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6 1

 

已說遍行、別境二位,善位心所,其相云何?頌曰:

앞에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의  가지 분위(分位)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러면 선위(善位)의 심소의 양상은 어떠한 것인가?'유식삼십송'의 제11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善謂信、慚、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선심소(善心所) 신(信)ㆍ참(慚)ㆍ괴(愧)와 무탐(無貪)ㆍ 무진(無瞋)ㆍ무치(無癡) 세 가지의 삼선근(三善根)

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과 행사(行捨)  불해(不害)이다.


▷論曰:唯善心俱名善心所,謂信、慚等,定有十一。

▷논하여 설명한다;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과 함께하는 것을 선심소(善心所)라 이름하며,

신(信)ㆍ참(慚) ㆍ괴(愧)ㆍ무탐(無貪)ㆍ 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ㆍ행사(行捨)ㆍ불해(不害) 심소 등으로 반드시 열11 가지가 있다.

 

云何爲信?於實、德、能深忍樂欲,心淨爲性,對治不信,樂善爲業。

무엇이 ‘신(信, śraddhā)심소’인가? 참으로 존재함의 실(實)과 덕(德)  능력(能)을 깊이 인정하고 좋아하고 원하여서 심왕(마음)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불신(不信)을 다스리고 선(善)을 좋아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신(信, śraddhā)심소는 ‘믿음’의 능력이다. 제법의 참다운 도리와 삼보의 덕과 선근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기꺼이 원하고, 염오의 심왕ㆍ심소를 다스려서 청정하게 한다. 마치 탁수(濁水)에 맥반석을 넣으면 정화되는 것과 같이, 이 신(信)심소는 염오심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그 성질이 자성선(自性善) 또는 상응선(相應善)이면서 4일체(四一切)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같은 성격을 가진 마음작용(심소법)들의 그룹을 말한다. 

불교에서 선(善)이란, 부파불교에서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과보를 받을만한 것을 선(善)이라고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것을 말한다.


然信差別略有三種:一信實有,謂於諸法實事、理中深信忍故;二信有德,謂於三寶眞淨德中深信樂故;三信有能,謂於一切世,出世善,深信有力,能得能成,起希望故。由斯對治彼不信心,愛樂證修世、出世善。

그런데 신(信)심소를 구별한다면 대략 3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참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를 믿는 것으로, 일체법의 참다운 현상의 실사(實事)와 본질의 실리(實理)을 깊이 믿고 인정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덕이 있는 유덕(有德)을 믿는 것으로, 삼보의 진실되고 청정한 덕을 깊이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능력이 있는 유능(有能)을 믿는 것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善)에 대하여 심신(深信)의 힘이 있어서 능히 얻어서 능히 성취한다고 깊이 믿는 것으로, 다시 말하자면 무위선(無爲善)을 얻고 유위선(有爲善)을 성취하는 것 또는 세간의 선(善)을 얻고 출세간의 선을 성취하는 것에 희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믿지 못하는 불신심(不信心) 다스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선을 닦고 증득함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


忍謂勝解,此卽信因。樂欲謂欲,卽是信果。礭陳此信自相是何?

▷외인(外人)의 질문; 인정하는 것은 승해(勝解)이니, 이것이 믿음의 원인인 신인(信因)이며,

좋아하여 원한다는 것은 욕구(欲)이니,  믿음의 결과인 신과(信果)인 것입니다. 

 신심소를 확실하게 말한다면 자상이 어떠한 것입니까?

()심소의 인과는 분명히 하였으나 아직 그것의 자상(相)을 말하지 않았는데,  자상(相)은 어떠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豈不適言心淨爲性?

▷답한다; 어찌 적절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심왕(마음)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體)으로 하는 것이다.


此猶未了彼心淨言,若淨卽心,應非心所,若令心淨,慚等何別?心俱淨法爲難亦然。

▷묻습니다; 이것은 아직  심왕이 청정함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청정한 것이  심왕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심소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심왕이지 심소가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하는 것.

만약 심왕을 청정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참(慚)심소 등과 어떠한 차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까?

심왕과 함께하는 청정법이라고 말한다면 역시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此性澄淸能淨心等,以心勝故立心淨名,如水淸珠能淸濁水。慚等雖善,非淨爲相,此淨爲相,無濫彼失。

▷답한다; 이것의 자성이 매우 맑아서 능히 심왕 등을 청정하게 할 수 있으니, 심왕이 뛰어나기 때문에 심정(心淨)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으로, 물을 맑히는 구슬인 수정주(水淸珠)가 능히 탁한 물을 청정하게 하는 것과 같으며,

참(慚)심소 등은 선(善)이지만 청정을 자상(相)으로 하지 않으나, 신(信) 심소는 청정하게 하는 것을 자상(相)으로 하는 것이니, 그러함에는 혼동된 잘못은 없는 것이다.

논주가 ()심소와 () 등의 심소의 차이점을 회통하여 답변한다.


又諸染法各別有相,唯有不信自相渾濁,復能渾濁餘心、心所,如極穢物自穢穢他,信正翻彼,故淨爲相。

또한 모든 잡염법은 각각의 자상(相)이 있으니, 오직 불신만의 자상(相)이 혼탁하며 또한 능히 다른 심왕과 심소도 혼탁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매우 더러운 물건은 스스로도 더럽고 다른 것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나,  

신(信) 심소는 그것과는 반대로 배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청정함을 자상(相)으로 하는 것이다.


有說信者愛樂爲相。應通三性,體應卽欲,又應苦、集非信所緣。

상좌부 또는 대승의 다른 학파인 이사(異師)들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신심소는 즐기고 좋아함을 자상으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신(信) 심소는 마땅히  가지 성품인 3성(三性)과 통하는 것이라면, 자체(體)가  욕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고제와 집제는 신심소의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논주의 논파로써,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신심소는 3() 통해야 하는 것으로, 신심소는  가지 대상을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심소의 자체는 ()심소이어야 하고, 신심소에도 ()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4성제를 믿을 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신심소라면, 고제(苦諦)ㆍ집제(集諦) 신심소의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有執信者隨順爲相,應通三性,卽勝解欲。若印順者卽勝解故。若樂順者卽是欲故,離彼二體無順相故,由此應知心淨是信。

대승의 다른 학파인 이사(異師) 또는 대중부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국집된 견해가 있으니, 신(信) 심소는 수순함을 자상으로 한다고 말하나,

대승의 다른 학파인 이사(異師)가 주장하는 바로, 신(信) 심소가 마땅히 3성(三性)과 통해야 한다면,  승해ㆍ욕(欲) 심소가 되어야 할 것이나,

만약 분명히 지녀서 수순해야 한다면 승해심소이어야 할 것이며,

만약 즐겨서 수순하다면, 욕심소이어야 할 것이니, 그 둘의 자체를 떠나서는 수순의 상(相)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니, 심왕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신(信)심소인 것이다.


云何爲慚?依自、法力崇重賢善爲性,對治無慚,止息惡行爲業。謂依自法尊貴增上,崇重賢善,羞恥過惡,對治無慚,息諸惡行。

무엇이 ‘참(慚, hrī)심소’인가? 자신과 법력(法力)에 의지해서 범부와 성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현덕(賢德)이 있는 현인(賢人)과 모든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선법(善法)을 받들고 존중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무참(無慚)을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業)으로 삼으며,  

자신과 법을 존귀하게 여기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현인과 선법을 받들고 존중하며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무참을 다스려서 여러 악행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참(慚, hrī)심소는 (자신에 대한 반성) ‘스스로의 부끄러움’의 작용을 하는 심소이다. 자신과 법에 의지해서 현선(賢善)을 존경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 즉 자신의 언행(言行), 정확히는, 자신의 구업(口業)과 신업(身業)과 의업(意業)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는 것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참(慚)과 괴(愧)를 참괴(慚愧 또는 慙愧: 매우 부끄러워함)라고 하는데, 설일체유부와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은 이 둘을 분별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중현(衆賢)은 '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에서, 참(慚)이란 참다운 진리로 나아감으로써 스스로와 법(法)에 대해 뛰어난 힘이 생겨나서, 애(愛: 애탐, 탐욕)의 등류(等流)를 거스리려는 마음의 자재성이라고 하고, 괴(愧)는 수습(修習)을 애락하고 공덕을 우선하는 것으로서, 치(癡)의 등류(等流)를 어기고 열등한 법을 혐오하는 것이라고 한다.

 

云何爲愧?依世閒力輕拒暴惡爲性,對治無愧,止息惡行爲業。謂依世閒訶厭增上,輕拒暴惡羞恥過罪,對治無愧,息諸惡業。

무엇이 ‘괴(愧, apatrapā)심소’인가? 세간의 힘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무괴(無愧)를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業)으로 삼으며,

세간에서 꾸짖고 싫어하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겨서 거부하고,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무괴를 다스리고 여러 악업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괴(愧, apatrapā)심소는 (타인에 대한 반성) ‘남부끄러움’, 즉 타인의 비방을 두려워하고 왕법(王法)의 형벌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참회(懺悔), 즉 뉘우침의 심리작용.  


羞恥過惡是二通相,故諸聖教假說爲體。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둘의 공통된 이통상(二通相)이다. 따라서  '아비달마잡집론' 제1권과 '현양성교론' 제1권의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가정적으로 자체(體)로 삼는 것이니,

유식논서에서의 차이점을 회통하는 것으로, 과오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ㆍ괴() 공통된 모습의 통상(通相)이므로, 따라서 '아비달마잡집론'ㆍ'현양성교론' 등에서 가정적으로 둘을 별개의 자체로 삼는 것이다.

 

若執羞恥爲二別相,應慚與愧體無差別。則此二法定不相應,非受想等有此義故。

만약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고집해서 둘을 별개의 이별상(二別相)으로 삼는다면, 참(慚)ㆍ괴(愧) 심소의 자체가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참(慚)ㆍ괴(愧) 심소의 두 법은 체일(體一)이기 때문에 반드시상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수(受)ㆍ상(想) 심소 등에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래의 견해를 비판한다.


若待自他立二別者,應非實有,便違聖教。若許慚、愧實而別起,復違論說十遍善心。

만약 자신과 타인에게 때가 오기를 기다림으로써 둘의 개별적인 이별상(二別相) 건립한다고 말한다면, 참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할 것이고, 만약 그러하다면 '유가사지론' 제55권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며,

만약 참(慚)ㆍ괴(愧) 심소가 참된 것으로서 개별적으로 일어난다고 인정한다면, 다시 '유가사지론' 제69권에  가지는 선심(善心) 두루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崇重輕拒若二別相,所緣有異應不俱生,二失旣同,何乃偏責?

▷외인의 질문; 현인과 선법을 존중하며, 악과 잡염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는 것이 만약 둘의 개별적인 이별상(二別相)이라고 말한다면, 참(慚)심소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縁)은 현인의 선법인 현선(賢善)이고, 괴(愧)심소의 대상은 포악(暴惡)이니, 이와 같이 둘의 소연(所縁, 인식대상)이 다르므로 함께 생겨나지 않아야 합니다다. 

둘의 과실이 이와 같거늘, 어찌 치우쳐서 힐책하는 것입니까?

그대는 ()ㆍ괴() 심소가 구생(俱生)하지 않는 것으로써 우리를 비판하지만, 그대의 견해에도  심소의 소연(所縁, 인식대상) 다르다는 과실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와 우리  모두 과실이 있는데 어째서 우리만 비판하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誰言二法所緣有異?

▷답한다, 누가  법의 소연(所縁, 인식대상) 다르다고 말한 것인가?


不爾如何?
善心起時隨緣何境,皆有崇重善及輕拒惡義,故慚與愧俱遍善心,所緣無別。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러한 것입니까?

▷답한다;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이 일어날 때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하여도 모두 선을 받들어 존중하고 악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는 뜻이 있으니, 따라서 참(慚)ㆍ괴(愧) 심소는 모두 착한 마음에 두루하여 소연(所縁,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豈不我說亦有此義?汝執慚、愧相旣同。何理能遮前所設難?

▷묻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말하는 것에도 역시 이러한 뜻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그대들은 참(慚)ㆍ괴(愧)의 자상이 같다고 집착하거늘, 어떤 논리로써 앞에서 시설한 비판을 능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然聖教說顧自他者,自法名自,世閒名他。或卽此中崇拒善、惡,於己益、損名自他故。

그러나,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자타(自他)를 돌아본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법을 자신인 자(自) 이름한 것이고, 세간을 다른 것의 타(他)라고 이름한 것이다.

혹은  가운데에서 선을 받들고 악을 거부한다고 말하나니, 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자(自), 해롭게 하는 것은 타(他)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無貪等者,等無瞋、癡。此三名根,生善勝故,三不善根近對治故。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무탐(無貪) 등’이라고  것에서, ‘등(等)’은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를 가리키며, 이 셋을 근(根)이라고 이름한 것은 선(善)을 일으킴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가지 불선근을 대치하여 다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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