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經卷第十九 昇夜摩天宮品第十九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 三藏沙門(삼장사문) 實叉難陀 譯(실차난타 역)
19.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ㅡ 5
ㅡ행림(行林) 보살 - 일혜(日慧) 세계 - 명상안불(明相眼佛)
ㅡ행림(行林) 보살은 난득행(難得行)으로서 원(願) 바라밀을 주재하며, 얻기 어려운 것을 능히 얻기 때문에 그 명칭이 행림이 되고, 이 지혜의 지위에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그 명칭이 난득행인 것이다.
선재동자의 이 지위의 선지식의 왕 이름이 대광(大光)인 것은, 이 제8의 지혜가 대원을 따라 중생의 뜻을 만족시켜서 대요익(大饒益)을 행함에 있어서, 널리 중생들에게 세간 낙수(樂具)들을 베풀어 주고, 이체의 지보(智寶)를 모두 베풀어 주는 것이다.
행림보살은 능히 행하는 사람이며,
일혜(日慧) 세계는 닦는 바의 법이니, 이 지위의 지체(智體)가 더욱 밝아지기에 세계의 명칭이 일혜인 것이며,
명상안불(明相眼佛)은 이 지위의 과(果)이니, 이 지위의 지체(智體)가 더욱 밝아지기에 불과의 명호가 명상안인 것이다.
ㅡ행림보살은 '부처님의 체상(體相)이 널이 두루함을 관(觀)하는 덕(德, 이익)'에 대하여 밝히는, 즉 부처님의 몸은 헤아릴 수 없으니, 갖가지의 색상(色相)으로 시방세계에 두루 나타나지만, 온 곳도 없고 머문 곳도 없으며,
또한 몸은 부처가 아니고, 부처가 몸이 아니며, 부처는 법(法)으로서 그 몸을 삼으므로,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여서 법성(法性)과 같으니, 부처님의 몸이 이러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관(觀)한다면 법왕자(法王子)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爾時(이시) 行林菩薩(행림보살) 承佛威力(승불위력) 普觀十方(보관시방) 而說頌言(이설송언)
그때, 행림(行林)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설하였으니,
譬如十方界(비여시방계) 一切諸地種(일체제지종)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無處不周遍(徧)(무처불주변)
비유하자면 시방의 세계의 일체가 모든 지대종(地大種, 땅의 종자)이라,
자성(自性, 스스로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두루하지 않은 곳 없는 것과 같이,
(땅에 자성이 없어서 실체가 없지만 세계의 곳곳에 땅이 없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佛身亦如是(불신역여시) 普遍諸世界(보편제세계)
種種諸色相(종종제색상) 無住無來處(무주무래처)
부처님의 불신(佛身) 역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계에 두루하시나,
종종(種種, 갖가지)의 색상들이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이고, 온 곳도 없는 무래처(無來處)라네.
(일체의 모든 존재가 불신이라, 모든 세계의 땅에 펼쳐져 있으나, 머물지도 않고 온 곳도 없다네)
但以諸業故(단이제업고) 說名爲衆生(설명위중생)
亦不離衆生(역불리중생) 而有業可得(이유업가득)
다만 제업(諸業)의 연고로 중생이라 말하는 것이지만,
(업으로 인하여 사람중생ㆍ짐승중생ㆍ축생중생ㆍ곤충중생, 등으로 중생이라 말하지만)
만약 중생을 떠난다면, 업을 얻을 수가 없도다.
(업 때문에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을 떠나서는 업도 얻을 수 없고 중생도 얻을 수 없도다.)
業性本空寂(업성본공적) 衆生所依止(중생소의지)
普作衆色相(보작중색상) 亦復無來處(역부무래처)
업성(業性, 업의 성품)은 본래 공적한 본공적(本空寂)이나, 중생들이 의지하는 바이라,
여러 가지의 중색상(衆色相)을 두루 짓지만 그 업(業)은 온 곳이 없는 무래처(無來處)로다.
(업, 즉 버릇, 습관은 본공적하여서 찾을 수 없는 것이지만, 버릇이나 습관을 바꾸거나 고치지 못하고
여러 가지의 습관이나 버릇을 계속 지어가고 있지만, 온 곳이 없는 무래처로다.)
如是諸色相(여시제색상) 業力難思議(업력난사의)
了達其根本(요달기근본) 於中無所見(어중무소견)
그와 같은 여러 가지의 제중상(諸色相)과 업력(業力, 업의 힘)은 상상하기 어려운 난사의(難思議)이나,
그 근본을 분명히 요달(了達)하여 안다면,
그 가운데는 (공하여서) 볼 것이 없는 무소견(無所見)이로다.
佛身亦如是(불신역여시) 不可得思議(불가득사의)
種種諸色相(종종제색상) 普現十方刹(보현시방찰)
부처님의 불신(佛身)도 그와 같이 사의(思議, 생각)로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갖가지 모든 제색상(諸色相)으로 시방의 세계에 두루 널리 나타나시는도다.
身亦非是佛(신역비시불) 佛亦非是身(불역비시신)
但以法爲身(단이법위신) 通達一切法(통달일체법)
몸도 부처가 아닌, 신비불(身非佛)이요, 부처가 몸인 것도 아닌 불비신(佛非身)이라,
오로지 법으로서 몸을 삼는, 법위신(法爲身)하여서 일체법(一切法)에 통달하는도다.
若能見佛身(약능견불신) 淸淨如法性(청정여법성)
此人於佛法(차인어불법) 一切無疑惑(일체무의혹)
만약 부처님의 불신(佛身)이 청정하여서 마치 법성(法性, 법의 성품)과 같음을 본다면
이러한 사람은 불법(佛法)에 일체의 의혹이 없으리라. (의혹이 없는 경지에 이르리라)
若見一切法(약견일체법) 本性如涅槃(본성여열반)
是則見如來(시즉견여래) 究竟無所住(구경무소주)
만약 일체법의 본성(本性, 근본 성품)이 마치 열반과 같다는 것을 본다면
이는 곧 여래는 구경에는 머무는 바가 없는 구경무소주(究竟無所住)라는 것을 본 것이로다.
若修習正念(약수습정념) 明了見正覺(명료견정각)
無相無分別(무상무분별) 是名法王子(시명법왕자)
만약 바른 생각의 정념(正念, 마음챙김)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명료(明了, 분명하게) 보아서
(그 정각은) 무상(無相)이요 무분별(無分別)한 것임을 안다면, 법왕자(法王子)라 이름 할 수 있으리라.
(만약 정념을 닦아서 정각이 형상도 없고 분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 사람이라면 법왕자라 이름 할 수 있으리라.)
ㅡ열반(涅槃 Nirvana)는, 생사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열반은 반열반(般涅槃) 또는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하며,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하는 열반 본래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에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며,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불교의 열반 개념과는 다르다.
소승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고 여기에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2가지가 있다고 한다.
유여(有餘) 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무여(無餘) 열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의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개념을 상(常)·락(樂)·아(我)·정(淨)의 4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아서,
상(常)은 상주(常住)함으로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변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이라 하며, 낙(樂)은 안락의 뜻으로 열반은 번뇌가 다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떠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이므로 낙이라 하며, 아(我)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것으로 열반은 망아(妄我)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에 도달한 세계이므로 아라 하며, 정(淨)은 청정의 뜻으로 염오(染汚)에 덮힌 생사의 세계를 여읜 열반의 세계는 청정한 세계이므로 정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4덕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은 유위열반(有爲涅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에 대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열반에는 상(常)·항(恒)·안(安)·청정(淸淨)·불로(不老)·불사(不死)·무구(無垢)·쾌락(快樂) 등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4덕과 관련하여 상(常)·항(恒)은 상(常)에, 안·쾌락은 낙(樂)에, 불로·불사는 아(我)에, 청정·무구는 정(淨)에 대응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으며,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寂靜)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열반과 해탈의 차이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는 ‘nibbāna, nirvāṇa(sk.)’를 번역한 것이고,
해탈은 ‘벗어났다’는 의미의 ‘vimokkha, vimokṣa(sk.)’를 번역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고 하셨으며,
세상을 불태우는 삼독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해탈은 ‘벗어난다’는 의미로서 어떤 구속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해탈은 구속이나 속박의 수와 같이 많지만,
크게는 욕탐에서 비롯된 번뇌(煩惱)로부터 벗어나는 심해탈(心解脫)과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혜해탈(慧解脫)이 있습니다.
오분법신(五分法身)에서 계정혜 삼학의 수행으로부터 성취하는 해탈신(解脫身)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혜해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를 갖춘 해탈을 구해탈(俱解脫)이라고 하며, 이러한 모든 해탈을 삼해탈(三解脫)이라 하는 것으로,
열반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구해탈((俱解脫))을 성취한 것을 말하고,
해탈은 수행을 통해 번뇌가 소멸될 때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ㅡ해탈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란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사는 것이 인생이 되는 것이나, 죽을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을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말은,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무덤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정말 놀랄 만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
해탈한 사람에게 죽음은 고통과 좌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낭비하지 마세요. 그건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사에서의 해탈이란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선택의 가능성이 단절된 죽음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사해탈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 결박되지 않는다면, 마음이 자신의 존재를 취착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이렇게 허망한 존재를 취하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ㅡ열반의 세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가 아닌데,
허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견(無見)에 빠진 사람이고,
생사의 세계를 떠나 모든 존재가 생멸하지 않고 변함 없이 존재하는 열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견(有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열반은 허망하게 조작된 유무(有無)의 모순 대립을 떠난 중도(中道)의 세계이며, 연기하는 법계(法界)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계에서 우리는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법신(法身)인 것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멈추고 연기하는 법계를 여실하게 관조하면서 일체 중생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원(願)으로 충만한 삶, 이것이 열반을 성취한 법신의 삶입니다. ㅡ 'PHOTO-TO-PHOTO (P-TO-P)'
*正覺(정각)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서,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것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부처님과 같은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이룰 수 있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그러면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정각(正覺)의 내용은 무엇이며?
과연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부처님이 되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선언적(宣言的)으로 무엇이라고 밝혀 놓은 경전(經典)은 없지만, 여러 경전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진리의 내용은 연기(緣起)의 법리(法理)로 요약할 수 있다.
연기란 모든 존재는 고정 불변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며 상자상의(相資相依)의 관계임을 밝힌 법리다.
연기의 법리가 고정 불변하는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 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체의 존재는 사회와 역사의 규정을 받으며 다시 사회와의 역사를 규정해 가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고,
인간이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부처님은 미망(迷妄)중생의 가치관인 아집과 탐욕을 부정하고, 협조와 조화만이 인간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부처님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깨달음이 진리라는 것을 실천을 통해 실증해 보인 것이다. ㅡ 백과
불교; 석가모니는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여 도와주는 존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적으로 유일신교적 관념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서양인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내어서, 그 존재를 숭배하는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전통적인 서양에서의 Religion(종교)의 개념이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뒤에 그들의 나라에서 불교를 설명하는 서양인들이 '불교는 Religion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는 종교다'라는 말이 맞는 것이다.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를 지칭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
그 의미하는 바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Religion과 한자어의 종교가 서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혼돈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만 대승불교에서 부처가 반신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맞는다.참고로 같은 책에서는, 불교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현대화하여 읽는 독법이 서구에서의 인기를 얻을 수는 있어도 불교의 '인기 없는 요소'를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 중도의 진리를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힌두교의 일부 종파나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고행을 권하지 않는다. 일단 개조인 석가모니부터가 극단적인 단식과 걸행 등의 고행을 그만둔 다음, 심신의 지나친 이완과 긴장 모두를 물리친 뒤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달음을 이뤘다. 불교는 몸을 해치는 절식(絕食)이나 각종 무모한 고행을 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깨달음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되며, 특히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하며,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시를 강조한다.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으로 표현된다.
- 항상 변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모든 번뇌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 없애기 위한 수행, 참선이 강조되며 허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직시란 '단견'과 '상견'의 관점을 모두 버려 대상을 치우침없이 적관하는 것을 말한다.
- 대승불교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방법의 수행을 권한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paramita'. 직역하자면, '저쪽 언덕(피안)에 도달한 상태'.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을 강물에다가 비유했는데, '감정'이라는 급류를 인간이 건널 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강물에 빠져 평생을 고통속에서 허우적댄다고 보았다. 바라밀이란 이 '감정'이라는 강물을 안전하게 건너,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분하게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바라밀이란 해탈하는 방법이다. 6바라밀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있다.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집중하는 것, 반야바라밀은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원인이다.
-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통해 열반(涅槃)’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오랜 역사 동안, 교의(敎義)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 '내 것'이 없다는 무아의 개념은, 부처님 유언에 '스스로에 의지하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삶의 주체인 나'와 '나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버린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것. 따라서 '삶의 주체인 나'는 신뢰하되,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이라는 환상'(이 환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긴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현재의 '나'를 믿기 때문에, 굳이 (변해버렸거나 변해버릴) 과거와 미래의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현실의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실의 삶'에 집중한 불교의 개념은 실존주의 보다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실존주의와는 다른 미묘하고도 독특한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실존은 고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또는 이러한 인간 삶을 방해하는 권위에 대해 반항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불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제대로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보아 긍정과 부정을 포함한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점, 그리고 '자아'마저도 또 다른 권위가 될 수 있다고 보아 '내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불교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때문에 종종 이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현대철학자들도 많다. 삶을 방해하는 절대적 권위-'언어', '고정 관념'-에 대한 탈권위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승 불교 한정, 여타 종교에 비해 저승과 하늘이 다양하다. 천국과 지옥만 언급하는 개신교나 거기에 더해 연옥의 개념이 있는 카톨릭과는 다르게 대승 불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및 그 외의 장소들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대승 불교에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까지 수많은 하늘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지옥은 불지옥 8종류와 얼음지옥 8종류에, 재판받는 길목마다 지옥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가장 지옥의 종류가 많은 종교이기도 하다. 또한 동물로 태어나는 환생을 지옥에 가긴 애매한 죄를 가진 영혼이 가는 형벌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축생계보다 죄가 무겁지만, 지옥을 갈 정도는 아닌 정도의 죄를 지은 영혼은, 불교 고유의 세계인 아귀도나 아수라 등을 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따위에 고민하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여 현실을 살라.'고 하시면서 저승에 비중을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한 불교의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가모니의 행적을 살펴봐도 충분히 현실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고행을 포기한 후에 깨달음을 얻거나 타인을 믿지 않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 해탈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석가모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기(無記)'란,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답도 찾을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불교에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란 '형이상학을 위한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형이상학 질문은 오로지 '현실의 삶 - 그 괴로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원칙이다 ㅡ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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