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經卷第十八 明法品第十八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三藏沙門(삼장사문實叉難陀 (실차난타 

18. 명법품(明法品)  9

 

善知衆心故(선지중심고) 能普現身(능보현신) 善巧說法故(선교설법고) 音聲無碍(음성무애) 

得心自在故(득심자재고) 巧說大法(교설대법) 無能沮壞(무능저괴) 

得無所畏故(득무소외고) 心無怯弱(심무겁약) 於法自在故(어법자재고) 無能過者(무능과자) 

於智自在故(어지자재고) 無能勝者(무능승자)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 自在故(자재고) 所說法相(소설법상) 不相違背(불상위배) 

辯才自在故(변재자재고) 隨樂說法(수락설법) 相續不斷(상속부단) 

陀羅尼自在故(다라니자재고) 決定開示(결정개시) 諸法實相(제법실상) 

辯才自在故(변재자재고) 隨所演說(수소연설) 能開種種(증개종종) 譬喩之門(비유지문) 

大悲自在故(대비자재고) 勤誨衆生(근회중생) 心無懈息(심무해태) 誨 가르칠 회

大慈自在故(대자자재고) 放光明網(방광명망) 悅可衆心(열가중심) 

대중들의 마음을 잘 아는 까닭에, 그 몸을 두루 나타내는 것이며,

교묘하고 훌륭하게 법을 설할 수 있는 까닭에, 그 음성에 걸림이 없어서 무애(無碍)하며,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까닭에, 대법(大法)을 훌륭하게 설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두려움 없음의 무소외(無所畏)를 얻은 까닭에, 그 마음이 겁약(怯弱)하지 않으며,

법에 자재한 까닭에 능히 그를 능가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지혜에 자재한 까닭에, 능히 그를 이길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반야바라밀에 자재한 까닭에, 그 설하는 법상(法相, 법의 내용)이 서로 위배되지 않으며,

변재(辯才)가 자재한 까닭에, 좋아하는 바를 따라 법을 끊임없이 계속하여 법을 설할 수 있으며,

다라니(陀羅尼, 불교의 교리나 이치, 연기 공 무아 무상 등)에 자재한 까닭에,

제법(諸法)의 실상을 결정코 분명하게 열어 보일 수 있으며,

변재(辯才)가 자재한 까닭에, 연설하는 바를 따라 갖가지의 비유의 문을 열어 제시할 수 있으며,

대비(大悲)가 자재한 까닭에, 중생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그 마음이 피곤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대자(大慈)가 자재한 까닭에, 광명(가르침)의 그물을 놓아 대중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ㅡ제법실상(諸法實相), 일체 만법의 진실한 체상 즉,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함. 

제법(諸法)은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말하며, 나아가 일체 존재나 일체 현상을 포괄하는 말이다. 실상(實相)은 진실한 체상이나 평등한 실재(實在) 또는 불변의 이치(理) 등의 뜻이다.

초기불교에서 ‘일체법은 오온이다’고 하거나 혹은 십이처·십팔계라고 설하고, 그것은 모두 무상(無常)이며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설할 때의 오온·십이처·십팔계가 곧 ‘제법’이며, 무상·고·무아는 ‘실상’에 해당한다.

제법실상에 관한 교설은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 주로 반야경류와 법화경에서 설해지며,  

법화경에서의 십여시(十如是), 제법의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여시력(如是力)·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여시과(如是果)·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제법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인 것이이며, 

천태지의(天台智顗)는 ‘제법’을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6도(道)와 성문·연각·보살·부처의 4성(聖)의 세계의 십법계(十法界)로 해석하였다. 십법계는 육범사성(六凡四聖)이라고도 하며, 탐욕·성냄·미혹으로 뒤덮인 지옥계로부터 인간과 천상계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과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세계를 모두 포함한다. 

결국, ‘제법의 십여시’라고 함은 지옥부터 부처의 세계에 이르는 일체 존재에 각각 십여시가 모두 갖춰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제법실상이라는 것이다.

십여시에서 상(相)이란 제법의 외형적으로 차별된 모습이고, 성(性)은 존재에 내재하는 본성, 체(體)는 그러한 모습과 본성을 갖춘 주체, 력(力)은 주체에게 갖춰진 잠재적인 원동력, 작(作)은 밖으로 표출되는 작용, 행위 등이고, 인(因)은 작용의 직접적인 원인, 연(緣)은 간접적인 조건, 과(果)는 행위에 따른 결과이며, 보(報)는 시간이 지나서 받는 결과이다.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에서 처음의 상(相)과 마지막의 보(報)가 궁극에 같다는 뜻이다

 

菩薩如是(보살여시) 處於高廣師子之座(처어고광사자지좌) 

演說大法(연설대법) 唯除如來(유제여래) 及勝願智諸大菩薩(급승원지제대보살)

其餘衆生(기여중생) 無能勝者(무능승자) 無見頂者(무견정자) 無暎奪者(무영탈자) 暎 비칠 영 奪 빼앗을 탈 

欲以難問(욕이난문) 令其退屈(영기퇴굴) 無有是處(무유시처) 

보살이 이렇게 높고 넓은 고광(高廣)한 사자좌에 앉아서 대법(大法)을 연설하는 것은

여래와 승원지(勝願智, 수승한 원력의 지혜)의 대보살(大菩薩)들을 제외한, 다른 중생들은

능히 이길 수 있는 이가 없으며,

그 정수리를 볼 수 있는 이도 없으며,(여러 면에서 수승하여서 뛰어나며)

그 세력을 빼앗을 이도 없으며, 어려운 질문의 난문(難問)으로 그를 굴복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佛子(불자)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 得如是自在力已(득여시자재력이) 

假使有不可說(가사유불가설) 世界無量廣大道場(세계무량광대도량) 

滿中衆生(만중중생) 一一衆生(일일중생) 威德色相(위덕색상) 

皆如三千大千世界主(개여삼천대천세계주) 

菩薩於此(보살어차) 纔現其身(재현기신) 悉能暎蔽(실능영폐) 如是大衆(여시대중) 纔 겨우 재

以大慈悲(이대자비) 安其怯弱(안기겁약) 以深智慧(이심지혜) 察其欲樂(찰기욕락) 

以無畏辯(이부외변) 爲其說法(위기설법) 能令一切(능령일체) 皆生歡喜(개생환희)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자재력(自在力)을 얻은 뒤에는

가령 말할 수 없이 많은 세계의 무량하고 광대한 도량에 중생이 가득하며,

그 낱낱의 중생들의 위덕과 색상이 삼천대천세계의 주인과 같다고 할지라도,

보살이 그 도량에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나타난다면,

그러함으로서 그곳의 모든 대중들의 위세를 가리워 버릴 수 있으며, 

대자비로써 그들의 겁약함을 위안하여 주고, 깊은 지혜로써 그들의 욕망을 살펴서,

두려움이 없는 무외변(無畏辯)으로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주어서, 그 모든 중생들을 환희하게 합니다.

何以故(하이고) 佛子(불자)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

成就(성취) 無量智慧輪故(무량지혜륜고) 成就(성취) 無量巧分別故(무량교분별고) 

成就(성취) 廣大正念力故(광대정념력고) 成就(성취) 無盡善巧慧故(무진선교혜고) 

成就(성취) 決了諸法實相(결료제법실상 )陀羅尼故(다라니고) 

成就(성취) 無邊際菩提心故(무변제보리심고) 

成就(성취) 無錯謬妙辯才故(무착류묘변재고) 謬 그릇될 류

成就(성취) 得一切(득일체) 佛加持深信解故(불가지심신해고) 

成就(성취) 普入三世諸佛(삼세제불) 衆會道場智慧力故(중회도량지혜력고)

成就(성취) 知三世諸佛(지삼세제불) 同一體性淸淨心故(동일체성청정심고)

成就(성취) 三世一切如來智(삼세일체여래지) 一切菩薩大願智(일체보살대원지) 

能作大法師(능작대법사) 開闡諸佛(개천제불) 正法藏(정법장) 及護持故(급호지고) 

왜 그러한 것인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무량한 지혜륜(智慧輪)을 성취한 까닭이며,

무량한 교분별(巧分別, 교묘한 분별)을 성취한 까닭이며, 

광대한 정념력(正念力)을 성취한 까닭이며,

그지없이 무진한 선교혜(善巧慧, 공교한 지혜)를 성취한 까닭이며,

제법의 실상을 결료(決了)하여 분병하게 아는 실상다라니(實相陀羅尼)를 성취한 까닭이며,

끝없는 무변제(無邊際)의 보리심(菩提心)을 성취한 까닭이며,

잘못됨이 없는 무착류(無錯謬)의 묘변재(妙辯才)를 성취한 까닭이며,

모든 부처님의 가지(加持)를 얻어 깊이 믿고 이해하는 심신해(深信解)를 성취한 까닭이며,

삼세 부처님들의 제불중회(諸佛衆會) 도량에 두루 들어가 지혜력(智慧力)을 성취한 까닭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들의 체성이 동일한 체성(體性)이라는 것을 아는 청정심(淸淨心)을 성취한 까닭이며,

삼세의 일체 모든 여래지(如來智)와 일체의 모든 보살의 대원지(大願智)를 성취하여,

능히 대법사(大法師)가 되어서 부처님의 바른 법장(法藏)을 개천(開闡)하여 확짝 열어 보이고 수호하여 지키는 까닭입니다.

 

ㅡ게송(偈頌)

爾時(이시) 法慧菩薩(법혜보살) 欲重宣其義(욕중선기의) 承佛神力(승불신력) 而說頌言(이설송언) 

이때, 법혜보살이 그러한 뜻을 거듭 펴고자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게송으로 설하였으니,

 

心住菩提集衆福(심주보리집중복) 常不放逸植堅慧(상부방일식견혜) 

正念其意恒不忘(정념기의항불망) 十方諸佛皆歡喜(시방제불개환희) 

마음을 보리에 두어, 중복(衆福)을 모으고, 방일하지 않아서 견혜(堅慧, 견고한 지혜)를 항상 심으며, 
그 뜻을 바로 생각하여 잊지 않으니, 시방의 제불(諸佛)들께서 모두 기뻐하시는도다.

 

念欲堅固自勤勵(념욕견고자근려) 於世無依無退怯(어세무의무퇴겁) 

以無諍行入深法(이무쟁행입심법) 十方諸佛皆歡喜(시방제불개환희) 勵 힘쓸 려

견고한 염욕(念欲,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서 스스로 근려(勤勵)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며, 
세상에 의지하지도 않고, 무퇴겁(無退怯)하여 물러나지도 않으며,  
다투지 않는 무쟁행(無諍行)으로 깊은 심법(深法)에 들어가나니
시방의 제불들께서 모두 기뻐하시는도다.

 

佛歡喜已堅精進(불환희이견정진) 修行福智助道法(수행복지조도법) 

入於諸地淨衆行(입어제지정중행) 滿足如來所說願(만족여래소설원) 

부처님께서 환희하시니, 더욱 견고하게 정진하여 복덕와 지혜의 복지조도법(福智助道法)을 수행하여서,  
제지(諸地,모든 지위)에 들어가 청정한 모든행들을 행하여, 여래가 설하신 서원을 만족하게 하는도다.

 

如是而修獲妙法(여시이수획묘법) 旣得法已施群生(기득법이시군생) 

隨其心樂及根性(수기심락급근성) 悉順其宜爲開演(실순기의위개연) 旣 이미 기

이러하게 닦아 행하여 묘법(妙法)을 얻으며,

(복지조도법을 수행하여 모든 지위에 들어가 청정한 모든행들을 행하여 묘법을 얻어서)

묘법을 얻은 후에는 중생들을 위하여 베푸나니,

그들의 심락(心樂, 마음으로 즐기는 바)과 그 근성에 맞추어 합당하게 연설하여 펼지는도다.

菩薩爲他演說法(보살위타연설법) 不捨自己諸度行(불사자기제도행) 

波羅蜜道旣已成(바라밀도기이성) 常於有海濟群生(상어유해제군생) 

보살이 남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한편, 자기 스스로도 제도(諸度, 모든 바라밀)의 행을 버리지 않으니,

바라밀도(波羅蜜道)를 이룬 뒤에는, 유해(有海,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계, 삼유)에서 항상 중생을 제도하는도다.

 

晝夜勤修無懈倦(주야근수무해권) 令三寶種不斷絶(령삼보종부단절) 

所行一切白淨法(소행일체백정법) 悉以廻向如來地(실이회향여래지) 倦 게으를 권, 懈 게으를 해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음에 게으르지 않으며, 삼보(三寶, 불 법 승)의 종성이 끊어지지 않게 하며, 
행하는 바의 일체 소행(所行)의 청정한 백정법(白淨法, 선법 善法)의 모두를 여래지(如來地)에 회향하는도다.

 

菩薩所修衆善行(보살소수중선행) 普爲成就諸群生(보위성취제군생) 

令其破闇滅煩惱(영기파암멸번뇌) 降伏魔軍成正覺(항복마군성정각) 降 항복할 항

보살이 닦아 익힌 모든 중선행(衆善行)들은 중생들을 성취(제도)하기 위한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어두운 번뇌를 멸하게 하여, 마군들의 항복을 받아 정각을 이루게 하는도다.

 

如是修行得佛智(여시수행득불지) 深入如來正法藏(심입여래정법장) 

爲大法師演妙法(위대법사연묘법) 譬如甘露悉霑灑(비여감로실점쇄)  젖을 점,  뿌릴 쇄

이와 같이 수행하여 불지(佛智,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서, 여래의 정법장(正法藏, 법의 창고)에 깊이 들어가
대법사(大法師)가 되어서 묘한 묘법(妙法)를 연설하나니,

이러함이 마치 감로수를 골고루 뿌려 주는 것과 같도다.

 

慈悲哀愍遍一切(자비애민편일체) 衆生心行靡不知(중생심행미불지) 

如其所樂爲開闡(여기소락위개천) 無量無邊諸佛法(무량무변제불법) 闡 열 천

자비함으로 두루 일체의 모두를 애민하게 여기시며,

중생들 심행(, 마음 씀씀이) 모두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그들의 즐기는 바를 따라 무량하고 무변한 불법을 개천(開闡)하여 펼치는도다.

 

安徐如象王(진지안서여상왕) 勇猛無畏猶師子(용맹무외유사자) 

不動如山智如海(부동여산지여해) 亦如大雨除衆熱(역여대우제중열) 

나아 가고 멈추는 진지(進止)의 모든 움직임이 마치 상왕(象王, 매우 큰 코끼리)과 같이 안정되었으며, 
용맹하여 두려워하지 않음은 마치 사자왕과 같으며, 부동하기는 마치 태산과 같고,

지혜는 바다와 같으니, 마치 소나기가 더운 열기를 식혀주는 것과 같도다.

 

時(시) 法慧菩薩(법혜보살) 說此頌已(설차송이) 如來歡喜(여래환희) 大衆奉行(대중봉행) 

그때 법혜보살이 이 게송을 설하여 마치니, 여래께서 매우 기뻐하셨으며, 대중은 받들어 행하는도다.

 

화엄경(華嚴經) 제18권 18. 명법품(明法品) 을 마침

 

ㅡ과학과 종교의 차이, 임기영 불교연구소

연구실에서 과학자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토대로 계속적으로  다른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장미꽃을 연구하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지금 장미꽃의 색깔에 있는 효소와 분자의 배열을 연구 중입니다. 그런데 하얀 장미였든지 붉은 장미였던지 간에 분자 배열은 같게 되었다라는 것도 확인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는 장미의  속에 있는 녹색을 띠는 색소도 함께 연구 중입니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로 앞으로는 청장미, 흑장미  여러 가지의 장미꽃이 탄생될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는 별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그는 별의 자전주기와  어떤 별은  크기와 형태 또는 온도 등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틀린지를 연구하는 것이 그의 주된 과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체망원경도 필요하고, 고성능 계산기가 필요하며, 고성능 컴퓨터도 필요합니다. 지구와의 거리와  별이 갖고 있는 특성들을 캐내는   과학자는  정열을  쏟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지 예에서 과학자는 이것이 왜라는 질문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분석입니다. 

어떻게, 혹은 , 언제,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알아내는 것이 과학자가 해야  과제입니다. 그래서 장미는 무엇 무엇 때문에  장미꽃이 핀다든지, 혹은 무엇 무엇 때문에 붉은 장미가 핀다든지 하는 것을 캐내는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종교에서는 장미꽃이  것을 학문으로 보지 않습니다. 더욱 ' 꽃이 피는가?'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관심은 있으나, 그것은 학문의 분야입니다. 정신의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신은 '! 장미가 어느 봄날 차가운 땅을 뚫고 나오더니 약간은 붉은 색을  연초록 색의 잎이 나고, 얼마 있다가 꽃봉오리가 맺더니 꽃이 피는구나' 하면서  꽃에 감사를 드립니다.

 꽃이 피기까지는  속의 수분과 양분등의 필요한 모든 물질을 그가 필요한만큼 성장하는 데에 썼을 것이고, 가시를 만들어야  영양, 잎을 만들어야  영양, 먼저 만든 잎을 유지하며 키워가는 영양과  앞으로 키가   있는 영양과 이루 헤아릴  없는 복잡한 과정을 하나도 잘못되지 않게 수행해 나가는 과정과 신비.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장미 나무가 자라며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냐? 하는 장엄한 생명을 신성시하는 태도를 종교라고 보면  것입니다. 작년에 했던 그대로 하나도 어김없이 똑같은 잎을 만들며 꽃을 만들어 내는 그의 실행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영리하고 모든 것을    같아도 실은 모두 모릅니다. 장미는 스스로 조절할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완전히 자기화(自己化)시키는 천재성이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가 담당하는 과정이 있고, 잎이 갖고 있는 능력은  다른 곳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녹색을 띠게 하는 색소 공장과 기타 여러 가지의 화학 공장이 바로 잎이라는 것을 알면  것입니다. 잎을 통하여  장미는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디에선가는  모든 기능을 통제도 하며 기능도 발휘하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몸의 줄기인지 또는 뿌리인 지도 모릅니다.

장미외의 다른 식물들도 그러합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노하우를, 그들 절대로 잃어 버리지 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만 위대한  알지만 실은  작은   포기도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위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땅을 지키고 있는 그 자체에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만약 식물도 동물처럼 움직여야 겠다고, 움직이는 식물이 되어서 모두 좋은 곳을 차지하고 산다고 하면, 정말  때부터는 모두 죽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식물들은 어떠한 환경이라도 아무 불평 없이 그들이 태어난 자리를 조금도 이동하지 않고 지켜 나갑니다. 땅의 황폐를 막아주고 기름진 땅을 만들어 주는 공덕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땅에 찾아온 공덕주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식물을 찬탄하는 것이 바로 종교일 것입니다.  장미가 갖고 있는 위대성을 인간에게 일깨워 주는 일은 종교의 몫입니다. 종교인은  지구상에서 있는 모든 존재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있도록 하여 주는 심성을 키워 주어 그들이 갖고 있는 위대성을 지켜 보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그들과 우리들 사이에 얼만큼의 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내 것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  별이 생겼는지,   별은  곳에 생기지 않으면  되었는지, 그리고   별은  크기로 있는 것인지,  지금 생겼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종교는  별을 그러한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괜찮습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아니한가?  옛날 옛적에 허공은 지구를 잉태하여 낳아 두었듯이 지금도 그런 일은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할 뿐입니다.

허공의 별을 세지 말라. 그것은 모두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별은 지금도 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이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별들의 생성, 혹은 소멸되는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관찰하면, 그것은 위대한 부처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어느 분이  부처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까 부처님이 창조를 하셨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이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부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봐도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창조라는 단어는 없어도  없이 많은 것이 부처님의 속에서 이루어지고, 사라지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주의 진리는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길, 인연법으로 생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봐도 그것은 우주공간에서 일어나는 많은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모두 경외스러울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줌을 창조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업이 있듯이 물질에게도 모두 업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  업은 바로 아(我, 나)라는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으로, 제각각이 갖고 있는 업의 소산인 것입니다.  업은 인연을 맺어 오게 됩니다. 이러한 업이 다른 날에는 저런 업을 안고 오며, 때로는  자신이 다른 모양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하여간   없는 일을  업은 한번도 쉼이 없이 그렇게 계속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관찰하는 것은 종교의 몫입니다. 이런 것은 심오하기 때문에 청정한 정신을 소유한 자만이 사유(思惟)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욕심을 갖지 않고 오직 법계의 질서를 경외심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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