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法慧菩薩의 說法
(1) 讚歎許說 질문한사람을 찬탄하고 설할 것을 허락함
爾時에 法慧菩薩이 告精進慧菩薩言하사대
善哉라 佛子여 汝今爲欲多所饒益과 多所安樂과 多所惠利로 哀愍世間諸天及人하야
問於如是菩薩所修淸淨之行하나니
佛子야 汝住實法하야 發大精進하고 增長不退하야 已得解脫하며 能作是問하야 同於如來하니
諦聽諦聽하야 善思念之하라 我今承佛威神之力하야 爲汝於中에 說其少分호리라
爾時(이시)에 法慧菩薩(법혜보살)이 그때 법혜보살이
告精進慧菩薩言(이시법혜보살고정진혜보살언)하사대, 정진혜보살에게 말했다.
善哉라 佛子(선재불자)여, 장하십니다. 불자여,
汝今爲欲多所饒益(여금위욕다소요익)과, 그대가 지금 多所饒益= 많이 요익하려고
多所安樂(다소안락)과, 그들의 유익과 안락과
多所惠利(다소혜리)로, 惠利= 은혜와 이익=혜택을 많게 하고자
哀愍世間諸天及人(애민세간제천급인)하야, 세간과 천인들을 불쌍히 여겨
問於如是菩薩所修淸淨之行(문어여시보살소수청정지행)하나니, 이렇듯 보살이 닦는 청정한 행을 물은 것이리다.
佛子야 汝住實法(여주실법)하야, 불자여, 그대는 실다운 법에 머물러
發大精進(발대정진)하고, 크게 정진하며 增長不退(증장불퇴)하야, 더욱 퇴전치 않고
已得解脫(이득해탈)하며, 이미 해탈을 얻어 能作是問(능작시문)하야, 능히 이러한 물음으로
同於如來(동어여래)하니, 여래와 같고자 하니 諦聽諦聽(제청제청)하야, 자세히 듣고
善思念之(선사념지)하라. 잘 생각해 보십시오.
我今承佛威神之力(아금승불위신지력)하야, 내 이제 부처님 위신력을 받들어
爲汝於中(위여어중)에, 그대를 위하여 說其少分(설기소분)호리라. 그 중 少分=약간을 말하리다.
[연기나 인연이나, 因緣生起인연생기. 또 因果인과. 因故인고 전부 같은 맥락으로,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고 풀어내는 데는 연기법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2) 離癡莫放逸(이치막방일). 어리석음을 떠나고 방일하지 말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已發一切智心인댄 應離癡暗하고 精勤守護하야 無令放逸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게으르고, 게으른 사람이 어리석은 겁니다. 몸이 아파서 더 힘찬 정진을 위해서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낮잠을 자도 그것은 정진입니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방일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已發一切智心(이발일체지심)인댄, 일체지혜의 마음을 이미 냈다면
應離癡暗(응리치암)하고, 응당 어리석음의 어둠에서 벗어나
精勤守護(정근수호)하야, 정근을 지켜 나가는 데에
無令放逸(무령방일)이니라. 방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十種法과 不放逸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十種法을 名不放逸이니 何者가 爲十고
一者는 護持衆戒요 二者는 遠離愚癡하야 淨菩提心이요 三者는 心樂質直하야 離諸諂誑이요
四者는 勤修善根하야 無有退轉이요 五者는 恒善思惟自所發心이요 六者는 不樂親近在家出家一切凡夫요
七者는 修諸善業호대 而不願求出世間果報요 八者는 永離二乘하고 行菩薩道요
九者는 樂修衆善하야 令不斷絶이요 十者는 恒善觀察自相續力이라
佛子야 若諸菩薩이 行此十法하면 是則名爲住不放逸이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住十種法(주십종법)을, 열 가지의 법에 머물러야
名不放逸(명부방일)이니, 방일하지 않다 할 것이니, 何者가 爲十(하자위십)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一者는 護持衆戒(일자호지중계)요. 첫째는 여러가지 계를 수호하여 지키는 것이요
二者는 遠離愚癡(원리우치)하야, 둘째는 어리석음을 멀리 떠나 보내고
淨菩提心(정보리심)이요. 보리심=불심을 청청히 가꾸는 것이요
三者는 心樂質直(심락질직)하야, 셋째는 마음으로 質直= 참되고 곧은 것을 樂=좋아하여
離諸諂誑(이제첨광)이요. 아첨하거나 속이지 않는 것이요
四者는 勤修善根(근수선근)하야, 넷째는 선근을 힘써 닦아 無有退轉(무유퇴전)이요. 퇴전치 않는 것이요
五者는 恒善思惟自所發心(항선사유자소발심)이요. 다섯째는 항상 자기가 발심한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요
六者는 不樂親近在家出家一切凡夫(불락친근재가출가일체범부)요.
여섯째는 모든 범부를 재가자거나 출가자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요
一切凡夫=어리석은 사람, 정법을 몰라서 정법과 멀게 살아가는 사람들, 재가자든 출가자든 물질에 미혹 되어있는 사람들
七者는 修諸善業(수제선업)호대, 일곱째는 모든 선업을 닦되
而不願求出世間果報(이불원구출세간과보)요. 출세간의 과보를 바라고 구하지 말 것이요
[자기 닦은 공, 자기 지은 복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지은 죄는 아무리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듯이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지은 복을 남에게 아무리 주려고 해도 남에게 안 갑니다.
어떤 일에도 자기가 지은 데로 가는 것이니 무리할 것 없고, 좋은 일 많이 하되 그 과보ㆍ공덕 바랄 것 없습니다.]
八者는 永離二乘(영리이승)하고, 여덟째는 영원히 이승=성문, 연각을 떠나
行菩薩道(행보리도)요. 보리도를 행하는 것이요
[주변에 우리가 돌봐야할 이웃 중에서 딱 세 가지를 정해야 된다면,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끼니를 못 때우는 아주 빈곤한 사람과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사람, 문맹ㆍ빈곤ㆍ병고는 크게 보살도라고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도와야 할 일입니다.]
九者는 樂修衆善(낙수중선)하야, 아홉째는 기꺼이 여러 선업을 닦아서
令不斷絶(영불단절)이요.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요
十者는 恒善觀察自相續力(항선관찰자상속력)이라. 열째는 늘 자기의 계속 이어지는 능력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
[相續力= 상속하는 힘을 잘 관찰해야 됩니다. ‘깜빡하고 까먹진 않는가?ㆍ빼먹진 않았는가?’를 늘 관찰하는 것입니다.]
佛子야 若諸菩薩(약제보살)이, 불자여, 보살들이 行此十法(행차십법)하면, 이 열 가지 법을 행한다면
是則名爲住不放逸(시즉명위주불방일)이니라. 이것을 곧 방일하지 않는 데 머물렀다 할 것입니다.
[不放逸에 머무는 것이라= 게으르지 않는 사람이다.]
[[열 가지 불방일법에 머묾을 밝힌 分]]
(4) 不放逸과 十種淸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不放逸에 得十種淸淨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一者는 如說而行이요 二者는 念智成就요 三者는 住於深定하야 不沈不擧요
四者는 樂求佛法하야 無有懈息이요 五者는 隨所聞法如理觀察하야 具足出生巧妙智慧요
六者는 入深禪定하야 得佛神通이요 七者는 其心平等하야 無有高下요
八者는 於諸衆生上中下類에 心無障礙 猶如大地하야 等作利益이요
九者는 若見衆生이 乃至一發菩提之心이라도 尊重承事를 猶如和尙이요
十者는 於授戒和尙과 及阿闍梨와 一切菩薩諸善知識法師之所에 常生尊重하야 承事供養이라
佛子야 是名菩薩의 住不放逸十種淸淨이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住不放逸(주부방일)에, 방일하지 않는 데 머물러
得十種淸淨(득십종청정)하나니, 열 가지의 청정함을 얻는데, 何者(하자)가 爲十(위십)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一者는 如說而行(여설이행)이요. 첫째는 말한 대로 행하는 것이요
二者는 念智成就(염지성취)요. 둘째는 念智=마음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요
三者는 住於深定(주어심정)하야, 셋째는 깊은 선정에 머물러 不沈不擧(불침불거)요. 막히거나 들추어 내지 않는 것이요
[沈= 昏沈(혼침), 昏= 어두울 혼. 擧=도거는 망상이 들고 일어나는 것.]
[[깊은 선정에 머물러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다”, 不沈=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성문의 滅盡定을 여의는 것이며 또한 위에 있는 2界의 식려선(息慮禪:사념을 쉬는 선)을 여의는 것이다.
즉 색계의 初禪은 아래에 있는 욕계의 근심[愁憂]을 소멸시켜, 경쾌하고 편안한 적정 [經安寂靜]을 얻으니, 욕계의 애착은 없지만 寂靜의 애착이 있기 때문에 물의 재앙이 문득 이르는 것이다.
색계의 제2禪은 능히 욕계의 근심과 고통[憂苦]을 소멸시켜 낳지 않기 때문에 경쾌하고 편안한 적정을 얻지만, 覺이 있고 觀이 있어서 능히 청정한 경계에 반연하는 것이 오히려 있기에 불의 재앙이 문득 이른다.
제3禪은 각도 관도 없이 禪悅의 즐거움만 있어서 마음에 기쁨의 동요가 있기 때문에 바람의 재앙이 문득 이른다.
제4禪은 몸과 마음이 적멸하니, 들숨과 날숨을 여의어서 기쁨의 동요도 없기 때문에 3災가 이르지 않고, 오직 묘한 빛깔의 몸만이 白銀처럼 청정한 빛이 순결하고 옷도 금빛 색깔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4禪이 다 마음을 청정케 하는 것으로 勢分을 삼으며, 나아가 空處와 識處와 無所有處와 非想非非想定이 모두 승진을 타파해 없애고 念을 낳게 하지 않음으로써 寂定에 머무는 것이다.
이처럼 색계의 청정한 빛깔을 타파해서 무색계의 公識을 이루게 하고, 또 空을 보는 識도 空하다고 타파하는 것이 識處定이며, 또 空을 識하는 見도 또한 없다고 타파하는 것이 無所有定이며, 또 무소유의 마음을 타파해서 無想의 想마저 없는 것이 비상비비상정이다. 이처럼 上界에서 수행하는 선은 모두 뜻을 짓고 情을 간직해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지, 성품에 맡긴 무위가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음으로써 眞에 칭합한 理智의 공적 작용이 자재로워서 작위 없는 定은 아닌 것이다. 욕계의 선정이 5欲에 반연함은 명칭이 들뜸[掉]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은 가라앉음[沈]이며, 또 성문과 연각의 선정은 가라앉음이며, 공관보살이 6바라밀을 행해서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그 명칭이 들뜸이니, 이처럼 삼승의 선정에 다 가라앉음과 들뜸이 있는 것은 더러움과 청정함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도를 보는 것이 참되지 못해 좋고 싫어함이 있기 때문이다.]]
四者는 樂求佛法(낙구불법)하야, 넷째는 기꺼이 불법 구하기를, 즐겨 불법을 구해서
無有懈息(무유해식)이요.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요, 게으르거나 쉼이 없음이요.
五者는 隨所聞法如理觀察(수소문법여리관찰)하야, 다섯째는 들은 법에 따라 如理觀察=이치대로 관찰하여
具足出生巧妙智慧(구족출생교묘지혜)요. 교묘한 지혜를 구족히 내는 것이요
[교묘한 지혜= 아주 익숙하고, 능숙힌 지혜]
六者는 入深禪定(입심선정)하야, 여섯째는 깊은 선정에 들어서
得佛神通(득불신통)이요. 부처님의 신통을 얻는 것이요
[[깊은 선정에 들어가 부처님의 신통을 얻는다는 것은 마음이 이(理)에 칭합해 근본적으로 출입이 없음으로써 체(體)에 고요함이나 시끄러움이 없고 체에 조작의 성품이 없다. 그리하여 이(理)에 맡겨 스스로 진(眞)이라서 낳지도 않고 조복시키지도 않으며, 이가 참되므로 지혜가 응하면서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 삼세와 시방을 일시에 널리 응하고 색신을 대현한다.
이처럼 지혜에 따라 응하여 군품(群品)을 교화하면서도 오고 감이 없으며 아울러 변화하지도 않는 것을 부처님의 신통이라 칭하는 것이니, 지혜가 의지함도 없고 형색(形色)도 없어서 체(體)에 오고 가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 삼세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능히 삼세의 법에 널리 응하는 것을 신통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혜가 삼세에 들면서도 오고 감이 엇다”고 한 것이니, 삼세가 중생의 정(情)으로 망녕되이 세운 것이지 실유(實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지혜의 체(體)가 형상이나 빛깔이 없어서 조작하지 않고서도 군품(群品)에 응하는 것을 신(神)이라 칭하는 것이며, 시방에 원만하여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근기마다 알아채지 못함이 없는 것을 통(通)이라 칭하는 것이다.]]
七者는 其心平等(기심평등)하야, 일곱째는 그 마음이 평등하여
無有高下(무유고하)요.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요 [無有高下= 차별하지 않는 것.]
八者는 於諸衆生上中下類(어제중생상중하류)에, 여덟째는 중생들의 상·중·하류에 관한
心無障碍(심무장애)이, 마음에 장애가 없어서
猶如大地(유여대지)하야, 마치 대지처럼 等作利益(등작이익)이요. 평등히 이익을 주는 것이요
[大地는 콩을 심으면 콩 나고, 팥을 심으면 팥 나고, 나무 심으면 나무 나고, 거기에 물 주고 거름 잘 주면 무럭무럭 자라는, 전부 이치대로 돌아가는, 아무 차별없이 평등합니다]
九者는 若見衆生(약견중생)이, 아홉째는 중생이
乃至一發菩提之心(내지일발보리지심)이라도,일단 보리심을 낸 것을 보면, 만약 중생이 한 번 보리심을 발했다 하더라도,
尊重承事를 猶如和尙(존중승사유여화상)이요. 존중하여 받들기를 和尙=큰 스님 같이 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한 번 보리심= 착한 마음을 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야~, 저사람 한 번 착한 마음을 내는 것 보니까 마음속에 분명히 착함의 뿌리=善根의 뿌리가 있구나!’해서 그 사람에게 끊임없이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큰 스님처럼 존중하는.]
十者는 於授戒和尙(어수계화상)과, 열째는 계를 준 큰 스님과 及阿闍梨(급아사리)와, 그리고 아사리와
一切菩薩諸善知識法師之所(일체보살제선지식법사지소)에, 일체의 보살, 선지식, 법사의 처소에
常生尊重(상생존중)하야, 늘 존중하는 마음으로
承事供養(승사공양)이라.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는 것이니
佛子야 是名, 불자야 이것의 이름이
菩薩의 住不放逸十種淸淨이니라. 보살의 불 방일에 머무는 열 가지의 청정함= 훌륭함이라.
[[불방일에 머무르니 열 가지 청정법 얻음을 밝힌 분]]
(5) 令佛歡喜 부처님으로 하여금 환희케 한다.
① 不放逸과 佛歡喜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不放逸하야 發大精進하며 起於正念하며 生勝欲樂하며 所行不息하며
於一切法에 心無依處하며 於甚深法에 能勤修習하며 入無諍門하며 增廣大心하며
佛法無邊을 能順了知일새 令諸如來로 皆悉歡喜니라
[不放逸(불방일)과 佛歡喜(불환희). 방일하지 않으면 부처님이 먼저 기뻐합니다. 공자도 낮잠을 자느니 차라리 바둑이나 장기라도 두라 했습니다. 바둑ㆍ장기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방일을 경계한 말입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住不放逸(주부방일)하야, 방일하지 않는 데 머물러
發大精進(발대정진)하며, 크게 정진을 발하고 起於正念(기어정념)하며, 정념을 일으키고
生勝欲樂(생승욕락)하며, 수승한 욕망과 즐거움을 내서
[모든 사람에게 욕락=욕심은 다 있습니다. 소나무도 끊임없이 크고자 하는 그것이 욕락입니다. 그런데 勝欲樂=수승한 욕심을 내야 된다. 남에게 이익이 되고, 자기에게도 도움이 되는 그런 욕심을 낼 줄 알아야 된다.]
所行不息(소행불식)하며, 쉬지 않고 행하며, 행하는 바를 쉬지 아니하며,
於一切法에 心無依處(어일체법심무의처)하며, 일체법에 마음이 의지한 데 없고
於甚深法에 能勤修習(어심심법능근수습)하며, 심오한 법을 능히 힘써 닦아 익혀서
入無諍門(입무쟁문)하며, 다툼없는 문에 들어가 增廣大心(증광대심)하며, 마음을 더욱 광대하게 하며,
佛法無邊(불법무변)을, 가이없는 불법을 能順了知(능순요지)일새. 능히 수순하여 분명히 알아서
令諸如來로 皆悉歡喜(영제여래개실환희)니라. 모든 여래를 기뻐하시게 합니다.
[[열 가지 법을 행하니 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함을 밝힌 분]]
② 諸佛歡喜 十種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復有十法하야 能令一切諸佛歡喜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一者는 精進不退요 二者는 不惜身命이요 三者는 於諸利養에 無所希求요 四者는 知一切法이 皆如虛空이요
五者는 善能觀察하야 普入法界요 六者는 知諸法印하야 心無倚着이요 七者는 常發大願이요
八者는 成就淸淨忍智光明이요 九者는 觀自善法에 心無增減이요 十者는 依無作門하야 修諸淨行이라
佛子야 是爲菩薩이 住十種法하야 能令一切如來歡喜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復有十法(부유십법)하야, 또 열 가지 법이 있어서
能令一切諸佛歡喜(능령일체제불환희)하나니, 모든 부처님들을 기뻐하시게 할 수 있는데,
何等(하등)이 爲十(위십)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一者는 精進不退(정진불퇴)요. 첫째는 정진하여 퇴전치 않는 것이요
二者는 不惜身命(불석신명)이요. 둘째는 신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요
[자기 身命보호한다고 세상은 온통 야단법석인데, 불교는 身命, 몸뚱이 그 까짓 것 아끼지 말라고 했습니다.]
三者는 於諸利養에 無所希求(어제이양무소희구)요. 셋째는 利養= 이익 늘리기를 희구하지 않는 것이요
四者는 知一切法이 皆如虛空(개여허공이)이요. 넷째는 일체법이 모두 허공 같음을 아는 것이요
[근본은 적멸= 常自寂滅相입니다. 따지고 보면 허공과 같을 뿐입니다]
五者는 善能觀察(선능관찰)하야, 다섯째는 법계를 잘 관찰해서 普入法界(보입법계)요. 두루 들어가는 것이요
六者는 知諸法印(지제법인)하야, 여섯째는 모든 법인을 알아서
心無倚着(심무의착)이요. 마음에 倚着= 의지하고 집착함이 없는 것이요
七者는 常發大願(상발대원)이요, 일곱째는 항상 대원을 세우는 것이요
八者는 成就淸淨忍智光明(성취청정인지광명)이요. 여덟째는 청정하고 드러나지 않는 지혜의 광명을 성취하는 것이요
九者는 觀自善法(관자선법)에, 아홉째는 자기의 선법을
心無增減(심무증감)이요. 마음에 더하고 덜함 없이 觀=관찰하는 것이요[선법을 아무리 관찰해도 아무 표시가 없다]
[忍智光明= 드러나지 않는 지혜. 참을 忍→ 드러나지 않는 지혜. 안에 지혜가 있다고 얼굴에 빛이 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법을 관찰함에 마음에 증감이 없다.]
十者는 依無作門(의무작문)하야, 열째는 지음이 없는 문에 의지하여
修諸淨行(수제정행)이라. 모든 청정행을 닦는 것이라
佛子야 불자여, 是爲菩薩(시위보살)이 住十種法(주심종법)하야, 이것이 보살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能令一切如來歡喜(능령일체여래환희)니라. 모든 여래를 기뻐하시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③ 諸佛歡喜 十種法 二
佛子야 復有十法하야 能令一切諸佛歡喜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安住不放逸과 安住無生忍과 安住大慈와 安住大悲와 安住滿足諸波羅蜜과 安住諸行과 安住大願과
安住巧方便과 安住勇猛力과 安住智慧하야 觀一切法이 皆無所住가 猶如虛空이라
佛子야 若諸菩薩이 住此十法하면 能令一切諸佛歡喜니라
佛子야 復有十法(부유십법)하야, 불자여, 또 열 가지 법이 있어서
能令一切諸佛歡喜(능령일체제불환희)하나니, 부처님들을 기뻐하시게 할 수 있는데,
何者(하자)가 爲十(위십)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所謂安住不放逸(소위안주불방일)과, 소위 방일하지 않는 데 안주하고,
安住無生忍과, 무생인=생멸이 없는 진리에 안주하며,
安住大慈(안주대자)와, 대자에 안주하며, 安住大悲(안주대비)와, 대비에 안주하며,
安住滿足諸波羅蜜(안주만족제바라밀)과, 만족한 여러 바라밀에 안주하며,
安住諸行(안주제행)과, 여러 행[諸行]에 안주하며, 安住大願(안주대원)과, 대원= 큰 서원에 안주하며,
安住巧方便(안주교방편)과, 선교방편에 안주하며, 安住勇猛力(안주용맹력)과, 용맹한 힘에 안주하며,
安住智慧(안주지혜)하야, 지혜에 안주하여
觀一切法(관일체법)이 皆無所住(개무소주)가, 일체법이 허공처럼 머물 바가 없음을
猶如虛空(유여허공)이라. 관찰하는 것이라
佛子야 若諸菩薩(약제보살)이, 불자여, 만약 보살들이 住此十法(주차십법)하면, 이 열 가지 법에 머문다면
能令一切諸佛歡喜(능령일체제불환회)니라. 모든 부처님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無生忍(무생인) =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어난 바가 없다는 깨달음의 확신을 의미. 無生忍·無生忍法·修習無生忍이라고도 함. 忍은 忍可·認知를 뜻하여 여실한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을 뜻.
능가경에서는 무생법인을 ‘태어남이 없는 법의 인증’을 뜻하고, 무량수경에서는 ‘생함을 떠나다’를 뜻한다.
무생법인은 또한 『법화경』에서 설하는 三法印인 法印·信印·順印중의 법인으로서,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 외에도 불전에 따라서 무생의 뜻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성불하기 전까지 惡心을 내지 않은 것이나 삿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일체의 현상에서 생겨나는 것이 없음을 관찰함으로써 소멸할 것도 없다는 불생불멸의 空性을 깨닫는 것이다.
화엄경 제44권에서 보살은 작은 법도 생겨남을 보지 않고,멸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불생불멸의 공성을 깨달아서 오고가는 일체 대상에 대한 헛된 마음작용이 끊어져 고요한 경지에 이른 자가 보살이다. 『유가사지론』 제74권에서는 遍計所執性에 의해서 本性無生印, 依他起性에 의해 自然無生印, 圓成實性에 의해 惑苦無生印 이라는 3가지 무생인을 얻는 자를 不退轉菩薩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일체의 현상에서 생겨나는 것이 없음을 관찰함으로써 소멸할 것도 없다는 불생불멸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야심경의 공은 무생법인을 압축한 내용으로 이 모든 공한 모습은 불생불멸이어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또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것이 바로 무생법인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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