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經卷第十七 梵行品第十六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三藏沙門(삼장사문實叉難陀 (실차난타 

16. 범행품(梵行品)  3

 

ㅡ계(戒, 계율)이 범행인가?

若戒是梵行(약계시범행)  爲壇場是戒耶(위단장시계아) 

만약 계(戒, 계율) 범행(梵行)이라 한다면, 단장(壇場, 제단)을 계라 하겠는가?

問淸淨是戒耶(문청정시계아) '청정한가?'라고 묻는 것을 계라 하겠는가? 

(계(戒)를 받을 때의 의식에서 “네가 자격이 있는가? 현재 청정한가?”라고 물으면,

“예”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묻는 것을 계라 하겠는가?)

 

敎威儀是戒耶(교위의시계아) 

교수아사리(敎授阿闍梨)가 위의를 가르치는 교위의(敎威儀)을 계라 하겠는가? 

(교수아사리가 승려와 사미와 비구의 행동할 바의 위의를 가르치는 것을 계라 하겠는가?

 

三說羯磨是戒耶(삼설갈마시계아) 

갈마(羯磨, 의식)를   말하는 것을 계라 하겠는가? 

ㅡ갈마(羯磨)는 포살(布薩)이나 자자(自恣)와 같은 승가의 규칙적인 행사를 비롯하여, 새로운 의결 사항이나 쟁사(諍事) 등이 생겼을 경우에 승가 구성원들의 의견을 확인하기 위하여 행하는 공식적인 회의이다. 

갈마는 원칙적으로 승가 구성원들의 전원 출석에 의해 집행되며, 의결도 전원 일치로 승인된다. 

그 형식에는 내용의 경중에 따라서 단백갈마(單白羯磨), 백이갈마(白二羯磨), 백사갈마(白四羯磨)가 있다. 

단백갈마는 고지(告知)와 같으며, 백이갈마는 고지한 사안에 1회 찬성과 반대를 통해 이의가 없으면 결정한다.

백사갈마는 고지한 뒤 세 번 거듭 찬성과 반대를 물어 결정하는 것이다.ㅡ다움

 

和尙是戒耶(화상시계아) 阿闍黎是戒耶(아도려시계아)

화상(和尙, 승려)을 계라 하겠는가?

아도려(阿闍黎, 아사리)를 계라 하겠는가?  

 

ㅡ아사리(阿闍梨, ācārya)는, 궤범사(軌範師), 계사(戒師) 등으로 의역되며 바른 행동을 보여준다 하여 정행(正行)이라 하기도 하며, ‘스승’이라는 뜻이다. 계율과 의식에 밝아서 출가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덕이 높고, 또 선법(善法)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옷을 단정히 입고 걸식(乞食)을 법답게 하며, 항상 제자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승려를 아사리라고 하였다.

10회 이상의 안거(安居)를 마쳤고 계율에 밝고 지혜와 복덕을 겸비한 승려이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이에게 10계(戒)를 주는 출가아사리(出家阿闍梨),

구족계를 줄 때 의식을 주관하는 갈마아사리(羯磨阿闍梨),

구족계를 받는 이에게 규율이나 몸가짐 등을 가르치는 교수아사리(敎授阿闍梨), 

경전을 가르치는 수경아사리(受經阿闍梨)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아사리라고 하면 은사(恩師)·법사(法師)·계사(戒師) 중에서 계사를 지칭한다.  

 

剃髮是戒耶(체발시계아) 着袈裟衣是戒耶(착가사의시계아) 

乞食是戒耶(걸식시계아) 正命是戒耶(정명시계아) 

머리를 깎는 체발(剃髮, 삭발)을 계라 하겠는가?

가사를 입는 것을 계라 하겠는가?

걸식하는 것을 계라 하겠는가?

올바른 생활의 정명(正命)을 계라 하겠는가?   

ㅡ바르게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에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창을 파는 것 보다 방패를 파는 것이 오히려 좋은 직업이다.

창은 사람 죽이는 물건이지만, 창 만드는 사람은 창을 만드는 것이 정명(正命)입니다. 

정명(正命)은 상황 따라 바른 직업, 바르게 생명을 유지한다는 뜻이지만 바른 직업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비구는 걸식을 해야 되고, 백정은 도살해야 되고, 어부는 고기 잡아야 되고, 창 만드는 사람은 창 만들어야 되고,

방패 만드는 사람은 방패를 만들어야 되고,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그 사실 각각이 그대로 전부 정명(正命)인 것입니다. 

중도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 수용하는 입장에서 정명을 살펴야 합니다.

계율도 이렇게 분석해보니까 계율이라는 그 자체에 실체가 없는 것을 얼기설기 이론적으로 묶어서 모아 놓은 것을 청정범행이라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ㅡ무비스님

 

如是觀已(여시관이) 於身無所取(어신무소취) 

於修無所着(어수무소착) 於法無所住(어법무소주) 

이렇게 관찰하고나서, 몸으로 취하지도 않고, 닦음에 집착하지도 않아서 법에 머물지도 않으며,

 

過去已滅(과거이멸) 未來未至(미래미지) 現在空寂(현재공적) 

과거는 이미 멸한 이멸(已滅)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미지(未至)이며, 현재는 적정하여 공적(空寂)하며,

 

無作業者(무작업자) 無受報者(무수보자) 此世不移動(차세부이동) 彼世不改變(피세불개변) 

업을 짓는 이도 없는 무작업자(無作業者)이고, 과보를 받을 이도 없는 무수보자(無受報者)이며,

이 세상은 옮겨가지 않는 불이동(不移動)인 것이며, 저 세상은 바뀌지 않는 불개변(不改變)이라.

 

此中何法(차중하법) 名爲梵行(명위범행) 

梵行從何處來(범행종하처래) 誰之所有(수지소유) 體爲是誰(체위시수) 

由誰而作(유수이작) 爲是有(위시유) 爲是無(위시무) 

이러한 가운데에서 어떠한 법이 범행(梵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범행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의 소유이며? 자체는 무엇이며?

누구로 말미암아 짓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爲是色(위시색) 爲非色(위비색) 爲是受(위시수)爲非受(위비수)

이것이 오온(五蘊)의 색(색, 보이는 물질)인가? 색이 아닌 것인가?

이것이 오온(五蘊)의 느낌의 수(受)인가? 수가 아닌 것인가?

 

爲是想(위시상) 爲非想(위비상) 爲是行(위시행) 爲非行(위비행) 

爲是識(위시식) 爲非識(위비식) 

이것이 오온(五蘊)의 생각의 상(想)인가? 상(想)이 아닌 것인가?

이것이 오온(五蘊)의 지어감의 행(行)인가? 행(行)이 아닌 것인가?

이것이 오온(五蘊)의 인식의 식(識)인가? 식(識)이 아닌 것인가?

 

如是觀察(여시관찰) 梵行法(범행법) 不可得故(불가득고) 

三世法皆空寂故(삼세법개공적고) 意無取着故(의무취착고) 心無障碍故(심무장애고) 

이렇게 관찰한다면, 범행이라는 범행법(梵行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까닭이며,

현재 미래 과거의 삼세(三世)의 법(法)이 모두 공적한 까닭이며,

의(意, 뜻, 생각)로 집착할 것도 없는 까닭이며,

심(心, 마음)에 장애가 없는 까닭이며, 

 

所行 無二故(소행무이고) 方便 自在故(방편자재고) 

受無相法故(수무상법고) 觀無相法故(관무상법고) 

知佛法平等故(지불법평등고) 具一切佛法故(구일체불법고)

如是名爲(여시명위) 淸淨梵行(청정범행) 

행할 바의 소행(所行)에 둘이 없는 무이(無二)인 까닭이며, 방편이 자재한 까닭이며,

모양(형상)이 없는 무상법(無相法)을 받아들이는 까닭이며,

모양(형상)이 없는 무상법(無相法)을 관찰하는 까닭이며,

부처님의 불법(佛法)이 평등함을 아는 까닭이며,

본래로 일체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갖추고 있는 까닭이니, 

위와 같이 고정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들을 이름하여 범행(梵行)이라 하느니라.  

 

ㅡ부처님의 10력

復應修習十種法(부응수습십종법) 何者爲十(하자위십) 

또한 열 가지의 십종법(十種法)을 닦아야 하나니, 무엇이 그 10 가지인가?

 

所謂 處非處智(소위처비처지)

이른바 처(處, 옳은 것, 도리)와 비처(非處, 옳지 않은 것, 도리가 아닌 것)를 아는 지혜와

過現未來業報智(과현미래업보지) 

지난 세상ㆍ지금 세상ㆍ오는 세상의 업(業)과 과보(果報)를 아는 지혜와

諸禪解脫三昧智(제선해탈삼매지)  모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과 삼매(三昧)를 아는 지혜와 

諸根勝劣智(제근승렬지)  모든 근기의 승(勝, 뛰어남)하고 열(劣, 열등)함을 아는 지혜와

種種解智(종종해지)  갖가지의  이해를 아는 지혜와 

種種界智(종종계지) 갖가지 세계(경계)를 아는 지혜와, 

一切至處道智(일체지처도지)  일체의 모든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는 지혜와

(죽은 뒤에 어디에 태어나는 등등을 아는 지혜와)

天眼無碍智(천안무애지)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중생들을 살펴보는 천안통(天眼通)의 걸림없는 지혜와

宿命無碍智(숙명무애지) 자신과 중생의 과거 생을 아는 숙명통(宿命通)의 걸림없는 지혜와

永斷習氣智(영단습기지)  습기(習氣)를 영원히 끊어버리는 지혜이니라.  

 

於如來十力(어여래십력) 一一觀察(일일관찰) 一一力中(일일역중)

有無量義(유무량의) 悉應諮問(실응자문)

여래의 십력(十力)을 하나하나 관찰한다면, 그 하나하나의 힘에 무량한 뜻이 있으니, 

마땅히 자문(諮問)을 많이 하여서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

 

聞已(문이) 應起大慈悲心(응기대자비심) 觀察衆生(관찰중생) 不捨離(이불사리) 

思惟諸法(사유제법) 無有休息(무유휴식) 無上業(행부상업) 不求果報(불구과보) 

了知境界(요지경계) 如幻如夢(여환여몽) 如影如響(여영여향) 亦如變化(역여변화) 

자문(諮問)하여 들은 뒤에는 응당히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서

중생을 관찰하여서 내치고 버리지 않아야 하며,

제법(諸法)을 사유(思惟)함에 있어서 쉬지 않으며,

위없는 무상업(無上業)을 행하나 그 과보(또는 이익)를 구하지 않으며,

모든 경계가 마치 요술과 같은 여환(如幻)이요,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요,

마치 그림자와 같은 여영(如影)이요, 마치 메아리와 같은 여향(如響)이요,

또한 변화(變化)와 같다는 것을 분명히 요지(了知)하여 알아야 하느니라.

 

若諸菩薩(약제보살) 能與如是(능여여시) 觀行相應(관행상응) 

於諸法中(어제법중) 不生二解(불생이해) 疾得現前(질득현전) 

初發心時(초발심시)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만약 보살들이 능히 이러하게 관찰함과 행함의 관(觀)과 행(行)의 관법이 더불어 서로 상응할 수 있고, 

제법(諸法) 가운데에서 두 가지의 이해를 내지 않는다면,

일체의 불법(佛法)이 빠르게 그 앞에 현전(現前)함을 얻게 될 것이며,

처음 초발심한 때에 곧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知一切法(지일체법) 卽心自性(즉심자성)  

成就慧身(성취혜신)호대 不由他悟(불유타오)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다른 이를 말미암지 않고 지혜의 몸인 혜신(慧身)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라.

(다른 이를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니라.)

 

ㅡ이렇게 자세히 관(觀)하여도 범행을 구하는 자를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청정한 범행이 된다고 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행(淸淨行)을 하는 자를 불성계(佛性戒)를 지녔다고 칭하는데, 바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얻기 때문이요, 나아가 처음 초발심할 때 문득 정각(正覺)을 성취함으로써 불성계를 지니기 때문에 불(佛)과 그 체(體)를 같이 하고, 이(理)와 사(事)가 평등하여 일체가 온통 진법계(眞法界)인 것이다.

이같은 지계(持戒)를 하는 이는 자기 스스로는 계(戒)를 지니고 있는 자로 보지 않으며, 다른 이를 계를 파괴하는 자로도 보지 않는다. 따라서 범부의 행도 아니요, 성현의 행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보지 않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께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는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조금이라도 얻는 바가 있다면, 정행(淨行)이라 칭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성계(性戒)가 바로 법신(法身)이라는 것이다.

법신이란 바로 여래의 지혜이며, 여래의 지혜는 곧 정각(正覺)이기 때문에 취하고 버림이 있는 소승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ㅡ 이통현(李通玄)장자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1권 2

 

16. 범행품(梵行品)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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