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13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을 해석함에 있어서 간략하게 10 가지의 문으로 나눈 것에서의 여섯 번째,
화장세계해의 순수하고 잡됨이 걸림없음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행한 불소행(佛所行)이 법계와 중생계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행이 두루하다면, 성취한 의과(依果) 역시도 두루한 것이지만,
다만 업이 상응하지 않는 자는 함께 거주한다 할지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영신(靈神)과 모든 귀신들이 사람과 함께 거처하지만, 사람이 보지를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경전에서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에 늘 선(善)의 공덕천녀(功德天女)와 악(惡) 흑암(黑暗)천녀가 인간의 선악을 엿보아서 제석천에게 보고하고자, 이 이천(二天)이 항상 쫓아다니면서 이 이천(二天)은 사람들을 보지만 사람들은 이천(二天)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이 경전은 부처님의 불행(佛行)이 원만하고 두루한 까닭에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또한 두루한 것이라서,
정토가 타방에 있다고 미루면서 거래(去來)와 자타(自他)의 상(相)을 불러들이는 삼승(三乘)과는 같지 않은 것이니,
삼승은 저 소심하고 근기 낮은 자를 위하여서 우선 이와 같은 방편으로 가르침의 그물을 시설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대보리심을 구하는자는 반드시 이 불이(不二)의 문으로 돌아와서 법계에 두루한 행원(行願)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을 해석함에 있어서 간략하게 10 가지의 문으로 나눈 것에서의 일곱 번째의,
화장세계해가 삼세업(三世業)의 경계를 원만히 거두어 들임을 밝힌다는 것이란,
이 화장세계해는 그 교법(敎法)이 일념삼세(一念三世)임을 밝힌 것이니,
일념(一念)이란 무념(無念)이 되고,
무념(無念)은 바로 삼세(三世)와 고금(古今) 등의 법이 없다는 것이니,
이는 법신이 무념한 것으로 일체 중생의 망념인 삼세다겁(三世多劫)의 법이 무념(無念)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화장세계에 있는 장엄의 경계가 능히 모든 부처님의 제불업(諸佛業)과 중생이 삼세간에 행한 행업(行業)을 나타낸 인과(因果)의 모두가 그 속에 드러나지만,
혹 어떤 경우는 과거업(過去業)이 미래 가운데에 나타나고
혹 어떤 경우는 미래업(未來業)이 과거 가운데에 나타나며,
혹 어떤 경우는 과거와 미래의 업이 현재 가운데에 나타나며,
어떤 경우는 현재업(現在業)이 과거와 미래 가운데에 나타나나니,
마치 백천 개의 밝은 거울을 함께 매달면 사방과 앞뒤의 영상이 서로 사무치는 것과 같으니,
이는 법계의 체성이 시(時, 시간)가 없기 때문에 망녕된 계교인 삼세의 업이 단박에 무시법(無時法, 시간이 없는 법) 가운데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지혜가 삼세에 들어갈지라도 가고 옴이 없다(智入三世而無來往)”고 하였으며,
또 경전에서는 “불자야, 너희들은 반드시 찰종(刹種)의 위신력을 관하여 (汝應觀剎種威神力)
미래의 모든 국토 모두를 마치 꿈과 같이 보고, (未來諸國土,如夢悉令見)
시방의 모든 세계와 과거의 국토 및 바다 모두가 1찰(刹) 속에 상(像)을 나타내는 것을 마치 환영같이 보며
(十方諸世界,過去國土海,咸於一剎中,現像猶如化),
삼세의 일체 모든 부처님과 그 국토를 하나의 찰종 속에서 일체 다 관하여 보라
(三世一切佛及以其國土,於一剎種中,一切悉觀見)”고 하였으니,
이에 대한 논주(論主, 이통현 장자)의 게송은 아래와 같으니,
三世無有時 妄繫三世法
삼세에는 시(時, 시간)이 없거늘, 망령되게 삼세법(三世法)을 계교하네.
以眞無妄想 一念現三世
참다운 진(眞)은 망상이 없거늘, 일념에 삼세를 나타내며,
三世無時者 亦無有一念
삼세에는 시(時, 시간)가 없다면, 일념(一念) 역시도 있지 않을 것이니,
繫著三世法 摠現無時中
삼세법을 계교하여 집착할지라도, 그 모두가 무시(無時) 가운데에 나타나나니
了達無時法 一念成正覺
무시법(無時法)을 요달한다면, 일념에 정각을 이루리라.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을 해석함에 있어서 간략하게 10 가지의 문으로 나눈 것에서의 여덟 번째
부처님 나라인 불국(佛國)이 본래 공한 본공(本空)이거늘, 어떻게 화장세계해 출생의 연(緣)이 되는가를 해석한다며,
어떤 일을 반연(攀緣)하는가에 대하여 네 가지의 사연(四緣)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이승이 비록 삼계의 추업(麤業, 조잡한 업)으로부터 해탈하긴 하였지만, 복과 지혜가 없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고 열반에 정체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삼승의 보살이 정토에 태어나기를 즐기는 상념을 항상 간직함으로서 법성의 여리(如理)를 가로막게 되는 까닭에 염정(染淨, 오염과 청정)이 정(情)에 지우쳐서 지견(知見)이 보편적이지 못하고,
정(情)을 정토에 두어서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이 법의 숨고 나타남의 은현(隱現)이 자유로워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뛰어난 복덕을 나타내는 까닭에 만 가지의 차별상을 갖추어서 광명을 현조(顯照)하게 비추는 것”만 못한 것이다.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정(情)을 취하여 집착하지 않는, 무취착(無取著)하게 한다면, 마치 환영의 구름이 흩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아져서,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면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법공무상(法空無相)의 이치를 이른바 단견(斷見)이라 하고, 공(空)에는 복과 지혜가 없다고 하면서 공을 관하는 공관(空觀)을 즐겨하지 않고, 상(相)에 집착하기를 즐기는, 즉 경계를 따라 업을 간직하면서 능히 해탈하지 못하는 일체공(一切空)을 두려워하는 중생을 위하여, 복덕의 정과(正果)와 의과(依果)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공법(空法)을 관하게 하여서 무명을 탈피하게 함으로써 복덕의 업을 이루게 하는 것이며,
넷째는 총체적으로 일체의 삼승과 일체의 범부를 위하여 광대한 원행(願行)과
복과 지혜의 경계와 도량(度量)의 양식(樣式)을 나타내어서 본받아 배우게 함으로써,
편벽되게 집착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모든 불국토가 허공과 같아서 견줄 바도 없는 무등(無等)이고 생김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상도 없는 무유상(無有相)이지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널리 청정히 장엄하고자 하는 본원력(本願力)으로 그 가운데에 머무는 것이다.
(諸佛國土如虛空,無等無生無有相,爲利衆生普嚴淨,本願力故,住其中)“라고 한 것이다.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을 해석함에 있어서 간략하게 10 가지의 문으로 나눈 것에서의 아홉 번째
화장세계해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숨고 나타남의 은현(隱現)을 자유롭게 하는가를 밝힌다는 것을 설명한다며,
일체법공(一切法空)의 이치로부터 지혜를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숨었다 나타났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세간의 용과 귀신은 삼독(三毒, 탐진치)을 갖추고서도 오히려 능히 숨었다 나타났다 하거늘,
하물며 삼독을 모두 비운 법공(法空)은 순수한 청정 지혜이거늘,
어찌 숨었다 나타나는 은현(隱現)이 자유롭지 못할 것인가!
가령 선재동자가 미륵의 누각에 들어가서 삼매력을 통하여 온갖 묘한 장엄을 갖추어 보다가
삼매로부터 일어나니, 갑자기 하나도 볼 수가 없었기에 선재동자가 미륵에게 여쭈기를,
“이 장엄이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此莊嚴何處去)”
미륵이 답하여,
“온 곳으로 갔다.(從來處去)”고 하였다
묻겠습니다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답한다.
“보살지혜(菩薩智慧)로부터 와서 보살의 지혜신력(智慧神力)에 의지하여 머무는 까닭에 간 곳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어서,
가는 곳이 없기 때문에 모임이 아닌 까닭에 비집(非集)이고,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일정함도 없는 비상(非常)이니, 일체를 멀리 여읜 것이다.
또한 환사(幻師)가 모든 요술을 지을 때, 좇아서 온 곳도 없고, 이르러 가는 곳도 없어서,
비록 오고 감은 없지만 환력(幻力)을 쓰는 까닭에 분명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니,
저 장엄사(莊嚴事)도 역시 이와 같아서, 좇아온 곳도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가는 곳도 없는 무소거(無所去)이라서,
비록 오고 감이 없는 무래거(無來去)이지만 관습적으로 익힌 불가사의의 환지력(幻智力)과 과거의 대원력(大願力) 때문에 이렇게 현현(顯現)하는 것이니, 화장세계(華藏世界)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래의 대원지력(大願智力)과 법성(法性) 자체가 공하여 자체성이 없는, 무성력(無性力)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은현(隱現)함이 자유로우니,
만약 법성을 따른다면 만상(萬相)이 전혀 없으면서도 원지력(願智力)을 따라 온갖 중상(衆相)이 따라서 나타나고, 은현(隱現)하는 것이 연(緣)을 따르는 것으로, 짓는 작자(作者)가 전혀 없고, 다만 이지(理智)를 통하여 법이 스스로 갖춘 것이니,
이는 불가사의한 불사의공(不思議功)이며 불가사의한 변화의 불사의변(不思議變)이라서 능히 짓는 능작자(能作者)가 없어도 자유롭게 은현(隱現)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범부는 집착함으로써 무명을 짓는 것이니,
집착의 장애가 없어진다면 지혜의 작용이 자재롭게 되어서 법신(法身)을 따르면, 만상이 함께 공적하고, 지혜의 작용을 따르니
만상이 함께 생기는 구생(俱生)이며, 대자비를 따르는 것이니,
항상 생사에 거처하면서도 단지 이지(理智)를 따르기에 생사가 늘 진실(眞實)한 것이라,
이러한 법신과 지혜 작용과 대자비의 삼사(三事)를 통하여 숨었다 나타났다 은현(隱現)하는 것이 만단(萬端)이며,
일진(一眞, 하나의 참됨)의 지(智)를 여의지 않고서도 교화의 화의(化儀)가 수 없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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