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15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9)광명각품(光明覺品)

 
이 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략 3 가지의 문으로 나눈다면,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이며,

둘째,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이며,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품명목(釋品名目)을 설명하면,

이 품을 광명각품(光明覺品)이라 칭한 것은 ‘여래께서 10신(十信)에서 족륜하(足輪下)의 광명을 놓아 시방을 비추니,

처음에는 1삼천대천(一三千大千)라 말하고 그 다음부터는 점점 넓어져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법계(不可說法界)와 불가설허공계(不可說虛空界)에 이르나니, 이로 인하여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을 밝힘으로써, 

신심(信心)이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심경계(心境廣, 마음의 경계)가 광대하고 무진(無盡)하고, 무애(無㝵, 걸림이 없음)하여서 법계ㆍ허공계와 더불어 같다는 것을 요달하게 하고자 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자기의 법신(法身)과 지신(智身)과 원행(願行) 또한 평등한 것이기 때문에,

광명을 비춤으로써 그러한 신심을 깨달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광명각품(光明覺品)이라 칭하는 것이다.

 

수행자(修行者)가 하나하나의 광명을 따라서 시방 모두를 관조(觀照)하고 능관(能觀)의 마음마저 진(盡, 다함)한다면,

곧 법신과 같은 체의 동체(同體)가 되면서 10주(十住)의 초심에 들어갈 것이니,

신심에 들어가는 입신심자(入信心)는 하나하나가 이 보색등운광(寶色燈雲光)을 따라 내심(內心)과 방소(方所, 방향과 처소)를 관하면서도, 총체적으로는 마음의 경계에 안팎과 중간이 없게 해야 비로소 방편삼매에 들어가 10주 법문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보색광명관(寶色光明觀)을 짓지 않는다면 일체보현원해(一切普賢願海)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신통의 도력(道力)과 모든 부처님의 대용(大用) 모두를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석품내의(釋品來意)를 설명하면,

이 제2회의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10신심(十信心)을 설한 것은,

범부가 스스로의 자심(自心)으로 계합한 불과에 대한 믿음을 성취하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전의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은 부처님의 신안이비설(身眼耳鼻舌, 몸ㆍ 눈ㆍ귀ㆍ코ㆍ혀) 등과 명호의 두루함을 든 것이며,

4성제품(四聖諦品)은 여래의 구업(口業)으로 법행(法行)의 두루함을 설하는 것을 밝힌 것으로,

이러한 두 품 모두가 불과(佛果)의 두루함을 밝힌 것이지만,

지금 이 광명각품에서는 여래 신위(信位)에서 교행(敎行)의 광명을 놓아 깨우침으로써, 신심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심지(自心智)경계의 신행(身行)이 두루함을 믿게 하는 것이니,

즉 일체처가 부동지불인 것과 일체처가 문수사리인 것과 일체처가 각수(覺首)ㆍ목수(目首)ㆍ재수(財首) 등의 10수(十首) 보살이라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신심자(信心者) 스스로의 신업(身業)ㆍ어업(語業)ㆍ의업(意業)과 명호의 두루함이 한결같이 부처님과 동일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이 품이 반드시 온 것이다.


이상 부동지불(不動智佛) 등의 10분의 십지불(十智佛)은, 이 신심으로 믿은 과(果)이니,

이는 자기의 스스로의 지혜가 부처님과 더불어 본래는 같은 것이며,

문수사리는 자기 스스로의 마음의 묘리혜(妙理慧)이며,

그 나머지 아홉은 행(行)이며, 10색(十色) 세계는 보는 바의 법(法)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때 세존께서는(爾時世尊)” 이하 24행 반의 경문 속의 대의를 5으로 나누겠으니, 

 
첫째는 광명의 출처를 든 것이며,

둘째는 광명이 비추는 광조경계(光照境界)의 멀고 가까움의 원근(遠近)을 든 것이며,

셋째는 일체처의 백억 중회(衆會)의 보살 대중이 함께 모인 것을 든 것이며,

넷째는 일체처의 불찰(佛剎)과 십지(十智)의 근본지불(根本智佛)을 든 것이며,

다섯째는, 일체처의 문수가 같은 소리의 동성(同聲)으로 일시에 게송을 설한 것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의 광명의 출처를 든 것을 설명한다면,

경전에서 “이때 세존께서는 두 발 족륜 밑으로 백억의 광명을 놓았다(爾時世尊兩足輪下放百億光)”고 한 것은,

이 광명은 초회에서는 여래께서 미간에서 놓은 미간광명(眉間光明)으로서, 그 명칭이 일체 보살의 지혜의 광명(一切菩薩智光明)으로서 시방을 널리 비추는 보조요시방장(普照曜十方藏)이니, 

이 광명은 시방의 보살을 교화할 때 10신(十信)과 5위(五位)와 10지(十地) 법문의 단계를 세워서 지위에 따라 닦아 나가게 함으로써, 지안(智眼)을 열어 그 무량한 복과 지혜의 바다를 이루는 까닭에 시방을 비추는 조요시방장(照曜十方藏)이라 칭한 것이다.


또 장(藏)에는 2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 중생의 선근(善根)이 이러한 법을 감수(堪受)하여 수용을 감당하는 것을 장(藏)이라 칭하나니,

예를 들자면, 문수사리가 선재동자를 칭찬하면서 “장하도다. 공덕장(功德藏)이여, 나의 처소에 능히 이르렀구나(善哉 功德藏 能來至我所)”라고 한 것이며,

둘째, 대원(大願)과 대비(大悲)와 대지(大智)와 법신(法身)을 모두 장(藏)이라 칭하는 것이니, 이 광명이 항상 시방 법계의 선근(善根)의 중생들을 비추어서 능히 대보리심과 대원과 대비와 대지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장(藏)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래의 양족륜광명(兩足輪光明)은 저 현상품(現相品)에서의 미간광명(眉間光明)인 것이니,

시방을 비추고 나서 그 광명이 다시 돌아와서 부처님의 불족하(佛足下, 발 아래)로 들어간 것은 10지의 과광(果光)으로써, 10신(十信)을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품에서는 제1회(會)에서 들어온 여래족하광명(如來足下光明)을 놓음으로써 10신을 성취하는 것이니,

여래의 양족(兩足)아래에서 광명을 놓은 것이 이 현상품(現相品)에서는 들어온 바의 광명이 되는 것이다.

족하(足下, 발 밑)에서 광명을 놓은 것은 과(果)로써 믿음을 이루는 시초임을 밝힌 것이며,

10주위(十住位)에서 여래의 발가락 끝, 여래족지단(如來足指端)에서 광명을 놓은 것은 성(聖, 성인)에 드는 시초와 자취를 발하여 진(眞)에 응하는 시초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제불대지가(諸佛大智家, 대지혜의 가문)에 초생(初生)하게 되기 때문이다.

 

10행위(十行位)에서는 발등의 족부상(足趺上)의 광명을 놓고,

10회향위(十迴向位)에서는 무릎 위의 슬상(膝上)에서 광명을 놓고,

10지위(十地位)에서는 미간(眉間)에서 광명을 놓아 마쳤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

이 또한 옛의 구과(果果)에 의거하여 인(因)을 이루고, 인(因)에서 과체(果體)를 닦음으로써 공(功)이 종결되는,

이러한 지위가 성숙함에 이르기까지의 본말(本末)이 옮기지 않는 것이니, 그 지위에 가서 다시 밝히겠다.

 
이제 양족륜(兩足輪)에서 광명을 놓는 것은 과(果)로써 믿음을 이루는 과성신(果成信)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수행으로 항상 과체(果體)를 닦아서 충분히 익혀 성숙하게 함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미간광명으로부터 양족륜광명을 놓고, 발가락의 족지단(足指端)에서 광명을 놓고,

발 등의 족부상(足趺上)에서 광명을 놓고, 무릎의 슬상(膝上)에서 광명을 놓고, 미간에서 광명을 놓고,

출현품에서도 또한 미간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니, 그 명칭이 여래출현광명(如來出現光明)이다.

 

이와 같이 6 번의 광명을 놓는 것 모두가

10신(十信)ㆍ10주(十住)ㆍ10행(十行)ㆍ10회향(十回向)ㆍ10지(十地)ㆍ11지(十地)의 인과법문(因果法門)과

닦아 나가는 지수행상(進修行相)이 한 번 종결되어 성취된 것을 밝힌 것이며,

 

법계품(法界品)에서 다시 미간방명(眉間放光)을 하는 것은 이 한 부 경전(법계품)의 보살이 5위(五位)를 닦아 나가는 것과 여래 출현을 증명하는 바의 근본법이 모두 법계를 체(體)로 삼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법계품(法界品)의 한 품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일체 모든 부처님의 본말이기 때문이며,

항상되는 항법(恒法)이기 때문이며,

이 법이 불변의 상도(常道)로서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본말(本末)이기 때문이며,

일체법의 본체(本體)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두 번째의 광명이 비추는 광조경계(光照境界)의 멀고 가까움의 원근(遠近)을 설명하면

처음에는 삼천대천의 경계를 비추고, 다음엔 10백천(百千)과 나아가 10억(十億)과 불가설(不可說)을 비추는 것이다.
 
묻겠습니다.

어찌하여 일시(一時)에 널리 모두를 비추지 않고 점차적으로 비추인 것입니까?
 
답한다.
이는 일시(一時)에서의 점차(漸次)인 것이니, 법계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이다.

점차(漸次)란 것은 10신(十信)의 수행이 진보하여 더욱 뛰어나게 되는, 승진증승(勝進增勝)인 때문이다.

 

세 번째의 일체처의 백억 중회(衆會)의 보살 대중이 함께 모인 것을 든 것은,

자기 스스로의 신행(信行)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의 일체처의 불찰(佛剎)과 십지(十智)의 근본지불(根本智佛)을 든 것은,

신심이 있는 신심자(信心者)가 자기 스스로의 지혜와 덕의 지덕과(智德果)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다섯 번째의 일체처의 문수가 같은 소리의 동성(同聲)으로 일시에 게송을 설한 것은,

신심 있는 신심자(信心者)가 자기 스스로의 묘혜(妙慧)로 법을 간택하는 것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자유(自有)의 법으로, 다른 타법(他法)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처음부터 스스로 이와 같은 10색(十色) 세계와 10지(十智) 여래와 10수(十首) 보살이 모두 자기의 과유(果有)와 법성의 대지혜와 만행의 두루함이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믿음을 성취하는 까닭에,

이로부터 수행하여서 5위(五位)를 거치면서도 이를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처음 발심(發心)하는 것과 궁극의 구경(究竟)이 다르지 않은 2 가지가 필경이불별(畢竟二不別)인 것이나,

이러한 2 가지의 마음 중에서 발심이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제도하지를 못하고 먼저 남을 제도하는,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초발심에 예(禮)를 표하나니,

초발심에 천인사(天人師)가 됨으로써, 성문이나 연각을 초월한다”고 한다.

이는 마치 열반경(涅槃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는 범부로부터 신심에 들기가 어렵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범부가 스스로를 범부라고 자인할 뿐,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에 10신에 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는 10신심(十信心)이 성취되면 운(運, 흐름)에 맡겨 10주(十住)의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나아가 궁극적인 구경불과(究竟佛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령 3승(三乘)에서 10신심(十信心)을 닦음에 있어서 10천 겁(十千劫, 십만 겁)을 지나야 하지만,

이 가르침에서는 근본지법계(根本智法界)로써 가르침의 교체(教體)를 삼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실(實)을 보게 된다면 그대로 얻으므로, 겁량(劫量)을 논하지 않는 것이니,

예를 들자면, 각성(覺城)의 2천의 대중 중에서 선재동자가 상수(上首, 첫 머리)가 되는 것은 노상(路上)에서 발심한 것이며,

6천의 비구 대중들 모두도 지혜가 날카롭고 사람됨이 가특하여서, 한 번 들음으로서 많은 것을 깨달아서

겸양과 자비로 오직 대도만을 구하여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모두가 이 일생(一生, 지금의 생)에 믿음이 원만하여져서 발심으로 지위에 들어간 사람인 것이다.

 
만약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즉시 영겁토록 표류할 것이니,

어찌 사람들을 능히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사물을 제도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서 설한 것과 같이, 만약 스스로가 묶여 있으면서 능히 다른 사람의 묶임을 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발심(發心)에 2 종류가 있는 것이니,

 

첫째는, 신해(信解)를 닦는 발심의 수신해발심(修信解發心)으로, 단지 10신해(十信解)만을 닦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10지여래(十地如來)와 10수보살(十修菩薩)이 이에 해당되며,

 

둘째는, 믿음이 원만한 신만발심(信滿發心)이니, 10주위(十住位) 초의 명칭이 초발심주이기 때문이다.

10혜보살(十慧菩薩)과 10 분의 월불(月佛)이 그 인과(因果)인 것이다.


또한 이 게송을 설하는 문(門)에 나아가는 뜻을 둘로 나누면,

첫째, 문수사리가 열 개의 게송을 설하여 여래의 10 가지 덕을 찬탄함으로써, 신심이 있는 이들로 하여금 신해(信解)를 넓히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둘째, 신심이 있는 자의 심지(心地)가 넓어지는 것이니, 그 광명이 점점 커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광명이 점점 커진다는 것은 신심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밝힌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광명이 비추는 경계를 따라서 마음으로 심관(心觀)하되, 그 방향을 따라 마음을 다함 없이 심무진(心無盡)하여서, 시방 모두를 그러하게 관하여서, 시방관(十方觀)이 두루하면 오직 능관(能觀)의 마음만이 존재하게 되나니,

다시 그러한 능관(能觀)의 마음마저도 안팎이 없다는 것으로 관(觀)할 수 있다면,

즉시 시방으로 걸림이 없어지면서 비로소 10주(十住)의 초심(初心)에 들게 되는 것이다.


첫째의 문수사리 보살의 게송으로부터 어떻게 여래의 10 가지 십종덕(十種德)을 찬탄하여서, 신심이 있는 자들을 점점 더 발전하게 하는 것인가?


첫 번째, 처음 10행(十行)의 게송은 여래법신(如來法身)의 자체성이 없는 덕의 무체성덕(無體性德)을 찬탄한 것이며, 
두 번째, 10행(十行)의 게송은 여래의 대자비의 덕으로 중생을 위하여 보리심을 구하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세 번째, 10행의 게송은 여래께서 제법이 꼭두각시(幻)와 같음을 요달한 덕에 연(緣)하여 그를 따라 응해 몸을 나타내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네 번째, 10행의 게송은 여래께서 깊고 깊은 심심법(甚深法)의 덕(德)을 대중을 위하여 열어 보임을 찬탄한 것이며, 
다섯 번째는, 10행의 게송은 주생을 구원하고 수호하는 여래의 덕(德)으로 신심이 있는 이를 권유하여 마땅히 지어야할 10 가지의 십종업(十種業)을 짓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여섯 번째, 15행의 게송은 여래의 무상(無相)의 상덕(相德)을 보는 자에 따라 모두 보게되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일곱 번째, 10행의 게송은 여래의 의지함이 없는 무의자재덕(無依自在德)의 일체 공덕을 갖추어서 신심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배우고 수행하게 하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여덟 번째의, 20행의 게송은 여래의 지혜방편덕(智慧方便德)으로 신심자들로 하여금 기꺼이 배우고 수행하게 하는 것을 찬탄한 것이며,
아홉 번째,  20행의 게송은 여래의 광대한 고행정진덕(苦行精進德)으로 신심자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함을 찬탄한 것이며, 
열 번째, 20행의 게송은 여래 실성의 성(性)이 실성무(實性無)의 삼세덕(三世德)에 두 가지의 상이 없는 무이상(無二相)이라서 일체에 두루함을 찬탄함으로써 신심자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는 것이니, 

  
이상으로 문수사리가 이 10 개의 게송을 설하여서 부처님의 열 가지의 불십덕(佛十德)을 찬탄한 것은, 신심을 일으킨 자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을 발하게 한 것이다.

 

이 광명각품(光明覺品)은 부처님의 과법(果法)을 듦으로써 신심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올바로 믿음에 들게 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과법(果法)이 법신의 부동지에서 옮기지 않고,

또 보살행이 두루함으로써, 일체(一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에 이르기까지 다시 다른 법이 없다는 것이니,

범부와 성인이 하나의 성품인 범성일성(凡聖一性)이라서, 무성미(無性味)와 같으며

대원(大願)과 대자(大慈)와 대비(大悲)와 대지(大智)인 문수사리와 묘혜(妙慧)인 보현의 만행미(萬行味)와 같아서

동적(動寂, 동요함과 적정함)이 일체용(一體用, 하나의 체용)이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같이 믿고 닦아서 초발심에서부터 일시에 함께 나아감으로써, 이 10신의 지위 안에 140의 대원(大願)을 두고

대자비의 행을 성취하여, 법신(法身)과 혜신(慧身)과 지신(智身)이 일시에 함께 나아가는 것이니,

법신(法身)이란 곧 10색세계(十色世界)가 이에 해당되며,

지신(智身)이란 곧 10지불(十智佛)이 이에 해당되며,

혜신(慧身)이란 바로 문수사리가 이에 해당되며,

대비(大悲)란 바로 140의 대원(大願)으로 성취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이상의 모든 법은 모두 이 광명각품에서 믿고 들어가는 것이며,

문명품(問明品)은 이미 믿음에 들어간 가운데에서 법칙을 문답하여 그 신력(信力)으로 수행을 성취하는 것이다.
 
묻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10신문(十信門)의 성취를 모두 문수사리 보살이 설한 것입니까?
 
답한다.
문수는 시방 모든 부처님의 묘혜(妙慧)로서 정(正)과 사(邪)를 잘 간택하기 때문이니,

정(正)과 사(邪)가 정해진 다음에야 행(行)으로서 수행하는 것을 보현행(普賢行)이라 칭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순서가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수사리가 동자보살(童子菩薩)로서 인(因)으로 계몽(啓蒙)을 처음 계발하여 믿음에 들도록 하는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자행(自行)으로서 명칭을 이룬 것을 밝힌 것이다.
 
다시 묻겠습니다.
5위법(五位法)에서는 보살이 선정에 들고 나서야 비로소 설하였는데,

어찌하여 신위(信位)에서는 선정에 들지 않고 설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신시범부생멸심(信是凡夫生滅心, 믿음은 범부의 생멸심)이니, 믿음은 증득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선정이 없는 것이나,

5위(五位)는 체(體)에 들어가 진(眞)에 응하는 무작(無作)의 이지(理智)로서, 사념(思念)이 없어야 나타나는 것이라서 정식(情識)으로는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선정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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