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5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교의(敎義)의 차별을 10법의 의리(義理)로써 설명한 것에서의 여섯째,

선재동자로 하여금 거듭 법을 증명하게 한 것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경전에서 제2 회상(第二會上)의 광명각품(光明覺品)부터는 여래의 두 발 아래의 양족륜하(兩足輪下)로부터 방광(放光)하여서 백천 나유타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나아가 이와 같은 측량할 수 없이 많은 무량(無量)하고, 헤아릴 수 없는 무수(無數)하고, 끝이 없는 무변(無邊)하며,

비교할 수 없는 무등(無等)이며, 말할 수도 없는 불가칭(不可稱)이고, 잴 수도 없는 불가량(不可量)이고,

설명할 수도 없는 불가설(不可說)하며, 

모든 허공과 일체의 모든 법계에 있는 세계의 사유(四維, 동서남북)와 상하(上下, 하늘과 땅)에도 마찬가지로 광명이 비추고 있다.

 

그리하여 일체처가 금색세계(金色世界)이고 일체처에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있으며,

나아가 십색세계(十色世界) 중 각수(覺首)와 목수(目數) 등의 10수(十首) 보살들이 저마다 십(十) 불찰미진수 보살들과 함께 동시에 와서 각각 한 가지 씩 법을 설하고 있다.

그 결과 이러한 10법(十法)이 다 함께 신위(信位)의 법문을 성취하였으며,

선재동자도 각성동(覺城東)에서 문수사리가 갖가지의 법을 설하는 것을 보고 신심(信心)을 일으킴으로써 이전의 신위(信位)에서 문수와 각수 등의 10수 보살이 이룩한 신위를 본받는 것이다.

 
제3 회상인 수미산정(須彌山頂)에 올라가서는 법혜 등의 10혜(十慧) 보살들이 저마다 한 가지 씩 법문을 설해서 다 함께 10주(十住)를 성취하고 있는데,

선재동자는 남쪽을 다니다가 묘봉산의 정상에 이르러서 덕운(德雲)비구 이하의 열 분의 선지식을 뵙고는, 경전에서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 법혜 등의 10혜(十慧)보살이 설한 10주(十住) 법문과 같이 하였다.


제4 회상인 야마천궁에 올라서는 공덕림 등의 10림(十林)보살이 저마다 한 가지씩 법문을 설해서 다 함께 10행(十行)의 법문을 성취하였는데,

선재동자는 남쪽을 다니다가 삼안국(三眼國)에 이르러서 선주(善住)비구 이하 열 분의 선지식을 뵙고는 앞의 경전 속에서 공덕림 등이 10행(十行)의 법문을 설한 것과 같이 하나하나를 행(行)으로 실천하였다.

 

제5 회상인 도솔천궁에 올라서는 금강당보살 등의 10당(十幢)보살이 저마다 한 가지 법을 설해서 다 함께 10회향(十迴向)의 법문을 성취했는데,

선재동자는 남쪽을 다니다가 광대국(廣大國)에 이르러서 청련화(淸蓮華)장자 이하 열 분의 선지식을 뵙고는 앞의 경전 속에서 금강당 등의 10당(十幢)보살이 설한 10회향(十迴向) 법문을 선재동자가 하나 하나를 선우(善友)에게 물어서 행(行)으로써 실천하였다.


제6 회상인 타화자재천궁에 올라서는 금강장 등의 보살이 10지(十地) 법문을 설했는데,

선재동자는 이 염부제(閻浮提)에 있는 가비라성(迦毘羅城)의 파산파연저야천(婆珊婆演底夜天) 이하의 열 분의 선지식에 이르러서 앞의 경전 속에서 타화자재천궁의 금강장보살이 설한 10지(十地) 법문 하나하나를 선우(善友)에게 물어서 행으로써 실천하였다.

 
제7 회상인 제3선(第三禪)에 올라서는 8선(八禪)의 대중들을 위하여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불화삼매(佛華三昧)에 들게 된 법문인 11지(十一地) 등각위(等覺位) 중 보현의 경계를 설하였으니,

선재동자는 마야(摩耶)부인 이하 열 분의 선지식에 이르러서는 앞의 영락경(瓔珞經)에서 거듭 설하고 있는 화엄의 단계인 11지(十一地) 법문의 보현의 경계를 벗들에게 하나하나를 물어서 행(行)으로써 본받아 실천함으로써 후칙(後則)을 이루게 하였다.


제8 회상의 불지(佛地) 법문은 보리도량(菩提場)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을 때 설한 것이니,

선재동자는 해안국(海岸國) 대장엄원림(大莊嚴園林)에 있는 비로자나장엄장(毘盧遮那莊嚴藏)이라 이름하는 광대한 누각의 미륵보살 처소에 이르러서는 ― 미륵보살은 선재의 불과(佛果)를 원만하게 하는 선지식이 되고 있다 ― 앞의 경전에서 여래가 보리도량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하는 것과 37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과 같이 하고 있다.


즉 경전에서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바로 앞은 보현행품(普賢行品)으로,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이후는 바로 이세간품(離世間品)이니, 이 또한 보현보살이 설한 것이다.

선재동자는 이러한 하나하나를 본받고 있으며, 또한 이전 5위(五位)의 마야부인 11지(十一地)의 등각위에서부터 보현행을 타고서 스스로 정각을 성취하여 세간에 출현하고 있다.

 

이를테면, 미륵보살 이후부터는 스스로의 그 몸이 보현의 몸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이는 바로 스스로 보현행을 타고 스스로 정각을 성취해서 세간에 출현하여서 항상 보현행으로써 중생을 인도하여 세간을 벗어나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스스로의 그 몸이 보현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은 행(行)이 완전해서 보현과 같은 것을 말하며,

법이 서로 닮아서 동일한 체(體)임을 밝힌 것이다.

아울러 보현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이끌면서 세간을 벗어나게 하고 있으니, 선재동자는 이러함도 역시 본받고 있는 것이다.


경전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여래께서 스스로의 미간에서 광명(眉間光)을 놓아 문수의 정수리에 붓고,

입으로 광명(口中光)을 놓아 보현의 입에 부어서 두 분으로 하여금 서로 함께 문답하게 하여서,

인(因)과 과(果), 이(理)와 사(事)가 서로 사무쳐 들어가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 두 분의 이(理)와 사(事), 체(體)와 용(用)의 이문(二門)은 불과(佛果)를 성취하기 때문에 세간에 출현한 것이다.

 

한편 선재동자가 미륵의 처소에 이르니, 미륵보살은 선재동자로 하여금 맨 처음의 선지식인 문수사리를 보게 하였다.

선재동자가 모두 다 듣고 나서 기억하는 중에 문득 보현보살의 이름을 듣고는 한량없는 무량삼매문(無量三昧門)에 들면서 문득 그 몸이 보현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미륵의 누각에서 삼세의 일인, 삼세사(三世事)가 지금의 금시(今時)에 있음을 이해한 것은 바로 선재동자의 공(功)이 다하고 과(果)가 지극하여서 미륵보살과 더불어 회통하여 법칙을 이룸으로써, 후학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고 깨달아 들어가는 신해증입(信解證入)함에 있어서 의심이 없게 하는 것이다.

 

경전에는 오직 법문만 있을 뿐이라면, 배움을 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선재동자로 하여금 좋은 벗들에게 하나하나를 물어서 행(行)으로 실천하게 함으로써, 한결같이 앞에서 말한 경전의 법칙과 같게 하는 것이니,

만약 쓸데없이 법칙만 시설(施設)한다면, 행(行)에서 오히려 미혹하게 될까 두려운 까닭에 선재동자로 하여금 행으로써 실천하게 하여 후학들이 정체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미륵이 선재동자로 하여금 문득 문수를 보게 한 것은 법신이체(法身理體)의 근본지로부터 인(因)을 삼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미륵보살을 친견한 것은 선재동자가 법신의 본지(本智)를 타는 것으로 인(因)을 삼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선지식의 처소에서 보현행을 행함으로써 자기의 불과(佛果)를 성취하며,

미륵을 본 뒤부터 보문법계(普門法界)에 들어서 스스로 그 몸이 보현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은 비록 정각을 성취하였을지라도 항상 보현행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문수와 보현과 미륵의 불과(佛果)의 셋이 시종일관 한 곳의 일처(一處)라는 것을 밝혀서 인(因)에 통하고 과(果)에 사무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문수와 보현과 미륵 세 분의 도(道)는 옛 부처님의 큰 강령의 대도(大都)이며, 시원(始源)의 법제(法際)이니, 만약 조속히 이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 본래의 전체를 바로 얻겠지만, 미혹에 처한 이는 스스로 윤회에 빠질 것이다.

 

옛 부처님의 도법(道法)이 본래부터 항상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생멸법(生滅法)이 아니며 작위도 없는 무작위(無作爲)인 것이니,

따라서 수행하는 수자(修者)와 방일(放逸)하는 자는 모두 작위가 있기 때문에 고요함(寂)을 기뻐하는 것도 온당하지 못하며

방일한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니, 스스로의 정견(情見)에 속박되어서 거룩한 성품의 성성(聖性)을 어길 뿐이니, 
그러므로 수도자는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스스로를 잘 관찰해서 그러함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교의(敎義)의 차별을 10법의 의리(義理)로써 설명한 것에서의 일곱째,

6위(六位) 보살의 대중들이 다름을 밝힌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권교(權敎, 방편의 가르침)에서 설한 보살의 각 지위의 단계는 다만 가진여(假眞如)를 설하여서 인과(因果)를 삼은 것이라서 지(地) 이전의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迴向)의 3현(三賢)은 여전히 진정한 증득을 하지 못한,

즉 초지(初地) 속에서 1지(一地)는 1진여(一眞如)를 증득하고, 10지(地)는 10진여(十眞如)를 증득하는데,

10진여(十眞如)를 증득한 뒤라야 비로소 처음으로 불성을 보고, 그 이전에 진여를 증득할 때는 10진여(十眞如)의 장애가 있다고 다시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가 장애를 이룰 수 있다면, 이는 권교에서 가진여(假眞如)를 시설한 것이지 본질적인 참(眞)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설하고 있는 지위는 3승(三乘)이 같이 들어서 성문과 인천(人天)이 모두 모이지만,

이 화엄 경전은 그렇지 않으니, 즉 모두가 과위(果位)의 보살이라서 6위(六位) 가운데에서 1위(一位)가 10을 갖추고 있으며,

또 해당되는 지위에서는 열 분 보살의 이름의 하명(下名, 이름의 마지막 자)이 모두 같아서 저마다 시방으로부터 십불찰미진수의 보살과 함께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신위(信位) 안에서 처음의 이름은 각수(覺首)이며, 그 다음의 이름은 목수(目首)로서 10수(首)의 보살이 있으니,

맨 처음 믿음(信)을 일으킬 때, 바로 일체처(一切處)가 문수사리가 있는 곳이며,

유래한 국토가 금색세계(金色世界)이며,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의 호칭이 모두 부동지불(不動智佛)이다.

 
화엄경(華嚴經)은 사(事)에 즉해서 법(法)을 나타내기 때문에 한 가지의 일사(一事)라도 법문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으니,

금색세계(金色世界)란 백법(白法)으로, 금(金)은 백색이 되는 것으로 법신의 본체를 밝힌 것이요,

부동지불(不動智佛)은 법신 안에 작위가 없는 성품의 무작성(無作性)의 지혜를 밝힌 것이니 바로 근본지(根本智)인 것이다.

문수사리는 능히 증득하는 인(因)이며, 부동지불은 증득되는 과(果)이니, 이제 인과가 동체(同體)로서 둘이 아님을 들어 10신(十信)의 첫 문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믿는 자로 하여금 과(果)를 믿어 인(因)을 이루게 하고,

또한 과법(果法)을 닦아서 인위(因位)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니,

10주(十住)의 초심에서 문든 정각을 이루는 것은 과(果)를 증득한 본지(本智)로부터 인(因)을 삼는 것이 된다.

 

이러한 때문에 이 경전의 다음 글에서는 “이소방편질득보리(以少方便疾得菩提), 적은 방편으로 신속히 보리를 얻는다”고 설한 것이니, 이는 권교(權教, 방편의 가르침)의 보리가 유위(有爲)와 같아서 증득하는 능증(能證)과 증득되는 소증(所證)을 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일념 사이에 능(能)과 소(所)가 없어져 능(能)과 소(所)가 다한 곳을 정각(正覺)이라 이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승(小乘)이 능(能)과 소(所)를 멸진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니,

이는 능(能)과 소(所)가 본래 움직임이 없는 본무동(本無動)임을 요달한 까닭이다.

이것은 바로 법성에 맡김으로써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이 다 평등하고,

본지(本智)가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망령되게 움직인다고 말하면서 요달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에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寂)을 찾아 커다란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니,

때문에 유마경(維摩經)에서는 “5수음(五受陰)과 통달공(洞達空)이 고통이라는 뜻이다”라고 설한 것이니, 소승은 통달공을 좋아하고 5수음을 싫어함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낳는 것이다.

ㅡ5수(五受)는 우수(憂受)ㆍ고수(苦受)ㆍ희수(喜受)ㆍ사수(捨受)ㆍ낙수(樂受)이고,

음(陰)은 자성을 은폐하여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ㅡ통달공(洞達空), 공(空)의 적멸을 즐기는 것.

 

그리하여 문수 등의 10수 보살은 과덕(果德)을 일으켜서 중생을 깨우쳐 보인 것이니,

이를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로써 중생을 깨우쳐서 청정함을 얻게 한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각수 등의 10수(十首) 보살들은 모두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 명호의 하명(下名, 아랫자)과 동일한 지(智)을 쓰고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부동지불(不動智佛)과 무애지불(無礙智佛)과 해탈지불(解脫智佛)과 같은 10지(十智) 여래의 도래는 모두 본지(本智)의 처소로부터 온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온 곳의 내처(來處)는 자기 자신의 지혜요,

오는 것은 인(因)이니, 이는 바로 인(因)이 본지(本智)의 과(果)로부터 온 것을 밝히는 것이다.

마치 완전한 금으로서 금팔찌를 만드는 것과 같이, 완전한 불체(佛體)를 가지고서 보살을 이루는 것이며,

완전한 불과(佛果)로서 자신을 만드는 것이니,

이제 돌아와서 자기 부처인, 자불(自佛)의 본지(本智)로써 첫 증득의 초증(初證)을 성취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이러하거늘, 지금 '부처님의 처소로부터 왔다는 종불소래(從佛所來)'라 한 것은 바로 초발심 때에 단박에 본지불(本智佛)의 체용을 증득함으로써 첫 깨달음의 초각(初覺)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 정각으로 첫 증득의 초증(初證)의 인(因)을 삼는 까닭에 저 10수(十首) 보살로써 인(因)이 과(果)로부터 온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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