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3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⑥ 이통현 장자의 십종교(十種教)의 6시(第六時)는 법화경을 설한 것이니, 방편으로 인도해서 실제로 들어가게하는 가르침이다.

아라한이 공(空)을 따라 적멸을 이해하는 것과 연각(緣覺)이 12연생법(緣生法)을 이해하는 것은 모두 자체의 성품이 없는 무체성(無體性)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여섯 기관의 6근(六根)의 식(識)과 명색(名色)과 마음의 경계인 심경(心境)의 이 세 가지의 자성(自性)은 무생(無生)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니, 아라한과 연각은 모두 심식(心識)이 소멸하고 삼계(三界)의 업이 소멸해서 지혜와 자비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또한 법을 분석해서 공(空)을 밝히고, 그 공으로 미혹을 타파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즐기는 보살과

미혹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의 둘 모두는 일체 중생의 무명의 모든 미혹들이 일체 여래의 근본성(根本性)의 청정하고 보편적인 광명의 중심(中)도 없고 변두리(邊)도 없는 지혜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요달하지 못하고,

모두 정토(淨土)와 예토(穢土), 자불(自佛)과 타불(他佛)을 구별하면서 싫어하고 좋아하면서 모든 삿된 사견(邪見)을 갖는 까닭에 진리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과 연각, 그리고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보살과 미혹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의 세 근기를 인도하여, 근본 지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오묘한 진리의 연꽃인 묘법연화(妙法蓮華)를 통해 무명생사(無明生死)의 성품 그대로가 지혜 자체인 지체(智體)로서, 성품 자체는 오염되 않았으나, 단지 미혹과 깨달음이 같지 않을 뿐인 것으로, 성품은 둘이 없는 무이성(無二性)이라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연꽃으로 표상한 것은 저 세 가지의 근기를 인도해서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법화경에서는 “세간의 모습인 세간상(世間相)이 항상 머문다”고 설한 것이다.

이 내용은 이미 교리에 의거해 종지를 구분하는 판교분종문(判教分宗門)에서 이미 설명한 것이다.

 

⑦ 이통현 장자의 십종교(十種教)의 제7시(第七時)는 열반경을 설한 것이니, 모든 성문 연각 보살의 3승(三乘)으로 하여금 방편을 버리고 실제로 향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나머지 3승의 가르침 중에서 교만한 자를 질책하기 위한 것이요,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천(人天)의 유루종자만 갖추고 3승의 무루종자가 없는 유정으로서 영원히 6도를 돌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성유정(無性有情)은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고 설함으로써 믿음을 일으켜서 수행에 매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열반경에서는 일체 중생 모두가 불성이 있는 개유불성(皆有佛性)으로, 그 불성은 부처님과 차이가 없지만, 다만 무명에 덮혀서 보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다.

전(前)은 세 가지 방편이 되고, 말후(末後)는 실(實)이니, 이 3승 속에서 가진여(假眞如)와 공(空)의 가르치을 닦아서 3아승기겁을 다 채운, 만극(滿極)에 이르는 것이 첫 견성(見性)의 초문(初門)이 것이다.

그 가운데의 부처님과 가섭(迦葉)보살의 문답에서는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할 때, 대보살을 위하여 법계법문(法界法門)을 설할 때의 도리를 회통한 것이다.

그 나머지는 같으나, 다른점은 앞에서 서술한 교리에 의거해 종지를 구분하는 문에서 이미 설하였다.


열반경은 3승 중 방편을 버리고 실제로 나아가서 상(相)이 멸진해서 견성하는 문이요,

법화경은 방편을 버리고 실제로 나아가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이(理)와 사(事), 성(性)과 상(相)의 문이니,

이 두 경전이 모두 3승 중 제6시의 가르침이지만, 다만 화상문(化相門) 속에서 설한 때의 전후(前後)가 있는 까닭에 열반경을 분리해서 제7시의 가르침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의 경계는 어떤 단계나, 옛날이라거나, 지금이라는 때가 없는 것이다.

 

⑧ 이통현 장자의 십종교(十種教)의 제8시(第八時)는 화엄경을 설한 것으로, 찰나간에 3세(世)와 10세의 원융(圓融)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가르침이다.

경전에서는,
“찰나제삼매(刹那際三昧)에 들어가서 신(神)을 내리고, 생(生)을 받고, 8상(相)으로 성도하고, 열반에 드는 것이 모두 시간의 변이인 이시(移時)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으니, 
이는 본성의 이지(理智)에 의거하기 때문에 본래 시간(時)이 없는 것이지 방편으로 본성에 의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간다(入)고 명칭을 붙인 것이다.

본래의 법성(法性) 속에는 나가고 들어오는 출입(出入)의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의(化儀)의 궤칙으로 방편으로 말한 것이니, 말만을 좇아가서, 그 말에 걸려서 온갖 군품(群品)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밝은 사람은 그 말을 좇아서 불세존(佛世尊) 한 분만이 찰나제삼매에 든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모든 불세존은 늘 법신의 지해(智海)에서 중생의 수효와 같이 많은 온갖 삼매문(三昧門)과 함께 하면서 중생의 지견(見)에 응할 뿐, 본래는 나고 드는 출입(出入)이 없는 것이니, 여래삼매의 출입(出入)의 상(相)은 반드시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화엄경의 교문(敎門)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니, 이는 부처님의 실보과덕(實報果德)의 성(性)과 상(相)이 원만하고 보편적이라서 그러한 것이나,

만약 그 머리와 꼬리나, 길고 짧은 점을 찾는다면, 시종(始終)의 길을 끊게 되어서 모든 가르침의 행상(行相)과 세간의 경계와 온갖 실천과 이해를 종합해서 근본에 의거해 총체적으로 일시(一時)와 일제(一際)의 법문을 짓게 되는 것이다.

본래가 이러한 까닭에 삼세의 모든 시간을 일제(一際)와 일찰나시(一刹那時)로 간주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는 것이니, 마치 온갖 물의 지류가 모두 바다로 흘러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법 외에 따로 정량(情量)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방편문일 뿐, 궁극적인 교설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법문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요, 열반에 드는 것도 아니니, 이는 근본의 본법(本法)에 의거할 뿐 정(情)에 따른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의 본법(本法)에 의거함이란, 곧 출입이 없는 무출입(無出入)이며,

권학(權學, 방편)에 의거하는 자는 세상에 나오는 것과 열반에 드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초발심인 10주(住)의 첫머리에서부터 삼매의 힘으로 단박에 삼계에 인(印)을 치니, 삼세가 일제(一際)며 모든 법이 한 맛의 일미(一味)이며, 해탈과 열반이 항상 적멸한 상적멸미(常寂滅味)인 것이다.

또한 처음과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니, 인과(因果)가 일제(一際)이며, 모든 성품이 하나의 성품인 일성(一性)이며, 온갖 지혜가 하나의 일지(一智)이며, 온갖 모습이 하나의 일상(一相)이며, 온갖 행이 하나의 일행(一行)이며, 삼세(三世)가 일념(일一念)이며, 일념이 삼세이고 나아가 십세(十世)이니, 이러한 법들은 자재롭고 걸림이 없는 무애(無礙)인 것이다.

 

화엄경의 법문도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서 ‘항상 법륜을 굴리는 항전법륜(常轉法輪)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의 교문(敎門)은 근본에 의거해 수립됨으로써 대근기(大根機)를 수용하고, 근본에 의거한 일제(一際)라서 시종(始終)을 세우지 않으니, 이는 허망견(虛妄見)이 아닌 까닭이다.

 

하나에 들어가면 나머지 모두를 얻게 되는 것이니, 법계가 일제(一際)이기 때문이요,

권학(權學, 방편)의 불완전한 견해와는 같지 않기 때문이며,

그 나머지에 들어가면 하나를 얻는 것이니, 법계의 바탕인 법계체(법法界體)가 걸림이 없는 무애(無礙)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둥근 구슬에는 모남이 없는 것과 같고, 밝은 거울에는 바로 비치는 것과 같으며, 허공에 사이가 없는 것과 같으며, 메아리가 의지함이 없는 것과 같으며, 그림자가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법문은 시종(始終)을 총괄한 일제(一際)라서 원만하여 걸림이 없고, 성취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나타나거나 사라라지는 일도 없이 항상 법륜을 굴리는 항전법륜(常轉法輪)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요달한다면, 부처님의 불지(佛智), 자연지(自然智), 스승이 없는 무사지(無師智)가 저절로 현전하나니,  이 법은 나타남이 없는 무출(無出)이고 사라짐 없는 무몰(無沒)의 자연스러운 지혜로서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 권교(權敎, 방편의 가르침)의 법문들 모두를 그 속에 내포하고 있어서, 일시에 설하고 있으니, 온갖 권교(방편의 가르침) 역시도 삼세가 없는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 자기 스스로의 견해에 의거해 무량한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승교(一乘敎)를 처음 정각했을 때, 설했다고 말한 것이나, 정(情)에 의거했다면 처음 성불했을 때에 설한 것이라 하겠지만,

지혜에 의거한 것이라면 시종(始終)이 없는 가르침의 교설(敎說)인 것이다.

⑨이통현 장자의 십종교(十種教)의 제9시(第九時)는 함께 하면서 함께 하지 않는 공불공(共不共)의 가르침으로, 모든 대승 경전을 설한 것이다.

인천(人天)과 3승의 법을 같이 들을지라도 얻는 이익은 제각각 다른 것이니,

화엄경에서는 “하나의 털끝과 하나의 일진(一塵, 먼지) 속에서도 모든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지만 중생의 이해는 저마다 다르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화엄경에서 “보살은 하나의 작은 중생의 몸 속에 있으면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법륜을 굴려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나, 그 작은 중생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항상 중생과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이며, 대승과 소승이 다 함께 부처님의 바다 속에 있는 것이라서 몸과 마음이 본질적으로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고, 법을 듣기도 하고 법을 듣지 못하기도 하여서, 해탈지견(解脫知見)과 대승과 소승 및 고통과 즐거움이 제각기 다른 것인, 이러한 까닭에 함께 하면서도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의 공불공교(共不共敎)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찰나제삼매(刹那際三昧)에 들어서 도솔천으로부터 신(神)을 모태(母胎)에 내려 출생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고 설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시간이 없는 무시(無時) 가운데에서 온갖 중생들이 스스로의 때, 시분(時分)을 얻어서 처음의 가르침과 중간의 가르침과 나중의 가르침을 보는 것이고,

일음법(一音法) 안에서 스스로 인간과 천상ㆍ대승ㆍ소승ㆍ불승(佛乘)을 얻어서 스스로의 도과(道果)를 성취함이 저마다 같지 않은 것이고,

부처님의 주겁(住劫)과 수명(壽命)의 길고 짧음을 보는 것에 제각기 차이가 있는 것이나

실로는 여래의 본성에는 조작(造作)이 없어서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위 없는 법성(法性)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지혜는 그 자체로 청정하여 일체 중생과 더불어 본래 바탕이 같은 체동(體同)이기 때문에 중생의 보고 들음에 응(應)해서 그 생각을 어기지 않으니, 즉 법성의 지혜가 본래 조작이 없는 것으로, 그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에 그 생각과 부합해서 때(時)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더불어 법을 함께 하는 공법(共法)하고, 지혜를 함께 하는 공지(共智)하고, 때를 함께 하는 공시(共時)하며, 몸을 함께 하는 공신(共身)하고, 마음을 함께 하는 공심(共心)이고, 수레를 함께 타는 공승(共乘)하나,

지견(知見)과 해탈은 저마다 함께 하지 않는 각각부동(各各不共)인 까닭에 함께 하면서도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의 공불공교(共不共教)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5백의 성문들이 함께 화엄의 회상에 있었으나, 귀머거리 같고 장님 같았다는 것이 그 실례인 것이다.

⑩이통현 장자의 십종교(十種教)의 제10시(第十時)는,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하는 가르침의 공불공교(共不共教)이니, 화엄경에서 '시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보살들과 불국토에서 온 자들의 방위(方位)가 제각기 다르나,

똑같은 동성(同聲)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 모두 같고,

법을 듣고 이익을 얻는 것은 같을 수도 있는 능동(能同)이고 다를 수도 있는 능별(能別)이라는 것이다.

 

또 모인 무리 중 천룡팔부(天龍八部)와 인(人)과 비인(非人, 인간이 아닌 용ㆍ귀신ㆍ나찰ㆍ야차 같은 존재) 등이 저마다 다르면서도 똑같이 비로자나의 과덕법문(果德法門)을 얻어 듣는 것니,

이와 같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 자유로운 것이다.

나머지 3승도 역시 이같은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하는 가르침이 있으니, 잘 견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가르침인 십종교(十種教)는 모두 여래께서 근본 법계의 일찰나제(一刹那際)에서 일시(一時)와 일성(一聲)으로 단박에 인(印)을 친 것으로서, 마치 메아리 같은 것이지만, 온갖 중생들은 자기 근기의 힘에 따라 점(漸)과 돈(頓)이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원만한 숫자를 써서 대략 열 가지 십교문(十敎門)으로 나누어 진수(進修, 닦아 나아감)와 해행(解行, 이해와 실천)의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10시(時)의 교문들 모두는 여래의 삼세(三世)가 없는 지해(智海)에서 일시에 설한 것이니,

근기에 따라 듣기 때문에 대승과 소승, 그리고 때의 차별인 시분(時分) 등이 근기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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