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①에서의 세 번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에서 그 뜻을 둘로 나눈 것에서의 두 번째의, 해당되는 품을 나누어서 과품(科品)한 것에서 다시 4 가지로 장과(長科)한다면,
첫째, “이때 세존께서는(爾時世尊)”부터 그 이하 8행 반의 경문은 ‘덕을 찬탄하는 탄덕(歎德)’과 ‘모인 대중’을 밝힌 분(分)이며,
둘째, “당시 모든 보살이 이러한 사유를 하였다(時 諸菩薩作是思惟)” 이하 14행의 경문은 대중이 법을 청한 대중청법분(大衆請法分)이며,
셋째, “이때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爾時 世尊 知諸菩薩心之所念)” 이하 41행의 경문은 여래께서 신통으로 법을 나타내는 신통현법분(神通現法分)이며,
넷째, “이때 문수사리(爾時文殊師利)” 이하부터 품의 말미에 이르기까지는 법을 들어 연설하는 거법연설분(擧法演說分)이다.
첫째의 ‘덕을 찬탄하는 탄덕(歎德)’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여래의 덕을 찬탄한 탄여래덕(歎如來德)이며
다른 하나는 보살 대중들의 덕을 찬탄한 탄보살대중덕(歎菩薩大衆德)이다.
처음의 탄여래덕(歎如來德)에서 “이때(爾時)” 이하 두 행의 경문은 서분(序分)으로,
앞에서 처음 보리를 얻은 곳과 보광명전 두 곳의 뜻이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본래 처소의 도량을 옮기지 않고서도 몸이 일체처에 두루하게 편좌(遍坐)하여 있기 때문이며,
보리도량의 체(體)가 바로 법계의 체(體)가 되기 때문이며,
보광명전이 법계의 보거(報居)가 도읍한 바가 되는 것이므로,
법(琺)과 보(報)의 두 이체(二體)의 성(性)과 상(相)이 일진(一眞)이라서 본말의 인과(因果)가 본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
이러한 도리를 말미암은 까닭에 거듭 서술하는 것이다.
고인(古人)들이 풀이하기를 “서로 가까움을 말미암기 때문에 거듭 서술했다”고 하였으나, 경전의 뜻은 그렇지 않은 것이며,
또 “부처님께서 노거(露居, 집 없이 노상에 거처함)하는 것을 보고 용이 보광명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도 역시 맞지 않은 것이니,
설령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는 3승(三乘)의 설인 것이다.
또한 “보리도량이 희련하(熙連河)의 강변(江邊)에 있다면, 보광명전과의 거리가 3리(三里)이며,
보광명전은 보리도량의 동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보리도량은 아란야로서 도를 얻은 곳이며,
보광명전은 보거(報居)의 택(宅, 집)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한 부의 경전이 앞뒤로 법계품(法界品)을 통하여서 다섯 번에 걸쳐 거듭
“이때 부처님께서는(爾時世尊在)”라고 한 것은 거처가 바로 법계(法界)이고,
여래의 몸과 궁전의 장엄이 모두 법계의 성상(性相)임을 밝힌 것이니, 근본지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번 서문을 둔 뜻은 전회(前會)에서 이미 서술하였으며,
“묘한 깨달음이 이미 원만하고(妙悟已滿)” 이하부터
“널리 삼세를 보고(普見三世)”에 이르기까지 가운데의 2행 반의 경문은
바로 부처님의 덕을 찬탄한 탄불덕(歎佛德)이며,
“묘한 깨달음이 이미 원만하다(妙悟已滿)”고 한 것은 10지(十智)가 두루하면서 자재한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2행이 영원히 끊어졌다(二行永絕)”라는 것은 유위와 무위의 2행(二行)이 다한 때문이며,
'무상법(無相法)을 요달'한 것은 취하고 버림의 취사(取捨)가 다한 때문이며,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에 머문다(住於佛住)'고 한 것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법계의 대지혜와 대자비에 머물기 때문이며,
또 여래와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 두루함에 머무는 오종편주(五種遍周)이시니,
첫째 정각 성취의 성정각(成正覺)을 보이심이 두루함이니, 초회의 보리도량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며,
둘째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장엄과 명호(名號)의 두루함이니, 제2회 보광명전이 이에 해당되며,
셋째 선정의 체(體)가 두루한 것이니, 십정품(十定品)이 이에 해당되며,
넷째 보현행의 가르침이 두루함이니, 이세간품(離世間品)이 이에 해당되며,
다섯째 법계의 원만무애하고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이 두루함이니, 법계품(法界品)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모든 부처님의 두루함의 오종제불편주(五種諸佛遍周)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곳에 머문다는 주불소주(住佛所住)라 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한 부의 경전에서 다섯 번에 걸쳐
“이때 부처님께서는 마갈국에 계시면서(爾時世尊在摩竭提國)”를 안립(安立)하나, 오직 법계품(法界品)만이 조금 다를 뿐이니,
겹겹이 두루하는 것이 1처(一處)ㆍ1보리체(一菩提體)ㆍ1법계(一法界)ㆍ1근본지(一根本智)를 여의지 않고,
일시(一時)로서 먼저와 나중이 없는 무전후(無前後)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경문에서 그 뜻을 잃을까 염려하여서, 다섯 번에 걸쳐 거듭 차례를 정하는, 오종중서(五度重敍)하여서,
나중에 배우는 후학자(後學者)들로 하여금 그러함을 미혹하지 않게 하고자,
이 다섯 가지 두루함의 오편주(五遍周)를 밝힌 것이다.
즉 총체적으로는 일제(一際)로서 먼저와 나중이 없는 무전후(無前後)이고
1찰나의 둘이 없는 마음의 무이념(無二念)에서 40년 간 법륜을 굴리신 것을 설하셨으니,
도솔천에서 오히려 내려오지도 않았고, 모태에서도 오히려 나오지 않고서, 이미 열반에 들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평등을 얻었다(得佛平等)’는 것이란,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닌, 이사무이(理事無二)이기 때문이며,
‘장애 없는 곳에 이르렀다(到無障處)’와 ‘법을 굴릴 수 없다(不可轉法)’는 것이란,
부처님께서 항상 생사(生死)에 처하면서도 업이 변천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능히 변천하지 않는 법을 굴리기 때문이다.
‘행하는 바에 장애가 없다(所行無㝵)’는 것이란,
부처님께서 생사 가운데에서 능히 함께 동사(同事)하면서도 진(眞)과 속(俗)에 걸리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불가사의를 세우다의 입불사의(立不思議)’라는 것은 부처님의 불도(佛道)가 원만하고, 행이 종결되니,
총체적으로는 공용(功用)이 없어서 운(運)에 맡겨 중생을 이롭게 함에 지혜로써 자재로우니,
이는 생각이나 상념, 뜻(意)이나 식(識)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찬탄한 것이다.
‘널리 삼세를 본다는 보견삼세(普見三世)’라 한 것은,
눈이 원만하고 밝기 때문에 삼세가 아닌 가운데에서 삼세 속의 중생사(衆生事)를 보는 것이며,
“10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과 더불어(與十佛剎微塵數諸菩薩俱)” 이하부터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있는 4행의 경문은 보살의 덕을 찬탄한 것이니,
10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과 함께했다는, 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구(與十佛剎微塵數諸菩薩俱)라는 것은
대중이 원만해서 법계해(法界海)에 두루함을 밝힌 것이며,
‘함께한 구(俱)’라는 것은 동시에 이르러 가고 옴이 없기 때문이며,
‘모두가 일생보처(一生補處)가 아님이 없다(莫不皆是一生補處)'것은 모두가 10지(十地)의 보살이기 때문이며,
10지(十地)가 등각위(等覺位)를 거치면서 보현위(普賢位)가 성숙하는 것이니,
도(道)가 원만하고 공(功)이 종결되어야 비로소 불과(佛果)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일생(一生)’인 것으로,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의 설과 같으며,
또한 초발심주(初發心住)부터는 그 명칭이 일생보살(一生菩薩)이니,
처음으로 성품의 근본지(根本智)가 나타남으로써
생(生)의 먼저와 나중이 있음을 보지 않는 까닭에 그 명칭이 ‘일생(一生)’인 것이니,
그래서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에서는 “3현(三賢) 보살이 법류수(法流水)에서 운(運)에 맡겨 부처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모두 타방(他方)으로부터 함께 와서 모였다(悉從他方而共來集)’는 것은,
타방에서 함께 와서 모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옛 대중의 구중(舊衆, 이미 여래의 집안에서 태어난 대중)이 아님을 구별한 것이니,
모두가 오지 않고 이르르는 것이며, 가지 않고 두루한 것이다.
또 전회(前會)는 과(果)를 들어 수행을 권하는 거과권수(奉果勸修)함으로써 저 불과를 믿는다는 것을 밝혔지만,
이제 이 제2회(二會)에서는 저 불과의 해행(解行)을 통하여 자기 마음의 믿음을 신증(信證)하는 도의, 자심신증도(自心信證道)를 성취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타방으로부터 함께 와서 모였다(從他方而共來集)’고 한 것이니,
이전의 불과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다 일생보처이다(皆是一生補處)’라는 것은
초회(初會)에서 신해(信解)가 생겨서, 이 회(會)에 와서는 그 믿음이 원만해져서 지위에 들어가면서 문득 성불함을 밝힌 것이니,
예를 들자면, 용녀나 선재동자 등인 것이다.
이런 뜻이 있으로, 타방에서 오는 것이 모두 일생의 대중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법에 들어가는 입법(入法)이라는 말을 나타냄으로써 타방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미혹(迷惑)을 타방(他方)이라 이름하고 깨달음을 ‘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계와 법계ㆍ세계ㆍ열반계를 널리 잘 관찰하여서(普善觀察諸衆生界法界世界涅槃界)” 이하 3행의 경문은,
도래한 대중이 이 세 가지 세계(법계가 둘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에 세 가지만 말한 것이다.)의 둘이 없는 성품의 무이성(無二性)을 잘 관찰하고,
또 중생들이 번뇌를 따르는 수번뇌업(隨煩惱業)을 알고,
또 보살의 지위에 따른 번뇌의 보살수의번뇌(菩薩隨位煩惱)의 행업(行業) 등을 아는 것을 찬탄한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에서 설한 바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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