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經卷第十九 昇夜摩天宮品第十九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三藏沙門(삼장사문實叉難陀 (실차난타 

19.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6

 

ㅡ각림(覺林) 보살 - 정혜(淨慧) 세계 - 최상안불(最上眼佛)

 

ㅡ각림(覺林) 보살은 선법행(善法行)으로서 역(力)바라밀을 주재한다.

선재동자의  지위 중에서의 선지식의 명호가 부동우바이(不動優婆夷)인 것은 9 법사위(法師位)이며,

여자의 몸인 것은, 법사위에 처할  정결하고 자비롭고 유연함을 밝히 위하여 여인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인이 염부제의 미진겁(微塵劫)을 거치면서 발심으로부터 오기에 마음에 일념도 없고 5욕의 상념도 없어서, 정결과 자비와 유연함이 바로 법사의 덕(德)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각림보살은 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정혜(淨慧) 세계는 수행의 이며, 

최상안불(最上眼佛)은 수행하는 바의 과(果)이니,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최상안인 것이다.

 

각림보살은 마음에 대하여 설하며, 화엄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유심게(唯心偈)와 파지옥게(破地獄偈)가 설하여지고 있으며,

심게(唯心偈)는 화엄경의 중요한 유심사상(唯心思想)과 일심사상(一心思想)을  드러내어 마음을 내세우는 모든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었다.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五蘊)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  짓는  없네."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부처나 마음이나  성품 모두 다함이 없네."

  가운데  번째 게송에서 나타난 마음은 망심(妄心)으로,  마음을 망심(妄心)으로 해석한 유식의 8야뢰야식에 의한 뢰야연기의 소의처(所依處)가 되었다고   있다.

이와는 달리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의 일심(一心)을 여래장 자성청정심과 여래성기심으로 이해하여 법계연기를 체계화시켰으며,  일심(一心)을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체(體)로 보고, 만덕(萬德)을 구족했으며 원융(圓融)하며 만유(萬有)를 포섭한다고 보았다.

 번째 게송이 바로 이러한 화엄사상의 소의처(所依處)라   있으  번째 게송은 60화엄의 게송이  많이 알려졌으며, 그 게송은,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차별이 없다."

다음은 파지옥게(破地獄偈)인데, 이것은 80화엄의 게송이   알려져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성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것이라는 것 보아야 하리라"

 

爾時(이시)林菩薩(각림보살)  承佛威力(승불위력) 普觀十方(보관시방) 而說頌言(이설송언) 

그때, 각림(覺林)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설하였으니, 

 

譬如工畵師(비여공화사) 分布諸彩色(분포제채색) 

虛妄取異相(허망취이상) 大種無差別(대종무차별)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잘 그리는 공화사(工畵師, 화가)가 여러 가지의 채색을 펼쳐 칠하면서

허망하게 여러 가지의 다른 모양들을 그리지만,

그 대종(大種, 물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 지수화풍)에는 차별이 없는 것과 같이,

(그림에는 차별이 있지만 그 지수화풍의 요소에는 차별이 없는 것으로,

대지를 보면 갖가지로 다른 모습이지만 그 땅 자체는 차별이 없는 것과 같이) 

 

大種中無色(대종중무색) 色中無大種(색중무대종) 

亦不離大種(역불리대종) 而有色可得(이유색가득) 

대종(大種, 물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 가운데에는 색도 없는 무색(無色)이고,

색(그림) 가운데에는 대종(大種, 물질을 이루고 있는 큰 요소, 지수화풍 등)이 없는 무대종(無大種)이지만

(대종= 지수화풍 가운데에는 색수상행식도 없고,

또한 색=물질, 즉 색수상행식 가운데에는 무대종이라서 지수화풍도 없지만) 

그러나 대종(大種, 지수화풍)을 떠나서는 색(色, 물질)을 얻을 수 없도다.

(그러한 것은 독립된 것도 아니고, 화합도 불화합도 아니고, 떨어져 독립되어 존해하는 것도 아니라서 얻을 수 없도다)

 

心中無彩畵(심중무채화) 彩畵中無心(채화중무심) 

然不離於心(연부이어심) 有彩畵可得(유채화가득) 

마음 속에는 채화(彩畵, 그림)가 없고, 채화(彩畵, 그림) 속에는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는 채화(彩畵, 그림)를 얻을 수가 없도다.(그림을 그릴 수가 없도다)

ㅡ우리가 그림을 보면, 그림과 마음은 다른 것이지만, 내 마음속에 그림이 포착되었으면, 그것은 이미 마음하고 그림이 두 개가 아닌 것으로, 그 그림은 내 마음의 인식 범주에 들어있는 것이고,  
그래서 내 마음이 만든 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하는 것으로, 내 마음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와 이 현상과의 관계는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현상, 즉 세상이 아무리 거꾸로 돌아가도, 아무리 험하게 돌아가도, 내 마음 안에 이미 포착되어 있는 것이고, 내 마음의 영역 속에 이미 들어온 엉터리 세상이라면, 그 엉터리 세상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많은 분야가 있지만 자기가 관심이 없는 분야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일부터 코리안 야구 시리즈가 시작되는데,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전혀 관계없지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내일 날씨 좋아야 할 텐데...’하고 있는 것과 같이,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그 사람과는 관계없고 책임도 없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이 흥분하고, 웃고 우는 것은 그 사람들 스스로가 만든 것으로, 그 사람 마음의 세계는 야구라는 것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미 나의 인식 속에 들어온 세계는 내가 일조를 한 것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 자체는 내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뜻이지만, 전부를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포착된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의 것인, 내 마음의 것이기 때문에 낭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그래서 내 마음 관리를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ㅡ무비스님

 

彼心恒不住(피심항불주) 無量難思議(무량난사의) 

示現一切色(시현일체색) 各各不相知(각각불상지) 

그 심(心, 마음)이라는 것을 항상 머무는 것도 아닌, 무량한 것이라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으며, 

비록 일체색(一切色, 온갖 빛깔)을 나타내지만, 그 각각의 색들이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지수화풍이지만, 땅은 물을 알지 못하고, 물은 불을 알지못하고, 불은 바람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譬如工畵師(비여공화사) 不能知自心(불능지자심) 

而由心故畵(이유심고화) 諸法性如是(제법성여시)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공화사(工畵師, 화가)가 자심(自心,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 심(心,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제법의 성품 역시도 그러하도다.

비유하자면 화가가 능히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마음을 말미암은 고로 그림을 그린다.

자기의 마음을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리는, 즉 그 주인공을 가지고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기주인공을 모르는 것이라, 제법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아서, 봄이 와서 새순이 나고, 새가 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지만, 그 당체는 모르면서 그렇게 엮어가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ㅡ무비스님

 

心如工畵師(심여공화사) 能畵諸世間(능화제세간) 

五蘊悉從生(오온실종생) 無法而不造(무법이불조) 

마음이 마치 공화사(工畵師, 화가)와 같이 능히 모든 세간을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오온(五蘊, 색수상행식, 몸과 마음)이 그 마음을 따라 생기어서 불조(不造, 짓지 못하는) 법이 없도다.

 

如心佛亦爾(여심불역이) 如佛衆生然(여불중생연) 

應知佛與心(은지불여심) 體性皆無盡(체성개무진) 

마치 마음과 같이 부처 역시도 그러하고, 마치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나니,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부처나 마음이나 그 체성(體性, 성품)은 모두 무진(無盡)하여서 다함 없는 것이라.

 

若人知心行(약인지샘행) 普造諸世間(보조제세간) 

是人則見佛(시인즉견불) 了佛眞實性(료불진실성) 

만약 어떤 이가 심행(心行, 마음으로 행함, 行은 의지작용)으로 모든 세간을 널리 짓는다는 것을 안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의지=行이 능히 모든 세간을 짓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곧바로 견불(見佛, 부처를 봄)하여서 불진실성(佛眞實性, 부처의 참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되리라.

 

心不住於身(심불주어신) 身亦不住心(신역불주심) 

而能作佛事(이능작불사) 自在未曾有(자재미증유) 

마음(心)이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마음(心)에 있지 않지만

능히 모든 불사(佛事)를 지을 수 있나니, 그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도다.(그 마음을 알 수 없도다)

 

若人欲了知(약인욕요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만약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들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여야 하나니,

그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 짓는 것이로다.

 

ㅡ지림(智林) 보살 - 범혜(梵慧) 세계 - 감청안불(紺靑眼佛)

 

지림(智林)보살 진실한 지혜 행이기 때문에 지(智) 바라밀을 주재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명칭과 지위가 서로 같다는 것을   있을 것이다. 

이 지위의 선재 동자 선지식의 호(號)가 출가외도(出家外道)이고, 이름이 편행(遍行)인 것은 지혜를 얻어 자재함으로써 능히 사견(邪見)을 같이 하면서도 모든 사견(邪見)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밝힌 것이니, 3 가지 경계와 96 가지 외도를 내가 모두 다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림보살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범혜(梵慧) 세계는 닦는 바의 이며,

감청안불(紺靑眼佛)  지위의 과(果)이니 감청은 10행의 지혜가 한번 종결되어 원만해지면서 밝고 청정함의 비춤인 명정조촉(明淨照燭) 지극한 것이다.

 

ㅡ지림보살은 부처님 삼업(三業)의 수승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부처님의 묘한 색신(色身, 신업 身業)과 무량한 지혜광명(의업 意業) 음성(音聲, 구업口業) 위할 수도 없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思議할 수도 없음을 밝히는 것으로,

법(法)을 설함에 있어서도 부처는 설함이 없지만 중생들이 다만 자기의 마음을 따라 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爾時(이시)林菩薩(지림보살)  承佛威力(승불위력) 普觀十方(보관시방) 而說頌言(이설송언) 

그때, 지림(智林)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설하였으니, 

 

所取不可取(소취불가취) 所聞不可聞(소문불가문) 

所見不可見(소견불가견) 一心不思議(일심불사의)

집착하는 바의 소취(所取)도 취할 수 없는 불가취(不可取)이고,

듣는 바의 소문(所聞)도 들을 수 없는 불가문(不可聞)이고, 

보는 바의 소견(所見)도 볼 수 없는 불가견(不可見)이라,  

일심(一心, 한 마음)이라는 것이 생각하기 어려운 부사의(不思議)로다.

(취하고, 보고 듣는 것 모두가 마음의 장난인 것이 부사의하도다)

 

有量及無量(유량급무량) 二俱不可取(이구불가취) 

若有人欲取(약유인욕취) 畢竟無所得(필경무소득) 

유량(有量, 한계가 있음)하다거나, 무량(無量, 한계가 없음)함의

둘 모두는 취할 수 없는 불가취(不可取)라

만약 어떤 이가 취하고자 할지라도 필경(畢竟, 결국)에는 얻지 못할, 무소득(無所得)이라.

(이 세상에 우리가 취하고, 보고, 듣고자 한, 한량하고 무량한 것 모두가 필경에는 무소득이라)

 

不應說而說(불응설이설) 是爲自欺誑(시위자기광) 

已事不成就(이사불성취) 不令衆歡喜(불령중환희)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광(自欺誑)하는 것이라.

(응당히 설하지 못할 것을 설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

일을 그르쳐서 성취 못할 것이니, 어찌 대중들을 기뻐하게 할 수 있으리오!

ㅡ앞에서 취할 것ㆍ볼 것ㆍ들을 것 등이 어떤 대상이라면, 여기에서는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는 것까지도 쓸어버리고 부정하는 것으로, 절 마당을 쓸 때 뒷걸음질하면서 쓸어서, 그 쓸어버린 발자취마저 쓸어버리는 불교의 이치입니다.ㅡ무비스님

 

有欲讚如來(유욕찬여래) 無邊妙色身(무변묘색신) 

盡於無數劫(진어무수겁) 無能盡稱述(무능진칭술) 

어떤 이(有)가 여래의 무변한 묘색신(妙色身) 찬탄하고자 하여,

무수한 겁(세월)이 다하도록 찬탄한다 할지라도 그 모두를 능히 칭술(稱述)하지 못할 것이니, 

 

譬如隨意珠(비여수의주) 能現一切色(능현일체색) 

無色而現色(무색이현색) 諸佛亦如是(제불역여시) 

비유하자면, 마치 여의주(隨意珠)가 일체의 모든 색들을 능히 나타낼 수 있지만

무색(無色)으로 색이 없는 곳에서는 색을 나타낼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마음)들 역시도 그러하시며, 

 

如淨虛空(우여정허공) 非色不可見(비색불가견) 

雖現一切色(수현일체색) 無能見空者(무능견공자)  

또한 마치 맑은 정허공(淨虛空)은 빛이 아니라서 볼 수가 없는 것으로, 

비록 일체의 모든 색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공(空, 허공)을 볼 수 있는 이가 없는 것과 같으며, 

(푸른 하늘이나 회색의 하늘을 볼 수 있을 뿐, 허공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ㅡ하늘은, 빛이 원자에 입사되면 원자에 속박되어 있는 전자가 진동하면서 여러 방향으로 빛을 방출하는 산란을 하며,

산란은 입자가 작을수록, 빛의 진동수는 높을수록 일어난다. (작은 종이 고음을 내는 것과 같.)

태양광 중에서 자외선의 대부분 오존층에서 흡수되고 일부는 대기 입자나 분자들에 의해 산란되지만,

상대적으로 푸른색이 많이 산란되어서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으로, 푸른 하늘은 공기가 건조할수록 푸르고,

수증기가 많으면 하늘은 회색을 띠게 된다. 

 

諸佛亦如是(제불역여시) 普現無量色(보현무량색) 

非心所行處(비심소행처) 一切莫能覩(일체막능도) 

제불(諸佛)들도 그와 같아서 무량색(無量色)을 두루 널리 나타내지만

마음으로 미칠 수 없는 비심소행처(非心所行處)이라, 일체의 모두를 능히 볼 수가 없음이로다.

(모든 부처님들도 무량한 색을 반연하여 나타내지만, 즉 모든 생명체가 무량하게 나타내는 것 모두를

우리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가 없음이로다)  

 

雖聞如來聲(수문여래성) 音聲非如來(음성비여래) 

亦不離於聲(역불리어성) 能知正等覺(능지정등각) 

비록 여래의 음성을 들을지라도, 그 음성은 여래가 아니며

역시 그 음성을 떠나서는 정등각(正等覺)을 능히 알 수도 없으니, 

ㅡ금강경의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菩提無來去(보리무래거) 離一切分別(리일체분별) 

云何於是中(운하어시중) 自言能得見(자언능득견) 

보리(菩提)는 오고 감이 없는 무거래(無來去)이며, 일체의 분별을 떠난 것이니, 

어찌 이러한 보리 가운데에서 능히 보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겠는가?

 

諸佛無有法(제불무유법) 佛於何有說(불어하유설) 

但隨其自心(단수기자심) 謂說如是法(위설여시법)  

모든 부처님의 불법(佛法)이란 무유법(無有法)이라서 없는 것이거늘,

(이 구절은 부처님께서 49년간 설하셨지만 '나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로지 스스로의 그 자심(自心)을 따라 생각하기를 이러한 것이 법이라 말할 뿐이로다.

(스스로의 자심, 즉 자신이 좋하하는 바를 따라,

이것은 팔만 대장경,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을 설하셨다고 말할 뿐이로다)

 

제19권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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