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16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11) 정행품(淨行品)


앞으로 이 정행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데 대략 4 가지 문으로 분별을 지을 것이니,

첫 번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며,

두 번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二釋品來意)이며,

세 번째, 품의 종지의 취지를 해석하는 석품종취(釋品宗趣)이며,

네 번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다.


첫째의  석품명목(釋品名目)이란,

어떠한 이유로 명칭이 정행품(淨行品)인가?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의 온갖 견해의 무명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애착을 통하여, 이제사 보리심을 발하게 되어 정법(正法)을 즐겨 믿는 신락정법(信樂正法)으로 이하여 일체의 모든 견해들을 단박에 뒤집어서 대원(大願)을 성취하여, 대비문(大悲門)을 길이 기르는 것이니,

 

만약 오로지 3공(三空)의 무상(無相)만으로 대치하고 대자대비를 낳지 않는다면 보현행(普賢行)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먼 길을 가고자 할 때, 발이 아니면 가지 못하고,

대자비를 행하여 보현문의 충만한 법계행에 들고자 할 때네는 일체의 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함에 잘못 됨이 없어야 문득 만행(萬行)의 장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가 이 140의 대원문(大願門)을 닦아 익힘으로써, 문득 보현행에 들게 되는 까닭에 정행(淨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이 원(願)이 없다면, 설령 번뇌를 끊었을지라도 곧 이승(二乘)의 행인 것이며,

설령 보살이라 할지라도 곧 정토에 나는 보살인 것이다.

이 140의 대원문(大願門)으로 단박에 일체 진로(塵勞)의 행문(行門)을 청정하게 하여서 문득 보현의 법계행을 성취하는 까닭에 명칭이 정행(淨行)인 것이며,

이 대원으로 일체 세간의 모든 행을 장엄하여 총체적으로 법계를 일체 도량을 삼기 때문에 명칭이 정행(淨行)인 것이며,

이러한 온갖 견해로 대선근(大善根)을 이루는 까닭에 명칭이 정행(淨行)인 것이다.


둘째의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二釋品來意)을 설명하면,

이전의 문명품(問明品)은 그 10신(十信)의 해(解)를 성취하는 것이며,

이 품은 10신(十信)의 행(行)을 이루는 까닭에 이 품이 반드시 오는 것이니,

나아가 ‘과행(果行)이 원만한 이래(乃至果行圓滿)’까지는 그 대원(大願)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셋째의 품의 종취(宗趣)를 해석하는 석품종취(釋品宗趣)를 설명하자면,

지수(智首) 보살은 하방(下方)의 파리색(頗梨色)세계이고, 부처님의 명호가 범지(梵智)인 것은,

일체 불법(佛法)의 근본 자체에 순백의 청정한 오염 없는 지혜를 밝힌 것으로, 이를 능문(能問, 듣는)의 사람으로 삼으며,

문수사리보살은 바로 일체 부처님의 훌륭히 가려내는 묘혜(妙慧)이니, 설법의 주체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 부처님의 근본지혜(根本智慧)의 문으로 스스로 문답의 주(主)와 반(伴)이 되어서 140대원의 문을 설함으로써,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 등 보현법계의 다함이 없는 무진행해(無盡行海)를 이루고,

본정지(本淨智, 근본청정지혜)로 묘혜(妙慧)에게 물어서 그 140의 청정한 원문(願門)을 설하게 함으로써

신(信) 등의 6위(六位) 중에 오염과 청정의 무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

 ㅡ아집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오염된 것이며, 법을 집착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청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7지(七地)의 법집현행(法執現行)과 10지 이래의 법집(法執)의 습기(習氣)와 불지(佛地)의 두 가지 어리석음을 일시에 정화시켜서 이 신심 속에 편집(偏執)됨이 없게 하고, 원(願)으로 방비함으로써 적용(寂用)으로 하여금 걸림 없게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의 본정지(本淨智, 근본청정지혜)와 묘혜(妙慧)의 문으로 140의 대원(大願)을 설하여 오염과 청정의 두 가지의 장애에 방비하는 것으로써 종취(宗趣)를 삼는 것이다.


그리고 6위(六位)에서의 신(信)과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의 지위에 따른 수도상(修道上)의 번뇌를 통틀으면,

6위 중 1위상(一位上)에 20이 있는 까닭에, 6위(六位)의 전부는 120이 있는 것이 되며,

또 10개의 십근본무명(十根本無明)이 모두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의 두 견해로 인하여 20이 되는 까닭에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진수(進修)에 오염과 청정의 번뇌가 모두 140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번뇌의 장애를 막기 위하여 140원(願)을 일으켜서 닦아 나가는 자들로 하여금 첫 신심에서부터 이(理)와 사(事)를 원융하게 함으로써 신심자로 하여금 그 원체(願體)가 줄어들거나 파괴되지 않고 요달하여서, 자심(自心)의 본정지(本淨智, 근본청정지혜)와 묘하게 가려내는 묘택(妙擇)의 지혜(慧)로서 동(動)과 적(寂)이 함께 참되게 함으로써 편벽된 수행이 되지 않게 하는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화장(華藏)세계는 수미산 미진수와 같은 풍륜(風輪)이 유지하는 것이니,

그 풍륜상의 일체 장엄은 대원(大願)의 풍륜은 능히 만행(萬行)의 행으로 과(果)를 낳게 되고, 그 인(因)으로 과(果)를 유지하기 때문에 원력으로 굳게 유지되는 것이며, 그로 인(因)하여 풍륜이 찰(刹, 세계)을 가지는 과보를 얻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화장(華藏)의 장엄이 모두 보현의 원력(願力)으로부터 일어났다(如是 華藏莊嚴 皆從普賢 願力起)”고 하나니,

원(願)이 없기 때문에 행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장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무진(無盡)의 의과보(依果報)에 감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신심(信心)에서 법성의 비지(悲智)와 묘혜(妙慧)의 만행이 모두 부처에 의거해서 닦아 나가게 될 뿐,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만약 부처님을 여의고서 따로 자법(自法)이 있다고 한다면,

신심을 이루지 못하여서 10 가지의 뛰어난 십종승해(十種勝解)를 성취하지 못하고, 수행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설령 고행으로 부지런히 정진한다 할지라도, 이는 삿된 사정진(邪精進)일 뿐이라서, 누겁(累劫, 많은 세월) 동안 고생하여도 인천(人天)에 태어나서 일념에 탐(貪)을 내거나 성을 내어서 그러한 일체를 모두 태워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이 품의 아래 경문에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도(道)에 머물고, 중생을 따라 머물면서 항상 벗어나지 않으며,

여러 법상(法相)들을 능히 모두 통달하여서 일체의 악을 끊고, 

여러 중선(衆善)을 구족하여서 당연히 보현의 색상제일(色像第一)과 같으며,

일체의 행원(行願)을 모두 구족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상은 종지의 취지를 밝힌 것이니, 그 뜻은 범부가 집착하는 마음과 경계의 차별업(差別業)을 돌이켜서

모두가 원해(願海)를 이루어 보현문을 구족하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의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을 둘로 나누면,

그 하나는, 1품 경전의 뜻을 과(科)한다는 것이니, 그 한 품의 경의(經意, 경문의 뜻)을 14단락으로 나누겠다.
하나, “이 때 지수(智首)보살(爾時智首菩薩)” 이하와

“어떻게 잘못이 없는 신업(身業)ㆍ어업(語業)ㆍ의업(意業)을 얻을 수 있으며?(云何得無過失身語意業?)”에서부터

모두 10 가지의 질문이 있으며, 그 10 가지의 질문 중에는 모두 110개의 물음이 있으니, 

세간업(世間業) 등을 묻는 것으로 아래와 같이 알 수 있다.


둘, “어떻게 생처구족(云何 生處具足)”에서부터 10구족(十具足)을 묻는 것으로,

그 중의 처음 중족구족(重族具族)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그 하나는 세간이니, 족성가(族姓家)에 태어나는 것이 종족(種族)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세간(出世間)이니, 곧 불가(佛家)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의 종성(種性)을 갖추는 것이다.

  즉 생상(色相)과 염혜(念慧) 등의 모두가  불가(佛家)요, 세간(世間)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 “어떻게(云何)” 이하 열 가지의 십종혜(十種慧)를 물은 것은,

모두가 출세간의 뛰어난 지혜의 출세승혜(出世勝慧)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넷, “어떻게(云何)” 이하는 열 가지 힘의 십종력(十種力)을 물은 것으로,

처음의 초인력(初因力)이란, 이른바 세세생생 가운데에서 운(運)에 맡겨 능히 대보리를 발하는 능력이며,

욕력(欲力)이란, 의지(意志)가 대보리심을 즐겨하여 물러나거나 읽음이 없는 무퇴실(無退失)이며,

방편력(方便力)이란, 대원(大願)으로 스스로 잘 깨닫는 선자각오(善自覺悟)하여서 공력(功力)을 허비치 않는 것이며,

또한 능히 남을 깨우치면서도 공력(功力)을 덜어서 우회하지 않는 것이다.

연력(緣力)이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에 망실됨이 없이 항상 대원을 일으키는 것이며,

근력(根力)이란, 대원(大願)의 선근을 잃지 않는 것이며,

관찰력(觀察力)이란, 능관(能觀)의 힘이며,

사마타력(奢摩他力, 지 止)과 비발사나력(毘鉢舍那力, 관 觀)은, 관(觀)과 지(止)가 함께 병행하고 자재한 가운데에서,

혹은 먼저 관(觀)한 뒤에 지(止)하며, 혹은 먼저 지(止)한 뒤에 관(觀)하기도 하고,

혹은 지(止)에 즉하여 관(觀)하기도 하고

혹은 관(觀)에 즉하여 지(止)하기도 하면서 모두 자재한 것이며,

사유력(思惟力)이란 올바른 이지(理智)를 잃지 않고 항상 현전하는 것이다.

 

다섯, “어떻게(云何)” 이하 10 가지의 질문은 10선교(十善巧)를 물은 것으로,

처음의 온선교(蘊善巧)라는 것은, 세간의 5온과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5온의 과(果)에 집착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계선교(界善巧)라는 것은, 18계 및 3계의 법과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3계의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며,

처선교(處善巧)라는 것은, 3계(界) 6도(道)로서 그 처(處)를 삼고, 선정의 해탈로서 비처(非處)를 삼는 것이니,

모두 그 가운데(中)를 여의지 않으면서 또한 오염되지도 않는 것이며,

연기선교(緣起善巧)란 것은, 세간의 12연생법을 무너뜨리지 않고 속박에 처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선교(色界欲界無色界善巧)라는 것은, 삼계에 사(事)를 같이 하면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과거ㆍ현재ㆍ미래 선교(過去未來現在善巧)라는 것은,

과거의 겁이 미래의 겁 속에 있고, 현재의 겁이 과거의 겁 속에 있어서 삼세가 서로 사무치면서 다 자재한 것이다.


여섯, “어떻게(云何)” 이하의 10 가지의 질문은 7각(七覺)과 3공(三空)을 물은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일곱, “어떻게(云何)” 이하 10 가지dml 질문은 6도(六度, 6 바라밀)와 4무량심(四無量心)을 물은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덟, “어떻게(云何)” 이하는 부처님의 10력(十力)을 물은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홉, “어떻게(云何)” 이하 10 가지의 질문은 10왕(十王)의 수호(守護)를 물은 것이니,

이는 원행(願行)으로 이르게 된 것으로서 공경을 받게 된 것을 밝힌 것이다.


열, “어떻게(云何)” 이하 10 가지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모든 중생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도(師導)가 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열 하나, “어떻게(云何)” 이하 10 가지의 질문은,

어떻게 중생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묘한 최승최묘(最勝最妙)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것으로, 역시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열 둘, “이때(爾時)” 이하에서 “승묘공덕(勝妙功德)”에 이르기까지 8행 반의 경문은,

문수가 이상의 110개 질문을 받는 것과 함께 지수(智首) 보살의 훌륭한 질문을 찬탄하는 것이다.


열 셋, “불자보살재가(佛子菩薩在家)” 이하 140의 대원(大願)은,

앞의 질문에 답함으로써 10신심(十信心) 보살들로 하여금 항상 그 마음을 써서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의행(意行)을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열 넷, “최하불자약제보살(最下佛子若諸菩薩)”에 있는 3행의 경문은,

교리에 의거하여 행을 행함으로써 그 승익(勝益, 뛰어난 이익)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이상으로, 세간에 있는 140가지의 사법(事法)을 단박에 뒤집어서 140가지 대원을 삼음으로써,

10신에서 수행하는 수행심(修行心)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유위(有爲)의 마음이지만, 능히 10주(十住) 이후 5위의 마음에서 이지대비(理智大悲)의 바다를 이루나니,

이후의 입위(入位)에서의 만행의 바다가 모두 이 140대원의 뛰어난 연력(緣力)을 말미암아 능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ㅡ입위(入位), 10주의 초주(初住)를 입위(入位)라고 하는데, 10신은 아직 법위(法位)에 들지 못한 때문에 입위라 한다.

 

 

만약 초발심 보살에게 이러한 원(願)이 없다면, 닦는 바의 해탈이 모두 성문과 독각의 행을 이룰 것이며,

설령 보살이라 할지라도 단지 정토에 태어날 뿐, 성불할 연(緣)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르침에서는 발심한 보살이 궁극적으로 이 유위(有位)를 요달하고, 그 이지(理智)의 진여(如)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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