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5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앞의 초회(初會)에서 광명을 놓아 방광(放光)한 것 보색등운(寶色燈雲) 같다 하였고,

지금 10지(十地)에서 방광(放光)한 것 보살력염명(菩薩力焰明)이라 이름한 것은

전후의 광명의 인과(因果)가 서로 비슷한 까닭이니, () () 서로 닮은 것이 그것이다.


앞의 초회의 방광(放光) 보살지광명보종시방장(菩薩智光明普照曜十方藏)이라 칭한 것은

바로 여래께서 보살지(菩薩智) 깨달아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10지(十地)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후의 십지품에서 여래께서 방광하신 것 보살력염명(菩薩力焰明)이라 이름한 것은

 보살의 자력(自力) 지극해서 10지에 오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앞의 광명은 개발(開發)하는 것이요,

뒤의 광명은 자력(自力)임을 밝힌 이다.

 

자력(自力)을 사용하는 까닭 여래께서 처음 개발한 곳에 이르러서 부처님의 본심(本心) 부합해서 시종일관 서로 비슷하게 닮는 것이니, 그래서 10지의 중도과종(中道果終, 중도의 과가 완결됨) 문은 나중(後) 처음(初) 사무치게 되는 것을 밝히는 까닭에 앞의 방광 () 들어서 수행을 권하는 것이요,

나중의 10지의광은 스스로 수행해서 () 이르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러므로 광명을 보살력(菩薩力)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보살이 닦아 나아가면서 스스로 정근력(精勤力) 물러남이 없는 불퇴전력(無退轉力) 게으르지 않는 불해태력(不懈怠力)으로 능히 닦고 익혀서 10지의 여래법계장(如來法界藏)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이름이 모두 장() 되는 것이니, 

장(藏)이라는 것은 덕을 쌓아 모아 갈무리하여서 잃지 않는다는 이다.

이는 법계의 자체청정한 무루법문(無漏法門) () 법계를 총괄해서 모든 대지혜와 대자비의 일체 공덕을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며, 만행의 구름을 일으켜 법우(法雨) 널리 내려서 중생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이니, 

10지위의 보살은 이러한 법에 부합하기 때문에 장(藏)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10지위에 있는 37 분의 보살이 모두 이름이 같은 장(藏)인 것은 이 10지 법문의 과(果)가 끝나게 되면서 그 마음(意)이 정도(正道)와 조도(助道)를 변별해서 알 수 있도록 밝히기 위한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37 분의 보살을 세워서 37조도법문(助道法門)이 정과(正果)가 아니며,

10주 이래의 보살행 모두가 조도(助道)일 뿐, 정위(正位)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행(行)으로 행한 것은 조도가 될 뿐이며, 머묾도 없고 행도 없는 무주무행(無住無行)이라서 참 진(眞) 자체에 맡기는 것을 정과(正果)라 이름 한다는 것을 마음(意)에 밝히고자 한 것이다.


만약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 법성의 상(相)이 없는 법성무상(法性無相)의 근본지(根本智)를 통해 무작용의 체(體)를 벗어나지 않고 여러 만행(萬行)을 행한다면, 보살과 부처님의 인과(因果)가 본래로 그 체(體)가 동등하다.

그러나 만약 불과(佛果)의 작위도 없고 수행도 없음을 가려내 본다면, 보살의 정가행(正加行)이 모두 조도(助道)라 명명되며,

ㅡ정가행(正加行)의 정행(正行)은 진정한 행이며,

가행(加行)은 정위에 들어가는 준비로서 노력을 가하여 수행하는 것.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이 무애한 것을 통해서 본다면, 정도(正道)와 조도(助道)가 원래는 다르지 않은 하나의 법문인 것이니, 그 차이는 눈과 눈썹과 같은 것이지만, 그 체(體)와 용(用)이 원만하고 고요하며 정도와 조도가 완전히 같기 때문에, 이는 완전히 별개이면서도 완전히 같은 전별전동(全別全同)의 문(門)인 것이다.

이것은 중현문(重玄門)을 통해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아직 들어 보지 못한 법이지만, 듣게 되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별개라는 전별(全別)과 완전히 같다는 전동(全同)의 경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니,

부처님과 범부가 제각각 다르게 별개로 있다는 것은 바로 완전히 별개라는 전별(全別)의 뜻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견해의 이견(二見)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만약 완전히 같은 전동(全同)이라면 이는 고요함과(寂) 막힘(滯)에 이어지는 것으로, 원융의 도리로서 사(事)와 이(理)가 서로 어우러지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만약 법문을 두 방향으로 완전히 나눈다면, 이는 범부의 법이요,

하나의 바탕에 완전히 합치면 이는 2승(二乘)의 법이다.

다만 이(理)와 사(事)가 자유로운 가운데에 도(道)가 있다 하여서 마음을 멸하는 것에 머무름도 잘못이며,

마음으로 간직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 조도(助道)의 행문(行門)은 정지과덕(正智果德)의 작위 없는 문과 바탕(體)이 합쳐져서 둘이 아니지만,

사(事) 속의 궤칙은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체(體)와 용(用)이 일반적으로 완전히 별개의 전별(全別)이거나 완전히 같은 전동(全同)일 수 없는 것이니,

완전히 같은 전동(全別)으로써 전별(全別)을 짓고, 전별(全別)으로써 전동(全同)을 지으므로,

완전히 별개인 전별(全別)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같음(同)과 별개(別)의 두 문을 미혹하면, 이는 곧 지혜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니, 
37 분이 같은 이름인 장(藏)이 되고 37 분의 보살 외의 독자적인 한 분을 해탈월(解脫月)이라 호칭한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같은 이름의 장(藏)은 10지법(十地法) 속의 정도(正道)와 조도(助道) 내에서 법을 같이하는 동법(同法)의 무리가 된 것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으로, 37은 바로 주체(主)가 되고, 해탈월(解脫月)보살 혼자만이 홀로 반(伴)으로서, 법을 같이하는 무리가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별개의 명칭을 세워서 손님(伴)과 주인(主)을 삼음으로써 10지법(十地法)을 게청격난(啓請擊難, 계청은 법을 설해주길 청하는 것이고, 격난은 논란을 벌여 법을 밝히는 것)하여서, 현재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정법(正法)을 듣고 의심하지 않게 한 것이다. 

 

경전의 뜻이 이러하니 반드시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이므로 이 10지법문에서는 해탈월(解脫月)이 대중을 위해 법을 청하는 상수(上首)가 되고, 금강장(金剛藏)보살이 대중에게 법을 설하는 상수가 되는 것이니, 그 이상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금강장(金剛藏)보살이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받아 보살의 대지혜광명삼매(大智慧光明三昧)에 든 것은 10회향위(十廻向位) 속에서 금강당(金剛幢)보살이 보살의 지광삼매(智光三昧)에 들었으나,

지금 이 10지에서는 금강장(金剛藏)보살이 보살의 대지혜광명삼매에 든 것을 말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지(智)가 밝기 때문에 묘용의 결택(決擇)이 더욱 밝아서 다시 혜(慧)를 덧붙이는 것이니, 이는 바로 각 지위의 단계적인 법문이 점점 더 뛰어나게 되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나, 그 밖의 다른 지위에서도 역시 지혜의 작용인 혜용(慧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삼매에 완전히 들자, 즉시에 시방으로 제각각 십억불찰미진수 세계를 지나서 있는 십억불찰미진수의 모두 같은 이름의 금강장(金剛藏) 부처님들께서 현전해서 13 종류의 법(十三種法)으로 금강장보살에게 가지(加持)한다.

첫째는 말로써 찬탄하고 깨우치는 언찬유(言讚諭)이며,

둘째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비교할 수 없는 눈부신 몸의 무능영탈신(無能映奪身)을 주는 것이며,

셋째는 걸림 없이 즐겁게 설하는 변재의 무애락설변(與無礙樂說辯)을 주는 것이며,

넷째는 훌륭하게 분별하는 청정한 지혜의 분별청정지(分別淸淨智)를 주는 것이며,

다섯째는 훌륭히 기억해서 잊지 않는 능력의 선억념불망력(善憶念不忘力)을 주는 것이며,

여섯째는 훌륭히 결정하는 명료한 지혜의 선결정명료혜(善決定明了慧)를 주는 것이며,

일곱째는 일체의 모든 곳에서 중생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일체처개오중생지(一切處開悟衆生智)를 주는 것이며,

여덟째는 도를 성취한 자유로운 힘의 성도자재력(成道自在力)을 주는 것이며,

아홉째는 여래의 두려움 없음의 여래무소외(如來無所畏)를 주는 것이며,

열째는 모든 지혜로운 사람이 갖고 있는 일체 법문을 관찰하고 분별하는 변재의 지혜를 주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모든 여래의 뛰어나고 오묘한 상묘신(上妙身)과 말과 뜻의 어의(語意)를 구족한 장엄을 주는 것이며,

열두 번째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손으로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수마정(手摩頂)을 하신는 것이며,

얼세번째는 뜻으로 가지하는 의가(意加)인 것이다.

 

가지(加持)라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의심을 끊고 법을 성취해서 믿음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한결같이 경전에서 설한 대로이다.

말로써 찬탄하고 깨우치는 것은 설하는 것을 허락해서 의심이 없도록 한 것이며,

손으로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은 편안히 위로함으로써 지혜가 서로 미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동명(同名)인 이유는 금강장(金剛藏)보살이 법을 증득한 인과(因果)가 부처님께서 증득한 것과 닮았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니, 즉 5위(五位) 보살과 부처님은 인과(因果)가 동등한 까닭에 모두 이름이 같은  동명(同名)의 부처님들께서 인가해서 법을 성취함으로써 현재와 후세 사람들에게 의심이 없게 한 것이다.

아울러 이 땅의 여래께서 그 몸에 광명을 비춘 것을 포함해서 13 종류의 가지가 되는 것이다.


등각위(等覺位) 중에서 보현의 경계는 보살본업영락경에 준하면, 제3선(第三禪)에서 설한 것으로 보이지만, 문장이 완전하지 못해서 회통할 수가 없다.

본업경은 화엄경을 다 설하고 나서 3승(三乘)의 대중을 교화하고자 나중에 거듭 보리장 안에서 간략히 설한 것으로, 그 경전에 스스로 분명한 문장이 있다.

 

이 5위(五位)의 교문(敎門)은 각 품의 단계에 의거해서 지금 대략 설하였지만,

후의 법계품 안에서 선재동자가 5위(五位) 보살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다니면서 하나하나 행하는 스승과 제자의 궤칙 행상(行相)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나중에 다시 밝히겠다.

 

각 지(地)의 법문에서 하나하나의 별상(別相)은 원문을 따라 뜻을 해석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대략이나마 3승(三乘)의 10지문과의 차이를 대조한다면,

3승(三乘)의 10지(十地)는 가르침과 실천의 인신(印信, 인가하고 깨달아 믿는 것)이 완전히 다르니, 이는 전후를 잘 읽으면서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3승(三乘)의 10지(十地)는 이 화엄법계 부처님의 법문의 단계와는 같지가 않으니, 경전에 나오는 5위(五位)와 6위(六位)의 행문(行門)이 모두 보살들이 스스로 증득한 과덕(果德)으로써 자신의 호칭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10신위(十信位)에서의 문수(文殊)와 각수(覺首) 등의 10수(十首) 보살과 10주위(十住位)의 법혜(法慧) 등의 10혜(十慧) 보살과 10행위(十行位)에서의 공덕림(功德林) 등의 10림(十林) 보살이 그것이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모두가 해당 되는 지위 안에서 스스로 증득한 본법(本法)으로써 유래한 국토의 명칭을 삼는 것이니, 모두 근본지(根本智)로 중생을 이롭게 이끌어서 그 근기를 관찰하여 미혹을 없애는, 관근멸혹지(觀根滅惑智)로써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의 호칭이 되는 것이다.

 

해당되는 지위에서 시방의 이름이 같은 동명(同名)의 부처님들께서 현전하여 13 종류의 가지(加持)로 인신(印信)을 이루어서 인과(因果)의 체(體)가 동등함을 이름이 같은 동명(同名)으로서 나타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총(總)과 별(別)이 서로 통하여 사무치고, 때(時)와 겁(劫)이 서로 융화하면서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의 중현(重玄)으로 하나(一)와 많음(多)이 서로 사무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체의 제법(諸法)이 모두 제망(帝網, 인다라 망)과 같아서 동(同)과 별(別)이 겹겹이 겹치면서도 장애가 없는 것이나, 3승(三乘)의 3현(三賢)과 10지(十地)는 이러한 인신(印信)이 없는 까닭에 행상(行相)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참(眞)을 닦는 자는 바드시 방편의 권(權)과 실제(實)를 알아서 그 공(功)에 걸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방편에 걸려서 실제를 잃는 자는 수 많은 겁 동안 헛되이 수고롭기만 할 뿐이리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