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2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화엄경과 열반경의 한 가지 같은 점의 일종동(一種同)이란, 열반경에서 설산의 비니초(肥膩草)를 비유한 내용이다.


또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서는 “일체 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으며,

불(佛)ㆍ법(法)ㆍ승(僧)은 차별이 없고, 삼보(三寶)의 성(性)과 상(相)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며,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열반에 든 적이 없다”고 설하고 있으며,

화엄경에서도 “여래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며, 열반에 들지도 않았다”고 설하고 있다.

열반경에서는 2승의 왜곡된 견해를 질책하고 있는데,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신(神)을 내려 모태에 든, 8상성도(相成道)가 모두 왜곡된 견해라는 것은, 화엄경에서 지혜가 삼세에 들어가 가고 옴의 왕래(往來)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으로, 
즉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옛날과 지금이 없는 성(性, 성품)을 통해 대보리(大菩提)를 이루었고,

일념(一念)에 도(道)를 보아서 옛날과 지금의 견해가 소진(消盡)하여 새로운 신(新)과 묵은 고(故)라는 것이 모두 없기 때문에 이전의 억천겁의 부처님과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미래의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함으로써 스스로 삼세의 시간(時)이 없음을 증명해 보인 까닭이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가고 옴도 없는 것이니, 설사 중생이 자기 몸과 마음의 본래정각(本來正覺)을 스스로 보지 못할지라도, 자기 몸과 마음의 정각과 온전한 전덕(全德)은 본래부터 멸함이 없는 것이며,

설사 어떤 중생이 자기의 몸과 마음의 본래정각을 본다 할지라도 자기의 정각에는 본래부터 생김이 없는 무생(無生)인 것이니, 이는 본래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요,

본래가 능각(能覺, 깨달음의 주체)과 소각(所覺, 깨달음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깨닫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이 같은 깨달음이니, 이는 본래 능각과 소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각불(本覺佛)의 경계는 범속함도 성스러움도 없고, 정해진 것도 흐트러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고, 지혜롭지도 어리석지도 않고, 생기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3승의 방편의 가르침은 근기가 낮은 자를 위해 인도하기 위한 것이나,
이 화엄 실교(實敎)에서는 당박에 불문(佛門)을 주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설하는 불성법신(佛性法身)의 이치가 화엄과 공통되긴 하지만, 그 교서의 보토(報土)와 불신(佛身), 그리고 상(相)의 지혜 작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니, 이는 앞에 서술한 열 가지로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법화경과 열반경, 두 경전의 가르침은 비록 화신불(化身弗)이 한 것이지만, 모두 2승과 인천(人天)들에게 1승의 법을 성취시키고자 한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법화경에서는 3승의 원계(遠繫, 원겁에 가서야 성불할 수 있다는 소견의 장애)를 타파하기 위해서 용녀에게 근본법으로써 찰나간에 보리를 얻게 한 것이며,

열반경에서는 천제(闡提, 착한 근기가 전혀 없는 이를 말하며, 천제가 성불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논쟁거리였었다.)에겐 불성이 없다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광액도아(廣額屠兒)에게 현겁(賢劫) 중에 정각을 이루게 하였다.

ㅡ세계는 사람의 수명이 8만 4천 세일 때부터 백 년마다 한 살씩 줄어 들어서 열 살에 이르고,

여기에 다시 백 년 마다 한 살씩 늘어나서 8만 4천 세에 이르는 것을 20회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세계가 이루어지고(成),

또 20회가 되풀이하는 동안 머물러 있고(住), 또 20회 되풀이하는 동안 무너지고(壞),

다시 다음 20회 되풀이하는 동안 비어 있다(空).

이러한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네 시기를 대겁(大劫)이라 하며,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莊嚴劫), 현재의 대겁을 현겁(賢劫), 미래의 대겁을 성수겁(星宿劫)이라 한다.

이 현겁의 주겁(住劫)일 때, 석가모니 부처님 등 일천의 부처님이 출현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또 설산의 비니초를 소가 먹으면 순수한 제호가 돼서 유소(乳蘇)를 만들지 않고서도 묘약(妙藥)을 이루듯이, 단번에 바로 돈증(頓證, 단박에 증명하는 것)해서 바탕(體)이 변이하지 않는 것이, 마치 법화경의 용녀가 얻은 과(果)와 같은 것이다.


이 법화경과 열반경의 두 경전의 대의(大義)는 3승으로 하여금 방편(權)을 버리고 실제(實)에 들어가서 법계의 한결같이 진실한 문(門)을 성취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며, 그 밖의 가르침들은 모두 방편으로 마련한 것이다.

다만 이(理)와 사(事)를 논할 때 약간만을 말해서 그 속의 사의(事儀, 사리의 마땅함)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화엄법계의 비로자나 근본불문(根本佛門)만은 이(理)와 사(事), 성(性)과 상(相)이 원만하게 갖추어져서 여타의 점진적인 배움의 점학(漸學)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때때로 배우는 자들은 길을 따라 흐르다 막혀서 방편의 가르침인 권교(權敎)에 집착하다가 많은 겁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돌아오며, 종성(種性)이 낮고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고난을 일으키니, 이 성지(聖旨)가 그러한 것을 불러들이는 것은 아니다.

ㅡ묻겠습니다.
열반경에서는 광액도아(廣額屠兒)가 현겁에서 정각을 이룬다고 부처님께서 살하셨으며, 

현겁 중엔 천 명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는데, 이는 정해진 숫자로서 경전에 분명히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광액도아 한 명을 덧붙이면 천 명이 넘으니, 어찌 정해진 수 안에서 성불이 겹치는 것입니까?

ㅡ답한다.
3승 권학(權學)의 속박이 없어지지 않은 자는 성불이 겹칠 수 없다.

그 바탕을 통달하게 되면, 삼세진겁(三世塵劫)의 부처님이 모두 다 일시에 정각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래부터 선후가 없고 방해가 없는 것은 법의 근본 체성(體性)에는 시간(時)이 없기 때문이다.

범속한 정념(情念)에 묶여서 함부로 시간을 탄생시킴으로써, 잘못된 견해의 그물 속에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만, 실제로 모든 부처님은 참(眞)에 응하고, 근본에 회통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오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화엄경에서는 “모든 부처님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고, 열반에든 적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스스로의 바탕(體)이 참(眞)에 응하니, 성품에 맡겨서 원만하고 고요하며,

성품에 맞추어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나타낸 색신(色身)도 오고 감이 없으니, 바로 조작이 없기 때문이다.

 

교리에 의거해 종지를 나눈, 의교분종(依敎分宗)을 밝히는 것 가운데 열 번째는,

대방광불화엄경은 바로 그 경전의 명칭인 근본불승(根本佛乘)으로 종지를 삼으니,

이 경전의 명칭이 '대방광불화엄경'인 것은 불승(佛乘)을 종지로 삼기 때문이며,

또 인과가 원만해서 법계의 이(理)와 사(事)가 자재롭고 연기가 걸림이 없는 것을 종지로 삼은 것이다.

 

이 화엄경은 비로자나 자체의 지헤와 자비, 과덕(果德)을 설하는 것이니, 중생에게 널리 보여서 대심(大心)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과덕을 믿게 함으로써 인위(因位)를 성취시키며,

이미 믿음을 일으킨 뒤에는 이지(理智)의 만행(萬行)인 대자비의 과덕(果德)을 닦음으로써 초증(初證)을 성취해서 초발심(初發心) 일 때, 문득 정각을 이루는 것이며,

또 이(理)와 행(行)을 겸수하여 체용(體用)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이(理)에 치우치지도 않고 행(行)을 고립시키지도 않아서, 그 편견을 없애는 것이다.

 

이 화엄경에는 열 가지 아주 깊고 광대한 비길 바 없과 다른 경전들과 다른 십종심심광대무비(十種甚深廣大無比)가 있으니,  
*첫째, 일체 모든 부처님의 자체근본이지(自體根本理智)의 대비법계(大悲法界)의 원만하고 무한한 승(乘)이니, 이는 3승의 방편으로 시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깊고 광대하여서 비할 바가 없는 것이며, 
*둘째, 불신(佛身)이 법보(法報)의 본신(本身)으로서 무량한 상해(相海)로 장엄되어 있으니,

하나하나의 모공(毛孔) 속에 법계를 태포하고, 일체의 경계가 겹겹이 겹치면서 다함이 없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하며, 깊고 광대하기가 비교 할 수가 없으며, 
*셋째, 이 경전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본보국토(本報國土)인 십연화장세계해(十蓮華藏世界海)를 설하고 있으니,

하나하나의 연화장의 가장 아래쪽 세계에는 모두가 10개의 불찰(佛刹) 미진수(微塵數)의 광대한 찰토(刹土)가 청정하게 장엄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광대한 찰토에는 다시 10개의 불찰 미진수의 온갖 작은 소찰(小刹, 작은 세계)의 권속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위로는 두 배씩 증광(增廣)하여서, 하나하나의 화장세계가 모두 허공에 충만하여 서로 사무쳐 들면서 끝없이 겹치고 있으니, 그 깊고 광대함은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넷째, 이 경전에서 설하는 보리수는 높이가 특출한 것이니, 즉, 보리수의 몸체는 금강(金剛)이고, 줄기는 유리(琉璃), 큰 가지나 작은 가지는 온갖 묘한 보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배 꽃의 보화(寶華)은 다양한 색깔이고, 열매는 마니(摩尼)인데 꽃 사이에 열려 있다. 이 보리수는 금강장(金剛藏)보살의 몸 속에 나타난 보리수를 능가하고 있으니, 그 몸체의 주위는 10만 삼천대선세계요, 높이는 백만 삼천대천세계이며, 가지의 넓고 좁음이 나무와 더불어 서로 합치하여 광대함이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다섯째, 이 경전에서는 보광명전(寶光明殿)이 법계를 포함하고, 온갖 묘한 보배로 장식하여 빛과 그림자가 겹겹이 겹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온갖 보배로운 누각(樓閣)과 높고 큰 정자 와 계단 의 장엄이 모두 서로 비치면서 사무치고 법계에 두루한 것이 광대하기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여섯째, 이 경전에서는 일체처(一切處)의 문수사리와 일체처의 보현의 체(體)와 용(用)이 서로 사무치고 법계에 충만해서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으니, 한 티끌(먼지) 속에서도 행해(行海)가 다함이 없는지라, 깊고 광대함이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일곱째, 이 경전에서는 여래가 찰나간에 도솔천으로부터 모태(母胎)에 신(神)을 내리고 성불하고 설법하고 교화를 마치고 열반에 드시나, 보신(報身)의 영원한 거처(보신의 대택大宅은 8상相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거처라고 한 것이다.)를 없애지 않고, 보살들의  보살중해(菩薩衆海)가 시방에 충만해서, 다함이 없는 신운(身雲)이 모두 진금색(眞金色)이며, 눈과 모발이 감청색(紺靑色)이라서 몸의 신색(身色)의 광명이서로 비치면서 사무친다.

이 같은 보살들의 바다는 모두 법계와 동등하고 시방으로 틈이 없어서 터럭만큼의 비거나 모자란 곳이 없다.

따라서 체(體)가 서로 사무쳐 들어가고 색상(色像)이 겹치면서도 아무런 방해나 걸림이 없어서 때를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색신(色身)을 대현(對現)하여서, 모든 중생들에게 보리심을 발하게 하는, 이와 같은 보살들의 바다는 모두 광대해서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여덟째, 어떤 대심중생(大心衆生)이 이 경전의 법문에 깊은 신심(信心)을 내서 다른 경전을 읽지 않고도 체(體)와 용(用)을 깊이 밝힌다면, 사소한 방편으로도 금방 보리를 얻어서 초발심 때에 10주(住)의 첫머리에 올라 그 지위가 불과(佛果)와 대등하게 되나니, 그래서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
“설사 보살이 한량없는 백천(百千) 나유타 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하고 갖가지 보리분법을 닦는다 하여도, 이 여래의 부사의한 대위덕(大威德) 법문을 듣지 못하거나, 듣고도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입문하지도 않는다면, 그 이름이 가명(仮名)보살이 되나니 여래의 집안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의 무량하고 불가사의한 장애 없는 지혜의 법문을 듣고 난 뒤에 믿음과 이해로써 따르고 깨달아 들어간다면, 이러한 사람은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서 모든 여래의 경계를 따른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또 그 아래에 나오는 글에서도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한다면 작위 없는 공력(功力)으로 스승이 없이 저절로 터득하는 지혜인, 무사자연지(無師自然智)를 얻게 되느니라”고 했으며,

보현보살도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들으면서 믿음을 내지 않는 자일지라도 해탈지(解脫智)의 종자를 이루나니, 마치 소량의 금강을 먹는 비유(사람이 금강을 먹으면 백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이 법을 한 번 들으면 영원히 해탈의 종자가 되는 것이 마치 그와 같다.)와 같은 것이다”라고, 경전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처럼 이 경전의 대위덕 부사의 법문(大威德不思議去門)은 모든 3승을 초월하는 것이니, 그 광대함은 비길 데가 없는 것이다.
*아홉째, 이 경전의 법을 표상하는 첫 번째는 선재 동자이니, 그는 한 생각의 일념(一念)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일생을 지나며, 한 곳의 일처(一處)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시방에 두루 이르러나니, 53명의 선지식을 거치면서 110개 성(城)의 법문을 얻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보살 법문에 나오는 온갖 예술의 행상(行相)과 색신(色身)과 형상과 중생 교회의 궤칙(軌則)이 모두 법계와 동등하고 다함 없이 광대한 행문(行門)을 갖추고 있어서 일생(一生)을 여의지 않고 정각(正覺)을 이루면서도 다시 처음과 끝, 앞과 뒤가 없는 것이니, 말하자면 광대하기는 법계와 같고, 그 궁극은 허공과 같으니, 이 같은 광대함은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열째, 이 경전에은 10불(佛)의 경계ㆍ10무진(無盡)의 법문ㆍ10지(十智)ㆍ10지(十地)ㆍ10신(十身)ㆍ10안(十眼)ㆍ10이(十耳)ㆍ10비(十鼻)ㆍ10보(十寶)ㆍ10산왕(十山王)ㆍ10용왕(十龍王)ㆍ10찰진(十刹塵)ㆍ10해(十海)가 있고, 그 하나하나마다 제각기 10불가설(十不可說)의 경계와 비유가 다함이 없는 법문을 갖추고 있으니, 그 광대함은 비길 데가 없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