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16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10)보살문명품②

 

"아홉 번째로 “이때(爾時)” 이하는

문수 보살이 현수(賢首) 보살에게 “일체 부처께서는 한 길로 출리(出離)함을 얻으셨거늘, 어찌하여 지금 갖가지로 같지 않음을 보는 것인가? (一切諸佛 一道而得出離云何今見 種種不同所?)”라고 질문한 것이며,

“소위” 이하 10행의 게송은 현수의 답으로서 그 가운데 삼문(三門)은"

ㅡ 이통현(李通玄)장자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15권 7에서 이어짐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이 10행의 게송 중에서 처음의 2 행은 법왕(法王)이 오직 하나의 일법(一法)이며, 하나의 일신(一身)이며, 하나의 지혜인 일지(一智)인 것을 찬탄한 것이다. 

 

그 이하 8행의 게송에 4 가지의 대의(大意)가 있으니, 
첫째, 차별적인 불국토가 근본 회향심으로 인(因)하여 성취된 것임을 찬탄한 것으로,

회향심으로 근기에 나아가 사물을 이롭게 함으로써 몸(身)과 땅(土)과 교의(敎義)가 모두 근기에 따름을 밝힌 것이다.

둘째, 모든 부처님의 자기 과보인 불자보(佛自報)의 경계는 행인(行因)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셋째, 중생의 차별적인 일이 모두 중생의 심행(心行)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자심(自心)을 따라 다르게 보는 것이지 부처님이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넷째,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능히 근기에 나아가 법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해석하며,

명칭이 현수(賢首)인 것은 이 열 가지 십종신심(十種信心)을 얻으니, 부처님의 과덕(果德)이 자기 마음의 자심(自心)과 더불어 체(體)가 하나임을 믿음으로써, 의심이 걸린 곳과 막히고 통한 곳을 잘 알아서 그 현위(賢位)에 들어가기 때문에 현수라 칭하는 것이다.

이는 상방(上方)의 지위이니, 그 뜻은 이 신위(信位)에서 마음의 지혜와 경계가 다 허공 같아서 포함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이와 같이 방해나 장애가 없는 것이 바로 현인(賢仁)의 덕이기 때문에 현수라 칭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세계의 명칭이 평등색(平等色)인 것은 이 것이 상방(上方)이라면, 몸과 마음이 허공과 합치함을 밝히는 까닭에 세계의 명칭도 평등색임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가 관찰지(觀察智)인 것은 자심(自心)의 공지혜문(空智慧門)으로, 제법(諸法)이 모두 공(空)해서 집착할 바가 없음을 능히 잘 관찰할 수 있는 까닭에 관찰지라 칭하는 것이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라는 것은,

자심(自心)의 근본 성품이 공(空)하여 분별이 없는 부동지불(不動智佛)로써 인(因)을 삼고,

닦아 나아가면서 법공(法空)에 이르는 관찰지불(觀察智佛)로써 과(果)를 삼는 것이니,

이는 체용이 원만해서 인과(因果)가 일성(一性, 하나의 성품)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의 일신(一身)ㆍ일심(一心)ㆍ일지혜(一智慧) 법문을 설한 것이니,

이는 과(果)에 계합하여 인(因)을 회통함으로써 시말(始末, 처음과 끝)이 둘이 아니, 모두가 하나로써 근본을 삼음을 밝힌 것이다.
 
묻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게송의 초(初)에서 “문수의 법은 항상 마찬가지이다(何故頌初云文殊法常爾?)”라고 한 것입니까?

답한다.
문수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인 제불혜(諸佛慧)이니, 부동지(不動智)는 체(體)이며 문수(文殊)는 용(用)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근본지인 체용문(體用門)을 갖고서

일체의 신심(信心) 있는 자와 더불어 인과(因果)와 체용(體用)을 짓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본에 의거하는 까닭에 구경과(究竟果)의 원만함에 이르기까지 인(因)과 더불어 불이(不異, 다름이 없음)하여서 무이성(無二性)인 까닭에 그 명칭이 “초발심(初發心)과 필경심(畢竟心, 궁극의 마음)의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니,

이는 10신(十信)의 마음을 발하는 것이 어렵고, 믿기 어려운 난신(難信)이고, 들어가기 어려운 난입(難入)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령 듣는 문자(聞者) 모두가 말하기를 “나는 범부인데 어찌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때문이며,

설령 조금 믿는 자라 할지라도 신통의 도력(道力)만이라고 할 수 있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반드시 이와 같이 바르게 정신(正信)하여야, 비로소 바른 믿음의 정신(正信)의 정견(正見)으로 법력(法力)을 가행(加行)하여 법답게 닦아 나아 갈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나아간다면, 무명이 점점 엷어지고, 해탈의 지혜가 밝아지면서 자기가 터득한 법의 깊고 얕음에 의거하여 신통의 덕용(德用)도 점점 자기가 얻은 바를 따라 얻어지겠지만,

믿음도 아직 얻지 못하였으면서 어찌 신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점점(漸漸)’이라고 말한 것은 일시(一時)ㆍ일법성(一法性)ㆍ일지혜(一智慧)에서 옮기지 않은 무의주(無依住,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음)와 무소득(無所得, 얻는 바가 없음)에서의 점점(漸漸)이니,

10현(十玄)과 6상(六相)의 뜻으로 원만히 하는 것이다.

법성의 이(理)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거늘,

다만 무시 이래의 무명에 익숙한 때문에 갑자기 이(理)에 계합하게 되면, 순수하게 성숙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점점(漸漸)이 있는 것이니, 이 점점(漸漸)은 궁극적으로는 시종(始終, 시작과 끝), 연촉(延促, 늦고 빠름), 장단(長短, 길고 짧음) 등의 양(量)이 없는 것이라서 그 명칭을 ‘점점(漸漸)’이라 한 것이다.


열 번째, “이때(爾時)” 이하는 모든 보살들이 함께 문수사리에게 물은 11종불경계(十一種佛境界, 11가지의 부처님의 경계)를 밝힌 것이며,

이하 10행의 게송은 문수사리가 답한 것으로, 그 중에서 세 가지 문을 세우면,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한 것을 설명하면,

이 10행의 게송은 1행이 하나의 게송으로, 그 게송의 문장은 앞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게송의 문장에서 스스로 갖추고 있기에 다시 번거롭게 풀이하지 않겠다.


둘째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설명하면,

문수사리는 한역하면 묘덕(妙德)이니, 묘혜(妙慧)로서 정(正)과 사(邪)를 잘 가려내 자재하기 때문에 묘덕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동방의 묘위(卯位)로서, 묘(卯)가 동방의 진괘(震卦)를 주재함을 밝힌 것이고,

진(震)은 뇌동(雷動)이 되어서 계칩(啓蟄, 겨울잠을 자던 벌레가 봄첨을 맞아 움직이게 됨)이 발생하는 시초이니,

이는 묘혜(妙慧)가 10신심(十信心)을 진동시켜 발생시키는 시초임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묘생(妙生)보살이라고도 하며,

일체 부처님께서 이 혜(慧)로부터 10신해(十信解)가 생겨서, 나아가 보리의 일체 원행(願行)의 바다를 만족시킨다는 것을 밝히는 때문이다.


세계의 명칭이 금색(金色)인 것은 인과체(因果體)의 순백 청정한, 오염이 없는 법을 거양함을 밝힌 것이며,

또 금(金)은 2월이 태(胎)가 됨을 밝힌 것이니, 10신(十信)이 성태(聖胎)가 됨을 나타낸 것이다.

 

'일체처가 금색세계이며 일체처가 문수사리(一切處金色世界,一切處文殊師利)'인 것은 자체성이 없는 무성(無性)의 정혜(淨慧)가 두루 편만함을 밝힌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부동지(不動智)인 것은, 무명이 본래 공(空)한 것이라서 체(體)에 움직임이 없는 것을 부동지라 칭한 것이다.

  

다만 경계에 감응하여 법을 알고, 그릇(器, 크기)에 응하여 근기를 아는 것이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아서,

처소(處所)와 형체(形體)를 얻을 수 없는 것을 지(智)라 이름한 것이며,

취하고 버림이 없기 때문에 부동(不動)이라 이름한 것이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를 설명하면,

묘혜(妙慧)가 인(因)이 되고, 부동지(不動智)는 과(果)가 되며, 또한 서로가 서로의 인과(因果)가 되는 것이다.

 

가령 묘혜(妙慧)로서 법을 잘 가려내어 지(智)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묘혜(妙慧)로 인(因)을 삼고, 부동지로 과(果)를 삼지만,

혜(慧)가 지(智)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면 부동지로 인(因)을 삼고 묘혜(妙慧)의 문수로 과(果)를 삼는다.

 

혹은 지(智)와 혜(慧)가 총체적으로 인(因)이자 총체적으로 과(果)라면, 체용이 하나의 일진(一眞)이라서 두 법이 없는 무이법(無二法)이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며,

또한 지(智)와 혜(慧)가 총체적으로도 인(因)도 아니요 과(果)도 아니라면, 그 체(體)에 본말도 없고 의주(依住)하여 얻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법계(性法界)의 자재로운 지견(知見)이니, 세간의 인과로서 상대적으로 견주어서 얻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 문수사리와 부동지불은 처음 신심을 일으킬 때에도 이로부터 일으키는 것이며,

나아가 신(信)이 끝나도 이를 여의지 않으며,

스스로의 행이 원만하여 정각의 성취를 보임에 이르러서도 이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불지혜(佛智慧)로 깨달음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불지견(佛知見)에 들게 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불지견(佛知見) 지견이란 문수사리의 묘혜(妙慧)와 부동지불(不動智佛)이 이에 해당되나니,

범부든 성인이든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범부들에게 보여서 깨달음에 들게 한 것이다.


열 한 번째로 “이때(爾時)” 이하 8행의 경문은,

이 사바세계의 구종차별(九種差別)을 모두 들었으며,

아울러 시방의 일체 차별이 모두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밝게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든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은 다만 문수사리의 질문에 따라서 해당되는 지위의 보살이 답한 것이니,

그 말씀하신 게송에 의거해서 그 뜻을 취하면 이(理)가 스스로 분명하여 질 것이고,

아울러 세계와 부처님의 명호와 보살의 명호를 통하여 닦아 나아가는 인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총체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법성을 장엄함과 청정 불찰의 네 가지 불찰 중에서 금색세계와 부동지불은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찰이며, 나머지 아홉 세계와 아홉 개의 지불(智佛)은 법성을 장엄하는 불찰이니 10지(十地) 이후가 모두 이에 해당되며,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은 정각의 성취를 나타내 보인 불찰(佛剎)이며,

청정불(淸淨佛)이 설한 불찰은 사제품(四諦品)이 이에 해당된다.

 

이 1품에는 6 가지의 대의가 있으니,

첫째 보살의 명호로서 행을 나타낸 것이며,

둘째 세계의 색깔로서 얻은 이(理)를 나타낸 것이며,

셋째 부처니의 명호로서 얻은 지(智)를 나타낸 것이며,

넷째 방우(方隅)로서 터득한 법(法)을 나타낸 것이며,

다섯째 10신(十信)의 행할 행(行)을 성취하는 것이며,

여섯째 10신(十信)을 닦아 나가는 동이(同異)를 밝힌 것이니,

앞에서 이미 서술한 것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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