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5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①
앞으로 이 보살문명품 ①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략 3 가지의 문으로 나누면,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며,
둘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이며,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을 설명하면,
10 가지의 십종신근(十種信根)을 성취하고, 10 가지의 십종신력(十種信力)을 기르면서
문수사리와 각수 등의 보살이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면서, 10 가지 십종법(十種法)을 물어 밝히고 있기 때문에 문명품(問明品)이 된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을 설명하면,
앞의 품에서는 여래께서 족하륜(足下輪, 발바닥의 족륜)으로 방광하여서, 개각(開覺, 깨달음을 열어)하여 비추고 있는 부처님 경계의 원근(遠近)을 통해 신심이 있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하나를 걸림없이 관하게 하여서, 심행(心行)을 광대하게 하여서 법계에 부합하게 한 것이며
또한 문수사리보살이 10 개의 게송으로 부처님의 십덕(十德)을 찬탄하고 권유함으로써 신심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한 것이지만,
이 문명품(問明品)은 곧 10신심(十信心)이 있는 자가 올바르게 수행하는 행(行)과 함께 단혹(斷疑)하여 의심의 단절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 품이 온 것이다.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를 설명한다면,
이 품의 한 단락에 11단락의 경문이 있는 것은, 문수사리와 각수 등의 10보살이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어 열 가지의 십종법(十種法)을 물어 밝힘으로써, 저마다 보살의 명칭으로 10신(十信)이 행하여야 발 바의 행(行)을 나타낸 것이니,
즉 문수는 이름 아래 글자가 뜻하는 바대로 행한 행으로써 서로 자문하고,
10보살 등은 각각의 자행(自行)의 법으로서 게송에 답함으로써,
신심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본받아 배우게 하는 것을 밝히고 있으니,
이러한 10 가지의 질문과 열 가지의 게송의 경문이 그 아래와 같고,
가장 아래의 한 단락은 시방이 모두 이와 같다(十方同此)고 함으로서 매듭을 짓고 있다.
첫 번째로 “이때 문수사리보살(爾時文殊師利菩薩)” 이하 6행(六行)의 경문은,
문수보살이 20 가지의 질문에 대한 선악(善惡)의 인과(因果)를 일으킨 것이니,
혹은 일자(一字, 한 글자)로서 묻고, 혹은 일구(一句, 한 구절)로서 묻기도 하면서, 모두 20 가지의 질문이 된다.
그 아래의 11행(十一行) 게송은 각수보살의 답(荅)으로,
처음 1행의 게송은 능히 묻는 사람을 찬탄하고 아울러 듣기를 권유하는 것이며,
나중 10행의 게송은 묻는 바의 법에 답한 것이다.
문수가 세간의 선악(善惡)의 인과(因果)에 대하여 서로 알지 못하는, 불상지(不相知)라는 것과
업이 능히 선악(善惡)의 인과(因果)를 성취할 수 있음을 훌륭하게 묻자,
각수보살이 법의 불상지(不相知)와 참다운 이(理)로써 답하였으니,
단지 진(眞)을 미혹한 까닭에 스스로 업을 짓는 것일 뿐, 진(眞)을 아는 자는 전체의 업이 진(眞)인 것이다.
마지막 1행의 게송은 진(眞)을 분명히 밝혀서, 망(妄)을 벗어나는 법을 설하여 밝힌 것으로써 비유와 법을 들면서서 설하고 있다.
경문에 스스로 갖추고 있으나, 경문이 문수리현(文順理顯, 경문이 까다롭고 이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하나, 순조롭고 이치가 뚜렷하니, 사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서 다시 번거롭게 해석하지는 않겠다.
이 11행의 게송이 뜻하는 바를 3으로 나누면,
첫째는 게송의 뜻을 과(科)하는 송의(頌意)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을 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게송의 뜻을 과(科)하는 송의(頌意)를 설명하면,
이 11행의 게송에서는 1행이 하나의 게송이 되는 것이니(一行是一頌),
처음의 일행송(一行頌, 일행의 게송)은 능히 질문하는 것을 찬탄하는 것과 함께 아울러 듣기를 권유한 것이며,
다음 10행문(十行文)은 각각 스스로 갖추어서 밝히고 있으니,
처음 1행의 게송은 법무성(法無性, 법에 성품이 없음)을 노래한 것이며,
다음의 1행은 물이 함께 흘러 가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에 비유하는, 수류불상지(水流不相知)를 든 것이니,
그 뜻에 준거하여 사유하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다시 번거롭게 과(科)하지 않겠다.
두 번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란,
이 흐름에 따라 생사(生死)의 흐름에 따른 업체(業體)의 본성(本性)은 항진(恒眞)한 것으로 무유전(無流轉)하는 것이며,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眼、耳、鼻、舌、身)가 항상 여법(如法)하며,
생사 윤회에 유전하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허망함도 없는 무허망(無虛妄)이며, 진실됨도 없는 무진실(無眞實)한 것으로,
다만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와 애착(愛)이 없는 참다운 진지혜(眞智慧)이기 때문에 진(眞)이라 칭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는 것이다.
이같은 법을 설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스스로 깨닫는 자각(自覺)이고,
남을 깨닫게 하는 타각(覺他)의 대도심(大道心)의 중생(衆生)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당체(當體)가 무명으로 인한 모든 업인과(業因果)에서 자신이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자각각타(自覺覺他)하는 것으로 법계 자성의 참다운 진이(眞理)를 알게 함으로써 진(眞)과 망(妄)이 둘다 없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을 각수(覺首)라 칭하고
이러한 법을 믿기 시작하는 것을 수(首)라 칭하는 것이니,
이는 10신의 초심(初心)에서 자신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眼、耳、鼻、舌、身)과 일체 중생 전체의 진(眞)과 망(妄) 모두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불지해(佛智海)일 뿐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부동지불 등의 10지(十智) 여래로서 10신위(十信位) 속의 자기과(自己果)로 삼는 것이며,
금색세계와 묘색세계와 연화색계 등의 10색세계(十色世界)는 10신(十信)에서 믿는 소신이(所信理)이며,
문수사리(文殊師利)와 각수(覺首)와 재수(財首) 등의 10보살(十菩薩) 대중은 10신(十信)의 행(行)이니,
이 행(行)으로 명칭을 세우는 까닭에, 명칭을 얻으면 행(行)을 아는 것이다.
하나하나 각각의 보살이 행과 이해의 행해(行解)로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이하의 보살들도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세계의 명칭이 묘색(妙色)인 것은 곧 각수(覺首) 보살의 깨달은 바의 소각지리(所覺之理)이며,
무애지불(無碍智佛)이란, 바로 각수의 지위에서 닦아서 이루어야 하는 불과(佛果)이니,
이러한 신심(信心)으로써 모든 업의 인과가 진(眞)과 망(妄)이 모두가 없는 것이 바로 지혜의 작용에 걸림이 없는 지용무애(智用無碍)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을 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를 설명한다면,
항상 자기 마음의 근본인 부동지불(不動智佛)을 근본 신심의 인(因)으로 삼아서,
이를 닦아 나아감으로써 무애지불(無㝵智佛)을 얻는 것이 바로 지위에 따른 불과(佛果)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문답과 보살의 명호와 부처님의 명호와 세계의 형색(形色)에 의거해서 그 의취(意趣)를 취한다면, 이(理)가 저절로 분명해질 것이니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
두 번째로 “이때 문수사리보살(二爾時文殊師利菩薩)” 이하 5행의 경문은
문수사리가 재수(財首)보살에게 물어서 여래의 열 가지 방편의 시기, 여래십종방편시(如來十種方便隨時)의 법(法)을 말한 것이다. 처음에 중생이 아니라는 비중생(非衆生)을 든 것은 바로 각수(覺首)가 답한 업체(業體)의 순수하고 참됨에 근거한 것이며,
그 후에 여래십종수시(如來十種隨時)에 따른 화현(化)는 어떠한 인연으로 있는 것인가를 물으니,
재수(財首)는 신심을 이루기 위하여 실(實)을 잡아서 ‘수시(隨時, 때를 따름)’는 가(假, 거짓)라고 답하였으니,
그 아래 10행의 게송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 10행의 게송의 뜻을 셋으로 나눈다면,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게송(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그 10행의 게송에서 1행이 하나의 게송이며, 처음 1행의 게송에서의 처음 두 구절은 질문한 법이 소기(小器, 근기가 작은 이)가 감당할 바가 아니라, 많이 들은 다문자(多聞者)의 경계라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 두 구절은 질문한 바와 같이, 반드시 설함과 듣기를 권유한 것이며,
이하의 9행 게송은 재수(財首)보살이 실(實)로써 답한 것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은 게송에서 진(眞)과 가(假)의 법재를 훌륭히 요달하여서 중생에게 베푸는 까닭에 재수(財首)라 칭하는 것이며,
10신심十信心()에서 처음부터 법재(法財)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수(首)라 칭하는 것이다.
세계의 명칭이 연화색(蓮華色)인 것은, 이 믿음에서 법의 성재(聖財)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여 자타(自他)로 하여금 성품의 오염이나 집착을 없게 하기 때문에 세계의 명칭이 연화색이라 칭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또한 법으로 사람들에게 보시하여서, 미혹을 타파하여 지혜를 이루는 것을 멸암지불(滅暗智佛)이라 칭하는 것이니,
이는 해당되는 지위의 믿음에서 스스로의 법문의 이행(理行)과 지인과(智因果, 지혜의 인과)를 갖추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재수(財首)란, 바로 해당되는 지위의 행(行)인 것이니, 그 이하도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셋째의 지위에 따른 인과를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를 설명하면,
항상 자기 마음의 근본부동지불인, 문수사리를 신심의 인(因)으로 삼아서 닦아 나아감으로써 해탈지불(解脫智佛)을 얻는 것이니, 재수보살은 이 해당되는 지위의 행과(行果)이고 부처님은 지과(智果)이니, 그 나머지도 대개 이와 같으니,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의 “이때(爾時)” 이하 4행 반의 경문은,
문수사리가 보수(寶首)보살에게 “먼저 모든 중생들 모두에게 4대(四大)가 있지만 아(我)도 없고 아소(我所)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으로, 이하의 열 가지 질문의 십문(十問)은 업의 인과법(因果法)인 것이다.
이하 10행의 게송은 보수(寶首)보살이 앞의 열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한 것으로,
처음은 거체(擧體)에 분별이 없는 거체무분별(擧體無分別)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업을 받는 좋고 나쁨이 행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밝힌 것으로,
경전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는 그 대의는 체(體)를 요달하면 업(業)이 멸하고, 진(眞)을 미혹하면 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10행 게송의 뜻을 셋으로 나눈다면,
첫째는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이며,
셋째는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 배수위인과(配隨位因果)이다.
첫째의 송의(頌意, 게송의 뜻)를 과(科)하는 것을 설명하면,
처음의 두 구절은 과보가 행을 말미암아 생긴다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 두 구절은 업의 체(體)가 본래는 진실한 본진(本眞)이라서 근본적으로 있는 바가 없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의 교설이라는 것을 찬탄한 것이다.
이하 9행은 1행 1게송에서 비유를 들어 법을 나타낸 것이니,
법을 요달한다면 업이 없어서 법과 업이 둘이 아닌, 무이(無二)이지만, 행으로 말미암아 같지 않은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하는, 석보살명(釋菩薩名)을 설명하면,
이 신위(信位)에서 업이 곧 법체(法體)라흔 것을 요달하여서, 다시 업이 있지 않게 된 것을 법보(法寶)라 칭하는 것이니,
이 법보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믿음의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그 명칭이 보수(寶首)가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북방(北方)이며 스승의 지위임을 밝힌 것이니,
위의(威儀)의 궤칙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위의지불(威儀智佛)이며,
세계의 명칭이 첨복화(瞻蔔華)인 것은 이 꽃이 황색으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복덕의 색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황색은 복경(福慶)의 기(氣)로서, 안으로 순백의 청정함에 응하는 것이니,
밖으로는 황색의 상(相)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여래께서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서 검은 옷을 입는 것은 북방의 감(坎)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안으로 순백 청정의 무염(無染)의 이(理)에 응하는 것이나, 밖으로 황색의 상(相)을 나타낸 것은,
바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순백 청정의 오염이 없는 백정무염(白淨無染)의 복상(福相)으로써 세계의 명칭을 삼음을 밝힌 것이며,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함으로써 덕행이 상서(詳序)하니 부처님의 명호가 위의지불(威儀智佛)이 되는 것이며,
항상 법보로 중생을 이롭게 하여 업성(業性)의 진(眞, 참됨)이라는 것을 요달하는 것을 보수(寶首) 보살이라 칭하는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제4신심(第四信心)에서 스스로 얻은 법인과이지(法因果理智)의 명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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