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14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묻겠습니다.
명(名)과 호(號)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한다.
명(名)과 호(號)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으니, 그 두 가지란?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때에는 아직 어려서 덕(德)이 없으므로 우선 자(字)를 지어 부르는 것이 명(名)이 되고,

덕(德)이 있으면 그 덕에 근거하여 명(名)을 세우나니, 그 명(名)은 높여서 부를 수 있으므로 호(號)가 되는 것이며, 

명(名)은 아랫사람들이 부를 수 없지만,

호(號)는 아랫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 있는 유덕(有德)과 덕이 없음의 무덕(無德)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명(名)에 속하는 것이니,

명언(名言)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전의 부처님 명호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모두 법을 잡고 덕을 잡아서 명(名)을 세운 것이니 세속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① 에서의 세 번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에서
그 뜻을 둘로 나누면,

하나는, 32품 경전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니, 제3선(禪)에서 11지(十一地)의 한 품을 설하는 것이 오지 않은 것이며,

둘은, 해당되는 품의 경문의 뜻을 과(科)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32품의 경정의 뜻을 장과한다는 것이란,

여래명호품 제2회(會)의 세주(世主)가 28 가지의 질문을 일으킨 이하부터 곧바로 향후의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세주가 묻는 1종(一終)의 인과이니, 모두 32품의 경문으로 28 가지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리하여 보광명지(寶光明智)의 법계불과(法界佛果)인 보거(報居, 과보의 거처)의 전(殿)에서 불과의 명호를 들었으며,

아울러 불과(佛果)로 행하는 중생 교화의 사성제(四聖諦) 법문을 들었으며,

아울러 법계근본지체(法界根本智體)의 부처님 명호인 부동지불을 들어서 믿음의 수행인 신수(信修)를 성취함에서부터

곧바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의 32품 경전이 믿음으로 수행하여 나아가는 신진수행(信進修行)하는 1종(一終) 인과의 극(極)이니,

이는 보광명지전(寶光明智殿)의 불과(佛果)에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인과가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또한 처음 정각을 성취한 시성정각(始成正覺)의 과덕(果德)에서 신심을 일으켜 수행하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중의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법계의 시간 간격이 없음을 밝히는 때문이니,

이는 법계의 체(體)에서 범부가 망령되게 무량한 겁을 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을 일으키는 자라면, 진(眞)에 의거하여 행(行)을 일으키는 것으로 닦아 나아감을 삼기 때문에 5위(五位)의 행문(行門)을 거칠지라도 시간의 변천이 없는 것이며,

만약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에는 항상 “이전의 모든 제불(諸佛)들은 앞에서 성불한 뒤에 무량겁(無量劫)이 지났다”고 말하다가,

올바른 믿음의 힘인 정신력(正信力)으로 시방으로 무량겁 동안 이미 성불한 이들을 보면, 자신과 앞에서 먼저 성불한 자가 일시로서  성불에 먼저와 나중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여래께서 처음으로 시성정각(始成正覺)을 성취하셨을 때, 지금의 범부가 비로소 보리심을 발하여서 행을 일으켜 닦아 나아가 스스로의 행이 이미 원만하게 되어도, 궁극적으로는 여래께서 시성정각(始成正覺)을 성취한 최초의 출현시(出現時)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정(情)으로 헤아리지 않고, 근본 법계에 의지함으로써 본래부터 시간이 없는 본무시(本無時)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처음의 발심과 궁극의 마지막이 다르지 않다(發心畢竟二不別)”고 말한 것은,

법계성(法界性, 법계의 성품)에는 삼세에 차별이 없는 무삼세별(無三世別)이기 때문이니, 

이는 삼세의 시간에 차별이 없다는 삼세시무별(三世時無別)이라는 것으로, 

삼세시무별(三世時無別)이란 삼세에는 시간이 없는 삼세무시(三世無時)이기 때문이니,  

삼세무시(三世無時)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며,  

지혜가 다르지 않은 지무별(智無別)이기 때문이니,

차별이 없다는 무별(無別)이란,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異)이며,

부동지불의 체(體)이기 때문에 묘혜(妙慧)의 작용이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며,

문수의 잘 간택하는 묘혜(妙慧)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행에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며,

초발심에서부터 무별(無別)의 10바라밀행의 보현행을 수행하기 때문에 대자비에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며,

항상 교화하기 때문에 대원(大願)이 차별 없는 무별(無別)이며,

중생을 버러지 않기 때문에 사섭법이 무별(無別)하고, 사무량심에 무별(無別)하고, 37조도품이 무별(無別)한 것이니,

이러한 10 열 가지의 차별이 없는 십종무별(十種無別)이기 때문에

처음의 초발심과 필경의 마지막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초발심과 필경의 이심(二心)에서도 처음의 발심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10 가지의 십종신해(十種信解)에 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마음 밖에서 다른 부처가 도를 얻는다는 것을 믿거나,

나는 범부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정(情)으로 헤아린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신진수행(信進修行)을 논하지 않고 다만 생사의 장구한 흐름에서 늘 견망(見網, 소견의 그물)을 따르는 것이니 어찌 크게 괴롭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제2회(第二會)와 초회(初會)에서 처음 정각을 성취한 여래의 출현을 밝히고,

나중의 32품에서 다시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을 나타냄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하는 자가 삼세의 부처님과 더불어 일시에 출현함을 밝혔으니,

이는 법계가 총체적으로 일시(一時)라는 것을 밝힌 것으로, 

마치 보경(寶鏡, 보배 거울)을 갖고서 온갖 상(像)에 널리 비추이니, 온갖 상이 즉시에 나타남에 전후의 시기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법계의 근본불지(根本佛智)의 경계 속에 단박에 온갖 중법(衆法)이 나타나는 것이라서, 정(情)으로 재거나 헤아려서 먼저와 나중이라는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한결같이 미륵의 누각에서의 경계에 의거하여야 하리라.


초회 중 처음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은 이 과(果)를 들어 수행을 권하는 거과권수(擧果勸修)요,

불출현품(佛出現品)에서의 부처님들은 모든 보살이 5위를 닦아 나아가서 인과행(因果行)을 마친 부처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신위(信位) 중 부동지불(不動智佛)과 더불어 상대하기 때문이다.

묻겠습니다.
모든 품을 보살들이 설하셨는데,

어찌하여 아승기품(唯阿僧祇品)과 수호품(隨好品)만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셨습니까?
 
답한다.
보살의 가행(加行)과 5위의 무명번뇌는 여래위(如來位) 중에서 부사의한 보살 대중이 5위 보살에 의탁함으로써, 해당되는 지위에 스스로 차제(次第)의 법문을 드러낸 것이니, 바로 10혜(十慧)ㆍ10림(十林)ㆍ10당(十幢)ㆍ10장(十藏)의 보살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위(佛位)에서 법을 미혹한 무명은 여래께서 스스로 설하신 것이니, 아승기품(唯阿僧祇品)과 수호품(隨好品)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불위(佛位)에서의 무명은 불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부처님의 수법(數法)을 알지 못하는 것과 부처님의 수호광명공덕(隨好光明功德)을 알지 못하는, 두 가지의 미혹을 해결하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무명주지(無明住地)는 불위라야 비로소 종결되는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에서의 설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이 가르침의 한 자락은 2승이나 3승과 비슷하지만,

2승과 정토보살이 근본무명을 끊었다고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무명이 근본지(根本無)라는 것을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1승(一乘)의 가르침에서는 부동지불로서 신심(信心)을 삼는 것이니,

이러한 때문에 소유(所有, 3승)의 수행이 증명하여 비추는 중법(衆法)이 이 경전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가르침은 당장의 일념에 초심(初心)과 필경심(畢竟心, 깨달은 궁극의 마음)이 모두 다함을 밝히고 있으니,

법계에는 삼세가 없는 무삼세(無三世)이기 때문이다.

 

3승은 절대적으로 승기(僧祗)가 가득 차야 하는 것이며,

또한 3현(三賢)과 10성(十聖)이 닦아 나아가는 길이 달라서,

지(地)에서는 가행(加行)이 되며, 지(地) 이전에는 4자량(四資粮) 등이며,

불과(佛果)는 반드시 승지를 채워야 하는 것이니 앞에서 이미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전은 10주(十住)에서 바로 도를 보며, 가행(加行)과 자량이 일시(一時)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법계의 대지혜로써 그 행을 자량하여 행에 오염이 없게 하고,

행으로써 법계의 지체(智體)를 자량하여 익숙하게 하여서 성숙시키기 때문이니,

이는 범부에서부터 처음 여래의 이지성(理智性)을 봄을 밝힌 것이다.


또 이 5위 중의 수행은 각각의 지위에서마다 불과(佛果)가 있지만, 지위의 익숙함에 따라 세우는 명칭이 다르다.

그러나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앞 지위가 뒤의 지위를 향하여서, 단지 보살의 과(果)만 있을 뿐, 불과(佛果)는 없는 것이니,

후에 그 지위에 이르러서 자세히 밝히겠다.

 

이 법계의 법문은 무량겁(無量劫)을 거친다고 설할지라도 연장하는 것이 아니며,

1찰나(一剎那, 순간)라고 설할지라도 줄인 것이 아니거늘,

오직 미혹된 이들만이 망녕되게 길고 짧음과, 늘이고 줄임이라는 견해를 지어서, 

곧바로 진(眞)에 응하는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이후부터 곧바로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이르기까지에 모두 32품의 경문이 있는 것은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의 닦아 나아가는 인과(因果)로서,

처음이 곧 나중이며, 나중이 곧 처음인, 불이(不二)의 지위인 것이다.

 

마치 대왕로(大王路)는 법이 항상 그러하여서 낡은 체(體)도 아니고 새로운 신체(新體)도 아닌 것과 같으니,

문수사리 보살의 게송에서는 “일념에 널리 한량없는 무량겁을 관하니,

감도 없는 무거(無去)이고 옴도 없는 무래(無來)이고 머물지도 않는 무주(無住)이구나.

이와 같이 삼세의 일을 요달하여 안다면, 모든 방편을 초월해서 10력(十力)을 이루리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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