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5 10

 

有說要由希望境力,諸心、心所方取所緣,故經說欲爲諸法本。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바로써 그들은 욕(欲)심소를 대지법(大地法)에 포함시켜서 변행하는 것이라고하는 견해가 있으나,  모름지기 대상을 희망하는 세력에 의해 모든 심왕(마음)과 심소(마음작용)가 비로소 인식대상을 취하는 것이니,

따라서 '중아함경' 제28권에서 욕구(欲)를법의 근본이라고 설하였다.


彼說不然,心等取境由作意故,諸聖教說作意現前能生識故,曾無處說由欲能生心、心所故。如說諸法愛爲根本。

그러므로 설일체유부가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심왕(마음) 등이 대상을 취하는 것은 작의(作意)심소에 의하기 때문이다.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말하기를, 작의(作意)심소가 현전해서 능히 식(識)을 일으킨다고 하기 때문이니, 일찍이 어떤 경론에서도 욕심소에 의해 능히 심왕과 심소를 일으킨다고 말하지 않은 때문이니, 

법은 애착(愛)을 근본으로 한다고 '잡아함경' 제35권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豈心、心所皆由愛生?故說欲爲諸法本者,說欲所起一切事業,或說善欲能發正勤,由彼助成一切善事。故論說此勤依爲業。

그렇다고 어찌 심왕(마음)과 심소(마음작용)가 모두 애착(愛)에 의해 생겨날 뿐이겠는가? 

따라서 욕구(欲)를 일체법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욕구(欲)로부터 일으켜지는 모든 선ㆍ악ㆍ무기 심성의 사업(事業) 말하는 것이니,

 착한 욕구는 능히 바른 노력의 정근(正勤)을 일으키고, 그 정근에 의해서 모든 착한 선사(善事)를 조성한다고 말하나니,

이에  논서에서는 이 욕구(欲)가 근(勤)심소의 의지처인 것으로써 업을 삼는다고 말한 것이다.

 

云何勝解?於決定境印持爲性,不可引轉爲業。謂邪正等,教理證力,於所取境審決印持,由此異緣不能引轉。故猶豫境勝解全無,非審決心亦無勝解,由斯勝解非遍行攝。

무엇을 승해(勝解, adhimokṣa)심소’라 하는 것인가? 결정된 대상을 분명히 지니는 것을 체성으로 하고, 이끌어 전전하는인전(引轉)을 업으로 한다. 

삿되고 바른  등의 가르침과 도리  증과(證果)의 힘으로써 인식대상을 살펴서 결정하고 분명히 지니나, 이에 의거해서 다른 연(緣)까지 이끌어 전전할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대상을 유예(猶豫)하는 데에는 승해심소가 전혀 없으며,

살펴서 결정하지 않는 심왕에도 역시 승해심소가 없는 것이므로 승해는 변행심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승해(勝解, adhimokṣa)심소는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살피고, 결정, 선택, 결정하여서 선택하고 선택한 것이 전변하지 않게 지키는 심리작용이다. 결정경(決定境)이 아닌 대상, 즉 대상을 유예하거나 살펴서 결정하지 않은 심왕에도 승해심소가 일어나지 않는다. 교시(敎示)ㆍ도리ㆍ선정수증(禪定修證) 등을 선택 결정하고 반대 입장에 의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


有說心等取自境時無拘礙故,皆有勝解。彼說非理,所以者何?能不礙者卽諸法故,所不礙者卽心等故。

'설일체유부'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왕(마음) 등이 자기 대상을 취할 때에는 구애됨이 없기 때문에 그 모두에  승해심소가 있다고 하나, '설일체유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능히 장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일체법이기 때문이고, 

장애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심왕 등이기 때문이다.


勝發起者根作意故,若由此故彼勝發起,此應復待餘便有無窮失。

뛰어나게 일어나는 승발기(勝發起)라는 것은 감각기관(根)과 작의(作意)심소이기 때문이니,

만약 이 승해(勝解)심소에 의해서 그러한 각기관(根)과 작의(作意)심소가 뛰어나게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이 승해심소도 다시 다른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며, 그러하다면 끊임없이 소급하는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云何爲?念於曾習境令心明記不忘爲性,定依爲業。謂數憶持曾所受境,令不忘失,能引定故。於曾未受體類境中全不起念,設曾所受不能明記,念亦不生,故念必非遍行所攝。

무엇을 ‘염(念, smṛti)심소’라 하는 것인가? 예전에 익히 대상을 심왕(마음)에 분명히 새겨서 잊지 않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정(定)심소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반복적으로 예전에 받아들인 대상을 생각하여 지녀서 잊어버리지 않게 하여 능히 정(定)심소를 이끄는 것이나,

예전에 받아들이지 않은 자체(體)와 부류(類)의 대상에 대해서는 전혀 염심소를 일으키지 않는다. 

설사 예전에 받아들인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기억할  없는 것에도 역시 염심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염심소는 반드시 변행심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염(念, smṛti)심소는 ‘지속적인 알아차림’, ‘기억 작용’을 한다. 슴리띠(smṛti)라고 하고, 빨리어로 사띠(sati)라고 하며, (선택한 바를) 기억, 명기(明記: 분명히 기억함), 지속적인 알아차림, 마음챙김, 정(定, 삼마지三摩地, 등지等持)의 소의가 된다.

 

有說心起必有念俱,能爲後時憶念因故。彼說非理,勿於後時有癡、信等,前亦有故,前心、心所或想勢力,足爲後時憶念因故。

'설일체유부'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왕(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염(念)심소와 함께하는 것이니, 능히 이후의 시기에 기억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이후의 시기에는 치(癡)ㆍ신(信) 등의 심소가 있으므로, 이전에도 역시 있었다고 말해서는  되기 때문이며,

이전의 심왕과 심소 혹은 상(想)심소 등의 세력으로써 이후의 기억의 원인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심왕 등이 대상을 취하고 나서 공능(功能) 훈습하여서 아뢰야식 중에 있기 때문에, 이후의 기억의 원인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므로, 현재의 ()심소를 기다려서 이후의 염심소가 생겨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논파한 것이다.


云何爲定?於所觀境令心專注不散爲性,智依爲業。謂觀德、失、俱非境中,由定令心專注不散,依斯便有決擇智生。

무엇을 ‘정(定, samādhi)심소’라 하는 것이가?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여 집중해서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지혜(智)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덕(德)과 과실(過失) 그리고 덕도 과실도 아닌 대상을 관찰하는 중에서, 정(定)심소에 의해 심왕을 기울여 집중하게 하여서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에 문득 결택(決擇)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정(定, samādhi)심소는 ‘집중’하는 능력의 심리작용으로서, 대상에 심왕을 집중 시켜서 하나에 머물러서 산란케 하지 않게 함으로써 결택지(決擇智)가 생겨날 수 있다.

정(定, 삼마지三摩地, 등지等持)은 (염念을 바탕으로) 집중, 선정, 삼매, 지(止)의 정(定) 마음작용은 개별 의(疑, 의심)를 끊는 결택지(決擇智)라는 무루(無漏)의 혜(慧, 지혜)가 문득 생겨나게 하며, 그 극치에서는 모든 의(疑, 의심)를 끊는 결택지(決擇智)가 생겨나게 하고 이로써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게 한다.


心專注言顯所欲住卽便能住,非唯一境。不爾,見道歷觀諸諦,前後境別,應無等持。若不繫心專注境位,便無定起,故非遍行。

심왕을 기울여서 집중하게 한다는 말이란, 머물고자 하는 것에 능히 머문다는 것으로,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견도에서 여러 진리를 관찰해 나갈 때, 앞뒤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등지(等持)가 없을 것이며,

산란이 심왕을 계박해서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지위에서는 정(定)심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따라서 변행심소가 아닌 것이다.


有說爾時亦有定起,但相微隱,應說誠言。若定能令心等和合,同趣一境,故是遍行。理亦不然,是觸用故。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을 신봉하는 사람들인 정리사(正理師)들의 다음과 같은 견해로써,

그 때에도 역시 정심소가 일어나는 것이나 다만 상이 미약하고 은밀할 뿐이라고 말하나, 마땅히 진실한 말을 해야 하는 것으로, 만약 정심소가 능히 심왕 등을 화합해서  같이 하나의 대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변행심소라고 말한다면, 이치가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촉의 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若謂此定令剎那頃心不易緣,故遍行攝。亦不應理,一剎那心自於所緣無易義故。若言由定心取所緣故遍行攝,彼亦非理,作意令心取所緣故。

만약  정(定)심소가 찰나에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緣)을 바꾸지 않게 하기 때문에 변행심소에 포함된다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찰나의 심왕은 스스로 소연(所緣, 인식대상)에 대해서 뜻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정(定)심소에 의해서 심왕에 소연(所緣, 인식대상) 취하게 하기 때문에 변행심소에 포함된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작의(作意)가 심왕에 소연(所緣, 인식대상) 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有說此定體卽是心,經說爲心學心一境性故,彼非誠證,依定攝心,令心一境,說彼言故。根、力、覺支,道支等攝,如念、慧等非卽心故。

경량부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정(定)심소 자체가  심왕이니, 경전에서 심학(心學)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진실한 증명이 아닌 것으로,  정심소가 심왕을 거두어서 심왕을 하나의 상태로 만드는 것에 의거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이며, 

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 등에 포함되므로, 염(念)ㆍ혜(慧) 심소 등과 같이 곧 심왕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5() 중에 정근(定根) 있고, 5() 중에 정력(定力) 있으며, 7각지(覺支) 중에 정각지(定覺支) 있고, 8정도 중에 정정(正定) 있다. 그것들 중에서 어느 것도 () 있으므로, ()심소를 심왕이라고 말해서는 된다고 논파한 것이다.

 

云何爲慧?於所觀境簡擇爲性,斷疑爲業。謂觀德、失、俱非境中,由慧推求得決定故。於非觀境愚昧心中無簡擇故。非遍行攝。

무엇을 ‘혜(慧, mati)심소’라 하는 것인가? 관찰되는 대상을 간택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의심을 끊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덕ㆍ과실 또는 덕도 아니고 과실도 아닌 대상을 관찰하는 가운데 혜(慧)심소가 추구하는 것을 따라 결정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닌, 우매한 마음속에서는 간택하는 것이 없으므로, 따라서 변행심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혜(慧, mati)심소는 ‘이해 분별하는 작용’으로, 대상에 대하여 득실시비(得失是非)를 판단하며, 이로써 의(疑) 번뇌가 단절하나, 혜(慧)는 정(定)을 바탕으로, 간택(簡擇), 택법(擇法), 이해, 분별, 식별, 지혜, 반야, 관(觀), 의(疑, 의심)를 끊음, 사(事)와 이(理)에 통달하는 것이다.


有說爾時亦有慧起,但相微隱,天愛寧知?對法說爲大地法故。諸部對法展轉相違,汝等如何執爲定量?唯觸等五經說遍行,說十非經,不應固執。

정리사(正理師)가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 때에도 역시 혜(慧심)소가 일어나나, 다만 양상이 미약하고 은밀할 뿐이라고 하나,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인 천애(天愛)가 어떻게 아는 것인가?(논주의 질문) 

소승의 '아비달마육족론(阿毘達磨六足論)ㆍ아비달마발지신론(阿毘達磨發智身論)' 등의 '대법론'에서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대지법(大地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정리사의 답변) 

여러 부파의 대법론은 전전해서 서로 다른 점이 많거늘, 그대들은 어찌 그것에 집착하여서 정량(定量)으로 삼는 것인가?오직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만을 경전에서 변행심소라고 하였으며,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경전에서 설한 바가 아니므로 고집해서 집착하지아야 하는 것이다. (논주의 비판이다.)


然欲等五非觸等故,定非遍行,如信、貪等。有義此五定互相資,隨一起時必有餘四。

그러나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정(定, 三摩地) · 혜(慧)심소 등의 다섯 가지는 촉 등이 아니기 때문에 신(信)ㆍ탐(貪) 심소 등과 같이 변행심소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안혜가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로써은 이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정(定, 三摩地) · 혜(慧)의 다섯 가지 심소는 반드시 서로 돕는 것이므로, 따라서 하나가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나머지 네 가지가 있게 된다고 말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