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6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12) 현수품(賢首品)
앞으로 이 현수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데 대략 4 가지 문으로 분별을 지을 것이니,
첫 번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며,
두 번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二釋品來意)이며,
세 번째, 품의 종지의 취지를 해석하는 석품종취(釋品宗趣)이며,
네 번째, 신심의 퇴주(退住)를 밝히는 명신심퇴주(明信心退住)이며,
다섯 번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다.
첫째의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란,
어떠한 이유로 명칭이 현수(賢首)인가?
행(行)에 의거하여 보살의 명칭을 세우고, 보살이 설한 법과 행에 의거하여 품의 명칭을 세우기 때문이다.
현수(賢首)라는 것은 여래인과(如來因果)와 보현의 5위행문(五位行門)을 믿고 이해하되,
그 심행(心行)이 순조롭고 온화하고 정직하며, 깊은 심심(深心)과 정념(正念)으로 선근(善根)을 기꺼이 모아서,
항상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을 현(賢)이라 칭하며,
처음 범부에서부터 단박에 법계를 드러내어 모든 부처님의 제불인과(諸佛因果)와 이지(理智)가 일시에 밝게 나타나는 것을 수(首)라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법주(法主)의 해행(解行)에 의거하여 명칭을 세운 것이다.
이 현수(賢首)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과해(果海)에 있는 문수와 보현행의 현수인 것이니,
부처님의 인과이지(因果理智)를 믿는 초수(初首, 첫 머리)이며, 원만한 법계의 해행(解行)의 시종(始終)이 없는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현수품(賢首品)이 되는 것으로,
이는 부처님과 문수와 보현의 과행(果行)으로 믿는 자의 첫머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의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二釋品來意)을 설명하면,
제2회(會) 이후 다섯 품의 경전은 단지 10신(十信) 보살이 수행하는 법문과 140원(願) 등의 법을 밝힌 것이지만,
이 품은 10신(十信) 속에서 기꺼이 닦는 불과(佛果)와 행하는 바의 소행행원(所行行願)의 공덕이 광대함을 밝히는 까닭에 이 품이 온 것이다.
셋째의 품의 종지의 취지를 해석하는 석품종취(釋品宗趣)를 설명하면,
이미 10신심(十信心)을 생(生)하게 함으로써 복과 이익을 얻는 것이 종지의 취지가 됨을 밝힌 것이다.
넷째의 신심의 퇴주(退住)를 밝히는 명신심퇴주(明信心退住)를 설명한다면, 이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3승(三乘)이요, 그 둘은 1승(一乘)이다.
먼저 3승(三乘)이란, 예를 들자면, 기신론(起信論)에 세 가지의 발심(發心)이 있으니,
그 하나는, 믿음을 성취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그 둘은, 이해와 행의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그 셋은, 증득의 증발심(證發心)이다.
그 첫 번째의 믿음을 성취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사람에게 의지하고, 어떠한 행을 닦음으로서 믿음을 성취하게 되어서 능히 발심을 감당하는 것이니,
소위 부정취(不定聚)에 의거해서 중생에게 선근을 훈습(熏習)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신업(信業)의 과보가 능히 10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여 무상(無上) 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부처님께 몸소 공양을 받들어 올리고, 신심(信心)을 수행하여 1만 겁을 지나야 신심을 성취하는 까닭에
모든 불보살이 발심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니,
혹은 대자비로써 능히 스스로 발심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정법이 소멸할 즈음에 인하여 정법을 수호하는 인연으로써 능히 스스로 발심하게 하는 것이다.
ㅡ삼정취(三定聚)= 중생(衆生)의 근기를 세 부류로 구분한 것
①사정취(邪定聚),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성불하지 못할 중생.
②부정취(不定聚), 어정쩡하게 기로(岐路)에 있는, 성불 할 수도 있고 성불하지 못할 수도 있는 중생.
③정정취(正定聚), 업장(業障)이 가벼워서 성불할 중생.
이렇게 신심을 성취해서 발심하게 되는 자는 정정취(正定聚)에 들게 되어서서 궁극적으로, 다시는 물러서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를 여래의 종자 중의 정인(正因)의 상응(相應)에 머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해와 행을 발심하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반드시 더욱 뛰어난 전승(轉勝)하게 되는 것을 앎으로써, 이 보살이 첫 믿음에서부터 장차 제1아승기겁에 이르기까지 원만하게 하고자 하는 때문에 진여법(眞如法)의 깊은 이해가 현전하면서 닦는 바가 상(相)을 여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증득의 발심의 증발심(證發心)이라는 것이란,
정심지(淨心地)에서부터 나아가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또한 경계를 증득하는 것인가?
이른바 진여는 전식(轉識)의 설(說)에 의지하는 것으로 경계를 삼으나,
이 증득이라는 것은 경계가 없는 것으로, 오직 진여지(眞如智)일 뿐이니 그 명칭이 법신(法身)이 되는 것이다.
또 논(論)에서는 “만약 어떤 중생의 선근이 미미해서 아득한 옛부터 번뇌가 깊고 두터우면,
비록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게 될지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나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킬 것이며,
설령 대승을 구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 근기가 정해지지 않아서 혹 어떤 때에는 나아가기도 하고, 혹 어떤 때에는 물러난다”고 하였으니, 이 말씀의 대의(大意)는 자기의 선근이 미미해서 타자에 의거해 발심하는 자와 혹 이승인의 가르침으로 발심하게 되는 이는, 그 이해와 행이 실답지 못하여서, 그 모두가 소득이 있는 유득(有得) 증득이 있는 유증(有證) 버리는 것이 있는 유사(有捨), 취함이 있는 유취(有取)함이 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는 퇴위(退位)에 머무는 것이다.
또한 논(論)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의 선법(善法)을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법(眞如法)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대략 4 가지의 방편을 설한다.
첫째,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은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무생(無生)이라서, 망견(妄見, 망령된 견해)를 여의었음을 관함으로써 생사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일체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가 상실되지 않는, 일체법인연화합업과부실(一切法因緣和合業果不失)함을 관함으로써, 대자비를 일으켜 온갖 복덕을 닦아 중생을 교화하고, 열반에 머물지 않는 까닭에 법성의 무주(無住)함을 순조롭게 따르는 것이다.
둘째, 능지방편(能止方便)이란, 이른바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능히 일체의 악법을 그치게 하여서 다시는 자라나지 않게 함으로써 법성의 온갖 잘못을 여읨을 따르는 것이다.
셋째,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란, 이른바 부지런히 삼보(三寶)를 공양하고 예배하고 찬탄하고 기뻐하면서 모든 부처님께 청하며,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맑고 돈독한 마음의 순후심(淳厚心)을 쓰는 까닭에 믿음이 더욱 자라서 이에 능히 무상도(無上道)를 구할 뜻을 세우는 것이며,
또 불(佛)ㆍ법(法)ㆍ승(僧)의 힘이 수호하는 바를 말미암은 때문에 능히 업장(業障)을 녹이고 선근이 퇴보하지 않음으로써 법성의 치장(癡障, 어리석음의 장애)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란, 이른바 원(願)을 발하여 오는 미래가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궁극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함으로써, 법성의 광대함이 일체 중생에 두루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하여 피차(彼此, 나와 남, 이것과 저것)를 가리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궁극적인 적멸을 따르는 것이다.
보살이 이같은 마음을 발하는 까닭에 소분(少分, 약간)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는 것이며,
법신을 보게 된 까닭에 그 원력을 따라 능히 팔상성도(八相成道)를 나타내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여전히 법신(法身)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무량한 과거 세상을 지나 오면서 유루업(有漏業)을 여전히 능히 결단하여 끊어내지 못하였고, 소생(所生, 낳는 바)을 따른 미미한 고통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논(論)에서 설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건대, 소분(少分, 약간)이나마 법신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원만해져서 10주의 지위에 들어간 것이니,
이상은 3승(三乘)이 10신의 원만한 마음을 발해서 10주의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들어가는 것은 원력이기 때문에 성불하는 것이다.
다음은 1승(一乘)의 발심으로,
이 경전에서 10신의 발심은 초발심할 때의 초회(初會)에서 여래께서 처음 성취한 시성정각(始成正覺)의 과(果)와
보현보살의 법계의 미진(微塵)과 모공(毛孔)의 중중(重重, 겹겹)함이 무진하여서 근기에 따른 근본지(根本智)의 행과(行果)로 신심을 일으켜서, 저 모든 부처님들께서 얻은 과(果)를 믿는 것이며,
제2회의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여래의 과보와 원만한 과(果)와 행과(行果)로서 스스로 믿고 들어가면서 수행하는 것이닌,
즉 금색 등으로 10색(十色)의 세계는 바로 자각(自覺)의 이(理)를 밝힌 것이며,
부동지불 등으로 10지(十智) 여래는 바로 스스로의 마음이 믿는 바의 자심불지(自心佛智)라는 것을 밝힌 것이며,
문수사리는 바로 자기 마음의 자심지(自心智)에서 분별하는 분별묘혜(分別妙慧)가 고금을 통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동일한 체용(體用)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틀리지 않아야 비로소 그 명칭이 믿음의 발심인 신발심(信發心)이 되는 것이다.
이 신심이 종결된 후의 불명호품(佛名號品)은, 곧 믿고 있는 바의 시방시성정각(十方示成正覺)을 보이는 불과의 명호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며,
사성제품(四聖諦品)은 곧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설한 법문이 중생계에 두루하면서 계(界)를 따라 명칭이 다름을 밝힌 것이며, 광명각품(光明覺品)은 바로 여래의 지혜 광명의 경계가 법계를 두루 비추면서도 극진(極盡)함이 없는 까닭에 발신심자(發信心者)로 하여금 관(觀)으로써 관(觀)하게 하여서, 그 마음이 광박(廣博)하게 되는 것이 부처님의 경계와 같음을 밝힌 것이며,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은 10신심 보살의 10 가지의 행하는 바의 법이 자기가 닦는 바의 행임을 밝힌 것이며,
정행품(淨行品)의 140대원(大願)은 바로 10신심의 지위에서 발한 대원으로 대비문(大悲門)을 성취해서 보현행을 갖추는 것이다.
이 현수품(賢首品)은 10신심의 기꺼이 닦는 불과의 공덕이 무유진극(無有盡極)하여 다함 없음을 밝힌 것인,
처음 10신심을 발할 때 이 품을 수지하고 독송한 공덕이 십불찰미진수 부처님께 1겁 동안 공양한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밝혔거늘, 하물며 그 이해를 따라 행하면서 닦아서 수치(修治)하는 것이겠는가?
이 경전의 10주 초심에서, 겨우 발심할 때 법신이 시방에 두루하면서 시성정각(示成正覺)을 보이는 것이 십주위발심공덕품(十住位發心功德品)에 있으니, 그 지위에 이르러서 밝힐 것이며, 경문이 번거로워서 그 것을 인용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대의를 대략적으로 밝힌다면, 이 경전에서 10신심(十信心)을 발한 것은
단지 법계의 부사의승(不思議乘)과 일체지승(一切智乘)으로 그 마음을 발한 것일 뿐,
부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불법을 의지하도 않으며, 보살을 의지하지도 않으며, 보살법을 의지하지도 않고,
성문법과 독각법을 의지하지도 않고, 세간법을 의지하지도 않으며, 출세간법에 의지해 마음을 발한 것도 아니며,
다만 의지하는 바가 없는 무소의(無所依)로서 보리심을 발하고, 다만 일체지(一切智)로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니,
이는 사물에 의탁하여 보리심을 발하는 3승(三乘)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즉 3기겁(祇劫, 3 아승기겁) 뒤에 불과(佛果)가 있다는 것에 의지하는 때문에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아니며,
현재나 삼세에 불과가 있다는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보리심을 발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뜻으로, 이 믿음에 들어간 자는 다 퇴보가 없으며,
설령 습기(習氣)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가 잠시 퇴보를 생각한다 할지라도 신위(信位, 십신위)와 주위(住位, 십주위)에 한 번 이르게 되면 퇴보하지 않는 까닭에 자기의 몸과 마음이 총체적으로는 법계불(法界佛)의 자타(自他) 없는 성품이라는 것을 바로 믿게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시방 모든 제불(諸佛)이 부처님의 의지함이 없고 머묾이 없는 지혜의 환주장엄문(幻住莊嚴門)으로 법계ㆍ허공계와 동등한 것으로, 법성이 항상 시방에 두루하여 여영(如影, 그림자)과 같이 색신(色身)을 대현(對現)하면서도 자신과 동등하기 때문에 본래 둘이 아닌 불이(佛二)이며, 체(體)가 무차별(無差別)한 까닭에 시방의 제불(諸佛)의 지신(智身)도 여영(如影, 그림자)과 같으며, 말하는 바의 소언(所言)이 여향(如響, 메아리)와 같은 것이니,
이렇게 믿고 이해한다면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것도 이렇게 알아야 하고, 이렇게 믿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니 어찌 퇴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전신(全身, 온 몸)과 전심(全心, 온 마음)의 일체 경계가 총체적으로 이 법계의 일진법신(一眞法身)의 체용이지(體用理智)이거늘, 어느 곳에 머물 것이며? 어느 곳으로 퇴보하여 이르겠는가?
만약 몸과 마음이 의지하거나 머물 수 있다면, 의지하는 곳을 내버릴 때 즉시 퇴보와 상실이 있을 것이지만,
스스로 몸과 마음이 본래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고 본래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을 요달한다면,
일체의 언어분별이 허공의 메아리 같아서, 작위 없는 무작연(無作緣)에 응하여,
아무런 근거가 없는 사물의 소리와 같이 본래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을 요달하여 믿음과 이해를 낸다면, 퇴전(退轉)함이 없겠지만,
의지하는 법이 있어서 발심한 자는 얻은 바와 의지하여 집착하는 곳을 내버리게 되면, 이내 퇴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이러한 때문에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증득으로 발심한 자도 퇴위(退位)에 머무는 자가 많다”고 한 것이니, 얻은 바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사의승(不思議乘)과 일체지무의주승(一切智無依住乘)을 타고서 보리심을 발한 이는 한 번 이르게 되면 퇴보하지 않는 것이니, 만약 퇴보가 있는 자는 단지 신심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며,
부처님의 교법(敎法)과 여래소승(如來所乘)에 소득이 있기 때문이며,
취하고 버림이 있기 때문이며, 믿음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라서, 믿음의 흐름인 신류(信流)에 들지 못하는 것이다.
또 이 경전에서는 “설령 어떤 보살이 무량한 백천의 나유타겁을 거치면서 6바라밀을 행하여 6신통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듣지 못하였다면 오히려 그 명칭이 가명(假名)의 보살이며 진(眞) 보살이 아니니,
설령 다시 들을 때가 있다 할지라도 불신(不信)하여 불입(不入)한다”고 하였으니, 경전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 품의 게송에서는 “일체 세계의 온갖 군생(群生) 중에서 성문승을 구하고자 하는 이는 적으며,
독각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으며, 대승에 나아가는 자는 더 더욱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대승에 나아가는 자도 오히려 쉬운 것이니, 이 법을 능히 믿는 것이야말로 배(倍)나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아래의 게송에서는 “손으로 10불찰을 받들고 1겁이 지나도록 공중에 머물러 있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은는 오히려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이 법을 능히 믿는 것이야말로 배(倍)나 어렵다”고 했으니,
이렇게 믿기 어려운 난신(難信)을 넘어서서 능히 뛰어넘어서 참되게 믿게 된다면 결코 퇴보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이 경전에서 보현보살이 “다만 여래의 명호와 설한 바의 법문만을 듣고 나서, 그 들은 바를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능히 금강지(金剛智)의 종자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이 소금강(少金剛)을 먹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지었으니,
만약 원인(遠因)으로써 한다면 모두 퇴보하지 않겠지만, 만약 현재 성불하는 현성불인(現成佛因)으로써 한다면, 여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다섯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을 해석한다면,
이 1품 경전의 뜻을 둘로 나누면,
그 하나는 해당되는 품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먼저 해당되는 품을 장과한다는 것에서는 이 1품을 14단락으로 장과하겠다.
첫 번, “이때 문수사리(爾時文殊師利)” 이하 두 행의 경문과 두 행의 게송은,
문수사리가 보리심을 발한 공덕을 설해주기를 청하는 분(分)이며,
두 번째, “이때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기를(爾時賢首菩薩以偈荅曰)”
이하 614행의 게송은 현수(賢首) 보살이 답한 것이며,
마지막 3행 반행의 경문은 게송을 설해서 모든 부처님의 허가(許可)를 감응함을 밝힌 분이다.
세 번째, 처음 “착하도다, 그대는 반드시 삼가 들으라(善哉仁者應諦聽)” 이하 8행의 게송은,
발심의 공덕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광대해서, 힘을 따라 약간 설함을 밝힌 분이니,
보리심은 변제(邊際)로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공덕 역시도 반드시 이와 같음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 “보살이 뜻을 발해 보리를 구함(菩薩發意求菩提)” 이하 6행의 게송은 초발심의 인(因)한 바를 밝힌 분이다.
다섯 번째,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하여 항상 청정함(深心信解常淸淨)” 이하 18행의 게송은
삼보를 얻어서 이익이 늘어남을 밝힌 분이다.
여섯 번째, “만약 늘 모든 부처님을 신봉하면” 이하 95행의 게송은 수행을 증진해서 과(果)를 얻음을 밝힌 분이다.
일곱 번째, “보살이 부지런히 대비행(大悲行)을 닦아서” 이하 151행의 게송은 보살이 과(果)를 얻고 자비를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 공양을 자재롭게 일으키는 분이다.
여덟 번째, “뛰어난 삼매가 있으니 그 명칭이 안락(安樂)이다(有勝三昧名安樂)” 이하 160행의 게송은
광명을 놓는 인과를 밝힌 방광명인과분(放光明因果分)이다.
아홉 번째, “이 같은 등비(等比)의 광명문” 이하 20행의 게송은 광명의 출처와 광명의 차별을 밝힌 분(分)이다.
열 번째, “뛰어난 삼매가 있어 능히 출현하니(有勝三昧能出現)” 이하 81행의 게송은 삼매의 자재함을 밝힌 분(分)으로,
이와 같이 동이(同異)가 걸림없이 자재한 대방망삼매문(大方網三昧門)에 나고 드는 입출(入出)과 숨고 나타남의 은현(隱現)이 동시에 자재한 것은, 중생업(衆生業)의 차이를 따라 보는 바가 달라서 차별한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 도를 얻어 자재하기 때문에 중생의 업을 따라 자재로운 것이다.
그러나 여래심(如來心)은 조작하는 성품이 없는 무작성(無作性)이기 때문에 지혜가 그림자와 같이 따라 응하면서 오고 가는 성품이 없고, 취하고 버릴 만한 것이 없음이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비유와 같으며,
물이 땅 속으로 흐르면서 온갖 초목들이 제각각 자생(滋生)하게 하는 비유와 같으며,
봄볕이 초목을 생육하는 비유와 같으며, 물이 물고기와 용을 양육하는 비유와 같으며,
땅에서 자라나는 초목의 비유와 같으며, 불이 밥을 이루는 비유와 같으며,
바람이 이익을 받는 중생의 장단(長短, 형체의 크고 작은 모습)과 수생(壽生, 장수와 요절)을 발생하는 비유와 같으니,
비유로 생각하고 지혜로 비추어서 집착의 정(情)인, 집계정(執繫情)이 없어진다면 진(眞)에 따르는 진지(眞智)가 본질적으로 그러함의 여시(如是)에 합일할 것이나,
그러나 집계(執繫, 집착의 속박)이 있다면, 설령 출세간의 도과(道果)를 한 푼 얻었다할지라도 능히 대자재(大自在)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열한 번째, “여래께서 다 함께 설하되(一切如來咸共說)” 이하 158행의 게송은 스무 가지 비유를 들어 설함을 밝힌 분(分)이다.
여두 번째, “제1지혜와 광대혜(第一智慧廣大慧)” 이하 14행의 게송은,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서 스스로의 지혜를 그와 동등하게 하고자 함이 믿기 어려움을 밝힌 분이다.
열세 번째, “십찰진수(十刹塵數)의 중생 처소” 이하 4행의 게송은 믿음으로 기꺼이 받아 지니는 신락송지득(信樂誦持)하여 복을 얻음을 밝힌 분이다.
열네 번째, “그때 현수보살” 이하 3행 반의 경문은,
현수보살이 설한 법문의 위엄이 시방 모든 부처님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허가(許可)에 감응되는 것을 밝힌 분이다.
다른 하나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해의(隨文解義)이니, 경문에 자세히 밝히고 있으므로 해석하지 않는다.
유현하고 은밀해서 알기 어려운 유은난(幽隱難)이란 것은 바야흐로 해석할 것이지만,
앞에서 과(果)로써 믿음을 성취하는 것은 다 밝혔으니, 진실증(眞實證, 진실한 증득)에 들어가는 것은,
아래에서 제석천궁에 올라 10주 법문을 설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니,
이 1회의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은 서분(序分)이며,
나머지 다섯 품 경전은 정설분(正說分)이며,
명법품(明法品)의 후미에서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것은 유통분(流通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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