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2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여덟째(교리에 의해 종지를 나눈, 의교분종(依敎分宗)을 밝히는 것에서의 여덟 번째),
대집경(大集經)은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이 경전은 욕계(欲界) 이상과 색계(色界) 이하에서 보방(寶坊, 도량)을 세우고 모든 인천(人天)의 대중을 모으는 것으로,
즉 욕계ㆍ색계 두 세계의 천인마(天人魔, 욕계의 제6천인 타화자재천의 마왕)와 범천(梵天, 색계의 대범천왕),
8부(部)의 귀신과 용들, 다른 세계의 보살들을 모두 모아서 보방(寶坊, 도량)에 나가게 하는 것이다.
ㅡ8부(部); 사천왕에 딸려 있는 여덟 종류의 신들이며,
동방의 지국천(持國天)에 딸려 있는 건달바(乾達婆)와 비사사(毘舍闍),
남방의 증장천(增長天)에 딸려 있는 구반다(鳩槃茶)와 벽례다(薛荔多),
서방의 광목천(廣目天)에 딸려 있는 모든 용들과 부단나(富單那),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에 따려 있는 야차(夜叉)와 나찰(羅刹)이다.
귀신들 중에서 가지 않는 자는 사천왕(四天王)이 뜨거운 철륜(鐵輪)을 놓아서 그들을 쫓아내어서 부처님이 계신 불소(佛所)에 가게 하는데, 여래가 모두에게 칙령을 내려서 정법을 수호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마왕 중에서 오직 한 마왕만이 부처님의 칙령을 따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고 나서야 보리심을 일으키겠다고 한다.
ㅡ사천왕(四天王); 욕계의 제1천인 사왕천(四王天)의 주재자로서 수미산을 둘러싼 사대주를 수호하는 신이다.
동주(東洲)를 수호하는 지국천왕, 남주(南洲)를 수호하는 증장천왕, 서주(西洲)를 수호하는 광목천왕, 북주(北洲)를 수호하는 다문천왕. 모두 도리천의 주재자인 제석천왕의 명을 받아 4천하를 다스린다.
아홉째, 열반경은 불성(佛性)을 밝히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이란, 화엄경과는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과 한 가지 같은 점의 일종동(一種同)으로 설명될 수 있으니,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이란;
첫째, 법을 설한 설법처(說法處)가 다르고, 둘째, 경계의 장엄이 다르고,
셋째, 대회에 참가한 대중들이 다르고, 넷째, 건립한 법륜(法輪)의 주(主)와 반(伴)이 다르고,
다섯째, 모인 대중들의 법을 듣는 것이 다르고, 여섯째, 보토(報土)의 청정함과 더러움이 다르고,
일곱째, 불신(佛身)의 방편과 실제가 다르고, 여덟째, 출생과 열반의 상(相)을 나타냄이 다르고,
아홉째, 가르침을 보이는 행상(行相)이 다르고, 열째, 처음부터 벗이 되는 궤범(軌範)이 다르다.
한 가지 같은 점의 일종동(一種同)이란; 설산(雪山)에 약초가 있는데, 그 이름이 비니(肥膩)이다. 소가 그 약초를 먹으면 순수한 제호(醍醐)가 되며,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은 색이 없는 것이다.
ㅡ화엄경과 열반경의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에서의
첫째, 법을 설한 설법처가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은 구시나국(拘尸那國) 아리라발제하(阿利羅拔提河) 강가의 사라쌍수(紗羅雙樹)에서 설했으며,
화엄경은 마갈제국(摩羯提國) 보리도량의 보리장(菩提場) 안에 있는 보보리수(寶菩提樹) 아래에서 설한 까닭이다.
둘째, 경계의 장엄이 다르다는 것이란, 대열반경을 설했을 때에는 사라쌍수가 있는 상서로운 축복의 땅이 가로 세로로 32유순(由旬)이었고, 그 안에는 대중들로 꽉 차서 비어 있는 곳이 없었다. 그때 사방의 무변신(無邊身,여래, 온갖 소견이 없어서 무변신이라 함)보살이 권속들이 앉은 곳을 바늘 끝처럼, 혹은 송곳 끝의 티끌처럼 해서 시방의 티끌 같은 부처님 세계의 대보살들이 모두 와서 모였으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으니,
"이때 삼천대천세계는 부처님의 신력(神力) 때문에 땅이 유연하여지면서 언덕ㆍ모래ㆍ자갈ㆍ가시ㆍ독초가 없어지고 온갖 보배로 장엄된 것이 마치 서쪽 무량수불(無量獸佛, 아미타불)의 극락세계(極樂世界)와 같았다. 이때 대중들은 모두 시방의 티끌 같은 부처님 세계를 보았는데, 마치 밝은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는 듯 했으며, 모든 불국토도 이렇게 보였다.”
또 “사라쌍수가 갑자기 흰 색으로 변했다”는 구절도 있으나,
화엄경을 설하실 때에는 십연화장세계해(十蓮華藏世界海)가 있으니, 이 세계는 상하가 스무 겹이며, 가장 아래 속에서 십불세계의 미진수광대국(微塵數廣大國)의 주변을 대략 설하여는, 즉 하나하나의 국토에 십불찰미진수(十佛刹微塵數)의 작은 국토들을 권속으로 삼고 있으며, 그 위로의 세계들은 두 배씩 증가하고 있다.
이 같은 십화장세계 속의 땅은 금강(金剛)으로 되어 있으며, 수대(樹臺)와 누각과 전당(殿堂)과 연못이 모두 온갖 보배로 장엄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 아란야(阿蘭若)의 법보리 도량 석에 계시면서 초정각(初正覺)을 이루셨으니, 그 땅은 견고해서 금강으로 이루어졌으며, 더할 나위 없는 오묘한 보배 바퀴의 상묘보륜(上妙寶輪)과 온갖 보화(寶華)와 청정한 마니주(摩尼珠)로 장식되어 있어서 온갖 색상(色相)의 바다가 끝없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이하에서부터 ‘곧바로 일체 불국토의 부사의한 겁(刧)이 갖고 있는 장엄이 모두 다 나타났다’에 이르기까지 중간양지(中間兩紙) 이래의 경문은 불경계(佛境界)가 갖고 있는 장엄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에 나오는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서도 널리 설하고 있는, 이와 같은 장엄은 곧 여래 자신의 실보(實寶)로 장엄한 것이니,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잠깐 화현하여 청정하게 하는 열반경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왜냐 하면 이 열반경에서 모여든 대중들은 3승 근기의 애중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만약 부처님의 신력으로 지켜주지 않으면 스스로 보지를 못하나, 화엄경에서는, 1승의 근기만이 순일할 뿐 여러 대중들이 섞여 있지 않고, 성문은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회상(會上) 안에 있어도 보질 못한다.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경문에서는 부처님의 신력으로 본다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 아래 문장에서 다시 법이 그러한 법여시(法如是)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력의 신(神)을 말하는 것에도 참(眞)에 응하는 것을 신(神)이라 한 것이라서, 범부를 가지(加持)해서 잠시보게 한 것을 신(神)이라 한 것과는 다르다.
ㅡ가지(加持). 가(加)는 가피(加被)이고 지(持)는 간직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대중에게 가피함으로써 부사의 경계를 얻어 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화장세계의 장엄은 본래의 실보(實寶)를 밝힌 것이요, 열반의 신력(神力)은 잠시 방편을 베푼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열반경에서는, 부처님의 정토가 서쪽으로 32항하사(恒河沙)의 불토(佛土)를 지난 뒤에 있다고 미루고 있어서 정토가 이곳에 있지 않다. 따라서 이는 화현(化現)이지 실(實)답지는 않기 때문이란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셋째, 대회에 온 대중들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면,
대열반경에서는 집회에 모인 대중들은 모두 인천(人天)의 종성(種性)과 3승의 대중들로서, 대보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래를 추억하면서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향(香)을 받들고 장작을 짊어지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불일(佛日, 부처님,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부처님의 지혜는 태양처럼 모든 번뇌를 없애기 때문)을 받들기를 연모하는, 이와 같은 대중들은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서 듣는 것을 감내하는 무리들이니,(여래의 지혜는 상부불변하는 것이라서 본래 이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며 사라지는 것도 아님을 모르는 대중들을 말한다.) 1승 보살로서 부천님의 지혜의 불지(佛智)에 들어간 대중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그러하나,
화엄의 집회에 모인 대중들은 모두 성품의 지혜 바다인 지해(智海) 속에 있는 부처님 과위(果位)의 보살들로서 순수한 1승(乘)이며 다른 종성(種性)은 없다. 인간과 천인과 신들도 다 똑같은 뿌리(根)로서 부처님의 지혜의 흐름에 들어가 부처님의 불지견(佛知見)을 갖추고 있다.
초회(初會)에서 '10불세계(佛世界)의 티끌 같은 보살 대중들은 모두 여래의 선근해(善根海)로부터 나왔다'고 한 것에서, 선근해(善根海)라는 것은 여래 법신의 근본지(根本智)로써 근본의 생기(生起)를 삼고 있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온갖 행문(行門)은 모두 유위(有爲)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중들은 초발심(初發心)에서부터 부처님의 지혜 바다에 들어가기까지 10신(信)과 10주(住)와 10행(行)과 10회향(廻向)과 10지(地)와 등각(等覺)의 6위(位)에 의탁해서 닦아 나아가, 그 행상(行相)에는 깊고 얕음의 차별이 있다.
열반경은 3승을 모두 거두기 때문에 인간과 천상의 착한 종성(種性)들이 다 같이 집회에 오지만,
화엄경은 3승의 대중들이 집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설사 집회 안에 있더라도 귀머거리처럼 듣지를 못한다.
따라서 열반경의 집회에 모인 보살ㆍ성문ㆍ인천(人天)의 3승 대중들은 화엄경과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화엄은 1승 지위 속의 보살 대중들이다. 초발심의 지위는 부처님의 지위와 같아서 불지(佛智)의 흐름에도 들어가고 부처님의 지견과도 같으니, 이야말로 참된 불자(佛子)가 되는 것이다.
넷째, 건립한 법륜(法輪)의 주(主)와 반(伴)이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에서 권청(勸請)의 수장(首長)은 가섭(迦葉) 보살과 문수사리보살과 사자후(師子吼)보살과 사리불 등으로, 이들이 법의 궤도(軌度)인 권청의 수장(首長)이 되고, 마왕 파순(波旬)은 여래께 열반에 들도록 권청한다.
화엄경에서 법을 건립하는 수장은 보현(普賢)과 문수(文殊)와 각수(覺首)와 법혜(法慧)와 공덕림(功德林)과 금강당(金剛幢)과 금강장(金剛藏)보살 등으로, 이와 같은 10수(首)와 10혜(慧)와 10림(林)과 10당(幢)과 10장(藏)인 부처님 과위(果位) 내의 대보살 등이 5위불과(位佛果)의 행상법문(行相法門)을 건립하는 까닭에 각각의 지위(位)가 부처이며, 부처님께서 곧 각각의 지위이니, 이는 각각의 지위 속에 불과(佛果)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에서 법도를 건립하고 문답하는 모든 보살들은 모두 시방과 이 국토의 보살들이다. 모두가 다 그 정신(神)이 참 근원의 진원(眞源)을 꿰뚫고, 그 지혜가 법계와 동등하고, 사방에 응하여 나타날 때에도 오지 않고, 오고 가지 않으나 가는 이드리니, 이는 법성(法性)의 시설(施設)에 합(合)한 것이지, 왕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 속에 다함이 없는 신운(身雲, 구름이 아주 많은)이 있고, 미세한 티끌 속에 사량하기 어려운 상해(相海)를 현현하는데, 이는 시방 법계의 일체에서 다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일체의 처소인, 일체처(一切處)에 홀연히 나타나도 온 곳이 없고 홀연히 사라져도 간 곳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처소와 일체의 시간에서, 그리고 유정(有情)의 신상(身相)의 무(無)가 자재하여 겹겹이 겹치면서 다함이 없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이 모든 것은 모두 대보살들이라서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경에서 “가섭보살과 성문인 사리불이 인가(人家)에 태어나 범부의 지위와 같다는 것을 보이고, 저 3승의 종성(種性)을 인도해서 부처님의 열반을 보고 슬픔에 젖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집회에 왔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섯째, 집회에 온 대중들이 법을 듣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은 성문의 2승과 방편을 가르치는 권교(權敎)의 보살을 위한 것으로, 이들은 온갖 관행(觀行)을 행하지만 여전히 집착의 장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온갖 행(行)에 집착하길 좋아해서 그 행상(行相)에 집착하고 있으니, 이러한 행상은 지음이 없는 법신의 법작법신(法作法身)의 증득할 것도 없고 수행할 것도 없는 본래의 자체(自體)를 미혹한 것이다. 그리하여 행(行)을 통해 닦아 내고 드러냄으로써 보리와 열반의 능소(能所) 등의 증득을 건립한 것이니,
여래는 바로 이러한 근기를 위하는 까닭에 열반경에서 “온갖 행은 무상한 것으로서 생(生)하고 멸(滅)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생멸마저 모두 소멸한다면, 그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고 설하신 것이닌,
행함이 있는 선행(善行)과 증득할 수 있는 능증(能證)의 보리는 바로 생(生)의 법이기 때문이며,
증득되는 소증(所證)의 열반은 바로 멸(滅)의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마음에 능소(能所)를 간직하고 있으면 생멸(生滅)이 쉬지 못하고, 생멸이 쉬지 못하면 참된 이치의 진리(眞理)에 막히게 된다.
열반경에서는 짐짓 온갖 행(行)과 증득할 수 있는 보리와 증득되는 열반이 모두 소멸되는 까닭에 비로소 참된 이치에 상응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온갖 행은 무상한 것으로서 생(生)하고 멸(滅)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생멸마저 다 소멸하면, 그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고 설한 것이다. 따라서 여래가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는 (여래의 완전한 적멸의 체(體)에서는 본래신(本來身)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과 온갖 능소(能所)의 마음을 다한 것을 대열반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2승의 열반은 능소도 있고 수행(修)도 있고 증득(證)도 있기 때문에 유위(有爲)의 무루(無漏)라고 명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여래의 열반은 능소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반경에서는 순타(純陀, 석가모니부처님께 최후의 공양을 한 마지막 제자)가 문수사리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래께서 온갖 행(行, 인천(人天)의 범부들의 행과 소승의 행)과 같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또한 문수사리여, 알고서 설하고 모르고서 설한다고 해서 (알고 설하는 것은 성현들의 행이며, 알지 못하고 설하는 것은 범부들의 행이나 여래는 이 앎과 알지 못함을 초월해서 설법한다.) 여래께서 온갖 행(行)과 같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래께서 온갖 행과 같다고 말한다면, 삼계(三界) 속에서 인천(人天)의 자재법왕(自在法王)이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대열반경에서는 저 3승에게 “온갖 행(行)과 증득할 수 있는 보리와 증득되는 열반이 모두 무상해서 생(生)함이 본래 없으니 멸(滅)도 증득하지 못한다. 이처럼 행도 없고 닦음(修)도 없는 것을 대열반이라 명명하고 원적(圓寂)이라 명명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는 3승의 행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행도 벗어나고 닦음도 벗어나게 하고, 증득되는 것이 있는 자에게는 증득도 없고 닦음도 없음을 행하게 한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다른 세계에서 온 대중과 이 땅의 인천(人天)이 그 회상의 지위에 들어오며, 초발심(初發心)에서부터 이(理)와 사(事)의 자재함과, 이(理)와 행(行)의 걸림 없음을 통달해서 문수의 이(理)와 보현의 행(行)으로 일시에 단박에 인을 치는데, 마치 도장을 진흙에 찍는 것과 같이 한다. 일시에 단박에 인(印)을 치는 것은 선후(先後)나 중간 등이 없은 것이니, 모두 근본법에 의거해서 법이 마땅히 그러할 뿐이다.
만약 시종(始終)과 인과(因果)와 선후(先後)가 있다면, 그러한 것들은 모두 범속한 정(情)이며, 생멸법(生滅法)이라서 성취도 있고 파괴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은 근기에 따라 속박을 깨뜨리는 것이라서 성불(成佛)의 바른 종지를 열어주지 못하니, 다른 종파의 중생을 인도하는 가르침은 모두 화엄의 이지과해(理智果海, 이치에 맞는 지혜의 과(果)가 광대한 것)에 들어와야 비로소 계합(契合)할 것이다.
이처럼 가르침의 교문(敎門)이 분명해서 확연한 귀감(龜鑑)으로 삼을 수 있으니, 반드시 경문을 두루 열람해서 관지(觀智)로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확연한 깨달음으로 지혜의 태양이 구름을 걷어버림으로써 단박에 묘봉(妙峰)에 나아가 재빨리 지혜의 바다에 올라서면, 범성(凡聖)의 상대적 견해가 선정의 물인 정수(定水)로 인해 씻겨지고, 자비와 지혜의 두 문이 법신(法身)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리라.
이 화엄경은 바로 최상(最上)의 대심(大心)을 가진 자를 위해 설한 것이니, 마치 보위(寶位)를 곧바로 범부에게 준 것과 같으며, 밤에 꾼 천 년의 꿈이 깨자마자 사라지는 것과 같다.
또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설산에 약초가 있는데, 그 이름은 비니(肥膩)이다. 소가 그 약초를 먹으면 순수한 제호(醍醐)를 얻게 되는데,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은 색이 없다.”
최상의 대심(大心)을 가진 자도 마찬가지다. 즉 단박에 불성(佛性)을 보아 문득 정각(正覺)을 성취할 뿐, 작은 지위의 소위(小位)의 점진적인 과정을 따르지 않는 까닭에 집회에 온 대중들의 법을 듣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열반경은 지말(枝末)을 거두어서 체(體)를 따르고는 있지만, 지혜와 자비, 진(眞)과 속(俗)이 아울러 쓰이면서도 걸림이 없음을 논하지 못하고 있다.
여섯째, 보토(報土)의 청정함과 더러움의 거처가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에서 부처님의 보토(報土)는 서방에 있다고 가리킨다. 32항하사(恒河沙)의 불국토를 지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보토가 있다는 것이다. 3승의 방편의 가르침은 더러움과 청정함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까닭에 이 사바세계를 더럽고 추악하고 청정하지 못하다고 보는 것이라서 여래는 방편으로 보토(報土)가 서방에 있다고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화엄의 실교(實敎) 법문에서는 이 사바세계도 청정무구하고, 시방세계도 청정무구하다. 실교의 보살은 더러움과 청정함이 다한 까닭에 경계가 순수하고 청정하며, 권교(權敎)의 보살은 더러움과 청정함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오염을 일으키기 때문에 보토(報土)가 서방에 있다고 가리킨 것이다.
일곱째, 불신(佛身)의 방편(權)과 실제(實)가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에서 32상(相) 여래는 방편(權)이요 열반원적(涅槃圓寂)의 참된 이치는 실제이니, 일체 보상(報相)의 무량한 장엄이 모두 참에 의거한 때문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은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라서 법신(法身)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상해(相海)를 따라 무량하고 무진한 것이다. 상(相)에 즉(卽)하고, 성(性)에 즉하고, 보(報)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는 것이 마치 빛인 듯 그림자인 듯 자유로워서 걸림이 없으니, 여기에서는 간략히 방편과 실제를 밝혔으니, 상세한 것은 나중에 나시 밝히겠다.
여덟째, 출생과 열반을 인천(人天)과 성문, 연각의 2승을 위해 도솔천으로부터 신(神)을 내려 생(生)을 받는 데서부터 열반에 들기까지 8상(相)의 성도(成道)를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대승의 보살들을 위하여 도솔천으로부터 신(神)을 모태(母胎)에 내리지 않은 것을 설하고,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과 무시(無始)ㆍ무종(無終)과 불생(不生)ㆍ불멸(不滅)을 설했다. 그러면서도 몸을 숨겨 나타내지 않았으니, 이로 인해 보토(報土)가 서방에 있다고 미루어서, 이곳에서부터 32항하사의 불국토 밖에 석가모니부처님의 보토(報土)가 있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바세계를 화신(化身) 국토의 오염된 경계의 예경(穢境)으로 삼은 것이니, 이렇게 구별된 방편으로 근기들을 인도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본신(本身)과 본법(本法)이 온갖 정견(情見)을 초월해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어서, 삼세(三世)의 상(相)이 끊어지고, 한결 같이 원만한 진보(眞報, 보신報身의 상해相海)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지속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아서 성(性)과 상(相)이 걸림 없는 자재로운 과해(果海)의 법문을 단박에 나타내어서, 곧바로 최상의 근기인 상상근인(上上根人)에게 준 것이다.
교문(敎門) 행상(行相)의 세분(勢分)이 이와 같으니, 이는 차례차례 단계적으로 이루어가는 방편의 가르침인 권학(權學)과는 다른 것이다. 방편의 가르침은 마치 아홉 길이나 되는 봉우리를 오르는데 그 행적을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고, 10층의 계단을 오르는데 그 자취를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관직이 한 계급씩 오르지만 단지 신하일 될 뿐이다. 내가 듣건대, 옛날의 사대부가 홀연히 구오(九五, 1. 임금의 지위. 주역에서 구오의 효(爻)를 임금의 지위로 본다.)의 지위에 오르면, 밝은 구슬이 단박에 비치면서 특정 방향이 없는 전체을 보고, 은택이 대해(大海)에 뿌려지면서 방울방울마다 충만하다고 했다.
하나의 티끌의 공성(空性)은 법계가 차이가 없건만, 온갖 종류의 유정(有情)이 억지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근기가 균등하지 못하고 방편과 실제가 같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교문(敎門)이 천차만별인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방편과 실제를 알아서 가(仮)를 식별해서 진(眞)을 닦아야 하는 것이니, 그래야만 방편의 종지에 오래도록 막혀 실다운 가르침을 미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홉째, 가르침을 보인 행상(行相)이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에서는 10지(地) 보살이 여래성품(如來性品) 속에서 보살의 위계(位階)는 10지인데도 오히려 불성(佛性)을 완전히 요달해서 알지 못한다고 설한다. 즉 범부의 10신(信) 뒤의 10주(住)의 지위에서는 약간이나마 여래의 성품을 보지만, 10주ㆍ10회향ㆍ10지의 계급을 세워서 점진적으로 닦아 나가다가 등각(等覺)의 지위에서 비로소 과행(果行)을 밝히고, 원만한 묘각(妙覺)의 지위에서라야 비로소 여래(如來)인 것이다.
또 “설산에 약초가 있는데, 그 이름을 비니(肥膩)라고 한다. 소가 그 약초를 먹으면, 순수한 제호가 돼서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은 색이 없다”고 설하는데, 이 역시 단박에 성취하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열반경에는 5승(乘)ㆍ6승ㆍ7승ㆍ8승ㆍ9승ㆍ10승 등 여러 종류의 법문이 있고, 또 열반경의 성문승과 연각승을 제외하고도 세 종류의 보살승이 있으니, 이 세 종류의 보살승과 저 성문과 연각 2승을 합해서 5승이 되고, 아울러 인간과 천상의 5계(戒)19)와 10선(善)을 취해서 6승과 7승이 된다. 또 3승의 사람들이 다 같이 들을 때, 저마다 스스로의 자법(自法)을 얻어서 서로 참구(參究)하여 9승이 있다.
ㅡ 5계(戒); 불교에 귀의하는 자가 지켜야 하는 계율. 첫째 살생하지 말라, 둘째 훔치지 말라, 셋째 음행(淫行)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술 마시지 말라.
세 종류의 보살승의 행상(行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첫째, 무아(無我)의 법문을 닦는 승(乘)이고, 둘째, 10주(住)로부터 10지(地)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불성(佛性)을 보는 승(乘)이고, 셋째, 설산의 비니초(肥膩草)를 소가 먹으면 순수한 제호가 되는 승이니, 이는 유(乳)ㆍ낙(酪)ㆍ생소(生蘇)ㆍ숙소(熟蘇) 등의 우유를 정제하면서 얻게 되는 과정과 같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래성품에서는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미 성품을 보아 견성(見性)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설한다.
“너무나 신기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무량한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면서 늘 무아(無我)의 미혹을 받았습니다.”(본래의 법성 중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가 둘이 아니고 삼매와 번뇌가 본래 평등하다. 그런데도 보살이 이 성품의 이치를 보기 전에는 늘 무아에 집착해서 구하는 마음이 쉬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바로 법화경과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과 같으니,
“모든 보살들이 무량한 겁을 거치면서 6바라밀을 닦아 6신통(神通)을 얻고 8만 4천의 법장(法藏)을 독송, 통달할지라도 오히려 이 깊은 경전을 믿지 못한다.”
얻게 된 신통은 성품(性)에 의거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온갖 선(善)과 무아(無我) 등의 관법(觀法)을 닦은 결과이니, 그 과보가 온갖 천(天)보다 뛰어나다. 또 저 북울단월(北鬱單越)의 사람도 과거세에 아소(我所, 나와나의 대상)가 없는 관법을 닦아서 그 과보로 그곳에 태어났는데, 수명은 천 년이요 옷과 음식은 자연 그대로였고, 갱미(粳米) 7촌(寸)을 불구슬의 화주(火珠)로 익혀서 그 냄새가 미치는 곳이 있는 자는 모두 와서 함께 먹지만, 불법(佛法)이 없어서 해탈을 얻지는 못한다. 이 모든 것은 다 과거세의 이해(解)와 행(行)이 잘못되어서 그러한 허물을 불러들인 것이니, 이로 인해 그 얻은 바를 영원히 없애지 못하게 된 거이다.
ㅡ북울단월(北鬱單越), 뛰어난 곳이라는 뜻의 승처(勝處)라고 번역한다. 4대주 중 북구로주로서 복과 즐거움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벌붑을 듣지 못한다고 한다. 불법을 듣는데는 남섬부주가 가장 좋다고 한다.
이처럼 열반경에서는 인천(人天)과 외도(外道)와 3승의 차별을 모두 회통해서 궁극적으로는 모두 불성의 열반원적(涅槃圓寂)한 무성(無性, 근본의 체(體)가 공(空)하므로 자체성이 없다는)의 참된 이치인 진리(眞理)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여전히 과보의 상(相)이 자(自)와 타(他)가 없이 원만하질 못하고, 이(理)와 사(事)의 지혜 작용이 걸림 없이 중중무진한 것을 보이지 못한 채 자와 타, 청정함(淨)과 더러움(穢) 등의 차별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의 보토(報土)가 서쪽으로 32항하사의 불국토를 지나서 있다고 설한 것이니, 이는 근기가 완전함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근기에 맞추어 시설한 것이다.
그 참(眞)에 집착하느라 장애가 있는 3승을 인도할 때, 불성이 원적(圓寂)한 진여(眞如)의 이치의 문(門)에서 과보의 상(相)이 겹치는 것을 여전히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온갖 유견(有見)에 걸려 미혹과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문득 법신을 가로막을까 염려한 까닭이다.
열반경에서 10지(地) 이후의 불과(佛果) 법문이 바로 화엄경의 10주(住) 초심(初心)의 견처(見處)이다. 즉 “설산에 약초가 있는데, 그 이름은 비니(肥膩)이다. 소가 그 약초를 먹으면, 순수한 제호가 돼서 푸르고, 투렇고, 붉고, 희고, 검은 색이 없다”고 한 것은 바로 화엄경의 10주 보살이 초발심(初發心)에서 도를 보아 단박에 자(自)와 타(他)가 처음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과, 옛날도 지금도 없는 무고무금(無古無今)의 본래 부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몸과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이 불문(佛門)을 해탈로 삼아서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곧바로 도량(道場)에 이르니, 용녀와 선재동자, 1만의 용들, 8천 명의 대중이 모두 그러하다. 6천 명의 비구와 5백 명의 우바새(優婆塞), 5백 명의 우바이(優婆夷), 5백 명의 동자, 5백 명의 동녀 등 모두 8천 명의 5위(位)가 모두 불과이지(佛果理智)의 문(門)과 동등함을 단박에 드러내고 있으니, 초주(初住)가 곧 10지(地)요, 초주가 곧 부처님의 지위인 불위(佛位)인 것이다.
만약 초주가 불위(佛位)가 아닌 것은 마치 신하들이 처음 9품에서 시작해서 1품의 벼슬에 이르러도 신하일 뿐, 왕의 이름은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방편의 가르침인 권교(權敎)에서는 5위(位)의 단계적 자위를 세워서 하나하나씩 올라가 3기(祇, 아승기)의 만 겁에 이르더라도 단지 보살이 될 뿐, 부처라는 이름하지 못하며, 여래승을 타고 곧바로 도량에 이른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무아(無我)의 관법을 닦아서 자비가 2승보다 뛰어나긴 하지만, 여전히 불성(佛性)을 보지 못한 까닭에 그 이름을 보살이라고 하나, 만약 조금이라도 성품을 보았다면 또한 불승(佛乘)을 얻을 것이니, 마치 바다 속의 물방울 하나하나에 바다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의 5위(位) 중 10주와 10지의 각각의 지위마다에 모두 불과(佛果)가 있는 것이 마치 저 바닷물의 물 한 방울과 같아서 불성을 벗어나지 않고 온갖 행(行)을 행하기 때문에 그 불성을 통해 닦아 나감이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곧바로 부처님의 완전한 과(果)인 부동지(不動智) 등의 10지(智) 여래를 범부에게 보여서 믿고 수행하게 한다. 마치 범부가 단박에 보위(寶位)에 올라서 몸소 왕위를 지니면, 신하와 정사(政事)를 비롯한 일체의 군품(群品)들을 모두 포용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으니, 화엄경에서 법문의 보살 행상(行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10주의 시작인 초발심(初發心)에서부터 단박에 여래법신불성인 작위 없는 지혜의 과(果)를 보아 보현의 일체 만행을 두루 행하면서도 연(緣)에 따라 걸리지 않아서 다 작위(作爲)가 없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도 “불성은 작위의 법이 아니니, 단지 객진번뇌(客塵煩惱)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10주 초위(初位)에서부터 작위 없는 삼매를 통해 그 자체(自體)인 참(眞)에 응하면, 객진번뇌가 완전히 체성(體性)이 없기에 오직 참의 체용(體用)만이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어서 운행(運行)에 맡겨 그대로 부처인 것인, 따라서 일념(一念)이 상응하면 일념이 성불(成佛)이요, 하루를 상응하면 하루가 성불이니, 어찌 수많은 겁 동안 점진적으로 닦아서 3기(祇)를 거친 뒤에야 과(果)를 이루려 하겠는가? 마음이 겁량(劫量, 오랜 세월)을 반연한다면, 소견(所見)의 장애가 어찌 쉬겠는가? 모든 부처님의 법문은 본질적으로 시간에 포섭되지 않으니, 시간을 계산하여 겁을 세우는 것은 불승(佛乘)이 아닌 것이다.
열째, 처음부터 벗이 되는 궤범(軌範)이 다르다는 것이란,
열반경에서 설산(雪山)동자가 나찰(羅刹)을 만나서 발심한 뒤, 열반의 게송을 귀중히 여기고 목숨을 가볍게 여긴 얘기를 설하고 있다. 설산 동자가 들은 게송은 “온갖 행(行)이 무상하니, 이는 생(生)하고 멸(滅)하는 법이다. 이 생멸마저 소멸하면,그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이니,
말하자면, 불성의 열반은 행(行)을 통해 닦을 수도 없고, 마음을 통해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니, 행을 통해 닦을 수 없다는 것은, 그 행이 유위(有位)이고 무상(無常)이기 때문이요, 마음을 통해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능소(能蘇)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行)은 그 성품(性)을 닦을 수 없으며, 마음은 그 이치(理)를 증명할 수 없으니, 마음이 곧 성품이라서 다소 능소(能蘇)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타(純陀)는 “여래가 온갖 행(行)과 같다고 말하지 말라”(온갖 행은 무상하지만 여래는 무상이 아니기 때문)고 말한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가 궤범(軌範)을 세우고 있으니, 즉, 선재는 문수사리를 통해 보리심을 발하고 나서부터 마지막의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善知識)에게 일일이 “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했는데, 어떻게 해야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살행(菩薩行)을 행하겠습니까?”라고 물을 뿐, “온갖 행(行)이 무상하다”는 등은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화엄경이 연기법계(緣起法界)의 문(門)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니, 연(緣)은 공적(空寂)하지 않음이 없고 사(事)는 참되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세계가 한결같이 참된 성품의 바다인 성해(性海)요, 대지(大智)의 보편성과 원만함이 국토의 경계가 된다.
총체적으로 성품의 바다가 한결같이 참된 일진법계(一眞法界)인 것이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업(業)을 따라 설해진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의 순수하고 참된 경계는 모두 지혜(智)가 되기 때문에 10주 보살은 혜(慧)로써 국토를 삼고, 10행 보살은 지(智)로써 국토를 삼고, 10회향 보살과 10지 보살은 묘(妙)로써 국토를 삼고 있으며, 정(情)과 무정(無情)의 상대적 견해의 차별은 설하지 않음으로써 화엄경은 본법(本法)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는 무정과 유정, 생(生)과 멸(滅) 등을 설하는 3승 권학(權學)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설산동자가 “온갖 행(行)은 무상하다‘고 설한 것은 3승 근기의 종성(種性)의 성품과 행실이 낮기 때문에 부처님이 행(行)을 통해 조복(調伏)시켜 거칠고 나쁜 것을 꺾음으로써 도(道)에 들어가는 것을 감당하게 했으나, 그 교설(敎說)에 대해 행(行)을 계산해 실(實)을 이루고, 작위 없는 성품을 막아서 진리에의 계합을 폐(廢)하고 있기 때문에 온갖 행(行)은 무상하고, 능증(能證, 증명하는 자)과 소증(所證, 증명되는 것)도 생멸법(生滅法)이라고 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가 일념(一念)에 발심하니 단박에 능소(能所)가 끊어지면서 삼세(三世)의 성품을 요달하니 그 성품에는 옛날과 지금의 고금(古今)이 끊어졌다.
스스로 ‘자기 마음의 자심(自心)이 본래 부처라서 정각(正覺)을 성취하지도 않고, 보리를 성취하거나 파괴할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인 것이다. 그리하여 연(緣)을 따라 움직이거나 공적(空寂)하면서도 유(有)와 무(無)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온갖 행을 행하는 것이 오직 지혜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에 ‘온갖 행이 무상하다’고 설하지 않은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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