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1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ㅡ화엄경과 법화경의 다른 점.
첫째, 교주(敎主, 가르침의 주체)가 다른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으니,
법화경은 화신불(化身佛)이 강설한 것이며, 과거 열반에 드신 다보불(多寶佛)이 와서 “이 경전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똑같이 설하신 것”이라고 증명하였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가 않으니, 비로자니를 교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법신(法身)ㆍ보신(報身)의 이지(理智)인 진신(眞身)으로서 무량한 모습의 바다와 공덕의 장엄을 갖추고 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함께 동일한 경우의 일제(一際)와, 동일한 시기의 일시(一時), 동일한 법계의 일법계(一法界)로서 보시의 상(相)이 겹겹이 겹치면서도 장애가 없으며,
옛날과 지금의 고금(古今)이 한 시기일 뿐 삼세가 아니기 때문에 옛 부처님도 과거가 아니요, 지금의 부처님도 새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니, 그 까닭은 근본지(根本智)의 성(性)과 상(相)이 동일하고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본 부처님의 본불(本佛)이 근본의 법을 설해서 대근기에게 단박에 부여했기 때문에 화신불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예전에 열반에 든 다보여래와 지금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비로자나불과는 다른 것으로, 바로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교주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방광(放光)이 다르다는 것으로, 법화경에서는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상(白毫相)에서 과(果)로부터 나오는 과광(果光)을 방출하여서, 그 비추는 경계가 단지 1만 8천 불국토로서 모두가 다 금색(金色)이니,
이는 곧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이 없는 무변(無邊)이고, 한량이 없어서 무량(無量)하고,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나, 단지 과(果)의 법만을 드러냈을 뿐 인(因)의 지위, 즉 화엄경에서 설하는 5위와 6위의 지위를 드러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인과(因果)와 법을 표현하는 광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십(十)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나중에 다시 상세히 밝히겠다.
셋째의 국토가 다르다는 것이란, 다음과 같다. 법화경에서는 세 번 세계를 변화시켜 정토를 이루게 하는데, 천상의 사람들을 다른 국토에 옮겨 놓고 나서 다른 곳에서 온 대중들을 안치한 뒤, 이 예토(穢土)의 경계를 변화시켜 청정한 불국토를 이루게 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이 사바세계가 그대로 연화장(蓮華藏)세계로서 하나하나의 세계가 서로 서로를 내포하는데,
이것을 경전에서는,
“一一世界滿十方,十方入一亦無餘,世界不增亦不減,無比功德故如是
하나하나의 세계가 시방에 가득 차고, 시방이 하나에 들어가도 남음의 여지(餘地)가 없으나,
세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니, 비교할 수 없는 공덕(功德), 자성부사의(自性不思議)의 공덕으로 그러한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제불성도(諸佛成道) 재일소중생신중(在一小衆生身中) 화무량중(化無量衆) 기피소중생(其彼小衆生) 불지불각(不知不覺),
모든 부처님의 성도(成道)는 하나의 작은 중생의 몸 속에서 무량한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으나, 그 작은 중생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만 범속함(凡)과 성스러움(聖)의 바탕은 같은 동체(同體)라서 옮겨서 이전하는 모습이 없고,
하나의 티끌 속에서 자(自)와 타(他)의 바탕이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의 회상(會上)에서 인간과 천인(天人)을 이전(移轉)하여서 청정한 불국토를 밝히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자(自)와 타(他)를 나누면서 소견(所見)에 걸려 있는 방편 근기의 권근(權根)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국토가 다르다는 걸 밝힌 것이다.
넷째, 법을 청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란,
법화경은 법을 청하고 있으나,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문수나 보현와 같은 각 지위에 해당되는 수위보살(隨位菩薩)을 시켜서 각각 스스로 자기의 지위(地位)의 법문을 설하게 하는 것으로서 설법(說法)의 수장을 삼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과(果)의 법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과(果)로써 인(因)을 삼아 대자비의 행(行)을 일으키시니,
근본지(根本智)가 이루어지면 과체(果體)는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씀도 없고 설법하지도 않으시는 것이니, 이는 대자비의 행(行)이 근본지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수와 보현은 인(因)의 지위에서 부처님의 과법(果法)을 설하여 중생들을 깨달아 들게 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니,
아승기품(阿僧祇品)은 세간의 수법(數法)이 너무나 광대해서 헤아리가 어려우며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까지 이른다고 하는데, 이는 5위(位) 가운데 인과문(因果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자기 지위에서 설하신 법문이며,
또한 부처님 스스로 설하시는 법문이다.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은 여래가 스스로의 인과를 성취하신 뒤에 부처님 스스로의 법 그대로의 법이(法爾)의 힘이 변함 업는 지혜와 복덕의 광명이라는 법문을 설한 것인데,
이 역시 5위 안의 행상인과(行相因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 스스로 설법하신 것이다.
이는 불과(佛果)에 두 가지 어리석음의 이우(二愚)가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두 품을 제외한 나머지 38품은 모두 5위 내의 행상(行相) 법문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신 것이 아니며, 모두가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 등에 해당되는 지위의 보살이 스스로 설하게 한 것이다.
부처님은 단지 광명의 방출로 그것을 나타내셨을 뿐이니, 광명의 방출로써 표현한 법의 상(相)은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다.
화엄경을 설할 때에는 단 한 사람도 성문이나 소보살이 법을 청하는 주체가 되지 않으며,
모두 부처님의 과위(果位) 안에 있는 대보살들이 스스로 서로 문답해서 불과의 법문 행상(法門行相)을 건립하였으니,
이는 대근기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서 단박에 불과(佛果)를 직접 수여하여 인(因)을 삼았으니,
인(因)은 곧 과(果)로써 인(因)을 삼은 것이며, 과(果)는 곧 인(因)으로써 과(果)를 삼은 것이니,
마치 씨앗을 심는 일에 비유할 수 있으니, 선정(定)과 지혜(慧)의 힘으로 사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법을 청하는 주체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섯째, 대회(법회)를 장엄하는 진신(眞身)과 화신(化身)이 다르다는 것이란,
법화경의 회상(會上)에서는 삼천대천세계를 청정하게 장엄시켜 화현(化現)한 중생들이 충만하고, 회상에온 부처님들도 모두 화신(化身)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10회(會)와 10처(處)의 대중들이 시방에 가득 차서 본래 있는 곳의 본처(本處)를 옮기지 않고서도 법계에 충만해 있으며, 하나하나의 몸의 모습과 모공 속에 국토가 겹겹이 겹치면서 보살과 부처님의 몸이 서로 사무쳐 들어가고, 온갖 종류의 중생들 또한 모두 걸림이 없어서, 모두 몸과 국토가 서로 사무쳐서, 마치 그림자같이 서로를 포용한다.
모여든 대중들도 법신(法身)을 파괴하지 않고서 상호(相好)를 따르는데, 법신과 상호가 하나의 경계로서 차별이 없다. 즉 그 모습의 상(相)이 완전한 전신(全身)이라서 화신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진신(眞身)도 말하고 화신(化身)도 말하면서 서로 참여하게 하는 여타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대회(大會)를 장엄하는 진신(眞身)과 화신(化身)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 서분(序分) 속에서 열거한 대중이 다르다는 것이란,
법화경의 회상(會上)에서는 먼저 성문(聲聞)들이 1만 2천 명이 모여 있음을 열거하고, 그 다음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이모로서 말년에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가 되신 마하파자파제(摩訶波闍波提)비구니와 권속(眷屬) 6천 명이 모여 있음을 열거하고,
다음엔 야수다라(耶輸)陀羅)비구니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분은 부처님께서 태자였을 때의 부인이다.
부처님께서 태자였을 때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구이(瞿夷)와 야수(耶輸)와 마노사(摩奴舍)이다.
구이(瞿夷)는 선재(善財)동자가 10지(地) 법운지(法雲地)에서 만나는 선지식으로, 10지의 법열(法悅)이 능히 자비롭기 때문에 법을 위하고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내는, 즉 법(法)으로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 아내의 의의(義意)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엔 보살 8만 명이 모여 있음을 열거하고, 그 다음엔 온갖 천신과 용(龍), 귀신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렇지 않아서, 먼저 보살의 상수(上首, 대표)가 10불(佛)세계의 미진수(微塵數)만큼 있음을 열거할 뿐, 그 따르는 자는 논하지 않는다.
다음엔 불교의 수호신으로 손에는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집금강신(執金剛神)의 무리들을 열거하고, 그 다음엔 온갖 신과 용(龍)ㆍ천인 등의 부류로 모두 쉰다섯 가지를 들고 있으니, 그 하나하나의 부종(部從, 부류)이 각각 다르고, 각각의 부종에는 저마다 불세계(佛世界)의 미진수 중생들이 있고, 또 어떤 부종은 곧바로 한량이 없어서 무량하다고 말한다.
또 10회의 초회(初會)에서는 보리도량을 통털어 쉰다섯 부류의 대중이 있으니, 이 10회(會)의 대중들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밝히겠으나, 다만 대강의 뜻만을 논한다면, 불신(佛身)과 중생의 중해(衆海)가 가이없는 법계로써 겹겹이 겹치고 있으면서, 하나하나의 몸이 전체를 포용하면서도 경계가 없다.
그래서 하나의 몸인 일신(一身)을 그대로 법계를 량(量)으로 삼아서, 자(自)와 타(他)의 경계가 전혀 없고, 법계가 그대로 자기의 몸인 자신(自身)의 전체성으로 편주(遍周)하는 것이니, 주관(能)과 객관(所)의 정견(情見)이 끊어졌다.
대략 이 정도로 논하지만, 10회(會)에서 열거한 대중은 다시 밝히겠다.
초회에서 7회(會)까지는 성문이 전혀 없고, 8회(會)에 가서야 비로소 비구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는 지위(位)에 이르러야 행상(行相)을 밝히는 것이다.
일곱째, 용녀가 몸을 바꾸어 성불한 것이 다르다는 것이란,
법화경에서는 용녀가 찰나간에 여자 몸을 바꾸어서 보살행을 갖추고 남방(南方)에서 성불하지만, 화엄경은 그렇지 않으니,
단지 스스로의 정견(情見)만 없게 하면 큰 지혜가 더욱 투명해지고, 그렇게 되면 만법의 바탕인 체(體)가 참(眞)이라서 변화하여 바뀌는 전변상(轉變相)이 없으니, 이는 마치 '유마경'에 나오는 다음의 문답과 같아서,.
“사리불이 천녀(天女)에게 말했다.
‘어째서 여자 몸을 바꾸지(轉) 않습니까?’
천녀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내가 12년 동안 여자 모습을 구했지만 결국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바꾸라는 말씀입니까?’”
또 암제차녀(菴提遮女)가 사리불에게 “남자로부터 우리 여자를 낳았다”고 하는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만법이 본래 그 자체가 여여(如如)한데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가령 화엄경의 입법계품(立法界品)에서 선재동자의 선지식(善知識)은 문수ㆍ보현ㆍ비구ㆍ비구니ㆍ장자(長者)ㆍ동자(童子)ㆍ우바이(優婆夷)ㆍ동녀(童女)ㆍ선인(仙人)ㆍ외도(外道) 등으로 53명이데, 저마다 스스로 보살행을 갖추고 스스로 불법도 갖추고 있다. 이 선지식들은 일체 중생에 따라 몸을 나타내는 것이 같지 않지만, 몸을 바꾼다(轉)고는 말하지 않는다.
법안(法眼)으로 본다면 속됨(俗)도 참(眞)되지 않은 것이 없고, 세간의 육안으로 보면 참(眞)됨도 속(俗)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방편을 가르치는 3승 근기의 견해가 아직 궁극적이지 못한 것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씨앗을 성취하게 한 것이며, 또한 여자 몸을 조속히 바꾸어 성불한 일을 통해 기특(奇特)함을 낳게 함으로써 처음으로 발심(發心)하여 참된 지견(知見)에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선한 근기를 일으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니, 여전히 3승의 방편인 삼권(三權)을 이끌어서 하나의 진실인 일실(一實)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또한 시겁(時劫)의 보살이 성불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의 3승기(僧祇, 3 아승기)를 고정되게 집착하는 것을 타파해서 찰나간에 삼세의 본성이 본래부터 한 경계인 일체(一際)로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평등한 법리라는 것을 증득하게 하며, 이를 통해 3승의 소견의 그물을 찢어내고 보살이 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거처하는 초암(草菴)을 철거해서 법계의 문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진실한 집인 진실택(眞實宅)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따라서 용녀로 하여금 성불하게 한 것은 과거로부터 오래도록 수행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고,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인 것은 과거에 배운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며, 여자 몸을 바꾼 시간의 시분(時分)이 찰나를 넘지 않는 것은 행(行)을 갖춘 불과(佛果)가 당장의 일념인 호념(毫念, 한 순간)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은 본래 그대로라서 그 자체가 시간이 없는데도 방편을 배우는 3승의 근기들은 자기의 견해에 가로막혀서 스스로 실법(實法)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화현(化現)이 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니, 결국 자기의 본분사(本分事)가 그런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집에 온전하게 거처하면서도 오히려 막힌 견해의 체견(滯見)을 품고 있는 것이니, 어찌 계(界) 밖의 승기(僧祇, 아승기)를 가리킨다고 말하여서, 법계는 본래 시간의 겁이 없는데도 법계 외에 멋대로 한량없는 겁의 수행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막힌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면 결정코 영겁토록 어긋날 것이며, 마음을 돌이켜서 견해를 없애야 비로소 옛 집인 구거(舊居, 여래의 집)에 있게 될 것이니, 지금 당장 온갖 견해의 업(業)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어찌 다겁(多怯)에 걸친 번뇌의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돌이키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화엄경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문은 범속함(凡)과 성스러움(聖)을 하나의 참(眞)이라 하여서 소견(所見)의 장애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인, 소견이 있으면 곧 범속함이요, 정(情)이 없으면 곧 부처이니, 본성(性)에 맞는 연기(緣起)는 위를 보든 밑을 보든, 나아가든 물러서든, 굽히든 펴든, 겸손하든 공경하든, 이 모든 것이 보살행이지만, 단 한 법도 낳고 머물고 소멸하는, 생부멸(生住滅)의 전변(轉變)의 상(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닭에 용녀가 몸을 바꿔서 성불한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여덟째, 용녀(龍女)가 성불해서 거처한 국토가 다르다는 것이란, 남방무구세계(南方無垢世界)가 사바세계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해석한다면, 마음이 진실에 응할 수 있기 때문에 무구(無垢)라 칭하고,
또 본각(本覺)을 올바르게 따르는 까닭에 남방(南方)이라고 하는 것이니, 남북으로 바름의 정(正)을 삼기 때문이다.
또 남방은 명(明)이 되고 허(虛)가 되고, 남방은 이(离, 흩어질, 떠날)가 되고, 이는 가운데가 허(虛)한 것으로, 8괘(掛) 중에서 이(离)는 마음을 본받으니, 마음은 허무(虛無)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속의 8괘에 의거해서 나타낸 것이니, 다른 국토에는 8괘라는 명칭이 없지만 그 방법은 한 가지이다.
비록 이치(理)가 이렇긴 하지만, 이(理)가 있기에 사(事)가 있는 것이며, 또 반드시 국토가 있기에 대중들이 귀의하는 것이다.
만약 남방에 따로 머무는 것이 있다면, 이는 자(自)와 타(他), 피(彼)와 차(此)가 오히려 현격한 것이라서 도리어 방편 근기를 단계적으로 인도해서 믿음과 이해를 낳게 하여, 불승(佛乘)으로 옮겨가게 하는 3승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3승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어서 그 남아 있는 세력을 꺾기가 어려울 것이며, 설사 한 푼의 회심(廻心)이 있다 할지라도 자(自)와 타(他)의 정이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는 단박에 법계의 체(體, 바탕)에다 인(印, 도장)을 찍어서 자(自)와 타(他)가 서로 사무치며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 인타라망(印陀羅網,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의 문이 머무는 화엄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거처하는 국토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아홉째, 6천의 대중이 발심(發心)한 것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면,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나니,
“용녀가 성불할 때, 사바세계의 성문과 보살 등 모든 대중들은, 용녀가 성불하면서 당시에 모인 인간과 천인들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대중들이 매우 기뻐하면서 멀리서 공경히 예배하였다.”
또 그 다음 문장에서는,
“사바세계의 3천 중생이 물러나지 않는 경지의 불퇴지(不退地)에 머물고, 3천 중생이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수기(受記)를 얻였으며, 지적(智積)보살과 사리불 등의 일체의 대중이 묵묵히 믿고 받아들였다.”
지적보살과 사리불이 비록 지혜로운 지사(智士)이지만, 여전히 미혹된 무리들에게 의탁해서 몽매한 자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가르침의 실천(行)을 통해서 평범한 자들을 더욱 제도하여 그 법도의 궤촉(軌躅)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래서 사바의 대중들이 멀리서 공경히 예배한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6천의 대중들이 발심(發心)한 것도 피(彼)와 차(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방편을 가르치는 3승 유위(有爲)의 보리를 다르는 것이지, 자(自)와 타(他)가 한 몸인 보문법계(普門法界)의 본각보리(本覺菩提)를 얻지는 못한 것이니,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멀리서 공경히 예를 표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은, 보문법계(普門法界)와 보견법문(普見法門), 여래장신삼매(如來藏身三昧)의 경계, 인타라망(因陀羅網)으로 장엄한 법문, 세계해선(世界海旋, 세계해의 중중무진함)의 중중무진하는 오묘한 지혜를 단번에 얻게 되나니,
하나를 증득하면 일체를 증득하고 하나를 끊으면 일체를 끊게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 속에 시방의 모든 불국토인 불찰해(佛刹海)의 장엄이 있으며, 불신(佛身) 속이 바로 자신의 경계라서 시방세계에 중중무진하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은폐되기도 하는 것이니, 이는 법이 그러한 것으로, 마치 온갖 지류가 바다로 돌아갈 때, 아직 바다로 들어가지 않았을지라도 젖는 성품의 습성(濕性)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짠맛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체의 중생들이 모두 이러해서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본래의 불해(佛海)는 다르지 않으니, 어찌 법화경에서 사바의 대중들이 멀리서 공경히 예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사의(事儀)와 법칙은 화엄과 완전히 다른 것이나, 다만 법계품(法界品) 속에서 6천 명의 대중이 찰나간에 10안(十眼)이 더욱 밝아지고, 5백 명의 작은 동자가 한 생애에 10신(身)을 모두 증득하고, 나머지 대중들도 그러하며, 선재 동자는 남쪽에서 미륵을 만나서 벗들에게 물어 불과(佛果)가 이미 완전해지고 다시 보현의 몸에 들어가 법문(法門)을 모두 갖추니,
(바닷물이 거듭거듭 순환하는 것과 같은 중중무진한 법문을 비유한 것이다. 선재동자가 마지막 미륵의 처소에 가서 과(果)를 증득하고, 다시 보현의 털구멍 세계에 들어가 보현과 더불어 행이 평등하고 세계가 평등하여 삼세 인과의 이(理)와 사(事)가 일시에 드러남을 보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이(理)와 사(事)가 평등해지고 법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어서 법계가 이미 티끌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니, 어찌 멀리서 공경히 예를 표할 것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지금 6천의 대중이 발심(發心)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ㅡ10안(十眼); 여래의 5안(眼)은 육체의 눈인 육안(肉眼), 법을 알아보는 법안(法眼), 우주를 꿰뚫어 보는 천안(天眼), 슬기로써 보는 혜안(慧眼), 사리의 오묘함을 보는 불안(佛眼)이다. 이 중 법안에서 지혜의 지안(智眼)이 나오고, 불안에서 광명의 광명안(光明眼)과 생사를 벗어나는 출생사안(出生死眼)과 장애가 없는 무애안(無礙眼)과 일체 지혜의 일체지안(一切智眼)을 더해서 10안이 된다.
열째, 성문에게 주는 원겁의 수기(授記)가 다르다는 것이란,
법화경에서는 용녀가 법계무시(法界無時, 법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찰나의 성불을 말함)의 문을 단박에 인(印)을 쳐서 불과를 완전히 드러내기는 하나, 그러나 3승의 권학(權學)은 믿고 따르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남아 있는 습기(習氣)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단박에 증득하지는 못해서, 원겁(遠劫)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까닭에 원겁의 수기(授記)를 받는 것이니,
이는 미혹하면 범부요 깨달으면 부처라서 설사 남아 있는 습기가 있어도 부처님의 불지견(佛知見)으로 다스리는 화엄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의 불지견(佛知見)이 없으면 단지 꺾어서 조복시키는, 절복(折伏)만을 성취하는 것이라서 부처님의 사수(駛水, 급류)의 흐름)에는 들어가질 못하여서 원겁(遠劫)을 거쳐야 비로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ㅡ사수는 급류(急流)이니, 단박에 증득하는 법을 비유한 것이다. 점진적인 근기는 망상이 본래 없음을 알지 못하고 꺾어버리고 조복시키기 때문에 단박에 증득하는 여래의 법에 들질 못하고 수많은 겁을 지난 뒤에나 비로소 회심하는 것이다.
3승의 초심자(初心者)는 믿음의 근기가 낮기 때문에 속박을 벗어나질 못하고, 번뇌가 많기 때문에 생사(生死)에 즐거이 집착한다. 비록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나 근기가 낮아서 늘 정체되고 후퇴하기 때문에 여래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무상(無常)과 부정(不淨)과 찰나에 무너져서 멸하는 찰나멸괴(刹那滅壞)와 생각생각마다 머물지 않는, 염념부주(念念不住) 등의 관법(觀法)으로 관찰하게 해서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厭離)를 하게 하시는 하신 것이다(이상은 제1단계이다).
염리(厭離)의 마음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청정함(淨)과 더러움(穢)에 머물게 되는데, 여래는 방편의 가르침 속에서 이러한 근기들을 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자비와 지혜 닦기를 권해서 불과(佛果)를 구하게 하실지라도, 여전히 정토가 다른 곳의 타방(他方)에 있다고 미루신다.
(이에 해당하는 보살은 비록 자비와 지혜를 닦아서 자기와 남 모두를 이롭게 하나, 이 땅에 오래도록 미혹을 남겨서 중생을 교화할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토에 가서 빨리 성불한 뒤에 다시 이 땅에 나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정토보살로서 이상은 제2단계이다.)
3승의 견분(見分, 소견)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아서 이 사바세계를 늘 예토(穢土)로 보고서 인(因)을 설하고 과(果)를 설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잠시 화현(化現)해서 청정케 하고, 홀연히 신력(神力)을 수용해서 당장에 예토를 나타내신다.
(청정과 오염이 둘이 아니고 인(因)과 과(果)가 일시인 실교(實敎)의 도리를 나타낸 것으로 이상은 제3단계이다).
이와 같이 3승의 가르침에는 분명한 것은 이 무상관(無常觀)에서 나온 지혜의 습성을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에 용녀가 단박에 불승(佛乘)을 보였을지라도, 또 이 불승을 믿을지라도 여전히 그대로 증득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뜻으로 법화경의 회상에서는 수기(受記)를 받은 바가 다른 것이니, 모두 원겁(遠劫)에서 받고 있는 것다. 법화는 점진적으로 이끌어서 돌아가게 하는, 즉 3승을 점진적으로 이끌어서 실교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요,
화엄은 발심을 하는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다시는 계위의 단계가 없기 때문에 당장에 직접 주는 것이니, 발심(發心)이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뜻으로 법화경과 화엄경의 행상(行相)이 같지 않은 것이다.
화엄경과 법화경, 두 경전에서는 같은 점의 동문(同門)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곧바로 도량에 이르는 것이니, 여래승이란 곧 1승(乘)을 말하는 것으로, 화엄경의 현수품(賢首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일체 세간의 온갖 군생(群生)들 중에서 성문승을 구하려는 자가 드물고, 연각승(緣覺乘)을 구하려는 자는 더욱 적고, 대승을 구하려는 자는 더 더욱 희귀하다. 그러나 대승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하겠으니, 이 법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니,
“마음이 사그라들어서 몰(沒)하는 것을 싫어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성문의 길을 설해서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나, 마음이 약간이라도 밝고 열이한 중생이 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인연법(因緣法)을 설해서 벽지불(辟支佛)을 얻게 하고,
자비심 배우기를 좋아해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중생이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보살의 길을 설하나니, 결정코 대사(大事)를 좋아해서 부처님의 몸을 보이기 위하여 무진불법(無盡佛法, 다함이 없는 불법)을 굴리려고 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1승(乘)의 길을 설한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4승(乘)을 나눈 뜻이다.
ㅡ성문의 길은 4제법을 닦는 것이나 고(苦)를 보아도 그 고가 도(度)라는 것을 몰라서 항상 염리(厭離)를 생각한다.
망상의 모임인 집(集)을 끊으려고만 할 뿐 그 집 그 자체가 무생(無生)이라는 것을 모르고 항상 집의 생기(生起)를 두려워한다.
멸(滅, 열반)을 증득하지만 홀로 무위에만 계합하고, 도(道)를 닦긴 하지만 오직 자기의 제도만을 생각한다.
이처럼 서원의 마음이 넓지 못하고 교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성문이라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설하는 문 앞에 있는 세 수레는 아직 방편문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맨땅의 흰 소인 백우(白牛)에서 비로소 바른 가르침의 정교(正敎)를 밝혔으니, 오직 1승법만 있을 뿐 2승이나 3승은 없는 것이닌, 이는 2승이나 3승 외의 권종(權宗)으로 맨땅의 실다운 가르침의 노지실교(露地實敎)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4승의 회통은 법화나 화엄이나 같지만, 시설한 교화의 의식(儀式)은 저마다 차이가 있다.
또 법화경에서는 “이 한가지 일(事)만이 진실(實)이요, 나머지 둘은 참(眞)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구절만을 준거하면 마치 3승을 세운 것 같지만, 그 회통을 논하면 오히려 4승을 이루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일만 진실’이라는 것은 불승(佛乘)의 사(事)가 진실이란 것이다. 나머지 둘은 보살대승(菩薩大乘)과, 연각승과 성문승을 합친 것으로, 연각승과 성문승을 합친 이유는 양자가 고통을 싫어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니, 이를 귀경(龜鏡)을 삼아서 밝게 비춰보아야 한다.(대승을 하나로 보고, 성문ㆍ연각을 하나로 보아 ‘나머지 둘’이라 한 것이다.)
법화경과 화엄경의 같은 것의 두 번째는 용녀가 1찰나 사이에 삼세의 본성을 인(印)치고, 또 범부 그대로가 성(聖)이라서 털끝만치도 변하거나 달라지지도 않는 것이니, 이는 선재 동자의 이해(解)와 실천(行0을 통해 도(道)에 들어가는 법문과 대략 같은 것이다.
선재가 일평생에 성불했다는 것은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서 삼세의 본성을 증득해 옛날(古)과 지금(今)이 같은 것이다.
이는 용녀가 1찰나에 몸을 바꿔서 행(行)을 갖춰 성불한 것과 같이 단번에 모두 마친 것이니, 모두 근본법을 칭한 것이다.
법이 이러한 까닭에 시겁(時劫)을 세운 것은 중생의 정(情)에서 나온 티끌이다.
선재는 이를 증득해서 이름을 일생(一生)이라 한 것이니, 삼세의 시겁(時劫)이 다했다면 다시 무슨 생(生)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름이 일생이 된 것이다.
용녀는 몸을 바꾸고 선재는 변하지 않았으니, 이 바꿈의 전변(轉變)과 바꾸지 않음의 불변(不變)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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