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15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묻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북방이 스승이 되고 임금이 되는 것입니까?
 
답한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 윤택케 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물은 아래를 사모하면서 흐르는 것과 같이

임금이되고 스승이  자가 우매한 자에게로 나아가 미혹을 제도하여 () 발하게 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북방의 () 하위(下位) 됨을 밝힌 것이니

임금이 되고 스승이  자는 항상 겸손한 행으로 중생들이 귀의 할 수 있도록 이익을 주어서, 

()로써 윤택하게 하는 까닭 군자가 항상 겸손하게 하위에 처해서 사물을 제도하여 () 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북방의 () 임금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은 것이니

무릇 대방(大方) 방우(方隅) 없지만,  뜻을 취해 덕을 나타낸 것으로,

나머지 지위는 명호품(名號品)에서 이미 해석한 것과 같이,  부처님의 명호가 시방에 두루하기 때문에 방위를 따르는 것으로 법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에서 건곤(乾坤) 초구(初九)에서 모(茅)를 뽑으니 () ()한다 것은

모(茅)가 결백하고 유약하고 뿌리가 달착지근한 것이므로, 군자의 덕이 있음이 () 유약하고 결백하고 달콤한 것과 같아서, 이로서 이끌어서 일을 같이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 군자가 아니니 사물로써 비유한 것이고,

방우(方隅) 부처님이 아니니 법으로써 비유한 것으로, 이는 법을 알게 하고자  것이다.

부처님의 불지(佛智) 의지함이 없기에 사물에 의지하여 지혜에 이름을 붙이고,

방위(方) 방위가 없는 까닭에 법으로써 방위를 이루는 것이라서, 동서남북의 (情)의 견(見)으로 보는 방위가 아닌 것이다.

 

가령 『주역』의 태괘(泰卦)에서 “건곤(乾坤)의 초구(初九)에서 모를 뽑으니 여(茹)를 연(連)한다”고 한 것은 모가 결백하고 유약하고 그 뿌리가 달착지근한 것에서 군자의 덕 있음이 모(茅)의 유약하고 결백하고 달콤한 것과 같아 이끌어 들여 일을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茅)는 군자가 아니니 사물로써 비유한 것이고, 방우(方隅)는 부처님이 아니니 법으로써 비유한 것으로, 이는 법을 알게 한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는 의지함이 없기에 사물에 의지해서 지혜에 이름을 붙이고, 방위[方]는 방위가 없기에 법으로써 방위를 이루는 것이라서 동서남북의 정견(情見)으로 보는 방위가 아닌 것이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을 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를 설명하면,

항상 자기 마음의 근본부동지불을 첫 신심의 인(因)으로 삼고,

닦아 나아감으로써 위의지불(威儀智佛)을 얻는 것이니, 제4의 정진(精進) 바라밀의 과(果)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로 “이때(爾時)” 이하 6행의 경문은,

문수가 덕수(德首) 보살에게 물어서 여래의 깨달은 바가 일법(一法)이라 한 것이니,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하의 열 가지 질문은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으며,

그 이하에 10행의 게송이 있는 것은 덕수(德首) 보살의 답이니, 이 게송의 뜻을 셋으로 나눈다면,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한 설명하면,

이 10행의 게송 중에서 처음의 1행은 질문의 뜻이 깊고 깊어서 오직 지혜라야 알 수 있다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 9행의 게송은 1행의 한 게송을 경문에서 잘 밝히고 있으니,

그 대의는 일법계(一法界)와 다르지 않아서, 무량한 법문을 수행함을 밝힌 것이다.

 

무량한 법문이 단지 1법계성(一法界性)이라서

하나에 걸려 많은 것을 짓지 못하는 불가체일불작다(不可滯一不作多)라고 할 수 없으며

많음에 걸려서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불가체다불시일(不可滯多不是一)이니,

10현(十玄)으로 사의(思義)하여서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는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설명하면,

그 명칭이 덕수(德首)인 것은 이 지위가 1법계성(一法界性)을 여의지 않고,

어리석음과 애착과 일체의 번뇌를 소멸시키면서 항상 일체의 모든 공덕을 닦기 때문에 덕수(德首)라 칭하는 것이며,

세계의 명칭이 청련화(靑蓮華)인 것은, 이 제5의 신심이 선(禪) 바라밀이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여 무염(無染)하고, 무탐(無貪), 무애(無恚), 무치(無恚癡)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동북방(東北方)인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명상지(明相智)인 것은 이 지위의 닦아 나아가는 과(果)로서 법을 얻어 청정한 까닭에 간위(艮位)와 같음을 밝힌 것이니, 인(寅)과 축(丑) 사이에 명(明)의 상(相)이 나타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명상지(明相智)인 것이니

이 방우(方隅)로써 선정의 법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방이 간(艮)인 것이니, 간(艮)은 산이 되고, 산은 흔들림 없는 안정의 뜻하는 것이니, 이것이 선정의 뜻이기 때문이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를 설명하면,

항상 자심(自心)의 근본부동지불을 믿는 것을 인(因)으로 삼아서 닦아 나아감으로써 명상지불을 얻는 것으로서 과(果)를 삼은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때(爾時)” 이하 5행 반의 경문은 문수가 목수(目首)보살에게 물어서 여래의 복전(福田)이 견줄 바가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소위(所謂)” 이하에 10 가지의 질문은, 경문에서 잘 갖추고 있으며,

그 이하 10행의 게송은 목수보살이 답한 것이니, 그 답한 바를 앞에서와 같이 3 가지의 문(門)으로 나눈다면,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한 것을 설명하면,

이 10행의 게송은 1행이 하나의 게송인 것으로,

그 게송의 뜻은 앞에서 질문한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하나이거늘, 어찌하여 보시의 과보는 같지 않는 것입니까?에 대한 답으로, 두 가지의 같지 않은 뜻이 있다.
그 하나는, 부처님 스스로의 복전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그 두 번째는, 중생이 보시한 바의 복전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의 부처님 스스로의 복전이 같지 않음을 밝힌다는 것을 설명한다면,

여래 몸의 눈과 머리가 감청색인 것과 몸의 금색과 붉은 입술과 흰 치아가 그 일신(一身)에서 각각으로 색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화장세계의 장엄이 만(萬)가지로 다른 것은, 총체적으로는 법성의 이지(理智) 속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법성의 이지(理智) 속에 본래부터 무량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행에 따라 과보로 얻은 장엄인 것은, 예를 들자면, 여래의 몸에 아흔일곱 가지 97종(九十七種)의 대인상(大人相)이 있는 것은 법신의 지체(智體)에 저절로 갖추어진 때문에 여래에게는 무량한 수호공덕(隨好功德)의 장엄이 있는 것이니, 이는 행에 따른 과보로 얻은 것이다.

  

가령 외변(外邊)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중에서

금강지(金剛地)는 법성신(法性身)의 보득(報得, 과보로 얻음)으로 정보(正報)이며,

보수(寶樹, 보배 나무)로 세계를 장엄한 것은 법성수행(法性隨行, 법성을 따른 행)의 보득(報得)으로 의보(依報)인 것이며,

궁전 누각은 법성대지(法性大智, 법성의 대지혜)가 대자비를 따라서 중생을 기른 업의 보득(報得)이며,

사자좌(師子座)는 이 법성이 지혜를 따라서 법륜을 굴린 보득이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이 법성이 행을 따라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오염이 없는 무염성(無染性)의 보득이며,

향수해(香水海)는 이 법성이 대비심을 따라 겸하(謙下)하여 요익행(饒益行)의 보득이며,

향하(香河, 향수 강)이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는 것은 법성을 따라 닦아 나아감으로써 중생을 교화한 보득이니,

총체적으로는 법성의 대지혜를 여의지 않은 행의 불리법성대지수행(不離法性大智隨行)을 따라 보(報)가 다른 것이라서

하나하나의 행 마다에 무량한 행문(行門)이 있어서 서로 주(主, 주체)와 반(伴, 객체)이 되는 것이니,

그러함을 통하여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장엄하여, 각각의 그 하나하나의 경계 속에 무량한 동이(同異)가 있는 것이니,

이는 인(因)을 관하여 과(果)를 아는 것으로써,

이에 준거한다면 모두가 이 일성(一性, 하나의 성품)의 작용을 따라 같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의 중생이 보시한 복전의 과보가 같지 않다는 것이란,

마음의 가볍고 무거움의 심경중(心輕重), 지혜 있음과 지혜 없음의 유지(有智)와 무지(無智)로 말미암아 과보가 같지 않은 것이며,  겸하(謙下)와 고심(高心)의 구하는 바가 다른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한마음의 일심(一心)의 작용을 따라 같지 않은 것이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해석한다면,

그 명칭이 목수(目首)인 것은 이 지위가 동남방 진(辰)과 사(巳) 사이임을 밝힌 것이니,

곧 이 신심을 닦아 나아가 지혜의 태양이 점점 높아지면서 복전의 인과(因果)와 같은 과보도 잘 아는 것을 목수라 칭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때문에 여래께서 항상 진사(辰巳)를 취하여 재계(齋戒)의 법칙으로 삼는 것이니,

앞의 명호품(名號品)에서 이미 해석했으니 그에 준해서 알아야 하리라.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 또한 자기 마음의 근본부동지불을 인(因)으로 삼고,

이 지위의 구경지불(究竟智佛)을 닦아 나가는 과(果)로 삼는 것이다.


여섯 번째로 “이때 문수사리(爾時文殊師利)” 이하의 5행 반의 경문은

문수가 근수(勤首)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인, 불교시일(佛教是一)이거늘, 

어찌하여 번뇌를 끊고 번뇌를 끊지 못하는 부동(不同) 등이 있는 것인가를 질문한 것과

“그러나(其已)” 이하의 열 가지 질문이니,

이하 10행의 게송은 근수(勤首) 보살의 답이니, 그 가운데에서의 삼문(三門)은 앞에서와 같은 것으로,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을 설명하면,

이 10행의 게송에서 첫 1행의 게송은 듣기를 권유하는, 권청(勸聽)이요,

다음 1행의 게송은 법을 듣고 부지런히 닦아 나아갈 것을 권하는, 권근수(勸勤修)이며,

이하 9행은 그 게으름을 질책하는 것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설명하면,

명칭이 근수(勤首)인 것은 앞의 목수(目首)보살이 복전의 인과를 잘 보임으로써 부처님의 명호가 구경지(究竟智)였지만,

이 지위는 반드시 부지런히 행하는 까닭에 근수(勤首)라 칭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최승지(最勝智)인 것은 부지런히 닦아 나아가 진보함으로써 최승지를 얻어 과(果)가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란 것 또한

근본부동지불을 인(因)으로 삼고 최승지불로 닦아 나아가는 것의 과(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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