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이제 이 1부의 경전은 단박에 5위(五位)의 인과(因果)와 제불(諸佛)의 불과문(佛果門)을 들어서 총체적으로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니, 믿음을 이루고 나서 지위에 들어가서 수행해야 비로소 이지(理智)를 미혹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마치 사람이 음식을 만들 때 5 가지의 맛의 오미(五味)가 함께 익어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처음 먹을 때부터 5 가지의 맛의 오미(五味)를 같이 먹기 시작해서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오미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5위(五位)의 인과를 10신에서 모두 밝히고, 그 시(時)도 본말(本末)의 변천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삼세가 일체(一際)인 까닭에 구경에는 불과가 첫 믿음의 초신(初信)의 법이라는 것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모양(樣)에 의지해서 상(像)을 그리는 등의 비유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신통으로 법문을 보이는 것 중에는 모두 41행의 경문이 있으니, 11단락으로 장과(長科)할 수 있다.
첫째 “이때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의(爾時世尊知諸菩薩)” 이하 1행 반의 경문은
여래께서 대중들이 생각하는 바를 알고서 신통으로 법을 나타내어 현법(現法)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제일(第一)의 “동방으로 10불찰미진을 지나서(東方過十佛剎塵)” 이하 39행 반의 경문은,
모두 시방으로부터 보살들이 와서 모인 것을 밝힌 것이니,
시방(시十方)이란, 스스로 한계가 있어서 다시 번거롭게 과(科)하지 않겠지만,
이 시방으로부터 보살대중이 모인 것의 뜻을 10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 불찰(佛刹)의 방면(方面)을 드는 것이며,
둘, 불찰의 멀고 가까움을 드는 것이며,
셋, 세계의 명칭과 색을 든 것이며,
넷, 부처님의 명호를 든 것이며,
다섯, 상수(上首)보살의 명칭을 든 것이며,
여섯, 대중의 수를 밝힌 것이며,
일곱, 대중이 다 와서 공경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여덟, 방위를 따라 법좌를 화(化)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아홉, 법좌의 명목을 밝힌 것이며,
열째,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힌 것이다.
하나, 불찰의 방면(方面)을 든 것은 동방에 있는 것이란,
동방이란 진괘(震卦)ㆍ춘생(春生, 봄의 생명)ㆍ초명(初明, 새벽의 밝음)ㆍ장남(長男)ㆍ머리ㆍ청룡ㆍ길경(吉慶, 길하고 경사로움)ㆍ진동(震動)이 되는데, 법사(法事)와 작업이 움직여 작용하는 시초라서 도(道)와 속(俗)에 공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먼저 동방을 들어서 첫머리로 삼음을 밝힌 것이며,
방(方)이란, 법으로서 단지 방법이란 뜻과 움직여 작용하는 시초를 취한 것일 뿐, 세간에서 동서남북의 방향이라고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일체처가 동방이며 일체처가 남방으로서, 단지 그 법만을 취할 뿐이니, 나머지는 이에 준거하라.
둘, 불찰의 멀고 가까움을 든다는 것이란,
동방의 십불찰미진수 세계 밖을 지난다는 것에 4 가지의 뜻이 있으니,
1) 십(十)이 원만한 원수(圓數)가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멀고 가까움의 원근(遠近)이 무진함을 밝힌 것이며,
2) 신심이 있는 자로 하여금 부처님 경계의 광대함을 알게 하여서,
스스로의 자심(自心)을 넓혀서 홍박(弘博)하도록 함을 밝힌 것이며,
3) 부처님 불경계(佛境界)의 두루함이 마치 거울 속의 상(像)과 같아서, 서로 사무쳐 걸림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4)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 자가 10불찰진(十佛刹塵)으로서 미혹에 처한 비유를 밝힌 것이니, 10무명(無明, 열 가지 근본 번뇌)을 요달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부처님 경계를 가로막아서 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진(塵)을 들어 법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열반경(涅槃經)에서 “석가모니의 정토는 서방의 32항하사 세계 밖을 지나서 있다”고 한 것은
모두 법을 나타낸 수(數)이니 회석(會釋)에서 이미 서술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십불찰미진수 세계 밖에서 왔다(十佛剎微塵數世界之外來)”고 말한 것은
10무명이 가로막고 있음을 밝힌 것이니,
10무명에서 하나하나의 무명이 무량한 정사(正使, 현행 무명)와 업습(業習, 종자 무명)이 있어,
그 주(主)와 반(伴)이 서로 훈습(熏習)하여서 번뇌가 세계진(世界塵)의 수(數)를 능가하여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또한 능히 지혜의 경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십불찰미진수 세계라 말하는 것이다
ㅡ정사(正使)는 습기(習氣)에 대해 칭하는 용어로서 바로 나타나 일어나는 번뇌의 정체를 정사라 하고,
그 번뇌의 여습(餘習)을 습기라 하는데, 그것이 업습(業習)이다. 정사는 현행(現行)을 말하고, 업습은 종자(種子)를 말한다.
‘왔다는 내(來)’는 것은 미혹으로부터 믿음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호칭이 ‘내(來)’가 됨을 밝힌 것이다.
저 세계 속에 부동지(不動智) 명호의 부처님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부동지불(不動智佛)이란, 시방의 범부와 성인이 모두 갖추고 있는 근본지를 밝힌 것이니,
이는 이 지혜(근본지)에서 능히 신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내(來)’라 호칭한 것이다.
이 부동지불(不動智佛)은 일체 중생 모두가 항상 스스로 갖고 있는 것으로,
만약 상(相)을 취해서 미혹을 따르면 곧 진(塵)의 장애가 무진(無盡)하나,
만약 일념에 미혹을 깨달아서 상(相)을 요달하면 곧 청정하여져서 허공과 같아지는 것이다.
미혹을 따르는 것을 밖의 외(外)라 칭하고
깨달은 것을 온, 내(來)라 말하지만,
실제의 불찰은 본래로 멀고 가까움의 원근(遠近)과 안팎 등의 장애가 없으며,
또한 가고 옴의 거래(去來)도 없는 것으로,
무변(無邊)한 불찰이 하나의 모공(毛孔)과 미진(微塵)의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멀고 가까움을 불러들이는 것은, 처음 믿는 초신심자(初信心者)의 마음을 광대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저 세계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 또한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온다(來)고 말한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부동지(不動智)인 것은, 믿는 신자(信者) 스스로의 근본지(根本智)가 부동지임을 밝힌 것이니,
이러한 지혜가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능히 보리심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지의 체(諦)로써 능히 미혹된 성품을 요달해서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까닭에, 미혹된 경계를 일으키는 것을 온다(來)고 칭하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것은 지혜의 청정한 상(相)에 의거해서 능히 일체의 뛰어나고 묘한 일체승묘경계(一切勝妙境界)를 짓나니, 소위 무량한 공덕의 상(相)이 항상 단절되지 않고 중생의 근기를 따라 자연히 상응하면서 갖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본각(本覺)에 의거해서 불각(不覺)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 하였으며,
또 “지(智)에 의거하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낳는다”고 자세히 밝히고 있다.
생각하건대 이는 일체 중생이 근본지를 미혹함으로써 세간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법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지혜에 자체성(自體性)이 없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불각(不覺)함으로써 괴로움과 즐거움의 업이 생기는 것이며,
지혜에 자체성이 없기 때문에 괴로움에 속박되는 것이나,
그러나, 근본에는 자체성이 없는 근본무성(根本無性)이며,
온갖 중연(衆緣)에도 자체성이 없는 무성(無性)이라서 만법이 스스로 공적하다는 것을 스스로 능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고(苦)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체성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스스로 유성(有性)이고 무성(無性)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과 같이(如人因地而倒因地而起),
일체의 중생도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넘어졌다가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一切衆生因自心根本智而倒,因自心根本智而起)
이러한 때문에 여래께서 이 일승의 경전에서 단박에 근본법을 드러내어서 금색세계로 삼은 것이니,
법신의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단박에 근본지를 드러내어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고 호칭한 것이며,
단박에 문수사리가 바로 자기 마음의 묘하게 가려내는 지혜의 자심묘택혜(自心妙擇慧)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나머지 9 개의 세계와 9 개의 지불(智佛)과 아홉 개의 보살은 자기 마음의 신해(信解)로,
수행하여 닦아 나아가는 지위의 진보에 따른 법신의 수행(隨行)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이다.
이 자기 마음의 자심(自心)이 본래 부동지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도를 보아 견도(見道)를 하고,
지위에 들어가서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를 일으켜 가행(加行)으로 법신ㆍ지신(智身)과 대원(大願)ㆍ대자(大慈)ㆍ대비(大悲)와 4섭법ㆍ4무량심과 10바라밀과 37조도분법(助道分法)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니,
처음 초발심한 근본 법신의 근본부동지체(根本不動體)를 통하여 만행을 자량함으로써 자비와 염원이 융화하여 서로를 성숙시키면서도 법신으로 행을 자량하여 오염되지 않게 하고, 행으로 법신을 자량하여 순수하게 성숙시키는 것이다.
오위(五位) 안에서 각각10열 개의 불과(佛果)와 10 개의 보살을 세운 것은,
지위를 따라 닦아 나아가는 가운데 스스로의 자행(自行)으로 터득한 득처(得處)의 불과(佛果)와 보살행과(菩薩行果)로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이는 다른 부처님의 명호가 아닌 것이며, 다른 보살로 명칭을 세운 것이 아닌 것이다.
지불과(智佛果, 지혜의 불과)를 따라서, 그 행과(行果, 행의 불과)를 따라서 5위(五位)의 인과가 각각 50개가 있으니, 모두 합치면 100개가 되고, 근본 5위에 있는 5 개의 인과를 합치면 도합 110성(城)의 법문이 되는 것이니,
이는 앞서 질문한 4 종류의 불찰 중에서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주불찰(佛住佛剎)과
법성의 청정을 장엄하는 장엄법성청정불찰(莊嚴法性淸淨佛剎)에 답하는 것이니,
이 2 종류의 불찰로부터 정각 성취를 보이는 시성정각불찰(示成正覺佛剎)과
신통이 자재하는 부처님의 위덕의 신통자재불위덕불찰(神通自在佛威德佛剎)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회(前會)에서 세주(世主)가 물은 것은 저 비로자나불의 자재함을 얻은 과이며,
이 제2회에서 보살이 물은 것은 스스로 수행하는 자의 불찰보살행(佛刹菩薩行)의 인과이니,
이로부터 곧바로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이르기까지는 5위를 닦아 나가는 보살의 가행(加行)하는 자력(自力)이 한 번 종결되는 지위이다.
이는 이 품이 신심으로 나아가는 신심진취과(信心進趣果)이며,
이로써 출현품(出現品)에 이르는 것은 수행의 지위가 지극한 인과의 상(相)임을 밝힌 것이다.
자기 마음의 근본불지(根本佛智)에서 닦아 나아가는 수행을 낳기 때문에,
이 부동지가 바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지(地, 바탕)가 되는 것이니,
이 지혜(智, 근본불지) 때문에 중생을 짓고, 이 지혜 때문에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즉, 이 지혜(智, 근본불지)로 인하여 미혹을 따라 중생을 지을 때는 6도(六道) 속의 천상 인간과 함께 악도를 따르는 가운데에서 모든 중생의 의보와 정보를 따르게 되는 것이니,
업에 따라 거친 추업(麤業)과 미세한 세업(細業)이 같지 않으며,
또 이 지혜(智, 근본불지)로 인하여 깨달음을 따를 때에는,
삼승과 법계의 원만한 일승불과(一乘佛果)의 오묘한 의보와 정보를 성취하는 것이니,
만약 이 지혜(智, 근본불지)가 없다면 원래 허공이라서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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