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八空義 第四十八 卷三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8. 초품 중 십팔공(十八空)의 뜻을 풀이함 11
“性空”者,諸法性常空,假業相續故,似若不空。譬如水性自冷,假火故熱,止火停久,水則還冷。諸法性亦如是,未生時空無所有,如水性常冷;諸法衆緣和合故有,如水得火成熱;衆緣若少若無,則無有法,如火滅湯冷。
성공(性空, prakrṛtiśūnyatā)이라 함이란, 제법의 성품은 항상 공(空)한 것이지만 거짓 업의 가업(假業)이 상속하는 까닭에 마치 공(空)하지 않은 듯하나니,
비유하자면, 물의 성품은 스스로 찬, 냉(冷)함 이지만 불을 임시로(假) 빌린 때문에 더워지는 것이며, 불이 그치고 시간이 지나면 물이 다시 차가워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법의 성품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이 마치 물의 성품이 항상 찬 것과 같으나, 제법은 여러 연(緣)이 화합하여 있게 된 때문이니, 이는 것이 마치 물이 불을 만나 더워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러 연(緣)이 적거나 없다면 곧 제법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 마치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이 식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經說:“眼空,無我、無我所。何以故?性自爾!耳鼻舌身意色乃至法等,亦復如是"
마치 경(Samṛddhisūtra의 교설)에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공하여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품 자체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물질(色) 내지는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고 한 것과 같다.
問曰:此經說“我、我所空”,是爲衆生空,不說法空,云何證性空?
묻나니, 이 경에서는 나와 내 것이 공함을 말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중생공(衆生空)이 되는 것이며, 법공(法空)은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성이 공하다는 성공(性空)을 증명하시겠습니까?
答曰:此中但說性空,不說衆生空及法空。性空有二種:一者、於十二入中無我、無我所,二者、十二入相自空。無我、無我所,是聲聞論中說。摩訶衍法說:“十二入我、我所無故空,十二入性無故空"
답하나니, 이 가운데에서는 성품이 공하다는 성공(性空)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중생공과 법공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성공(性空)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12입(入) 가운데에서 '나(我)'도 없고 '내것(我所)'도 없는 것이며,
둘째는 12입의 상(相) 그 자체가 공한 것이라 '나(我)'도 없고 '내것(我所)'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문의 논인 성문논(聲聞論)중에 있는 설명으로,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법(가르침)에서는 “12입은 '나(我)'와 '내것(我所)'이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며, 12입의 성품이 없기때문에 공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復次,若無我、無我所,自然得法空。以人多著我及我所故,佛但說“無我、無我所”,如是應當知一切法空。若我、我所法尚不著,何況餘法!以是故,衆生空、法空終歸一義,是名性空。
또한 만약 '나(我)'도 없고 '내것(我所)'도 없다면 저절로 법공(法空)을 얻게 되는 것이니, 사람들은 대개 '나(我)'와 '내것(我所)'에 집착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만 “무아(無我)이고 네 것도 없는 무아소(無我所)이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이 응당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만약 '나(我)'와 '내것(我所)'라는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외의 법에 집착하랴!
이 때문에 중생공과 법공은 결국에는 한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을 법공(法空)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性名自有,不待因緣;若待因緣,則是作法,不名爲性。諸法中皆無性。何以故?一切有爲法皆從因緣生,從因緣生則是作法;若不從因緣和合,則是無法。如是一切諸法性,不可得故,名爲性空。
다시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있는 자체의 것으로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니,
만약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라면 곧 지어진 작법(作法)으로서의 성(性)이라 부르지 않는 것이니,
제법 가운데에는 모두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니,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인연을 좇아 생겨나는 것으로, 인연을 좇아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것은 곧 지어진 작법(作法)이며,
만약 인연화합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법이 존재하지 않는 무법(無法)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일컬어 성공(性空)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畢竟空無所有,則是性空,今何以重說?
묻나니, 필경공이서 존재하는 바가 없음을 일컬어 성공(性空)이라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거듭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畢竟空”者,名爲無有遺餘。“性空”者,名爲本來常爾;
답하나니, 필경공이란 ‘남음이 없는 무유유여(無有遺餘)라 이름하는 것이며,
성공(性空)이란 ‘본래부터 항상 그러한 것’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如水性冷,假火故熱,止火則還冷。畢竟空如虛空,常不生不滅、不垢不淨,云何言同?
마치 물의 성품은 찬 것인데 불을 빌려서 더워지기는 하지만 불이 없으면 다시 식어서 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필경공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언제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인데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는가?
復次,諸法畢竟空。何以故?性不可得故。諸法性空。何以故?畢竟空故。
또한 제법은 필경공이니, 왜냐하면 성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제법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필경에는 공한 필경공이기 때문이다.
復次,性空多是菩薩所行,畢竟空多是諸佛所行。何以故?性空中,但有因緣和合,無有實性;畢竟空,三世淸淨。有如是等差別。
또한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의 대부분은 보살이 행할 바이며,
필경공의 대부분은 여러 부처님께서 행할 바이다.
왜냐하면 성공(性空)에는 다만 인연의 화합이 있을 뿐, 진실한 성품이 없으나,
필경공은 삼세가 청정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復次,一切諸法性有二種:一者、摠性,二者、別性。摠性者,無常、苦、空、無我,無生無滅、無來無去、無入無出等。別性者,如火,熱性;水,濕性;心爲識性。如人喜作諸惡,故名爲惡性;好集善事,故名爲善性。
또한 일체법의 성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의 성품인 총성(總性)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성품의 별성(別性)이다.
총성(總性)이라 함이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래(無來)ㆍ무거(無去)ㆍ무입(無入)ㆍ무출(無出) 등이며,
별성(別性)이라 함이란, 불은 더운 성품이고, 물은 습한 성품이며, 마음은 분별하는 식성(識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마치 사람이 여러 악한 일을 즐겨 짓기 때문에 나쁜 성품의 악성(惡性)이라 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쌓아 모으는 까닭에 착한 성품의 선성(善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十力經』中說:“佛知世閒種種性。”如是諸性皆空,是名性空。何以故?若無常性是實,應失業果報。所以者何?生滅過去不住故,六情亦不受塵,亦不積習因緣;若無積習,則無誦經、坐禪等。以是故知無常性不可得。無常尚不可得,何況常相!
마치 '십력경(十力經, Daśabalasūtra)'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갖가지의 성품을 아시며, 이와 같은 모든 성품 모두는 공한 것이다”고 한 것과 같으니, 이러함을 성공(性空)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무상한 성품의 무상성(無常性)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업의 과보는 없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 이유는 생멸(生滅)하는 것으로 과거는 머무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6정(情, 육근)도 역시 대상 진(塵, 육진)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인연을 쌓거나 익히지도 않으니,
만약 인연을 쌓거나 익히지도 않는다면 경전을 외우고 좌선(坐禪)하는 등도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성(無常性)은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무상한 것조차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항상한 상상(常相)이겠는가.
復次,苦性亦不可得,若實有是苦,則不應生染著心。若人厭畏苦痛,於諸樂中亦應厭畏;佛亦不應說三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亦不應苦中生瞋、樂中生愛、不苦不樂中生癡。若一相者,樂中應生瞋,苦中應生愛。但是事不然!
如是等,苦性尚不可得,何況樂性虛妄而可得!
또한 괴로운 성품의 고성(苦性)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실로 이 괴로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있는 것이라면 물들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나니, 만약 사람이 고통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면, 모든 쾌락에 대해서도 당연히 싫어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으로,
부처님 역시 괴로운 느낌의 고수(苦受)와 즐거운 느낌의 낙수(樂受)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지 않으셨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괴로움으로 화를 내거나, 즐거움을 좋아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에서 어리석음을 내지 않아야 하나니, 만약 일상(一相)이라면, 즐거움 가운데서도 화를 내어야 하고, 괴로움 가운데서도 좋아해야 할 것이나, 이러함은 그렇지 않은 것이며,
이와 같은 등의 이 괴로움의 성품인 고성(苦性)조차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허망한 낙성(樂性)을 얻을 수 있겠는가!
復次,空相亦不可得。所以者何?若有空相,則無罪福;無罪福故,亦無今世後世。
또한 공상(空相) 또한 얻을 수 없나니, 왜냐하면, 만약 공상(空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죄와 복이 없게 되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금세와 후세 역시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復次,諸法相待有。所以者何?若有空,應當有實;若有實,應當有空。空性尚無,何況有實!
또한 제법은 서로 기다리는 상대(相待)로 존재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공(空)함이 있으면 응당 진실이 있는 유실(有實)이어야 하고, 만약 유실(有實)이라면 당연히 공함이 있는 유공(有空)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한 성품의 공성(空性) 조차 오히려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유실(有實)이 있겠는가!
復次,若無我者,則無縛無解,亦無從今世至後世受罪福,亦無業因緣果報;如是等因緣,知無我性尚不可得,何況我性!
또한 만약 무아(無我)라면, 곧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이니, 또한 금세에서 후세에 이르기까지 죄와 복을 받음도 없을 것이며, 또한 업의 인연과 과보 역시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무아(無我)의 성품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나의 성품인 아성(我性)이랴!
復次,無生無滅性亦不實。何以故?若實,則墮常見;若一切法常,則無罪無福;若有者常有,無者常無;若無者不生,有者不失。如不生不滅性不可得,何況生滅性!無來無去、無入無出等諸摠性亦如是。
또한 낢도 없고 멸함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성품 역시 진실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만일 진실이라면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법이 항상한 것이라면 죄도 없고 복도 없는 것이 되고,
만약 존재한다면 항상 있음이 되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항상 없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낢이 없는 불생(不生)이며,
존재하는 것이라면 잃지 않는 불실(不失)이니,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성품은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생멸의 성품(生滅)이겠는가!
무래(無來)ㆍ무거(無去)ㆍ무입(無入)ㆍ무출(無出) 등의 모든 전체의 성품인 총성(總性)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復次,諸法別性,是亦不然!何以故?如火能燒,造色能炤,二法和合,故名爲火。若離是二法有火者,應別有火用,而無別用。以是故知火是假名,亦無有實。若實無火法,云何言熱是火性?
또한 제법의 개별적인 성품의 별성(別性)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니,
왜냐하면 불(火)이라 하는 것은 능히 타오를 수 있는 조색(造色)과 능히 비추어 밝힐 수 있는 능소(能炤)의 두 법이 화합된 까닭에 불(火)이라 이름하는 것이나,
만약 이 두 가지의 법을 여의고도 불(火)이 있다면, 다른 불(火)의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작용이 없으므로 불(火)이란 곧 임시로 이름한 가명(假名)이며, 실체 또한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실로 불이라는 화법(火法)이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더운 열(熱)이 바로 불의 성품인 화성(火性) 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復次,熱性從衆緣生,內有身根,外有色觸,和合生身識,覺知有熱;若未和合時,則無熱性。以是故 知無定熱爲火性。
또한 더운 열(熱)의 성품은 온갖 연(緣)을 따라 생겨나는 것이니, 안으로는 몸의 감관인 신근(身根)이 있고, 밖으로는 색(色, 물질)의 접촉이 화합하여 신식(身識)이 생겨나 열(熱)이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니,
만약 이러한 화합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곧 열(熱)의 성품은 없는 것이므로 열(熱)이 정해진 화성(火性)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復次,若火實有熱性,云何有人入火不燒,及人身中火而不燒身?空中火,水不能滅?以火無有定熱性故。神通力故,火不能燒身;業因緣,五藏不熱;神龍力故,水不能滅。
또한 만약 불(火)에 진실로 더운 성품의 열성(熱性)이 있다면 어찌하여 어떤 사람이 불(따뜻함)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인가?
나아가 사람의 몸 속에 불(火, 온기)이 있음에도 몸을 태우지도 않고, 공중의 불(火, 태양의 빛과 열)은 물로도 끄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불에는 결정된 열성(熱性)이 없기 때문이고, 신통력 때문에 불이 몸을 태우지 못하는 것이다.
업의 인연으로 된 몸의 오장(五藏)은 크게 열을 내지도 않으며,
신(神)과 용(龍)의 힘 때문에 물로써 없애지도 못하는 것이다.
復次,若熱性與火異,火則非熱;若熱與火一,云何言熱是火性?餘性亦如是。是摠性、別性無故,名爲性空。
또한 만약 더운 열성(熱性)과 불이 다른 것이라면 불(火)은 곧 더운 것이 아니닌 것이 되고,
만약 더운 열성(熱性)과 불이 하나라면 어떻게 더운 열(熱)이 바로 불의 성품인 화성(火性)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밖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으니, 이렇게 전체의 성품인 총성(總性)과 개별적인 성품의 별성(別性)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性空)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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