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5 권 9
有義六識,三受容俱,順、違、中境容俱受故。意不定與五受同故,於偏注境,起一受故,無偏注者便起捨故由斯六識三受容俱。得自在位,唯樂喜、捨。諸佛已斷憂苦事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6식(六識)에서는 삼수(三受)가 함께한다고 인정되는 것으로, 수순의 순(順)ㆍ거슬림의 위(違)ㆍ중용(中容)의 대상을 함께 느끼는 것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의식(意識)은 반드시 5식의 느낌이 수(受)와 같지 않기 때문이며,
특히 강하게 기울여서 집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의 느낌인 일수(一受)만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특히 강하게 기울여서 집중하는 것이 없을 때에는 문득 사수(捨受)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식에는 삼수(三受)가 함께한다고 인정되며,
자재함을 얻은 지위에서는 오직 낙수(樂受)ㆍ희수(喜受)ㆍ사수(捨受)뿐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수(憂受)와 고수(苦受)의 일들을 단멸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은 과위(果位)의 수구문(受俱門)이다.
前所略摽,六位心所,今應廣顯彼差別相。且初二位其相云何?頌曰:
앞에서 간략히 언표한 6위(六位)의 심소(心所, 마음작용)에 대하여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들의 차이를 말하리라.
우선 처음 두 가지 지위인 이위(二位)의 상(相)은 어떠한가?
'삼십송'의 제10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말하였으니;
이하 거듭 6위(位) 심소(心所)를 해설한다.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처음의 (두루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인) 변행심소(遍行心所)는 촉(觸) 등이며,
다음 (특정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 일어나거나 작용하는) 별경심소(別境心所)는 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정(定)ㆍ혜(慧)로써,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경계가 같지 않은 것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는 8식 모두에 언제나 상응해서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으로, 이 심소는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性) 모두에 두루 일어나며, 3계(界)ㆍ9지(地)의 일체제(一切地)어디에서나 작용하는 것으로, 유심무심(有心無心)의 모든 순간의 일체시(一切時)에 일어나고, 변행의 5심소는 언제나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이다. 이에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가 있다.ㅡ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1
論曰:六位中,初遍行心所卽觸等五。如前廣說。
▷논하여 말한다; 6위(六位) 중에서 처음의 변행심소는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내용은 제3권 아뢰야식의 상응심소 부분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다.
此遍行相云何應知?由教及理爲定量故。此中教者,如契經言眼色爲緣生於眼識,三和合觸,與觸俱生有受、想、思。乃至廣說。由斯觸等四是遍行。
이 두루 작용한다는 변행(遍行)의 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의 정리(正理)에 의해서 정량(定量)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여기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의 성교(聖敎)라는 것은 경전의 '잡아함경' 제11권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안근과 색경(色境)이 연(緣)이 되어 안식을 일으키고, 근ㆍ경ㆍ식의 셋이 화합해서 촉이 있으며, 촉과 함께 일어나는 수(受)ㆍ상(想)ㆍ사(思)가 있다.……(기타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그러므로 촉 등 네 가지는 변행심소이다.
又契經說:‘若根不壞,境界現前,作意正起,方能生識。’餘經復言:‘若於此作意卽於此了別,若於此了別卽於此作意,是故此二恒共和合。’乃至廣說,由此作意亦是遍行。此等聖教誠證非一。
또한 '상적유경(象跡喩經)'과 '중아함경' 제7권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감각기관인 근(根)이 무너지지 않고 경계가 현전할 때에는, 작의(作意)가 바로 일어나서 능히 식(識)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며,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기진경(起盡經)'에서도 또한 말씀하기를
“만약 이것에 대해서 작의할 때에 곧 이것에 대해서 요별하는 것이니, 이것에 대해서 요별할 때에는 곧 이것에 대해서 작의(作意)하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화합한다.……(기타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작의(作意)도 역시 변행심소인 것이니, 이러한 성스러운 가르침의 진실한 증명문이 하나 둘이 아닌 때문이다.
理謂識起必有三和,彼定生觸,必由觸有,若無觸者心、心所法應不和合觸一境故。
바른 논리인 정리(正理)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식(識)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감각기관의 근(根)ㆍ대상의 경(境)ㆍ식(識)의 3 가지의 화합이 있고, 그러한 삼화(三和)가 결정적으로 촉(觸)심소를 생겨나게 하고, 반드시 촉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니, 만약 촉이 없다면, 심왕(心王, 마음)ㆍ심소법(心所法, 마음작용)이 화합하여 하나의 대상에 접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作意引心令趣自境,此若無者心應無故。
작의(作意, 경각)심소는 심왕(心王, 마음)을 이끌어서 자신의 대상인 자경(自境)으로 향하게 하는 것으로, 만약 이것이 없다면 심왕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의(作意, manasikāra)심소’는 능히 심왕을 경각(警覺)시키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하고,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 쪽으로 심왕을 이끄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하며,
이것이 일으켜야 하는 심왕의 종자인 과구유(果俱有)를 경각시키고 이끌어서 대상으로 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작의(作意)라 이름하는 것으로, 이것은 심소도 능히 이끌어 일으키지만, 심왕이 주체이기 때문에 다만 심왕을 이끈다고 말한다.
작의(作意)는 경각(警覺)의 뜻으로, 이 경각에는 종자경각(種子警覺)과 현행경각(現行警覺)의 두 가지가 있으며,
종자경각(種子警覺)은 작의(作意)의 종자가 다른 심왕ㆍ심소의 종자를 경각하여 현행시키는 것을 말하고,
현행경각(現行警覺)은 작의가 현행하여 다른 심왕ㆍ심소의 현행을 경각시켜서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1
受能領納順、違、中境,令心等起歡、慼、捨相,無心起時無隨一故。
수(受, 느낌)심소는 능히 수순이나 거슬림 또는 중용(中容)의 대상을 받아들여서 심왕 등으로 하여금 기쁨이나 근심 또는 기쁨도 근심도 아닌 것의 상을 일으키게 하며, 심왕이 일어날 때에 따라서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受, vedāna)심소’는 수순함(順)과 거슬림(違), 수순도 거슬림도 아닌 구비(俱非)의 대상인 경상(境相)을 받아들이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애착을 일으키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능히 화합과 떠남의 합리(合離) 및 화합도 떠남도 아닌 비합리(非合離)의 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受)심소는 ‘감수작용’ ‘느낌’의 심소이며, 고(苦)ㆍ낙(樂)ㆍ사(捨)의 3수(受)가 있다.
또는 3수에 우수(憂受)ㆍ희수(喜受)를 더하여 5수(受)를 말하기도 하며,
능히 수순ㆍ거슬림ㆍ중용의 대상을 받아들여서 심왕으로 하여금 기쁨이나 괴로움 등의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낙수(樂受)에 있어서는 아지 얻지 못한 미득(未得)의 낙(樂)에는 합하기를 바라는 (구하는) 욕(欲),
이미 얻은 이득(已得)의 낙(樂)에서는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고수(苦受)에 있어서는 미득(未得)의 고(苦)에는 합하지 않기를 좋아하고(樂),
이득(已得)의 고(苦)에는 떠나기를 좋아하며,
둘 다 아닌 불락불고(不樂불不苦)에 대해서는 앞의 두 가지가 아닌 것을 말한다.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1
想能安立自境分齊,若心起時無此想者,應不能取境分齊相。
상(想, 개념화)심소는 능히 자기 대상의 구체적인 상을 안립하는 것으로, 만약 심왕이 일어날 때에 이 상(想)이 없다면, 응당 대상의 구체적인 상을 취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상(想, saṃjñā)심소’는 대상에 대하여 형상을 취하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갖가지 명칭을 시설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반드시 대상의 자상과 공상의 분제상(分齊相)을 안립하여 능히 따라서 갖가지 명칭(개념화)을 일으키는 것이다.
상(想)심소는 ‘표상(表象) 작용’ ‘개념화 작용’의 심소이다. 능히 자기 대상의 구체적인 양상을 안립하며, 대상의 형상을 취하여 명칭을 붙이는(언어와 일치할 수 있는) 개념화 작업을 한다.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2
思令心取正因等相,造作善等,無心起位無此隨一,故必有思。
사(思, 의지작용)심소는 심왕으로 하여금 바른 원인인 정인(正因, 선)ㆍ사인(邪因, 악)ㆍ구상위인(俱相違因, 무기) 등의 상을 취해서 선(善) 등을 짓게 하며, 심왕이 일어나는 지위에서 이것에 따라서 하나가 됨이 없지 않으므로, 따라서 반드시 사심소가 있는 것이다.
‘사(思, cetanā)심소’는 심왕을 작용하게 하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선품(善品) 등에 대해서 심왕을 작용하게 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대상의 바른 원인인 정인(正因, 선)ㆍ사인(邪因, 악)ㆍ구상위인(俱相違因, 무기) 등의 상(相)을 취하여 자기 심왕을 작용시켜서 선 등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사(思)심소는 ‘의지 작용’으로서, 심왕ㆍ심소로 하여금 선ㆍ악의 대상에 대해 선ㆍ악의 심작업(心作業)을 일으키게 하여 업도(業道)의 근원이 된다.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2
由此證知觸等五法心起必有,故是遍行。餘非遍行,義至當說。
이러함으로써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오법(五法)은 심왕(心王, 마음)이 일어날 때에 반드시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 변행심소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변행심소가 아니라는 뜻을 장차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次別境者,謂欲至慧,所緣境事多分不同,於六位中次初說故。
다음으로는 별경심소(別境心所)의 욕(欲)심소, 승해(勝解)심소, 염(念)심소, 정(定)심소, 혜(慧)심소이니,
대부분의 인식대상 경계의 경사(境事)가 많으므로, 육위(於六) 중에서 두 번째로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별경심소(別境心所)에 관하여 해설한다.
云何爲欲?於所樂境希望爲性,勤依爲業。
무엇을 ‘욕(欲, chanda)심소’라 하는 것인가?
좋아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 희망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근(勤)심소의 소의(所依, 의지처)로 삼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욕(欲, chanda)심소는 좋아하는 것을 희망하여 전전하는 ‘욕구’, 즉 좋아하게 된 대상을 희망하는 심리작용, 특히 선욕(善欲)은 정진의 근(勤) 작용을 일으키는 소의(所依)가 된다.
욕(欲): 선욕(善欲)은 근(勤, 精進)의 마음작용의 소의가 되고,
악욕(惡欲)들 중에서 타인의 재물(財物), 등의 재화나 공적, 명예 또는 지식을 빼앗거나 가로채거나 도용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할려는 욕구(欲) 즉, 원하고 희망하는 것으로, 불변의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스스로를 상응시키는 바른 노력(정정진) 없이 쉽게 얻으려는 욕구가 곧, 불선근이자 근본번뇌 중의 하나인, 탐(貪)의 마음작용이다. ㅡ위키
有義所樂謂可欣境,於可欣事欲見、聞等有希望故。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좋아하게 된 것의 소락(所樂)이란, 기뻐할 만한 대상을 말하는 것이며, 기뻐할 만한 대상에 대해서 보고 듣는 것 등을 하고자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於可厭事希彼不合,望彼別離,豈非有欲?
▷묻습니다; 싫어할 만한 가염(可厭)의 대상에 대해서 거기에 합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그것을 떠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째서 욕심소가 아닌 것입니까?
此但求彼不合離時可欣自體,非可厭事,故於可厭及中容境一向無欲。緣可欣事若不希望,亦無欲起。
▷답한다; 이것이 다만 그 싫어할 만한 가염(可厭)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에는 합하지 않고 떠나고자 구할 때에는 기뻐할 만한 자체로써 싫어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싫어할 만한 가염(可厭)과 중용(中容)의 대상에 대해서는 모두 욕(欲)심소가 없으며,
기뻐할 만한 대상을 반연할지라도, 만약 희망하지 않을 때에는 역시 욕심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有義所樂謂所求境,於可欣厭求合離等,有希望故。於中容境一向無欲,緣欣厭事若不希求,亦無欲起。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좋아하게 된 것이란, 구하는 대상인 소구경(所求境)을 말하며, 기뻐하거나 싫어할 만한 것에 대해서 화합(合)하고 떠남(離) 등을 구할 때에는 희망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중용의 대상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욕심소가 없는 것이니, 기뻐하거나 싫어할 만한 대상을 반연할지라도 만약 희구하지 않을 때에는 역시 욕심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有義所樂謂欲觀境,於一切事欲觀察者,有希望故。若不欲觀,隨因境勢任運緣者,卽全無欲。由斯理趣,欲非遍行。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좋아하게 된 것이란, 관찰하고자 하는 대상을 말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관찰하고자 하는 것에는 희망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관찰하고자 하지 않고, 원인ㆍ대상의 세력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반연하는 것에는 욕심소가 전혀 없는 것이니, 이러한 논리의 취지에 근거하면 욕심소는 변행심소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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