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2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또 화엄경은 열 가지의 십종덕(十種德)을 갖고 있으니, 
*첫째, 마치 대해(大海)에는 온갖 흐름들이 모이는 것과 같은, 즉 모든 흐름이 바다로 들어가면, 모두가 광대하여지면서 바다의 덕인 해덕(海德)을 같이 하는 것과 같이, 화엄경도 믿음을 일으켜서 들어갈 수 있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여래의 성해(性海), 지해(智海)의 과덕(果德)을 같이 하는 것이며, 
*둘째, 세간의 모든 샘과 우물은 바다를 체(體)로 삼고 있다. 이를 마시는 사람은 모두 바다의 맛인 해미(海味)를 얻어서 바다와 일체가 되면서 차이가 없어 지나, 다만 업력(業力)에 따라 짠맛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화엄경도 이와 같이, 만약 대심중생이 이 경전을 듣고서 간직하고 믿어서 들어가면, 문득 여래법신불성(如來佛法身佛性)의 대자비 지혜의 맛을 얻게 되는 것이니, 천제(闡提, 착한 근기가 전혀 없는 이)는 이를 감당하지는 못하지만,

여래의 지성(智性)은 언제나 생인(生因, 과果를 낳는 인因의 종자, 여래의 지성智性은 천제에서도 줄어들지 않는 것)을 창조한다.
*셋째, 대해(大海)에는 네 가지의 보배 구슬인 사보주(四寶珠)가 있으니,

그 첫째는 적집보(積集寶)라 이름하며, 둘째는 무진장보(無盡藏寶)라 이름하며, 셋째는 언리치연보(遠離熾然寶)라 이름하며, 넷째는 장엄을 갖춘 구족장엄보(具足莊嚴寶)라 이름하며, 이 네 가지 보배구슬은 모든 범부와 용신(龍神)들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일체의 2승(乘)과 권교(權敎)의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자는 볼 수가 없으나, 오직 최상불승(最上佛乘)의 대심중생만이 이 경을 보고 믿음을 일으켜 들어갈 수 있으니, 스스로의 마음인 자심(自心)이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동등한 대지혜의 보배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출현품에서 말하기를, “이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인하여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인가? 내가 성스러운 길의 성도(聖道)를 가르쳐서 망상과 집착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하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여래의 광대한 지헤를 볼 수 있게 하여서 부처님과 차이가 없게 하리라.”한 것이다.
*넷째, 대해(大海)에서는 일체의 용들과 고기들이 함께 바다 속에 있으니,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일체 중생의 심해(心海)의 일념(一念) 속에 무량한 모든 부처님이 있으며, 이 부처님들은 중생들의 심해에서 일어나 세상에 나와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룬다고 설하고 있으니, 여래출현품에서 설하기를, 
“불자야, 보살마하살은 응당 자기 마음의 염념(念念)마다 항상 부처님이 있어서 등정각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부처님 여래는 모두 이 마음을 떠나서 정각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의 자심(自心)이 이러한 것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이니라.”하고 하였다
*다섯째, 대해(大海)는 큰 비를 받아들일 수 있으니, 무량하게 비가 일시에 쏟아져 내려도 물과 바다는 다 같이 짠맛으로, 앞서고 뒤서지 않으니,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이 경은 10주(住)의 초발심 때,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똑같이 여래의 일체지(一切智)의 맛을 얻는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 경전에서는 “사소한 방편으로도 금방 보리를 얻는다”고 하고 있는데, 선재동자나 용녀 등이 그러한 것이다.
*여섯째, 대해(大海)는 큰 몸의 대신(大身)의 중생이 거처하는 곳인,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최상의 대심중생이 거처하는 곳이니, 연못이나 늪의 용은 이러한 큰 곳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 대해(大海)는 죽은 시체를 묵혀 두지 않는, 불숙사시(不宿死屍)이니,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만약 보고 듣고 믿고 좋아해서 능히 깨달아 들어갈 수 있으면, 범부와 권학(權學)과 천제(闡提, 착한 근기가 전혀 없는 이)의 죽은 몸을 영원히 떠나서 곧바로 여래의 법신지해(法身智海)와 동등해지는 것이다.
*여덟째, 대해(大海)의 조류(潮流)는 시기를 잃지 않는, 조무실시(潮無失時)이니,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어떤 중생의 근기가 감당할 수가 있다면 곧 들을 수 있으니, 그 좋아하는 바를 따라 듣게 되는 것이다.

이는 5승법(乘法)의 교화에서 때(시기)를 잃지 않는 것인데, 여래출현품에서는,  
“불자야, 여래의 음성도 역시 마찬가지니, 머묾도 없는 무주(無主)이고, 작위도 없는 무작(無作)이고, 분별도 없는 무분별(無分別)이고, 들어가지도 않는 비입(非入)이고, 나가지도 않는 비출(非出)이나, 다만 여래 공덕의 법력(法力)으로부터 다섯 가지 광대한 음성을 내는 것이니, 무엇이 그 다섯인가?
**첫째로 너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일체의 모든 행(行)은 다 고(苦)라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고(地獄苦)ㆍ축생고(畜生苦)ㆍ아귀고(餓鬼苦)와 복과 덕이 없는 무복덕고(無福德苦)이고, 나와 나의대상에 집착하는 착아아소고(著我我所苦)이고, 일체의 악행을 하는 작제악행고(作諸惡行苦)를 말한다.

인간계와 천상계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근(善根)을 닦아야 하나니, 인간계와 천상계에 태어나면 모든 난처(難處)를 벗어는 것이니, 중생은 이 법을 듣고서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생각을 버리고, 일체의 온갖 선행을 닦아서 모든 난처를 벗어나서 인간계와 천상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천승(人天乘)이다.
**둘째로 너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일체의 모든 행(行)은 온갖 고통이 맹열히 타오르는 것이 마치 불에 달군 쇳덩어리와 같으니, 모든 행의 제행(諸行)은 덧없이 무상(無常)한 것이라서 소멸하는 법이요, 열반의 적정(寂靜)은 무위(無爲)의 안락함이라서 맹여리 타오르는 것을 멀리 벗어나 일체의 온갖 번뇌를 녹이는 것이다. 중생이 이 법을 듣고 부지런히 착한 선법을 닦아서 성문승(聲聞乘)의 음성에 따르고 순종하는 인의 음성수순인(音聲隨順忍,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서 순종하면서 행하는 법인)을 얻으니, 이것이 바로 성문승인 것이다.
**셋째로 너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문승은 남의 말에 따라 이해하는 수타어해지(隨他語解智)라서 지혜가 좁고 열등하나,  성문승의 위에 또 하나의 승(乘)이 있으니, 독각승(獨覺乘)이라 하는 것으로, 독각승은 깨달음의 이해가 스승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너희들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뛰어난 도를 즐기는 자는 이 법음(法音)을 듣고서 성문승을 버리고 독각승을 닦나니, 이것이 바로 독각승인 것이다.
**넷째로 너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무승과 독각승을 능가하는 또 다른 뛰어난 도(道)가 있으니, 도의 이름은 대승(大乘)인데, 보살이 행하는 바의 보살소행(菩薩所行)으로, 6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살행을 끊지 않고 보리심도 버리지 않으며, 무량한 생사에 처해서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2승을 능가하므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대승(菩薩大乘)인 것이다.
**다섯째는 제1승(第一乘)ㆍ승승(勝乘)ㆍ최승승(最勝乘)ㆍ상승(上乘)ㆍ무상승(無上乘)과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이익일체중생승(利益一切衆生乘)의 오승(五乘)이다.

만약 어떤 중생의 믿음과 이해가 광대하고 근기가 날카롭고 숙세(宿世)에 선근을 심어서 모든 여래 신력(神力)의 가피(加被)를 입어 뛰어난 낙욕(樂欲, 즐기는 욕구)으로 불과(佛果)를 구한다면, 그는 이 법음(法音)을 듣고서 보리심을 발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승(佛乘)인 것이다.
불자야, 여래의 음성은 몸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나, 무량한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불자야, 이것이 바로 여래음성제일상(如來音聲第一相)이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음성은 항상 5승(乘) 중생들의 듣는 바를 따라 응하기 때문에 마치 대해의 조류가 때(시기)를 잃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홉째, 대해(大海)는 바탕(體)은 작용이 없으면서도 인연으로 인하여 네 가지의 보배 구슬의 사대보주(四大寶珠)를 낳는 것이니,  이 네 가지 보배는 온갖 진귀한 보배를 낳을 수 있으나, 만약 이 네 가지 보배가 없다면, 일체의 모든 보배들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ㅡ네 가지 보배의 이름은 적집보(積集寶), 무진장보(無盡藏寶), 언리치연보(遠離熾然寶), 구족장엄보(具足莊嚴寶)이다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여래의 일성청정해(一性淸淨海)를 일체 중생이 공유하고 있으나 능히 연설할 수는 없지만, 여래만이 온갖 연(緣)을 따라 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의 4대지(大智)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자무량심(慈無量心), 남의 고통을 벗겨주려는 비무량심(悲無量心), 기쁨을 주려는 희무량심(喜無量心), 모든 중생을 평등히 여기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의 4무량심(無量心)을 일으켜서 능히 일체 법문을 낳으며,

이 무량한 도의 도보(道寶)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모자람이 없으니, 이 성해(性海)에 만약 4대지와 4무량심이 없다면, 설사 성과(聖果)을 얻을지라도 모두 성문과 연각 2승의 행(行)을 따르는 것이다.

또 이 성해(性海)에 비록 4대지와 4무량심의 법보(法寶)를 성취한다 할지라도 그 성해에는 작위하는 작자(作者)가 없고, 작위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증득하는 것도 없으니, 이는 바로 법이 그러한 여시(如是)한 까닭이다.
*열째, 대해(大海)는 그 청정한 덕으로 칠금산(七金山, 수미산 주위를 일곱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금으로 된 산)이나 수미산, 사천왕 등의 장엄을 반영하나니, 대해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화엄경도 마찬가지로,

화엄경은 여래의 법신성해(法身性海)와 갖추고 있는 덕의 장엄과 10불신(佛身)과 10연화장(蓮華藏)과 5위(五位)와 10지(十智)와 10바라밀(十波羅蜜)과 10정(什定)과 10인(十忍)과 인과의 보덕(報德)과 모든 도품법(道品法)을 충분히 설하면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10정(什定); 보광(寶光)ㆍ묘광(妙光)ㆍ차제변왕제불국토신통(次第遍往諸佛國士神通)ㆍ청정심심행(淸淨深心行)ㆍ여과거장엄장(如過去莊嚴藏)ㆍ지광명장(智光明藏)ㆍ요지일체세계불장엄(了知一切世界莊嚴)ㆍ중생차별신(衆生差別身)ㆍ법계자재(法界自在)ㆍ무애륜(無碍輪) 삼매

ㅡ십인(十忍); 보살이 번뇌를 끊고 일체법이 적멸함을 깨달을 때 생기는 열 가지 안주(安住)하는 마음으로,

① 부처님의 설법 소리에 의해 진리를 깨닫고 안주하는 음성인(音聲忍),

② 지혜로 일체법을 관찰하여 그 진리에 따르는 순인(順忍),

③ 진여법성(眞如法性)의 불생불멸을 증득해서 안주하는 무생인(無生忍),

④ 온갖 법은 인연으로 생긴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 알고 안주하는 여환인(如幻忍),

⑤ 마음과 대상의 사물은 모두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그 본성은 적멸하다고 알고 안주하는 여염인(如焰忍),

⑥ 망심은 마치 꿈과 같이 허망함을 알고 안주하는 여몽인(如夢忍),

⑦ 범부에게 들리는 소리는 인연 소생으로 메아리와 같이 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주하는 여향인(如響忍),

⑧ 중생의 몸은 오온이 모여서 생긴, 일시적인 집합체로서 그림자같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안주하는 여영인(如影忍),

⑨ 일체법은 생멸변화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안주하는 여화인(如化忍),

⑩ 일체법은 실체가 없어서 잡을 수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다는 것을 알고 안주하는 여공인(如空忍).

 
화엄경의 커다란 대체(大體)는 성기(性起)인 대지법계(大智法界)로써 체용(體用)을 삼고 있다. 즉 성기인 대지법계(大智法界)의 체용문(體用門)에서 각각의 경지를 차별하는 중생 교화의 법을 세우고 있는 까닭에 이 법 속에서 믿음을 일으켜 대보리심을 발하면, 10주(十住)의 첫머리에서 곧바로 성기(性起)인 법신의 지혜를 보아서 문득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ㅡ성기(性起); 일체 만법은 변함이 없는 항상한 성품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성기라 하면,

기(起)는 기(起)함이 없는 ‘체(體)에 즉한 용(用)’과 ‘용에 즉한 체(體)’를 말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기대지(性起大智)의 지위에서부터 온갖 행상(行相)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바로 각(覺)과 행(行)이 원만한 부처님이니, 이는 방편의 가르침인 권교(權敎)와는 다른 것이다.

권교(權敎)는 먼저 보살행을 행하게 하여, 가진여(仮眞如)의 장애를 배우기 때문에 관법(觀法)이 정(情)과 어울리고 진여(眞如)가 장애를 이루어서 그 행하는 바가 모두 유위(有爲)이며, 그 일으킨 보리심도 생멸(生滅)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분별무명(分別無明)을 끊는 것도 관(觀)으로 절복(折伏)시키기 때문에 10지(地)의 지위에서야 비로소 견성(見性)할 수 있고, 3기겁(祇劫, 아승기겁)을 지나서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니, 반드시 백 겁 동안 따로이 상호(相好)를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의 본승(本乘)인 대방광불화엄경을 방편의 가르침을 인도하는 화신과 비교한다면, 방편 가르침의 상ㆍ중ㆍ하류는 전혀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화엄의 도리는 상근기인 보살과 중근기인 연각과 하근기인 성문이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상상근기인 대심범부라야 이해할 수 있다는 뜻)

그들은 부처님과 현격히 떨어져 있고, 경전의 뜻도 이해하지 못해서 대광겁(大廣劫)이 지나도 끝내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근기(上上根機)의 사람이라면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나니, 그들은 분명히 알아서 오류를 범하지 않고, 즉각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곧바로 도량에 이르니 여래승을 탄 바로 그때가 바로 도량이라서 또 다시 이르러야 할 곳이 없는 것이다.

 

법화경 역시도 불승(佛乘)이긴 하지만, 이는 화신불이 3승을 인도해서 실법(實法)을 알게 한 것이니, 즉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문 앞에 있는 3승인 양이 끄는 수레의 양거(羊車)와 사슴이 끄는 녹거(鹿車)와 큰 소가 끄는 대우거(大牛車)가 바로 상근기ㆍ중근기ㆍ하근기의 3승인 것이다.
상근기의 사람에게는 일분(一分, 한 푼)의 자비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2승보다 뛰어난 거이며, 가(仮)를 관하기 때문에 실다운 견해의 실견(實見)이 없어서 부진보살(不眞菩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상근기ㆍ중근기ㆍ하근기의 3승인은 모두 삼계의 고통을 싫어하며,

중ㆍ하근기의 사람인 성문승과 연각승은 삼계의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나길 원하고,

상근기의 보살은 싫어하지만,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그 이유는 보살의 자비심이 2승보다 뛰어나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인간은 모두 삼계의 체상(體相)이 하나의 참된 부처님의 경계인 일진불경(一眞佛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이는 여래출현품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세 종류의 인간을 대치하시고자, 부처님께서 소유하신 공덕의 보상(報相)이 모두 닦아서 생긴 것이라 설한 것이니,  이는 모든 방편의 가르침들로 하여금 닦고 다스리는 데 뜻을 두게 한 것이니, 3기겁 동안 닦을지라도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 앞의 수레는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시설한 것이며, 맨땅의 노지(露地)의 흰 소라야 비로소 법계를 밝히는 것이다.

법계의 성(性)과 상(相)은 오직 참지혜인 진지(眞智)만 있을 뿐이니, 있는 바 분별하는 소유분별(所有分別)도 지혜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갖가지 성(性)과 상(相)의 의의는 나와 시방의 부처님이라야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성문이나 연각, 불퇴전 보살 등은 모두 알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문 앞의 3승인 것이다.


이 3승은 법이 법위(法位, 진여의 법위)에 머물면서 세간상(世間相)이 늘 상주하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까닭에 3승인, 고집(苦集)을 싫어하고 멸도(滅道)를 닦기를 즐기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고집(苦集)이 본래 지혜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밝히지 못한 것이며, 멸도(滅道)가 본래 스스로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을 요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떠한 조작없이도 온갖 군품(群品, 중생)을 화현하여 마치 허깨비와 같이 세상에 머물면서도 그 성품에는 무명(無明)이 끊어졌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인 까닭에 일념이 상응하면 일념의 일념불(一念佛)이요, 하루를 상응하면 하루의 부처인 일일불(一日佛)이니, 어찌 수고롭게 3승기(僧祇)가 필요하겠는가?

다만 스스로 삼계의 업(業)을 요달하여 능히 업을 비워서 운행에 맡겨 중생을 제접(提接)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 
어찌 반드시 변역(變易)해야만 성불한다고 말하겠는가? 

용과 천(天)의 변역이 어찌 부처님께서 되겠는가? 3승의 사람도 역시 변역할 수 있으니, 왜냐 하면, 3승기를 기다린 뒤에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며, 10지(地)의 과정에서 비로소 견성(見性)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의 게송에서는, “만약 색성(色性)과 대신력(大神力)으로 조어사(調御士, 부처님)를 보고자 한다면, 그는 병든 눈으로 전도(顚倒)되게 보는 것이라서 가장 뛰어난 법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란 깨달음이니, 업의 성품이 참이라서 업은 생멸도 없고, 얻거나 증명할 수도 없고, 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성품에 변화가 없고 본래 여여(如如)한 그것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6도(道)를 돌면서 보살행을 행하고, 신통으로 중생들을 인도할지라도 부처님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정명경(淨名經)에서,  
“비록 정각을 이루었을지라도 법륜을 굴려서 보살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보살이다.”하였다.


이 때문에 선재동자는 10주(住) 초심(初心)에 묘봉산(妙峰山) 위의 덕운(德雲)비구가 있는 곳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억념(憶念)하는 지혜 광명인 보견법문(普見法門)을 터득하여, 즉시에 정각을 이루고 나서야 비로소 여러 벗에게 나아가 보살도를 구하면서 보살행을 행한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올바르게 체용(體用)을 개달으면 바로 마음에 조작이 없는 곳이며, 마음에 조작이 없는 곳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수행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설사 행(行)이 원만할지라도 그 역시 지금(今)을 이탈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화신불이 8상(相)의 변화를 보일 때, 삼씨 하나와 보리 한 알씩 먹으면서 고행을 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수행자의 옷을 입고, 모든 장신구를 버리고 풀로 자리를 깐 것 등은, 고행을 즐기는 외도(外道)와 3승의 근기로서 방일한 자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이미 종합하여 회통하였으니, 이러한 행(行)들은 부처님 스스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이는 깨닫지도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말하며, 얻지도 못하나 얻었다고 말하는, 증상만(增上慢)인 자가 없다면 어찌 그와 같이 했으리오?

일념을 작위 없는 성품에 맡겨서 부처님의 지혜가 현전하여 얻음도 없고 증명함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닌,

이는 또한 선재가 깨달음을 증명한 뒤에야 비로소 보살도를 구하고 보살행을 행한 것과 같은 것이니, 왜냐 하면 도를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속박에 드는 것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속박에 처할지라도 결박이 없어야 비로소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고 결박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나, 만약 자신이 묶여 있으면서 능히 다른 이의 결박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은 옳지가 않은 것이다.

설할 때에는 앞뒤가 있지만, 실제 법은 일시(一時)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살행을 행하고 싶으면 먼저 정각(正覺)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선재동자는 10주(什住)의 첫머리에 묘봉산 정상에 있는 덕운 비구의 처소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억념(億念)하는 지혜 광명인 보견법문(普見法門)을 얻었으니, 이는 수미산(須彌山) 정상에서 10주 법문을 설하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묻겠습니다.
법화경의 문 앞의 3승 중 하나인 대우거(大牛車)와 맨땅의 흰 소인 백지백우(露地白牛)의 수레는 다 같이 소가 끄는 수레인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한다.
문 앞의 3승은 삼계의 고통을 대치하는 것이니, 즉 불난 집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편으로 불의 재난을 면하게 한 것이지, 성불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권교(權敎)의 보살은 자비심 행하기를 좋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의 재난을 벗어날 뿐, 삼계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즉 일분의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 자기의 해탈을 구하는 2승보다 뛰어난 점이 있기 때문에 이 일분(一分)의 짐을 실어가는 마음을 큰 소의 대우(大牛)라 이름붙인 것이다. 이는 2승과 비교해서 더 크기 때문이며, 또한 10지(地)에서 견성하여 바야흐로 성불할 까닭이며, 오히려 많은 겁(세월)을 지나서야 비로소 참(眞)일 수 있기 때문에 2승과 비교해 단순히 보살대승(菩薩大乘)이라고 이름붙인 것이지 불승(佛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화경에서도 “오직 1승법(乘法)만이 있을 뿐이니, 2승이나 3승은 없는 것이다”라고 설해서 3승을 인도해서 1승으로 돌아가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원겁(遠劫)에 성불하는 소승의 수기(授記)를 설하고 있으니, 이는 비록 성불을 신실하게 인정할지라도 습기(習氣)를 돌이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원겁을 표방한 것이다.
한편 용녀는 찰나 사이에 문득 불신(佛身)에 이르렀는데, 이는 참다운 증득을 밝힌 것이니, 고(苦)가 바로 참이라는 것을 요달해서 싫어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 앞의 수레는 3승을 대치해서 시설한 것이며, 맨땅의 흰 소라야 비로소 의지함이 없는 무의처(無依處)에 이르른 것을 밝힌 것으로, 맨땅이란 불지(佛地)이고, 부처님의 지혜는 의지함이 없기 때문에 ‘맨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흰 소란 바로 법신(法身)이며, 자비의 지혜이다. 법신에 상(相)이 없는 것을 ‘희다(白)’고 이름붙였으며,

지혜가 근기를 살필 수 있고 자비의 마음이 사물을 제도하는 것을 ‘소(牛)’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소는 짐을 운반할 수 있고, 또 작위 없는 법신의 자비 지혜로써 사물을 제도하기 때문에 소와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이롭게 하는 것을 ‘흰 소(白牛)’라고 이름붙였다면, 문 앞의 소는 이런 소와 무엇이 다른가?

문 앞의 소는 공(空)을 관하는 것이 뛰어나 삼계의 고통스러운 고처(苦處)를 타파하고, 또 일분(一分)의 자비가 있어서 일분의 거친 몸(身)ㆍ말(口)ㆍ뜻(意)의 3업(業)의 고통을 벗어나긴 했지만, 3기(祇, 3 아승기)가 아직 차지 않아서 여전히 불성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법신의 근본지(根本智)도 증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 앞의 소를 희다고도 하지 않고 맨땅이라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가진여(仮眞如)와 정(情)에 해당되는 공관(空觀)은 오히려 의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희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며,

의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맨땅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여러 장자의 아들들인 제자(諸子)들이 달려가서 맨땅에 이르른다 해도 양이 수레ㆍ사슴의 수레ㆍ큰 소의 수레 등 세 수레를 다 같이 탐색하는 것은 3승인이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고, 또한 불의 재난을 피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비록 마음을 돌이켜 1승을 믿을지라도 초지(初地)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3승의 습기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오히려 마음은 견고한 믿음을 이루지 못한 까닭에 3승을 탐색하는 것이며, 감히 큰 것을 좋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유인하시어 믿음의 힘을 이루게 한 뒤에 평등하게 큰 수레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바라는 바가 아닌 것을 이제 다 주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3승의 마음 돌이키는 회심(廻心)을 밝힌 것이닌, 가령 문 앞의 우거(牛車)를 희다고 말하지 않고 장식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유루(有漏)가 되기 때문이며,

또한 인천(人天)의 즐거움보다 일분의 뛰어남은 있으나 여전히 작위 없는 지혜 지신(智身)의 공덕인 묘락(妙樂)은 얻지 못한 까닭에 높고 넓으며 온갖 장식 등을 갖췄다고 하는 맨땅의 흰 소 수레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문 앞의 3승과 맨땅의 1승은 전혀 별개로서 같지 않은 것이니, 그 밖의 나머지 뜻은 앞으로 다시 밝히겠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방편을 회통해 실제로 들어가는 회권입실(會權入實)인 것이며,

이 화엄경은 모든 부처님의 근본승(根本乘)이다.

또 법화경은 용녀로서 표상한 것이며, 화엄경은 선재동자로서 드러낸 것인데,

선재와 용녀의 행상(行相)을 회통해서 앞으로 자세히 밝히겠다.

부처님의 뜻은 세 가지 방편의 삼권(三權)을 교화해서 모두 이 실교(實敎)로 돌아오게 함에 있기 때문에 이 경전 명칭이 일체지(一切智)의 근본불승(根本佛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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