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3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이 화엄경(華嚴經)은 방광(放光)이 구족해서 덕을 나타내는 것이 원만하니, 이 열 가지를 구족해서 법계에 두루한 것이란,

'일부(一部)의 경전에서는 화신불의 방광(放光)을 할 때, 혹은 한 번 방광하고 혹은 온몸으로 방광하지만,

이 경전과 같이 시종일관 원만하고, 일일이 덕을 갖추어서 열 가지를 구족한 것이 없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다만 10(十)이라는 것은 갖추고 있는 덕이 다함이 없어서 무진(無盡)하다는 뜻이니, 10(十)이란 완전한 원수(圓數)이기 때문이다.

 

교의(敎義)의 차별(差別)을 밝힘에 있어 최상의 무리와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무리들을 묶어서 대략 10개의 10법(十法)의 의리(義理)로써 설명하는 가운데에서 세 번째의, 문답으로 표현한 주(主)와 반(伴)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니,

이 경전의 일부에서 문답의 체용(體用)과 종지의 승종(乘宗)의 대의(大意)와 총체적인 총상(摠相)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덕을 갖춘 것의 구덕(具德)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문수요,

셋째는 보현이다.


부처님은 과덕(果德)의 말이 없는 무언(無言)을 나타낸 것이니,

설할 수도 없는 불가설(不可說)이고, 닦을 수도 없는 불가수(不可修)이고, 얻을 수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증명할 수도 없는 불가증(不可證)인 것으로, 다만 인(因)이 이루어지면 과(果)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

 

문수는 인위(因位)를 설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법신의 과덕(果德)을 설하여 수행을 권장하는 것이다.

보현은 스스로의 자행(自行)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니, 그 행해(行海)를 행하여서 법계에 충만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덕의 삼덕(三德)으로서 장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니,

 

문수로는 법신본지(法身本智)의 찬미를 이루고,

보현으로는 그 차별지(差別智)의 행덕(行德)을 이루고,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이러한 두 존자(尊者)를 사범(師範)으로 삼아서 대보리의 극과(極果)를 능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보현이 장자(長子)가 된다고 설하는데, 이는 행(行)을 건립해서 중생을 성숙시키고 완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혹 어떤 때에는 문수가 소남(小男)이 된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처음으로 발심해서 법신본지불성(法身本智佛性)을 증득하는 첫머리가 되기 때문이며,

처음으로 법신 본지불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처음으로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성품의 지혜 집안인 성성지혜가(聖性智慧家)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계몽(啓蒙)을 발명하는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소남이 되는 것이니,

동북방(東北方)을 주체로 하는 것이 간괘(艮卦)가 되며 간(艮)은 소남이 되고 산이 되고 돌이 되는 것다.

또 축(丑)과 인(寅) 사이에 있으니, 이는 새벽이 처음 밝아질 때, 어두움은 이미 없어졌지만 햇빛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계몽의 첫머리인 10주(十住)의 초발심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도(道)를 보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수사리가 동북방의 청량산(淸凉山)에 있다고 가리킨 것이니,

이는 염부주(閻浮洲)의 경계와 지위를 취해서 법이 세간에 있다고 기탁함으로써 이해하기 쉽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일체처(一切處)의 어느 곳이나 문수사리이다”라고 한 것은, 법신이 널리 존재함을 밝힌 것이다.

 

또 동방의 10불찰(佛刹) 미진세계(微塵世界)를 지나서 금색세계(金色世界)가 있고,

문수사리가 있고, 또 시방에서 문수사리가 온 국토는 금색세계이니, 금(金)은 백색이 되고 그 모습은 황색이다.

바탕(體)이 희고 모습(相)이 황색인 것은 바로 법신불성(法身佛性)의 지혜를 밝힌 것으나,

바탕이 순백으로 청정하고 청결하다고 해서 형태나 빛깔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법신불성은 몸도 없고 마음도 없는 무심무신(無心無身)이니, 성품에 맡겨 작위가 없는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각각의 연(緣)마다 순백 청정하고, 하나하나의 사물마다 무심(無心)이라서 오직 의존함이 없는 지혜의 무의지(無依智)일 뿐이라서 순백의 청정한 백정(白淨)이라 이름한 것이다.


만약 보살들이 이와 같은 성품과 이와 같은 지혜의 지신(智身)을 증득한다면, 몸이 모두 황색이 되나니, 이 황색은 축복과 경사의 색으로서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으로, 즉 조화된 지혜의 유화기지(有和氣智)와 자비로써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덕(德)인 것이다.

 

경전에서 금색세계(金色世界)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은, 일체처(一切處)의 법이 모두 진(眞, 진실)임을 밝힌 것이니,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나타내는 것이다.


보현장자(普賢長子)는 동방의 묘위(卯位)에 위치하며 진괘(震卦)가 되니,

진(震)은 장남이 되고, 머리가 되고, 시초가 되고, 청룡(靑龍)이 되고, 경사(慶事)가 되고,

봄의 생명인 춘생(春生)이 되고, 법을 건립하는 기초가 된다.

 

세간의 불법은 모두 동방을 첫머리로 삼으니, 이는 동방에서 해가 떠서 만물을 다 비추어서 일체가 모두 명료하여지면서 시행(施行)을 감내하고 업무를 지어서 연(緣)에 따라 운용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보현은 행(行)의 으뜸이 되기 때문에 장남이 되고, 

관음은 자비의 으뜸이 되나니, 서방에 위치한 금강산의 서아(西阿)에 머물면서 자비경(慈悲經)을 설하다.

서방은 유위(酉位)가 되고, 유(酉)는 태괘(兌卦)가 되는 것이니,

태(兌)는 금(金)이 되고, 백호(白虎)가 되고, 흉위(凶危)가 되고, 추곡(秋穀)이 되기 때문에 자비관음(慈悲觀音)으로써 이를 주재하는 것으로, 착하지 못한 곳에서 자비를 행하는 것이 관음(觀音)인 것이다.

 

문수ㆍ보현ㆍ관음의 세 가지의 삼법(三法)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도 함께 행하는 것이며,

선재동자의 10회향(廻向) 중에서 제7 자비위(慈悲位) 속의 선지식이 되는데, 나머지는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다.

 

불법(佛法)은 말이 없는 무언(無言)이니,

세간법을 써서 사물(事)에 의탁하여 불법을 나타내나, 언설이 있는 것은 모두 세간법이다.

말이 없는 무언(無言)이라면 어떻게 계몽(啓蒙)에 하여 이르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과 문수와 보현의 세 가지 삼덕(三德)을 이용하여,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어 가면서 법칙을 이루고,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하는 것이다.

 

그 첫머리에서 부처님께서는 일체과(一切果)를 거두고,

문수는 일체의 행하여지는 인과(因果)의 법신본지(法身本智)를 거두고,

보현은 일체 모든 인과의 행신차별지(行身差別智)를 거둔다.

 

이러한 의미가 있는 까닭에 혹 어떤 때에는 문수와 보현이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모태(母胎)가 된다고 설하고,

혹 어떤 때에는 문수와 보현을 소남(小男)이 되고 장자(長子)가 된다고 설하는 것이니,

세 분이 서로 체(體)가 되면서 일법계(一法界)의 체용(體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즉 문수는 처음으로 도(道)를 보는 최초에 법신본지(法身本智)의 문(門)이 되고,

보현은 처음으로 도(道)를 본 이후에 행(行)을 행하는 문(門)이 되고,

부처님께서는 이 둘 가운데에서 작위 없는 무작체(無作體)인 것이다.

 

따라서 문수의 법신(法身)으로 이 화엄경의 가르침이 설하여서, 법신본지(法身本智)를 총괄하게 하여서 일체 중생이 처음으로 도(道)를 보는 초견도(初見道)를 갖추게 하고,

보현으로 이 화엄경의 가르침이 설하는 행문(行門)의 차별지(差別智)를 설하게 하여서 일체중생이 행(行)을 행하는 행문(行文)을 갖추게 하는 것이니,

법(法)과 행(行)이 구족한 것을 부처라 이름하는 것이다.

 

화신불의 가르침에서는 이러한 법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으니, 
열반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몸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구절과

“옛날 설산 동자가 요달한 것은 ‘온갖 제행(諸行)이 무상하니, 이는 생멸법(生滅法)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은,

이는 법신의 열반에는 행(行)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대품경(大品經) 가운데에서는 살타파륜(薩陀波淪, 상제(常啼)보살, 불법을 구하기 위해 7일 밤낮으로 울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 보살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구하여 6바라밀은 갖추었지만, 방편바라밀과 원(願)ㆍ역(力)ㆍ지(智) 등의 10바라밀은 갖추지 못했으니, 이는 다만 성문과 인천(人天)의 작은 그릇의 소기(小器)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10방편이나 10원(十願)ㆍ10력(十力)ㆍ10지(十智) 등의 바라밀을 듣는 것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6바라밀 가운데에 방편바라밀이 없는 것은 방편바라밀이 도(道)가 아닌 곳에서 비도(非道)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 작은 그릇의 소기(小器)들은 듣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애착의 습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방편의 근기는 애증의 습기가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습관이 일어날까봐 외도나 세속의 티끌에 자유롭게 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저 경전 속의 수많은 성문들은 부처님과 함께 문답하고 있어서 대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보살이 있다 할지라도 문수와보현이 아니기 때문이며,

설사 문수가 있다 할지라도 보현이 없는 것은 행을 갖추지 못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설사 보현이 있다 할지라도 문수가 없는 것은 법신의 근본지혜를 보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설사 문수와 보현이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 서로 문답하지 않는 것은 이(理)와 사(事)가 아직 사무치지 못하고, 또한 일체 모든 곳의 문수와 일체 모든 곳 및 미진(먼지) 속의 보현행의 온갖 행(行)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신불이 스스로 문답의 주체가 되어서 인(因)이 과(果)를 행하는 것을 3승기겁(僧祇劫)을 기다린 뒤에야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소기(小技)들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니, 이는 아직 “인(因)에 즉(卽)하고 과(果)에 즉해서 이사(理事)가 원융한 10주(住)의 초발심이 바로 부처이고, 전제(前際)와 후제(後際)가 없고, 법계를 단박에 증명하고, 진(眞)과 속(俗)이 모두 참되다”는 것은 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이니, 화신불이 설한 가르침을 예로 든다면, 이 화엄경만한  경(經)이 없으니, 일체의 모든 가르침은 모두 방편으로 시설한 것이니, 일체의 모든 근기를 결국 다 이 화엄의 대해(大海)에 오게 하여서 비로자나의 경계에 들게 하는 것이다.

 

3승(三乘)의 공관(空觀)은 현행(現行)을 굴복시켜서 무명(無明)이 생기지는 않으나,

근본지(根本智)를 이루지 못하고 차별지(差別智)를 갖추지 못한 까닭에 다른 불국토에 나는 것을 좋아하고 이 사바세계를 싫어하는 것이다.

설사 사바세계에 머무는 자가 있다 하여도, 오히려 미혹에 걸려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화엄경 가운데에서 선재동자가 10주(十住)의 과정에 의거해서 5위법문(位法門)의 행상(行相)을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는데, 그 보편적인 행(行)이 원만하기 때문에 이 10주의 지위 안에는 10지(地)의 행문(行門)을 갖추고 있으니, 이는 이 법의 덕용(德用)이 원만한 것으로, 다른 종파의 행(行)과는 같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설산동자는 한 분의 선지식을 보고 하나의 법문을 얻었으며, 살타파륜(薩陀波淪)도 마찬가지였으며,

법화경에서는 용녀의 성불을 간략히 보이면서도 오히려 남방을 가리켰으니, 이는 법계의 자타(自他)가 원만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문답의 주체가 다른 것이며, 교주(敎主)도 바로 화신불인 것이니,

이 화신불은 예국(穢國, 穢土, 오염된 땅)을 변화시켜 청정하게 한 것이지 원래 실다운 정토는 아니기 때문에 인천(人天)을 다른 불국토에 옮겨 놓은 것이고, 그로 인하여 피차(彼此)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화엄경이 다른 경전과 다른 점을 설한다면,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서 쉽게 끝낼 수 없기 때문에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3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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