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6 3

 

此五別者謂初發心自分勝進自分行中三品別故或初發心長時無閒慇重餘修差別故或資糧等五道別故乘究竟道欣大菩提故。諸佛究竟道樂利樂他故。

맹렬함을 일으키는 피갑(被甲, 유세有勢)ㆍ가행(加行, 유근有勤)ㆍ낮추지 않음의 무하(無下, 유용有勇)ㆍ물러나지 않음의 무퇴(無退, 견맹堅猛)ㆍ만족하지 않음의 무족(無足, 불사선액不捨善軛)의 5 가지의 차이를 말한다면,

맹렬함을 일으키는 피갑(被甲, 유세有勢)은 초발심이며, 그 나머지 넷은 수행이나, 이 수행은 다시 자분(自分, 그 지위에 해당되는 수행)과 승진(勝進, 상위를 위한 수행)으로 나뉜다.

가행(加行, 유근有勤)은 자분(自分)으로써 하품(下品)이며,

낮추지 않음의 무하(無下, 유용有勇)은 자분(自分)으로써 중품(中品)이며,

물러나지 않음의 무퇴(無退, 견맹堅猛)은 자분(自分)으로써 상품(上品)의 삼품(三品)이고, 

만족하지 않음의 무족(無足, 불사선액不捨善軛)은 승진(勝進)에 해당 되는 것이니, 

자분(自分)ㆍ승진(勝進)ㆍ자분행(自分行)의 세 가지 품류로서 다르기 때문이다.

혹은 초발심ㆍ오랜 기간인 장시(長時, 삼대겁)ㆍ무간(無間, 일체시)ㆍ은중(慇重)ㆍ무여(無餘, 6바라밀)의 수행의 차이이기 때문이고,

혹은 자량도(資糧道)ㆍ가행도(加行道)ㆍ견도ㆍ수도ㆍ무학도등의 오도(五道)의 차이이기 때문이고,

2승의 구경도에서는 대보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구경도에서는 남을 이롭고 즐겁게 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3승(乘)의 무학(無學)도 증과(證果)를 원만히 이루었는데, 어째서 만족하지 않는 무족(無足)이나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불사선액(不捨善軛)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2승(乘)의 구경도(究竟道, 무학無學)는 마음을 대승으로 회향하여 대보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의 구경도에서는 영원히 미래세가 다하도록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 만족하지 않는 무족(無足)이나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불사선액(不捨善軛)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或二加行、無閒、解脫、勝進別故。

혹은 가까운 근(近)과 먼 원(遠)의 두 가지 가행(加行)ㆍ무간(無間, 일체시)ㆍ해탈ㆍ승진(勝進)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安謂輕安,遠離麤重,調暢身心,堪任爲性。對治惛沈,轉依爲業。謂此伏除能障定法,令所依止轉安適故。 

‘안(安, prasrabdhi)심소’는 경안(輕安)을 말하며, 추중(麤重)을 멀리 여의고 몸과 마음을 고르고 화창하게 해서 자재함의 감임(堪任)을 체성(體)으로 삼으며, 혼침을 다스려서 몸, 즉 소의신(所依身)를 전환함을 업(業)으로 한다.

이것이 선정을 장애하는 법을 조복시켜 없애서, 의지처인 몸으로 하여금 바뀌어 평안하고 적절하게 하기 때문이다.


안(安, prasrabdhi)심소는 ‘경안(輕安)’, 즉 번뇌를 멀리하고(輕), 몸과 마음을 편안히 조절하는(安)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이것은 욕계의 산심위(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색계ㆍ무색계의 정위(定位)에서만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不放逸者,精進、三根於所斷修防修爲性。對治放逸,成滿一切世、出世閒善事爲業。

불방일(不放逸, apramāda)심소’는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으로 하여금,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방지하고 닦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방일을 다스리고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일을 원만히 이루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불방일(不放逸, apramāda)심소는 방일함을 없애는 심리작용, 즉 정진ㆍ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심소력으로 번뇌를 끊고 선행을 닦음에 있어서 선법을 획득하고 보존하게 하는 능력의 심소이다.


謂卽四法,於斷、修事,皆能防修名不放逸,非別有體。無異相故,於防惡事修善事中,離四功能無別用故。雖信、慚等亦有此能,而方彼四勢用微劣,非根遍策,故非此依。
곧 근(動)심소와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 심소의 네 가지 법이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방지해야 할 것을 능히 방지하고 닦는 것을 불방일이라 이름하고, 다른 체상이 없기 때문에 별도로 자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악한 일을 방지하고 착한 일을 닦는 것에 있어서 근(動)ㆍ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네 가지 법의 능력을 떠나서는 별도의 작용이 없으며, 

신(信)ㆍ참(慚) 심소 등도 역시 이러한 능력이 있지만, 근(動)ㆍ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네 가지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선근에 두루 책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방일(不放逸)의 의지처가 아닌 것이다.

 

豈不防修是此相用?

▷외인의 질문; 어째서 방지하고 닦는 것이 그 체상과 작용이 아닌 것입니까?

防修何異精進三根?彼要待此方有作用。此應復待,餘便有無窮失。勤唯遍策,根但爲依,如何說彼有防修用?
▷논주가 반대로 질문하여서; 방지하고 닦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근(動)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외인의 답변으로; 그것은 모름지기 이 불방일을 기다려서 비로소 작용이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논주의 논파로써; 그러하다면, 이 불방일도 다시 다른 것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문득 끝없이 소급하는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외인이 비판하여 묻는 것으로; 근(勤)심소는 오직 착한 심왕을 두루 책려하고,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3근(根)은 다만 선법의 의지처이거늘, 어째서 근(動)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의 심소에게 방지하고 닦는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汝防修用其相云何?若普依持卽無貪等。若遍策錄不異精進,止惡進善卽摠四法,令不散亂應是等持,令同取境與觸何別?令不忘失卽應是念。

▷논주의 반대질문으로; 그대가 주장하는 방지하고 닦는 작용의  체상은 어떠한 것인가?

만약 널리 모든 선심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무탐심소 등이 될 것이고,

만약 두루 책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근(勤)심소와 다르지 않을 것이고,

악을 그치고 선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전체적으로 곧 근(動)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이 되는 것이고,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등지(等持)심소이어야 할 것이며,

 같이 대상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촉(觸)심소와 무엇이 다르겠으며?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염(念)심소이어야 할 것이다.


如是推尋不放逸用,離無貪等竟不可得。故不放逸定無別體。

이와 같이 불방일(不放逸) 심소의 작용을 분석하여 보면, 무탐심소 등을 떠나서는 마침내 얻을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불방일심소는 반드시 별도의 자체(體)가 없는 것이다.

 

云何行捨?精進、三根令心平等,正直無功用住爲性。對治掉擧靜住爲業。

무엇이 행사(行捨, upekṣā)심소’인가?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세 가지 선근이 심왕으로 하여금 평등하고 적정하며, 공용(功用, 작용)없이 머물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으며, 도거(掉擧)를 다스려서 고요히 머물게 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행사(行捨, upekṣā)심소는 마음의 ‘평정’을 이루게 하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사(捨)’는 혼침이나 들뜸의 도거(掉擧)가이 아닌 평정상태를 말하며, ‘행사(行捨)’란 5온(蘊) 중에 수온(受蘊)이 아닌 행온(行蘊)에 포함되는 사(捨)의 뜻이다.


謂卽四法令心遠離掉擧等障,靜住名捨。平等正直無功用住,初中後位辯捨差別。由不放逸先除雜染,捨復令心,寂靜而住。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四法)이 심왕에서 도거 등의 장애를 멀리 여의어서 고요히 머물게 하는 것을 행사(行捨)라고 이름하며, 평등하고 적정하며 작용없이 머물게 한다는 것이란,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지위에서 행사(行捨)심소의 차이를 판별하는 것이다. 

먼저 불방일이 잡염을 제거함에 의해서, 행사 심소가 다시 심왕을 적정하게 머물게 하는 것이다.


此無別體。如不放逸,離彼四法無相、用故。能令寂靜卽四法故。所令寂靜卽心等故。

이것에는 별도의 별체(別體)가 없으니, 불방일과 같이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四法)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능히 적정하게 하는 것은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四法)이기 때문이며,

적정하게 되는 것은 심왕 등이기 때문이다.

 

云何不害?於諸有情不爲損惱,無瞋爲性。能對治害,悲愍爲業。謂卽無瞋於有情所,不爲損惱假名不害。

무엇이 불해(不害, ahiṃsā)심소’인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무진(無瞋)심소를 체성(體)으로 삼으며, 해롭게 하는 것을 다스리고 연민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것으로 업(嶪)을 삼으니,  

 무진(無瞋)심소가 유정에 대해서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가정적으로 불해(不害)심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불해(不害, ahiṃsā)심소는 타자(他者)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심리작용이며, 이것은 무진(無瞋)심소에 의해서 생기하는 것이다.


無瞋翻對斷物命瞋,不害正違損惱物害。無瞋與樂,不害拔苦。是謂此二麤相差別。

무진(無瞋)ㆍ불해(不害) 심소를 별도로 건립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자면,

무진심소는 생물의 목숨을 끊는 진(瞋)심소의 정반대이고, 

불해심소는 생물을 괴롭히고 손해 입히는 해(害)심소의 정반대이니, 

즉, 무진심소는 약을 주는 것이고, 불해심소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으로,

이러함이   가지의 두드러진 상의 차이다.

 

理實無瞋,實有自體。不害依彼一分假立。爲顯慈、悲二相別故。利樂有情,彼二勝故。

참다운 이치로써 말하자면, 무진심소는 참으로 자체(自體)가 있으며, 

불해심소는 그것의 일부에 의지해서 가립하는 것이며,  

자(慈)와 비(悲)의 이상(二相)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유정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이 무진심소와 불해심소,  가지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有說不害非卽無瞋。別有自體,謂賢善性。

설일체유부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불해심소가  무진심소가 아니니, 별도로 자체(自體)가 있어서 어질고 착함의 체성인 현선성(賢善性)이라 하였다.


此相云何?

▷논주의 질문; 이것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謂不損惱。無瞋亦爾。寧別有性?謂於有情,不爲損惱,慈悲賢善,是無瞋故。

▷외인 답;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논주의 논파로써; 무진심소도 역시 그러해야 하거늘, 어째서 별도로 자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유정에게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자비와 어질고 착한 것이 무진심소이기 때문이다.


及顯十一義別心所,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및 즉, 급(及)’이라고 말한 것은 열한 가지로부터 뜻이 다른 심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및, 즉 급(及)’이라는 글자에 상위(相違) 합집(合集) 뜻이 있어서,

상위(相違)는 선심소(善心所) 11 가지가 각각 모두  자체(體)가 다른 것을 나타내고,

합집(合集)은 11 가지 이외에 다른 심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후자의 개념이다.

 

謂欣、厭等善心所法。雖義有別,說種種名,而體無異,故不別立。

기뻐함과 싫어함 등의 착한 성품의 선(善)심소법을 말하는 것이나, 뜻의 차이가 있으므로 갖가지 명칭을 붙인 것이지만, 자체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다.

선심소에 관한 장행석(長行釋) 중의 3제문분별(第三諸門分別) 일단(一段)으로, 그것에는 12 가지가 있는데, 먼저 뜻의 의(義)으로써 다른 것을 포섭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欣謂欲俱無瞋一分。於所欣境,不憎恚故。不忿恨惱、嫉等亦然。隨應正翻瞋一分故。

기뻐함의 흔(欣)이라는 것은 욕(欲)심소와 함께하는 무진심소의 일부이니, 기뻐하게  대상에 대해서 증오나 성냄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음의 불분(不忿), 원한을 품지 않음의 불한(不恨), 고뇌하지 않음의 불뇌(不惱), 질투하지 않음의 불질(不嫉) 등도 역시 그와 같으니,

상응한 바를 따라서 바로 진(瞋)심소의 일부에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음의 불분(不忿), 원한을 품지 않음의 불한(不恨), 고뇌하지 않음의 불뇌(不惱), 질투하지 않음의 불질(不嫉) 등은 분(忿)ㆍ원(恨)ㆍ뇌(惱)ㆍ질(嫉) 등의 심소를 뒤집어서 정반대로 건립된 것으로, 모두 무진(無瞋)심소의 일부이다.


厭謂慧俱,無貪一分。於所厭境,不染著故。不慳、憍等,當知亦然。隨應正翻貪一分故。不覆、誑、諂、無貪、癡一分。隨應正翻貪、癡一分故。

싫어함의 염(厭)이라는 것은 혜(慧)와 함께하는 무탐(無貪)심소의 일부이니, 싫어하게  대상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색하지 않음의 불간(不慳), 교만하지 않음의 불교(不憍) 등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상응한 바를 따라서 탐심소의 일부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덮어두지 않음의 불복(不覆), 거짓으로 꾸미지 않음의 불광(不誑), 아첨하지 않음의 불첨(不諂) 등은 무탐ㆍ무치(無癡) 심소의 일부이니, 상응한 바를 따라서 탐ㆍ치(癡) 심소의 일부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義不覆唯無癡一分。無處說覆,亦貪一分故。有義不慢,信一分攝。謂若信彼,不慢彼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감추지 않음의 불복(不覆)은 부(覆)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며, 오직 무치심소의 일부이니, 어떤 경론에서도 부(覆)심소가 탐심소의 일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거만하지 않음의 불만(不慢)은 만(慢)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며, 신(信)심소의 일부에 포함되는 것이니, 믿을 때에는 그것을 얕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有義不慢捨一分攝。心平等者不高慢故。有義不慢,慚一分攝。若崇重彼,不慢彼故。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거만하지 않음의 불만(不慢)은 행사(行捨)심소의 일부에 포함되는 것이니, 마음이 평등한 자는 자신을 높이고 거만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호법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거만하지 않음의 불만(不慢)은 참(慚)심소의 일부이니, 그것을 받들고 존중할 때에는 그것을 거만하게 높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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