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제14권 하단의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에서 “남방” 이하 4행의 경문의 단락에서 10 가지로 뜻을 나누겠으니,
하나, 불찰(佛剎, 세계)의 방향을 드는, 거불찰방면(擧佛剎方面)이요,
둘, 불찰(佛剎, 세계)의 멀고 가까움을 드는 거불찰원근(擧佛剎遠近)이요,
삼, 세계의 이름과 색을 드는, 거세계명색(擧世界名色)이요
넷, 부처님의 명호를 드는, 거불명호(擧佛名號)요,
다섯, 상수 보살의 명칭을 드는, 거상수보살명(擧上首菩薩名)이요,
여섯, 대중의 수를 밝히는, 명대중수(明大衆數)요,
일곱, 대중이 다 모인 후, 존경을 바침을 밝히는, 명대중이래도경(明大衆來已致敬)이요,
여덟, 방위를 따라 법좌가 화작하는 것을 밝힌, 명수방화좌(明隨方化座)요,
아홉, 법좌의 명목을 밝히는, 명좌명목(明座名目)이요,
열,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히는, 명대중승좌이좌(明大衆昇座而坐)이다.
첫 번째의 불찰의 방면을 드는, 거불찰방면(擧佛剎方面)을 설명한다면,
경전에서 남방(南方)이라고 말한 것은,
법을 나타냄에 있어서 남(南)은 정(正)이 되고, 일(日)이 되고, 명(明)이 되고, 허무(虛無)가 되고,
리(离) 가운데 허(虛)가 되기 때문에 바로 밝음(明)이 연(緣)이 되는 것이니,
10신을 닦아 나아가면서 제법이 허무(虛無)함을 요달하여서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수 각모(覺母)가 처음 배우는 자를 계몽(啓蒙)하여 믿게 함으로써,
근기를 각성(覺成)의 동쪽에 따르게 하는 것이니,
선재동자가 도에 들어가 닦아 나아갈 때, 남쪽으로 향하여 모든 벗들을 순방하는 것은
그 남방이 정(正)이 되고, 일(日) 되고, 명(明)이 되고, 허무(虛無)의 이(理)가 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예불(禮佛)할 때 모두 ‘나무(南無)’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남방의 허무를 밝힌 것이다.
단지 허무의 이(理)가 남방의 뜻이므로 일체처가 남방인 것이며,
다만 최초로 믿음의 생신(生信)을 내는 때가 바로 일체처가 동방이 되는 뜻이다.
때문에 4제(四諦)에서 고(苦)와 집(集)을 동(東)과 서(西)로 짝짓고,
멸(滅)과 도(道)를 남(南)과 북(北)으로 짝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법(法)에는 방향이나 처소가 없는 것이니,
초학자를 교화하여서 이해를 낳고 믿음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성을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품 아래의 경문에서 “세존께서 보살이셨을 때에는 갖가지 담론과 갖가지 언어와 나아가 갖가지 신해(信解) 등으로 성숙함을 얻었는데, 또한 중생에게도 이와 같이 지견(知見)하게 하기 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였으니, 경전에서 설한 바 그대로 이다.
또 나무(南無)라는 것은 바르게 따르는 정순(正順)을 밝힌 것이니
올바르게 허무의 이(理)를 따르기 때문에 나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모갑불(某甲佛, 어떠어떠한 부처)이란 것은 바로 허무를 요달한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무모갑불이라 칭한 것이다.
두 번째의 불찰(佛剎, 세계)의 멀고 가까움을 드는 거불찰원근(擧佛剎遠近)을 설명한다면,
십불찰미진수(十佛剎微塵數)라고 말한 것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이 미혹한 것을 밖(外)이라 하고, 법에 들어가는 것을 온다(來)라고 말한다.
세 번째의 세계의 이름과 색을 드는, 거세계명색(擧世界名色)을 설명하면,
묘한 색깔의 묘색(妙色)이라 칭한 것은 제2의 신심이 점점 더 묘하여져서, 이전의 신심보다 뛰어난 때문이니,
법의 허무를 요달하여서, 법에 즉(卽)하여 스스로 묘하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의 부처님의 명호를 드는, 거불명호(擧佛名號)에서 부처님의 호칭이 무애지(無碍智)라는 것을 설명한다면,
부동지의 체(體)로 닦아 나아가 신심이 더욱 밝아짐으로써 지혜가 걸림 없음을 밝힌 것으로,
총체적으로는 자기 마음의 신위(信位)의 부처님이지 다른 부처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총체적으로는 일심(一心)ㆍ일법계(一法界)ㆍ일지혜(一智慧)가 되어야 비로소 믿음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의 상수 보살의 명칭을 드는, 거상수보살명(擧上首菩薩名)을 설명하면,
명칭이 각수(覺首)가 되는 것은,
문수의 묘한 슬기로써 정(正)과 사(邪)를 선간(善簡, 간략하게 간택함)하여서 능히 자각하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깨달은 법에서 능히 타자를 깨닫게 하는 자소각법각타(自所覺法覺他)를 밝히기 때문이다.
이 지위의 보살이 깨달은 것은 어떠한 법인가?
이 지위에서의 깨달음에 셋이 있으니,
그 첫째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라서 무염(無染)의 순백하고 청정한 것임을 깨닫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금색세계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며,
그 둘째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분별하는 성품의 자신심불별성(自身心分別性)이 본래는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라서,
근본적으로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그 셋째는 자기 마음의 정(正)과 사(邪)를 잘 간책하는 묘한 지혜의 자심선간택정사묘혜(自心善簡擇正邪妙慧)가 문수사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신심의 첫머리에서 이 세 가지 법을 깨닫는 것의 그 이름이 각수인데,
이는 바로 신심 속에서 잘 깨닫는 행이 각수보살이라는 명칭이 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총체적으로는 자기가 행하는 바의 자소행지법문(自所行之法門)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비로소 믿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니, 타인을 믿고 스스로는 그러한 분수가 없다고 믿는다면 믿음(信)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대중의 수를 밝히는, 명대중수(明大衆數)를 밝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십불찰미진수가 있다는 뜻은 앞에서 이미 해석 하였다.
"십불찰미진수(十佛剎微塵數)라고 말한 것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이 미혹한 것을 밖(外)이라 하고, 법에 들어가는 것을 온다(來)라고 말한다."
일곱 번째의 대중이 다 모인 후, 존경을 바침을 밝히는,
명대중이래도경(明大衆來已致敬)을 밝힌다는 것 역시도 앞에서 말한 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의 법칙이 존경하며 따르는 의식(儀式)임을 밝힌 것이다.'
六明大衆之數者,有十佛剎塵義如初釋。七明大衆來已致敬者,如前可知。八明隨方化座者,如前可知。九明座之名目者,爲明入信成就得於生死之中能無畏故,依主得故餘義如前。十明大衆昇座而坐者,義如前釋,此位主戒波羅蜜爲主,餘九爲伴。
여덟 번째의 방위를 따라 법좌가 화작하는 것을 밝힌,
명수방화좌(明隨方化座)를 밝힌다는 것도 앞에서 설한 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방위에 따라 법좌의 화현을 밝힌다는 것은 동방에 있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의 법좌의 명목을 밝히는, 명좌명목(明座名目)이란,
믿음의 성취에 들어가 생사 속에서 능히 무외(無畏)를 얻음을 밝힌 것이니,
주(主)에 의거해 명칭을 얻기 때문이며, 나머지 뜻은 앞의 해석과 같다.
'법좌를 연화장사자(蓮花藏師子)라 이름한 분(分)의 뜻을 셋으로 나누겠으니,
첫째, 연화(蓮華)는 오염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법에 의거하고 행에 의거한 과보로 얻은 것이니,
법신의 행성(行性, 행의 성품)에 세간의 오염이 없기 때문에 능히 이지(理智)의 과(果)를 꽃 피워서 더욱 더 밝고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과(因果)가 서로 자량해서 순수하게 성숙시킴을 밝힌 것이며,
연꽃을 꽃피워서 사법(事法)을 장엄한 것이 볼 만한 가관(可觀)인 것을 밝힌 것이니,
이 법행(法行)의 꽃이 이러한 과보의 연꽃을 감응하여 불러들여 법좌로 삼는 것이다.
둘째로 장(藏)이란 것은 갈무리한다는 뜻으로, 법신의 이지(理智)로 세상에 처하여 행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널리 법계를 갈무리하여 일체의 많은 공덕으로 요익하게 하는 것을 장(藏)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셋째로 사자(師子)라 이름한 것은 주(主)에 의거해서 명칭을 얻은 것이니,
법성 대지혜의 무생멸신(無生滅身)으로 세간에 처하여 사람을 이롭게 하면서도 생사에 두려움이 없으며,
또 정지(正智)의 광명으로 변재(辯才)가 두려움이 없으며,
나아가 불활외(不活畏), 오명외(惡名畏), 대중위덕외(大衆威德畏), 사외(死畏), 수악도외(隨惡道畏)의
5포외(五怖畏) 등이 없는 것이 사자와 같다는 것이다.'
열 번째의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히는, 명대중승좌이좌(明大衆昇座而坐)란 앞의 해석과 같다.
이 지위는 계(戒)바라밀로 주(主)를 삼고 나머지 아홉이 반(伴)이 된다.
'법좌가 법계를 좌座)의 체(體)로 삼고 있는 것이니,
이는 범부에서부터 법계체(法界體)에 계합하기 때문에 이를 닦아 나아가는 수행으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며,
또한 이것은 시방 일체의 모든 부처님들의 과좌(果座)이니,
이는 초신심(初信心)에서부터 단박에 불과(佛果)를 믿는 것으로,
스스로의 자행(自行)으로 행하는 바로서 법으로 삼기 때문에 비로소 믿음을 성취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단락을 다시 둘로 나눈다면,
첫째는 법좌의 넓고 좁음의 광협(廣狹)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보살이 어떻게 편안히 앉는가를 밝힌 것이다.
첫째, 법좌의 넓고 좁음의 광협(廣狹)을 밝힌 것은,
가령 법계품(法界品)에서 “그 사자좌가 법계를 포함한다(其師子座包含法界)” 등을 말한 것으로서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그 대의는 의지함이 없는 무의(性無)이고, 고요하거나 흐트러짐이 없는 무정난(無定亂) 심성의 체(體)로써 법좌의 체(體)로 삼는 것이다.
둘째, 보살이 어떻게 편안히 앉는가를 밝힌 것이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말하는 것으로,
세간의 온갖 연(緣)을 회통하여 하나의 법계를 만드는 것을 결(結)이라 이름하고,
하나의 일법(一法)으로 온갖 연(緣)에 부합하는 것을 가(跏)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결가부좌(結跏趺坐)라는 것은 안정되어서 움직이지 않는 위의(威儀)의 상(相)이기 때문이니,
이 지위는 단바라밀 중 10바라밀을 주재하는 것이다.'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14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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