사문) 實叉難陀 譯(실차난타 역)
22.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ㅡ 7
ㅡ제7(第七) 지혜로움의 혜장(慧藏)
佛子(불자) 何等(하등) 爲菩薩摩訶薩(위보살마하살) 慧藏(혜장)고
此菩薩(차보살) 於色如實知(어색여실지) 色集如實知(색집여실지)
色滅如實知(색멸여실지) 色滅道如實知(색멸도여실지)
於受想行識(어수상행식) 如實知(여실지) 受想行識集(수상행식집) 如實知(여실지)
受想行識滅(수상행식멸) 如實知(여실지) 受想行識滅道(수상행식멸도) 如實知(여실지)
於無明(어무명) 如實知(여실지) 無明集(집무명) 如實知(여실지)
無明滅(무명멸) 如實知(여실지) 無明滅道(무명멸도) 如實知(여실지)
於愛 如實知(어애여실지) 愛集 如實知(애집 여실지)
愛滅 如實知(애별 여실지) 愛滅道 如實知(애멸도 여실지)
於聲聞(어성문) 如實知(여실지) 聲聞法(성문법) 如實知(여실지)
聲聞集(성문집) 如實知(여실지) 聲聞涅槃(성문열반) 如實知(여실지)
於獨覺(어독각) 如實知(여실지) 獨覺法(독각법) 如實知(여실지)
獨覺集(독각집) 如實知(여실지) 獨覺涅槃(독각열반) 如實知(여실지)
於菩薩(어보살) 如實知(여실지) 菩薩法(보살법) 如實知(여실지)
菩薩集(보살집) 如實知(여실지) 菩薩涅槃(보살열반) 如實知(여실지)
불자들이여, 어떠한 것을 보살마하살의 지혜로운 지장(慧藏)이라 하는가.
이 보살은 색(色, 물질, 몸)을 여실(如實)하게 알고,(여실하게 알아서 집착하지 않으며)
색(色)이 모인 원인의 집(集), 색집(色集)을 여실하게 알며,(몸이 된 원인을 여실하게 알며)
색(色)이 멸(滅)하는 것을 여실하게 알며, (몸이 소멸하는 것을 여실대로 알며)
색(色)이 멸하는 색멸도(色滅道)를 여실대로 알며,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을 여실하게 알며,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의 모임(원인)의 집(集)을 여실하게 알며,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 멸(滅)함을 여실하게 알며,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 멸하는 멸도(滅道)를 여실하게 알며,
무명(無明)을 여실하게 알며, 무명의 모임(원인)의 집(集)을 여실하게 알며,
무명이 멸(滅)함을 여실하게 알며, 무명이 멸하는 멸도(滅道)를 여실하게 알며,
애(愛, 애착, 집착)를 여실하게 알며, 애가 모인(원인)의 집(集)을 여실하게 알며,
애가 멸(滅)함을 여실하게 알며, 애가 멸하는 멸도(滅道)를 여실하게 알며,
성문(聲聞을 여실하게 알며, 성문의 법을 여실하게 알며,
성문의 집(集, 성문이 된 원인)을 여실하게 알며, 성문의 열반을 여실하게 알며,
독각(獨覺, 연각)을 여실하게 알며, 독각법(獨覺法, 연각법)을 여실하게 알며,
독각의 집(集, 연각이 된 원인)을 여실하게 알며, 독각의 열반을 여실하게 알며,
보살을 여실하게 알며, 보살의 법을 여실하게 알며, 보살의 집(集, 보살이 된 원인)을 여실하게 알며,
보살의 열반을 여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ㅡ무명(無明), 원어 아비댜(avidy), ‘번뇌로 말미암아 진리에 어둡고 불법(佛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상태’, 즉 극복해야 할 마음의 불안 상태인 셈이다. 무명은 12연기의 제1지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무상, 무아함을 모르고 갈애를 일으키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생노병사 등의 온갖 고통을 초래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다. 불교는 인간의 윤회적 삶을 직시하여, 그 윤회적 생존을 초월함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윤회의 근원인 무명을 소멸함으로써 인간의 고통도 없어질 수 있다.
비담종이나 법상종에서는 무명을 마음 작용 가운데 하나인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또 아함부 경전은 무명을 해석할 때, 사성제에 대한 무지라 하고 갈애와 표리적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유부나 유식에서는 무명을 상응(相應)무명과 불공(不共)무명으로 구분하여서, 상응무명은 탐욕 등의 근본 번뇌와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불공무명은 근본 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스스로 생기는 것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깨닫지 못한 불각(不覺)을 무명이라고 하고, 불각은 다시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으로 나누고 있다. 근본무명은 본래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망상심이 곧 근본무명이고, 근본무명에서 파생된 무명을 지말무명이라고 말하고 있다.ㅡ불교신문
云何知(운하지) 知從業報(지종업보) 諸行因緣之所造作(제행인연지소조작)
一切虛假(일체허가) 空無有實(공무유실) 非我非堅固(비아비견고)
無有少法(무유소법) 可得成立(가득성립)
어떻게 아는 것인가?
업을 지어 과보 받는 업보(業報)와 제행(諸行)의 인연으로 인하여 짓게되는 것이라고 알며,
일체의 온갖 것이 허망한 거짓의 허가(虛假)라서 공하고 진실하지 않은 무실(無實)하다는 것을 알며,
나도 아닌 비아(非我)이고, 견고한 것도 아니며,
작은 소법(少法)도 얻어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ㅡ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선사가 상당하여 말하였다.
“적육단(赤肉團: 붉은 살덩어리) 상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真人)이 있어서 항상 모든 사람의 면문으로 출입한다.
아직 증험하지 못한 자는 살펴보고 살펴보라.”
이때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無位真人)입니까?”
임제선사가 선상에서 내려와 붙잡고는 말하였다. “말해라. 말해라.”
스님이 의논하고 헤아리려고 하자, 임제선사가 탁 밀치고는 말하였다.
“무위진인이 무슨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막대기)인가?”, 그리고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臨濟上堂。赤肉團上有一無位真人。常在諸人面門出入。未證據者看看。時有僧出問如何是無位真人。濟下禪床搊住曰道道。僧擬議。濟托開曰無位真人是什麼乾屎橛。便歸方丈。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마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인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 즉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하고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임제스님은 대 해탈, 대 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 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 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明明白白), 소소영영(昭昭靈靈, 심성이 밝고 영명함)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 듯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 고림
欲令衆生(욕영중생) 知其實性(지기실성) 廣爲宣說(광위선설) 爲說何等(위설하등)
說諸法不可壞(설제법불가괴)
何等法(하등법)이 不可壞(불가괴) 色不可壞(색불가괴) 受想行識(수상행식) 不可壞(불가괴)
無明不可壞(무명불가괴) 聲聞法(성문법) 獨覺法(독각법) 菩薩法(보살법) 不可壞(불가괴)
중생들로 하여금 그 실성(實性, 실다운 성품, 무위진인)을 알게 하고자 널리 선설(宣說, 연설, 설명)하나니,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
제법(諸法)은 파괴할 수 없는 불가괴(不可壞)라는 것을 설합니다.
어떠한 법이 파괴할 수 없는 불가괴(不可壞)인가?
색(色, 물질, 몸)이 불가괴요,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이 불가괴요,
무명이 불가괴요, 성문법ㆍ독각법ㆍ보살법이 불가괴입니다.
ㅡ바다에 무수하게 일어나는 그 물결들의 모양은 끊임없이 변하고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물을 떠서 보면 물이라는 그 실체는 변함이 없는 불가괴(不可壞)입니다.
물결은 순간순간 변해서 무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물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불가괴(不可壞)라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성문ㆍ연각ㆍ보살법이 불가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체, 실상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ㅡ무비스님
何以故(하이고) 一切法(일체법) 無作無作者(무작무작자) 無言說無處所(무언설무처소)
不生不起(불생불기) 不與不取(불여불취) 無動轉無作用(무동전무작용)
菩薩(보살) 成就如是等(성취여시등) 無量慧藏(무량혜장) 以少方便(이소방편)
了一切法(요일체법) 自然明達(자연명달) 不由他悟(불유타오)
왜 그러한 것인가? 일체법(一切法)은 지음도 없는 무작(無作)이고, 짓는 이도 없는 무작자(無作者)이며,
말할 수도 없는 무언설(無言說)이고, 머무는 곳도 없는 무처소(無處所)이며,
불생(不生)이요, 일어나지도 않는 불기(不起)요,
주지 않는 불여(不與)이며, 취하지도 않는 불취(不取)이며,
움직임도 없는 무동전(無動轉)이요 작용도 없는 무작용(無作用)인 것입니다.
보살이 이러하게 무량한 지혜의 모임인 혜장(慧藏)을 성취하고서는, 그 작은 방편으로 일체법을 아나니,
다른 이로 인하여 깨닫는 것이 아닌 불유타오(不由他悟)가 아니라
분명하게 스스로 자연히 깨닫는 자연명달(自然明達)인 것입니다.
ㅡ결국 자기 자신 속에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此慧無盡藏(차혜무진장) 有十種不可盡(유십종불가진) 故說爲無盡(고설위무진)
何等(하등) 爲十(위십) 所謂多聞善巧(소위다문선교) 不可盡故(불가진고)
親近善知識(친근선지식) 不可盡故(불가진고) 善分別句義(선분별구의) 不可盡故(불가진고)
入深法界(입심법계) 不可盡故(불가진고) 以一味智莊嚴(이일미지장엄) 不可盡故(불가진고)
集一切福德(집일체복덕) 心無疲倦(심무피권) 不可盡故(불가진고)
入一切陀羅尼門(입일체다라니문) 不可盡故(불가진고)
能分別 一切衆生(능분별 일체중생) 語言音聲(어언음성)
能斷一切衆生疑惑(능단 일체중생의혹) 不可盡故(불가진고)
爲一切衆生(위일체중생) 現一切佛神力(현일체불신력) 敎化調伏(교화조복)
令修行不斷(령수행부단) 不可盡故(불가진고) 是爲十(시위십)
是爲菩薩摩訶薩(시위보살마하살) 第七 慧藏(제칠 혜장)
住此藏者(주차장자) 得無盡智慧(득무진지혜) 普能開悟(보능개오) 一切衆生(일체중생)
이 지혜가 다함이 없는 혜무진장(慧無盡藏)에는
10 가지가 다함이 없는 십종불가진(十種不可盡)이 있는 까닭에 무진(無盡)이라 말하는 것이니,
무엇이 그 10 가지인가? 말하자면,
다문선교(多聞善巧)하여 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많이 듣는 것이 다함이 없는 불가진(不可盡)이며,
ㅡ삼혜(三慧) 많이 듣는 문(聞)ㆍ듣고서 사유하는 사(思)ㆍ반복하여 실천하는 수(修)
선지식을 친근하는 것이 불가진하며,
(궁극의 선지식은 자기 자신이고, 그 다음으로는 화엄경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
구의(句義 경전의 구절에 담겨 있는 뜻)를 잘 분별하는 것이 불가진하며,
깊고 심오한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진하며,
한결같은 일미(一味)의 지혜로 장엄하는것이 불가진하며,
일체의 모든 복덕을 모으되 고달프고 피로함이 없음이 불가진하며,
일체 다라니문(陀羅尼門)에 들어가는 것이(다라니를 아는 것이) 불가진하며,
능히 일체 중생들의 말과 음성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진하며,
일체 중생들의 의혹 끊어주는 것이 불가진하며,
일체 중생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신력을 나타내어 교화하고 조복하여서 수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불가진하나니,
이러한 것이 그 10 가지입니다.
이를 보살마하살의 제7(第七) 지혜로움의 혜장(慧藏)이라 하나니,
이 혜장에 머무른 이는, 다함이 없는 무진지혜(無盡智慧)를 얻어서 일체 중생들을 널리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ㅡ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왕복(往復)의 원리이다. 비행기도 왕복표가 있고 기차도 왕복표가 있다.
왕복이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복을 다시 일상생활에서 살펴보자.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왕복이다.
집에서 직장에 갔다 다시 집에 돌아오는 것도 왕복이며, 학생이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 것도 왕복이다.
수없이 떴다 감았다 반복하는 눈도 왕복이며, 들숨과 날숨을 이어가는 숨도 왕복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사도 마찬가지다. 태어났으니 죽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갔으면 다시 오고, 왔으면 다시 가는 이치일 것이다.
다만 중생은 분단생사(分段生死)를 하고 보살(菩薩)은 변역생사(變易生死)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정일원(動靜一源)에 있다.
움직이는 동작과 고요한 적정상태의 근원이 하나(마음)라는 뜻이다.
아무리 왕복해도 그 중심은 마음에 있다.
즉, 시계바늘이 360도 도는데 중심축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심축은 가만히 있지만 물체는 왕복을 거듭한다.
종체기용(從體起用)이요 섭용귀체(攝用歸體)라는 경구(經句)가 있다.
종체기용이란 체(근본)를 좇아 용(작용)이 일어나고,
섭용귀체란 작용(作用)을 거두어 체로 돌아간다. 이것도 왕복의 원리인 것이다.ㅡsome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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