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5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이 10행위(十行位)는 시방에서 제각각 한 분의 대보살이 부처님의 처소로 오는데,
저마다 십불찰미진수(十佛刹微塵數)와 같이 많은 보살을 거느리고서 집회(集會)에 왔으니,
열 분의 상수(上首, 대표)가 되는 보살들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 같은 임(林)이며,
그들이 온 국토의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도 모두 같은 혜(慧)이며,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 명호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도 모두 같은 안(眼)이니,
열 분의 상수보살들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 같은 임(林)이라 한 것의 임(林)에는 다섯 가지의 오덕(立德)이 있으니,
첫째는 건립하는 건립덕(建立德)이요,
둘째는 몸체와 줄기와 큰 가지와 작은 가지가 서로 반연해서 서로를 낳는 호상생(互相生)이면서도 낳음이 없는 무생덕(無生德)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꽃과 잎과 열매가 이익을 이루는 성익덕(成益德)이요,
넷째는 뜨거운 더위를 막아서 시원하게 하여 주는 청략덕(淸涼德)이요,
다섯째는 사람ㆍ용ㆍ새ㆍ짐승ㆍ귀신 등이 돌아가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여 주는 소귀덕(所歸德)이다.
*첫째, 어째서 건립덕(建立德)이 임(林)과 같다고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면, 저 큰 숲의 대림(大林)의 안으로는 용과 신이 거처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큰 바람에게 꺾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만약 이러하지 못하다면, 높고 빼어난 숲을 건립하지 못는 것이다.
즉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은 안으로는 대지(大智)의 용이 있어서 항상 대자비의 신(神)으로 스스로를 수호하여 경계가 저절로 고요함을 요달하고, 밖으로는 색진(色塵) 경계의 바람에 꺾이는 바가 없어서 이도(異道)와 사론(邪論)을 지혜로 꺾으면서도, 그러함을 꺾었다는 능(能)과 소(所)의 상(相)이 없고, 만행을 건립하여 일체 중생과 함께 하면서 늘 이익을 주는 것이니,
이러한 것이 바로 건립덕(建立德)이 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둘째, 어째서 몸체와 줄기와 큰 가지와 작은 가지가 서로 반연해서 서로를 낳는 호상생(互相生)이면서도 낳음이 없는 무생덕(無生德)이라 하는 것인가?
몸체와 줄기, 큰 가지와 작은 가지, 그 하나하나의 능생(能生)과 소생(所生)의 성품을 구하여도 끝내 구할 수 없고, 다만 인연으로 생(生)할 뿐이니, 연생법(緣生法)에서 하나하나의 연(緣)이 나는 바가 없는 것이라,
본래 나지 않는 본불생(本不生)이면서 생(生)하며,
본래 나는 본래생(本來生)이면서도 나지 않는 불생(不生)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니,
즉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은 무진문(無盡門)을 행하면서 법신의 본지(本智)를 선도(先導)로 삼아 늘 만행을 행하는데,
몸(身)과 경계(境)에서 능행(能行)과 소행(所行)을 구하면서도 끝내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는 다만 법이 그러한 법여시행(法如是行)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째서 꽃과 잎과 열매가 이익을 이루는 성익덕(成益德)이라 하는 것인가?
예를 들면, 나무에 꽃이 활짝 피면, 그 아름다움이 가히 볼 만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하게 하고,
잎들은 뜨거운 태양열을 막아서 청량함을 얻을 수 있게 하여주고,
그 열매는 중생들에게 자양분을 주어서 목마른 자들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것이니,
즉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은 항상 만행을 행하여서 인천(人天)으로 하여금 즐겁게 보게 하며,
널리 대자비의 잎을 유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를 버리지 않게 하며,
커다란 지혜의 열매(果)를 베풂으로써 법계의 중생을 충족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본원력(本願力)이 끝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넷째, 어째서 뜨거운 더위를 막아서 시원하게 하여 주는 청량덕(淸涼德)이라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수림(樹林)에 들어오는 이들은 모두 더위를 벗어나서 시원한 즐거움을 얻게 하나,
그 수림(樹林)은 항상 무심(無心)인 것과 같으니,
즉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이 귀의하는 자를 그 근기와 성품에 따라 그 청량함을 얻게 하면서도,
그 본성은 이롭게 하는 것에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에도 무심(無心)한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 어째서 사람ㆍ용ㆍ새ㆍ짐승ㆍ귀신 등이 돌아가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여 주는 소귀덕(所歸德)이라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저 울창한 숲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채취하는 곳이며, 많은 용이 거처하는 곳이며, 뭇 새들이 깃드는 곳인 것과 같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즉 만행의 숲을 건립함으로써 뭇 사람들이 귀의하여서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또 숲에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으니,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이 수많은 행을 건립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행이 많은 까닭에 공덕 역시도 많으니,
이는 법신의 비지(悲智, 자비와 지혜)로써 온갖 행을 행하기 때문에 공덕이 숲과 같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들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 같은 임(林)이라 부른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 본래 온 국토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 같은 이름인 혜(慧)인가?
범부들은 거처하는 땅을 국토의 이름으로 삼지만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은 선정과 지혜의 해탈로 자타(自他)를 평등하게 잘 함양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국토(國土)라고 부르는 것이다.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이 머무는 국토는 모두 중생들의 업의 영상(影像)이라서 실답지 않으며,
법신지혜의 해탈은 모든 보살들이 상주하는 본체국(本體國)이라서 업으로 환생(幻生)한 국토가 아닌 까닭에 보살이 지혜로써 국토를 삼는 것이다.
또한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은 만행(萬行)을 건립함으로써 이해와 실천을 통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즉 행(行)은 능히 일을 같이하고, 혜(慧)는 능히 가르침을 시설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인천(人天)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서 거주하는 나라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무슨 이유로 본래 섬기고 있는 부처님 명호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같은 이름인 안(眼)인가?
이 화엄경은 사(事)로써 법을 나타내는 것이니, 따라서 부처님의 명칭을 자기가 증득한 바와 동일하고,
증득한 법의 당처(當處)를 부처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 10행위(十行位)의 보살이 행(行)을 통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
그기를 잘 관찰하여서 근기에 맞추어서 법을 설하는 것이 때와 정도를 잃지 않는 불실시도(不失時度)인 것을 안(眼)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그때, 공덕림보살이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받아 보살의 선사유삼매(善思惟三昧)에 들었으니,
이 삼매에 완전히 들어서, 시방으로 각각 만불찰미진수(萬佛刹微塵數) 세계를 지나서 다시 만불찰미진수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공덕림(功德林)이라 호칭하면서, 그 앞에 나타나서 세 가지 종류의 삼종(三種)으로 공덕림보살을 가지(加持)하였다.”
다만 불과(佛果)의 지위에 있는 보살은 법신의 자비와 지혜가 항상 앞에 나타나서 선정과 지혜의 법문이 늘 구족하거늘, 어찌 선정에 들어가서야 모든 부처님들이 오셔서 가지(加持)하기를 기대하겠는가?
그러나 모든 보살들이 가르침을 시설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는 궤칙(軌則)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처의 신력을 말해서 그 덕을 지존(至尊)께 추대하는 것이다.
비록 법계의 그 바탕(體)이 가지런하여 평등하긴 하지만, 교화의 화의식(化儀式) 때문에 스승과 제자를 두는 것이고,
교화의 화의식(化儀式) 때문에 선정에 들어가 법을 관(觀)하고 또 선정으로부터 나와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삼매(三昧)라는 것은 등인(等引)이라 이름하며, 올바른 이해를 이끌어내는 것을 선사유(善思惟)라 이름한다.
10주(十住)에서는 천불세계(千佛世界)를 지나고,
10행(十行)에서는 만불세계(萬佛世界)를 지나는 것은 그 지위의 확장을 나타내는 것이니,
교화을 위한 화의식(化儀式)의 궤칙과 행상(行相)의 순서가 다 법에 부합해서 이러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참된 성품은 모두 시방에 가득 찬 것이다.
타방(他方)에서 오신 모든 부처님과 선정에 들어간 보살의 이름이 모두 같은 공덕림(功德林)인 것은 인(因)과 과(果)가 모두 함께 똑같고, 법과 지혜가 한 종성(種性)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방에서 온 모든 부처님들과 선정에 들어간 보살이 이름이 같은 것이다.
열 번째로, 세 가지의 삼종가지(三種加持)는
첫째, 말로써 가지하는 어가(語加)이며,
둘째, 손으로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수가(手加)이며,
셋째, 열 가지의 지혜의 십지(十智)를 주는 것과 이 땅의 여래께서 광명을 그 몸에 비추이는 것이다.
말로써 가지하는 어가(語加)란, 법이 그릇되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손으로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수마정(手摩頂)하신 것은 법신지신(法身智身)의 지헤와 자비가 지견(知見)의 해탈과 서로 미치고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은 안위(安慰)하는 모습이다.
열 가지 지혜의 십지(十智)를 주는 것은, 보살의 지혜가 불과(佛果)와 동등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준다”고 말한 것이며,
또 지존께 덕을 추대함으로써 겸양을 통해 오만을 벗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주신다”고 말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항상 “법이 그러힌 법여시(法如是)이기 때문이며, 스스로의 착한 근기의 자선근(自善根) 때문이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교화를 위한 화의식(化儀式)의 궤칙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10행위(十行位)에는 모두 사품(四品)의 경전이 있는데, 다 함께 이 지위의 법칙의 문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이며,
둘째는 야마천궁게찬품(夜摩千宮偈讚品)이니,
10행문(十行門) 속에 있는 법문은 반드시 이 네 품의 경전에 의거해서 수행하여야 이(理)와 사(事)를 구족하는 것이다.
십회향품(十迴向品)을 설할 때, 무슨 이유로 도솔천에 올라가는 승도솔천(昇兜率天)하는 것이며,
무슨 이유로 여래의 양슬(兩膝, 두 무릎) 위로부터 광명을 놓아 방광(放光)하는 것이며,
무슨 이유로 상수(上首, 대표) 보살의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 같은 당(幢)이라 호칭한 것이며,
온 국토의, 종래국(從來國)의 이름의 하명(下名, 마직막 글자)이 모두 같은 묘(妙)라고 호칭한 것인가?
왜냐 하면 도솔천(兜率天)이 욕계 중에서 위와 아래의 중간(中間)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석천(帝釋天)이 모든 사천왕천(四天王天)을 거느리고 있으며,
묘고봉(妙高峰)의 정상과 이어져 있어서 모두 일천세계(一天世界)를 거두고 있고,
야마천(夜摩天)은 제2천이라 이름 하는데, 사천왕천과 제석천의 묘고봉은 모두 지계(地界)에 이어져 있으며,
야마천 이상은 허공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도솔천(兜率天)은 욕계 6천(天)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솔천의 위로는 화락천(化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두 하늘이 있다.
그러므로 도솔천(兜率天)은 욕계의 중간에 처해 있는 까닭에 이 도솔천에서 이(理)와 사(事)를 융화시켜 중도(中道)로 회통하는 것이다.
즉 이(理)를 돌이켜 사(事)로 향하고, 사(事)를 돌이켜 이(理)로 향하여서 이(理)와 사(事)가 걸림없이 지혜와 자비의 묘용(妙用)의 문을 이루어서 중도(中道)로 회통하고 있기 때문에 회향(廻向)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10주(十住)의 초심(初心)에서 이(理)와 사(事)가 무애하여 스스로 중도(中道)에 회통하는 것은 후위(後位)에 가서야 비로소 회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교화를 위하여 명목상의 법칙을 둔 것일 뿐,
초발심의 초주(初住) 이후부터 5위(五位) 안의 이(理)와 사(事)가 본래 스스로 회향인 것이다.
이제 이 제3위(第三位)에서 회향은 앞의 10주(十住)와 10행(十行)의 두 법위(法位)의 무애함을 설해서 회향의 지위라고 이름붙이는 것일 뿐으로, 여러 지위에서 모든 지위를 융화해서 회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사(事)에 기탁해서 법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도솔천에서 10회향(十迴向)을 설하는 것이다.
여래의 슬(膝, 무릎)로부터 광명을 놓은 것은 무릎은 돌리고 굽히는 등의 자유로움이 무릎을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무릎 위에서 백천억 나유타(那由他) 광명을 놓음으로써 이(理)와 사(事), 열반과 생사가 무애함과, 거두어들이고 펴는 것이 자재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역시 사(事)로써 법을 나타낸 것이다.
이 일부 경전의 명언(名言)과 경계와 신상(身相)과 명목(名目)과 광명을 놓는 것, 모두는 스스로 증득하는 법문의 자증법문(自證法門)을 나타낸 것이다.
이 10회향(十迴向)의 지위에서 상수 보살들의 이름에 당(幢)을 이름붙인 것은 10회향 보살의 지혜와 자비가 자재해서 자타(自他)의 미혹으로 인한 업을 무너뜨릴 수 있고, 생사에서 일체의 덕(德)을 건립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당(幢)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당(幢)이란 덕(德)을 건립해서 기울거나 요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원한을 항복받는다는 뜻이며,
꺾어버린다는 뜻이며,
견고하다는 뜻이다.
뛰어난 지혜의 승지(勝智)가 서는 것이 법의 깃대힌 법당(法幢)이 굳건하여지고,
대자비를 세우니 마음이 견고하여지고,
오만의 산을 꺾어버리니 보배로운 길의 보로(寶路)에서 노닐고,
연화대(蓮花臺)를 빌려서 오묘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10회향(十迴向) 지위의 보살들의 이름을 당(幢)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옴직이지도 않고 작위도 없는, 부동무작(不動無作)의 지혜와 자비로써 자타의 생사를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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