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7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15) 십주품(十住品)
십주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략 5문(五門)으로 나누겠으니,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며,
둘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이며,
셋째, 품의 종취(宗趣, 종지의 취지)를 밝히는 것이며,
넷째, 단혹(斷惑, 미혹을 끊는) 단계를 모두 회통하는 것이며,
다섯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란,
이 품은 열 가지의 머물어야 하는 주문(住門)을 설하는 것이므로 그 명칭이 십주품(十住品)인 것이다.
둘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를 설명하면,
앞의 품에서는 게송으로 찬탄하여 수행을 권하는 권수문(勸修門)이었지만,
이 품은 바로 10주(十住)의 행을 수행을 거양하고자 이 품이 반드시 온 것이다.
10주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대지혜 속에 태어나서 머무는 것이니,
이 주(住)에 들어가면 영원히 물러나 돌아가지 때문에 주(住)라 이름한 것이다.
셋째, 품의 종취(宗趣, 종지의 취지)를 밝히는 것을 설명하면,
이 품에서는 열 가지의 십종주(十種住)의 20 가지의 닦아 나아가는 20종진수(二十種進修)의 인과를 설하여서 바른 종지의 정종(正宗)으로 삼고,
또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에 머무는 것으로서 바른 종지의 정종(正宗)으로 삼음을 밝히고 있다.
즉 이 10주(十住位)에 각각 두 종류의 인과가 있으니,
저마다 각각으로 해당되는 지위에서 처음 열가지 십법(十法)을 든 것은 바로 흔취증상(欣趣增上)의 연(緣)이며,
나중에 열 가지 십법(十法)을 든 것은 이 해당되는 지위 안에서 수행한 수학과(修學果)임을 밝힌 것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넷째, 미혹을 끊는 단혹(斷惑, 미혹을 끊는) 단계를 모두 회통하는 것이란,
가령 초발심주(初發心住)와 치지주(治地住)와 수행주(修行住)의 세 가지 주(主)에서 총체적으로 출세간의 마음을 닦아서 모든 세간의 번뇌와 속박을 타파함을 밝힌 것이니,
이 세간의 번뇌는 선재동자가 게송으로 설한 10 개의 근본번뇌가 있고, 6 개의 수번뇌(隨煩惱)가 있다.
10 가지의 근본번뇌(根本煩惱)란, ① 욕망, ② 색(色), ③ 무색(無色)으로, 이는 삼계의 근본적인 속박처이고,
④ 교만(憍慢), ⑤ 모든 제취(諸趣), ⑥ 애(愛), ⑦ 어리석음의 우치(愚癡), ⑧ 탐(貪, 탐욕), ⑨ 에(恚, 성냄), ⑩ 심마왕(心魔王, 마음의 마왕)이니, 이로써 10 개가 된다.
또 6 개의 수번뇌(隨煩惱)란,
① 첨(諂, 아첨), ② 광(誑:속임수), ③ 의혹(疑惑), ④ 간(慳, 인색함), ⑤ 질(嫉, 질투), ⑥ 교영(憍盈, 아양)이다.
선재동자의 게송에서 “세 가지의 삼유(三有)가 성곽(城郭)이 되고,
교만(憍慢)이 담장이 되고, 모든 제취(諸趣)가 문호(門戶, 문)가 되고,
애착의 애수(愛水)가 연못이나 도랑이 되고,
어리석음의 암복(闇覆, 어둠의 덮개)이 되고,
탐내고 성내는 불이 치열하여서 마왕이 군주(君主)가 되자 동몽(童蒙, 소년)이 의지하여 머물며,
탐애(貪愛, 탐심과 애착)가 휘전(徽纏, 얽어 맴)하며,
첨광(諂誑)이 비륵(轡勒,고삐와 재갈)이 되고,
의혹(疑惑)이 그 눈을 가려서 모든 삿된 견해의 제사도(諸邪道)에 들어가서 인색하고 질투하며 교영(憍盈)하는 까닭에 삼악도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는 내심(內心)이 나아가는 바에 근거한 것이지, 신견(身見)과 변견(邊見)과 견취(見取)와 계취(戒取)와 사견(邪見)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내심(內心)이 지혜를 성취하면 모든 견해로부터 저절로 해탈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일승의 교체(敎體)는 다만 무명을 깨달아서 대지(大智)를 이루고,
온갖 견해를 이용하여서 자재로움을 짓는 것이니, 이 때문에 5견(五見)을 논하지 않는 것이다.
또 10신위에서 문수사리가 법수(法首)보살에게 질문한 11 가지의 번뇌가 있으니, 그 11 가지의 종류는 무엇인가?
1.탐내는 탐(貪), 2. 성내는 진(瞋), 3. 어리석음의 우치(愚癡), 4. 교만의 만(慢), 5. 숨김의 복(覆),
6. 분노하는 분(忿), 7. 원한의 한(恨), 8. 질투하는 질(嫉), 9. 인색한 간(慳), 10. 속이는 광(誑), 11. 아첨하는 첨(諂)으로,
이는 반야경(般若經)에서의 5온 및 12연(緣) 등과 같은 것이다.
이상과 같은 번뇌는 10주의 초발심주와 치지주와 수행주의 3주(住)에서 일시에 단박에 끊고 근본지혜(根本智慧)를 성취하는 것이니, 이는 가령 선재동자가 묘봉산 위에서 덕운비구를 친견하고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광명문을 얻고서는, 곧바로 앞에서 말한 세간의 모든 번뇌장(煩惱障)을 없앰으로써 부처님의 불지혜광명(佛智慧光明)을 성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선재동자가 묘봉산 위에서 믿음의 신안(信眼)이 청정하게 밝고, 지혜의 지광(智光)이 조요(照耀)하여 밝게 비추임으로써 널리 경계를 관(觀)하여 일체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 바로 초발심주(初發心住)인 것이다.
두 번째 해문국(海門國)에서는 해운(海雲)비구를 친견하고, 심경(心境, 마음과 경계)의 미진(迷眞, 미혹과 참됨)을 없애고, 12연생관을 지어 장애가 없게 한 때문에 즉시 바다 속에서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어 보안경(普眼經)을 설하시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니, 이는 자타(自他)의 12연생관을 보아서 대지해(大智海)를 성취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기 때문에 심경(心境, 마음과 경계)이 결과적으로 모두 경(經)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불지혜(佛智慧)를 얻어서 12연생을 관(觀)하여 대지해(大智海)를 성취함으로써 심경(心境, 마음과 경계)가 널리 자재롭고 두루함을 밝히고 있으니, 이는 이 치지주(治地住)에서 12연생으로 다스림으로써 여래의 지지(智地)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해안국(海岸國)에서 선주(善住)비구를 친견하고 심경(心境)의 청정하지 못한 장애를 없애고, 보살의 무애해탈문(無碍解脫門)을 얻음으로써 근기에 따른 업행(業行)으로 인하여 여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태어나는 일체 중생을 능히 모두 밝게 보는 것은, 바로 수행주(修行住)이니,
이 세 가지의 삼종주(三種住) 중에서 속박을 벗어난 마음의 자재로움을 얻은 것을 밝힌 것이다.
총체적으로는,
10신심(十信心)을 통하여, 스스로 일체 삼계의 분별무명(分別無明)이 근본부동지불(本不動智佛)이라는 것을 믿고,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 자재롭고 결정적인 이해력으로 믿음의 신안(信眼)이 청정하고, 지광(智光, 지혜 광명)이 조요(照耀)하여 비추임으로써 널리 경계를 관(觀)하여 일체의 장애를 벗어나서, 10주의 초심에 계합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니,
그렇게 지위를 따라 닦아 나아가는 가운데, 50개 불과(佛果)의 단계를 안립하는 법문방편(法門方便) 모두가 부동지로써 그 근본을 삼는 것이다.
이상으로 초발심주와 치지주와 수행주는 10주 가운데에서 출전심(出纏心, 속박을 벗어나는 마음)의 뛰어남을 터득하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선재동자의 세 선지식이 모두 비구인 것이니,
이는 속박을 벗어난 해탈로서 초발심주와 치지주와 수행주, 3주위(住位) 중의 행상(行相)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 생귀주(生貴住)는 세간의 법칙과 생사의 번뇌에 자재롭지 못한 장애에 대치하여 자재로운 것을 밝힌 것이니,
즉 선재동자가 저자거리에서 미가(彌伽)장자가 윤자경(輪字經)을 설하는 것을 보는 것은,
생사의 저자가 시끄러우면서도 항상 고요한 상적(常寂)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하나의 일일자(一一字)는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서 일(一)과 다(多)가 원만하며,
체(體)를 서로 번갈아가면서 서로 성취하는 호체상성(互體相成)이며,
또 제석천의 보망(寶網, 보배 그물)이 서로 연기(緣起)하면서 겹겹이 사무쳐 비추이는, 영철중중(映徹重重)한 것과 같아서,
일자(一字) 속에 다함이 없는 자구(字句)가 있는 것은, 세간의 명구문신(名句文身)으로서 모든 말학(末學)을 인도함으로써 가르침의 궤칙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세속의 선비인 미가(彌伽)로써 그 행을 성취하는 것은,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을 얻게 한 뒤에 반드시 세간의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정란(靜亂)으로 연기하는 생사의 성품과 만법이 무생무멸(無生無滅)이라는 것과, 세간의 명자(名字)의 의리(義理)와 일체 중생의 언어를 밝힘으로써, 서로가 성취할 수 있록 하는 것이니, 가령 옛날 복희(伏羲) 등의 부류가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는 진속(眞俗)과 신변(身邊)의 두 가지 견해에 대치하여서 대지경계(大智境界)로 하여금 부자재(不自在)한 장애를 타파하게 한 것이니,
가령 선재동자가 해탈(解脫)장자를 친견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을 ‘일체 불찰의 가없는 다라니를 널리 거두어들임(普攝理體佛刹無邊陀羅尼)’이라 이름한 것은, 시방으로 각각 십불찰 미진수의 불국토 바다의 청정한 장엄을 나타내어서 그 모두를 몸 안에 두는 것은, 바로 일체중생신(一切衆生身) 모두가 다함이 없는 무변불찰을 내포하여서 체상(體相)에 걸림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는 진(眞)과 속(俗)의 색상(色相)이 다 빛그림자 같아서, 서로를 용납하여서 중변(中邊, 중심과 변두리)이 없기 때문에, 62견 등의 가없는 온간 견해(사견)들로 하여금 그 성품을 해탈시키고자 함을 밝힌 것이다.
여섯 번째 정심주(正心住)는 지혜가 공적한 작용의 자재롭지 못한 장애에 대치하는 것이니,
선재동자가 해당(海幢)비구를 뵙고 경행(經行)하는 땅 부근에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출입식(出入息)을 여의고 별다른 사각(思覺, 사념)도 없이 그 몸에서 각각 신분(身分, 분신 몸의 나뉨)을 하여 그 분신을 따라 화신(化身)을 내니, 마치 구름과 같이 널리 두루 덮어서 시방에 두루하면서 응당 보는 바를 따르고 있으니, 이는 공적한 작용의 걸림 없는 적용무애(寂用無㝵)를 밝히는 것이다.
이상은 총체적으로 세간과 출세간을 회통하여서 해탈하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이 이후의 4바라밀은 세속에 들어가서 자비를 행하여 자재롭게 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불퇴주(不退住)는 대자대비로써 행을 함께 하는 동행(同行)을 하면서 중생을 섭수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원만자재하지 못한 장애에 대치하여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즉 선재동자가 보장엄원(普莊嚴園)에서 휴사(休捨) 우바이를 친견하는데,
그가 선재동자에게 “나에게는 8만 4천 나유타의 행을 함께 하는 권속이 있어서 늘 이 보장엄원에서 거처한다”고 말한 것은,
대비위(大悲位) 중의 방편바라밀을 행하여 8만 4천 불가설(不可說)의 일체 중생의 번뇌와 함께 하는, 즉 총체적으로는 사(事)를 함께 함으로써 교화하고 이롭게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 나머지 중생도 이 보장엄원에 거주하는 모두는 널리 불퇴전(不退轉)의 지위를 얻는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자비와 지혜의 행을 능히 행할 수 있는 이는 모두가 이와 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여덟 번째 동진주(童眞住)는 속박에 처하려 함께하는 동사(同事) 함으로써 세간의 남은 습기로 인하여 청정하지 못한 지혜의 장애에 대치하여 청정케 하는 것이니,
즉 선재 동자가 비목구사(毘目瞿沙) 선인(仙人)을 친견한 것은 대지혜가 청결해서 오염되는 바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휴사(休捨) 우바이와 이 선인이 거주하는 곳의 이름이 같은 해조처(海潮處)인 것은, 이 자비와 지혜가 일체라서 비록 물들지라도 더럽혀지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만약 자비를 따라 지혜를 닦는다면 오히려 습기가 경계에 물드는 마음이 있을 수 있으나,
곧 제7과 제8의 두 지위가 회통되어서 한 번 종결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만약 지혜를 따라 자비를 행한다면 물드는 습기의 염습(染習)이 없으니, 곧 사자당왕녀(師子幢王女)인 자행동녀(慈行童女)가 이에 해당되는 것이니, 사유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홉 번째 법왕자주(法王子住)는 법을 설하는 데 자재롭지 못한 장애에 대치하여 자재롭게 하는 것으로,
선재동자가 승열(勝熱)바라문을 친견함으로써 도산(刀山, 칼 산)에 올라 화취(火聚, 불구덩이)에 들어가 고행(苦行)을 행할 때, 천(天)과 용과 신(神)과 인(人)과 비인(非人) 등의 오는 이들은 그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열 번째 관정주(灌頂住)는 자비와 지혜의 자재롭고 청정하지 못한 장애에 대치하여서 청정을 얻게 하는 것이니,
즉 선재동자가 사자당왕녀(師子幢王女)인 자행동녀(慈行童女)를 친견하는 것이다.
왕(王)이란 지혜가 자재로운 것이며,
여(女)란 자비를 따라 사(事)를 함께 하는 데 오염의 습기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지혜가 원만해지면 자비를 좇아 세간에 처하기 때문에 동사(同事)하면서도 염습(染習, 물듦의 습기)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상 열 가지의 십종대치(十種對治)는 모두 일념의 심상(心上)과 초발심(初發心)의 시(時)와
일행(一行)에서의 일시(一時) 안에서 전후(前後)의 사이가 없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장애의 십종장법(十種障法)에 대치하여 일법(一法)ㆍ일심(一心)ㆍ일지혜(一智慧)를 이루면서도,
일행(一行) 속에서 백 가지의 다함이 없는 십십무진법문(十十無盡法門)이 모두 자심(自心, 자기 마음)의 부동지불로서 체(體)를 삼는 것이니,
법사(法事) 속에 이 열 가지의 다함이 없는 십종무진법문(十種無盡法門)을 갖추어서,
동(同)과 별(別), 일(一)과 다(多)가 자재롭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열 가지의 십종대치(十種對治)가 일시에 습관(習慣)을 자재롭게 하는 까닭에,
3승의 권교에서 이해력이 낮은 중생을 위하여 세간 삼세의 성품을 간직함으로써 불과가 3아승기 밖에 있다고 설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자기 마음의 자심근본무명분별(自心根本無明分別)의 종자(種)로서 문득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이루고,
법계의 체용을 ‘믿음으로 나아가 깨달아 들어가는 신진오입(信進悟入)의 문(門)'으로 삼기 때문에,
믿음으로 신지위(信地位)에 들어가 닦아 나가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를 거치기가지에 총체적으로 근본부동지불을 여의지 않는 것이고,
일시(一時)ㆍ일념(一念)ㆍ일법(一法)ㆍ일행(一行)을 여의지 않는 것이나,
무변무량(無邊無量)하고,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인 법계와 허공계의 미진수 법문(法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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