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11
問曰; 若是二事皆實 佛何以故 多讚嘆空而毀訾有?
묻나니, 만약 유아(有我)와 무아(無我) 두 가지 모두가 진실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공(空)을 많이 찬탄하시고 '존재의 유(有)'에 대해서는 꾸짖으신 것입니까?
答曰; 空無所有 是十方諸佛 一切賢聖法藏 如『般若波羅蜜ㆍ囑累品』中說, “般若波羅蜜 是三世十方諸佛法藏 般若波羅蜜 卽是無所有空" 佛或時說有法 爲教化衆生故 久後皆當入無所有法藏中。
法藏법장= 1. 불교의 교법 2. 불성이나 여래장에 내재한 공덕
답하나니, 공(空)은 무소유(無所有)이니, 이것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온갖 성현들의 법장(法藏)으로, 마치 『반야바라밀경』과 「촉루품(囑累品)」에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경은 바로 삼세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법장이며 반야바라밀이란 곧 무소유(無所有)의 공(空)이다”라고 하셨으며,
부처님께서 혹은 법이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으나, 그것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일 뿐,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는 모두가 무소유(無所有)의 법장(法藏)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問曰; 若爾者 云何『般若波羅蜜』言 “若觀五衆空無所有 非是道?”
묻나니,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에서 “만약 5중(衆)이 공(空)하여 무소유(無所有)라고 관하는 것은 옳은 도(道)가 아니다”라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 是『般若波羅蜜』中 說有 無皆無。如『長爪梵志經』中 說三種邪見, 一者 一切有, 二者 一切無, 三者 半有半無。
답하나니, 이 반야바라밀에서는 있다, 없다 하는 것도 모두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장조범지경(長爪梵志經)』에서의 설명과 같이 세 가지 삿된 소견이 있으니,
첫째는 온갖 것이 있다는 일체유(一切有)이고,
둘째는 온갖 것이 없다는 일체무(一切無)이며,
셋째는 반은 있고 반은 없다는 반유반무(半有半無)이다.
佛告長爪梵志; “是一切有見 爲欲染 爲瞋恚 愚癡所縛。一切無見 爲不染 不瞋 不癡故所不縛。半有半無 有者 同上有縛, 無者 同上無縛。
부처님께서 장조범지에게 말씀하시되 “이 온갖 것이 있다고 하는 일체유(一切有)의 소견은 음욕에 물들고 성냄과 어리석음에 속박을 당하게 하며,
온갖 것이 없다는 일체무(一切無)의 소견에서는 음욕에 물들지도 않고 성을 내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아서 속박을 당하지도 않게 되며,
반유반무(半有半無)에서는 있다는 것은 위의 있다는 속박에서와 동일하고 없다는 것은 위의 없다는 속박에서와 동일하다”고 하셨다.
於三種見中 聖弟子作是念, ‘若我受一切有見 則與二人共諍 所謂一切無者 半有半無者。
세 가지 소견 가운데서 성인의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 하나니, “만약 내가 온갖 것이 있다는 일체유견(一切有見)을 받아들인다면 곧 두 사람과 함께 말다툼을 하게 되리니, 이른바 온갖 것이 없다는 일체무(一切無)의 사람과 반유반무(半有半無)의 사람이리라.
若我受一切無見 亦與二人共諍 所謂一切有者 半有半無者諍。若我受半有半無者 亦與二人共諍 所謂一切無者 一切有者。
만약 내가 온갖 것이 없다는 소견인 일체무견(一切無見)을 받아들인다 하여도 역시 두 사람과 함께 다투어야 하리니, 이른바 일체유(一切有)의 사람과 반유반무(半有半無)의 사람이리라.
만약 내가 반유반무(半有半無)의 소견을 받아들인다면 역시 두 사람과 함께 다투어야 하리니, 이른바 일체유(一切有)의 사람과 일체무(一切無)의 사람이리라.
鬪諍故相謗 相謗故致惱, 見是諍謗惱故 捨是無見 餘見亦不受 不受故卽入道。
다투게 되면 서로가 비방하게 되고, 서로가 비방하기 때문에 괴로운 소견에 이르게 되리니, 이 다투고 비방하고 괴로워함 때문에 없다는 소견도 버리고, 그 밖의 소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요,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곧 도(道)에 들어가리라.“고 하는 것이다.
若不著一切諸法空 心不起諍 但除結使 是名爲實智。若取諸法空相起諍 不滅諸結使 依止是智慧 是爲非實智。
만약 일체제법이 공(空)하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에 다툼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번뇌에 얽매인 결(結) 번뇌의 부림을 당하는 사(使)가 제거될 것이니, 이러함을 진실한 지혜의 실지(實智)라 하는 것이다.
만약 제법의 공상(空相)을 취하여 다툼을 일으키고 번뇌를 소멸시키지 않는다면, 이 지혜에 의지하여 번뇌가 그치게 되었을지라도 이것은 실지(實智)가 아니다.
실상(實相)과 함께한다는 뜻은 반야바라밀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如佛所說 爲度衆生故 有所說 無不是實, 但衆生於中有著 不著故有實 不實。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말씀한 것이라 진실하지 않음이 없지만, 다만 중생들이 그에 집착하고 집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진실하고 진실하지 않음이 있게 되었을 뿐이다.
如是種種因緣故 佛身口意業 無有過失。是故說 佛身口意先知 然後隨智慧行。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부처님의 신업ㆍ구업ㆍ의업에는 과실이 없으며,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몸과 입과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먼저 아신 후에야 지혜에 따라 행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問曰; 初說 “身無失 口無失 念無失”, 今復說 “身口意業 隨智慧行”, 義有何差別?
묻나니, 처음에 “몸에도 과실이 없고 입에도 과실이 없고 기억에도 과실이 없다”고 하셨으나, 이제는 또 “신업ㆍ구업ㆍ의업은 지혜에 따라 행한다”고 하셨는데, 그 뜻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 先三種無失 不說因緣, 今說因緣 隨智慧行 故不失。若先不籌量 而起身口意業 則有失, 佛先以智慧 起身口意業 故無失。
답하나니, 먼저 세 가지의 과실이 없음의 삼무실(三無失)에서는 인연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지금은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지혜를 따라 행을 하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헤아리지 않고 신업ㆍ구업ㆍ의업을 일으킨다면 과실이 있게 되지만, 부처님께서는 먼저 지혜로 헤아려서 신업ㆍ구업ㆍ의업을 일으키시기 때문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復次 佛成就三種淨業 三種寂靜業 三不護業。有人疑言, “佛何因緣 成就如是業?” 以是故 佛言, “我一切身口意業 先以智慧 然後隨智慧行"
또한 부처님께서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의 정업(淨業)과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의 적정업(寂靜業)과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의 불호업(不護業)을 성취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의심하여 묻기를,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인연으로 이러한 업을 성취하신 것인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온갖 신업ㆍ구업ㆍ의업을 먼저 지혜로써 안 연후에 지혜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佛以智慧 知過去未來現在世 通達無㝵”者 此三種智慧 於三世通達無㝵故 三業隨智慧行。
부처님께서는 지혜로써 과거ㆍ미래ㆍ현재 세상을 아시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⑯ 없는지혜지과거세무애(智慧知過去世無礙), ⑰ 지혜지미래세무애(智慧知未來世無礙) 18 지현재세통달무애(知過去未來現在世通達無礙)이라 함은, 이 신구의(身口意)에 대한 세 가지의 지혜가 삼세에서 통달하여 막힘이 없기 때문에 정업(淨業)과 적정업(寂靜業)과 불호업(不護業)의 세 가지 업을 지혜에 따라 행하시는 것이다.
問曰 過去諸法已滅已盡 無所復有, 未來世諸法 今不來不生 未和合, 現在乃至一念中無住時 云何能知三世通達無㝵?
묻나니, 과거의 제법은 이미 사라지고 멸하여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미래세의 제법은 아직 오지도 않았고 생기지도 않았고 아직 화합하지도 못하였으며, 현재에는 한 생각도 머무르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삼세(三世)를 알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을 수 있습니까?
答曰; 佛說過去未來現在 通達無㝵 此言豈虛?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과거ㆍ미래ㆍ현재를 통달하여 막힘 없다”는 말씀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復次 若無過去未來 但有現在一念頃 佛亦不得成就無量功德。如十種智是十力 是時亦不得一心有十智。若爾者 佛亦不得具足十力。以是因緣故 知有過去未來。
또한 만약 과거와 미래가 없고 다만 현재의 일념(一念)만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도 역시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실 것이다. 열 가지 지혜의 십지(十智)란 바로 십력(十力)이니, 역시 일념(一心, 한마음)으로는 십지(十智)를 얻지 못하셨을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부처님께서는 역시 십력(十力)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셨을 것이라. 이러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십지와 십지를 갖추셨으므로) 과거와 미래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問曰; 若過去未來現在 皆有者 何等是無?佛說四諦 苦諦觀無常等相 無常名生滅 敗壞 不可得, 若過去法今實有 不名爲無常 敗壞 不可得。
묻나니, 만약 과거ㆍ미래ㆍ현재가 모두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것이 '없음'입니까? 부처님께서 사제(四諦)를 말씀하셨으며, 고제(苦締)에서는 무상상(無常相) 등을 관하는 것으로, 무상(無常)은 생멸(生滅)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이라 얻을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만약 과거의 법이 지금에도 실재하여 있는 것이라면, 무상하여 부서지고 무너져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復次 若過去未來現在皆有者 便墮常。何以故?是法在未來世中定有 轉來現在 從現在轉入過去, 如人從一房入一房 不名失人。
또한 만약 과거ㆍ미래ㆍ현재가 모두 있는 것이라면 곧 항상함의 상(常, 상견)에 떨어질 것이니, 왜냐하면 이 항상한 법은 미래 세상에도 틀림없이 있는 것이라, 차츰 굴러와서 현재로 오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차츰 굴러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이 이 방(房)으로부터 다른 방으로 들어가도 그 사람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答曰; 若不失 有何咎?
답하나니, 만약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인가!
問曰; 若無無常 無罪無福 無生無死 無縛無解。“罪”名殺等十不善道 若無無常 無殺等罪。如“分別邪見”中說, “刀在身七分中過 無所惱害" “福”名不殺等十善道。“無常”名分別生死, 若無無常 亦無生死 亦無縛亦無解。如是等無量過咎!
묻나니, 만약 무상함이 없음의 무무상(無無常)이라면 죄도 없고 복도 없고 낢도 없고 죽음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입니다.
'죄(罪)'라 하는 것이란 살생(殺生) 등의 10불선도(不善道)를 말하는 것인데 만약 무무상(無無常)이라면 살생 등의 죄도 없는 것이니, 마치 '분별사견경(分別邪見經)'에서 “칼이 7분(分)쯤 몸 안으로 들어가도 괴롭거나 해로움이 없다”고 설한 바와 같으며,
복이란 불살생(不殺生) 등의 10선도(善道)를 말하는 것이고, 무상(無常)이란 생사(生死)를 분별하는 것이나,
만약 무무상(無無常)이라면 역시 생사(生死)도 없고 탐진치(貪瞋癡)의 속박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해탈 또한 없을 것이니, 이러한 등과 같은 무량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答曰; 諸法三世各各有相, 過去法有過去相 未來法有未來相 現在法有現在相。若過去 未來有現在相者 應有是難, 而今過去未來現在 各自有相。
답하나니, 제법은 삼세에서 저마다의 상(相)이 있으니, 과거의 법에는 과거의 모양이 있고, 미래의 법에는 미래의 모양이 있으며 현재의 법에는 현재의 모양이 있다.
만약 과거와 미래에 현재의 상(相)이 있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나, 과거ㆍ미래ㆍ현재 저마다에 각각의 상(相)이 있으며,
復次 若實無過去未來 亦無出家律儀。所以者何?若現在惡心中住 過去復無戒 是爲非比丘。又賢聖人心在世俗中 是時應當是凡夫!無過去未來現在道故。
또한 만약 실로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역시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는 출가율의(出家律儀)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현재에서 나쁜 마음에 머무르고 있다면, 과거에 계율이 없었다는 것이 되므로 그는 비구라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성현의 마음이 세속에 있다면, 그는 마땅히 범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과거ㆍ미래ㆍ현재에서 도(道)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如是亦無五逆等諸罪。所以者何?是五逆罪業已過去 及死時入地獄 是五逆罪未來 無業故無報, 現在身不爲逆罪 若無過去 則無逆罪, 若無逆罪 何有餘罪?福亦如是。若無罪福 是爲邪見 與禽獸無異!
이와 같이하여, 오역죄 등의 모든 죄들도 역시 없게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오역의 죄업을 과거에 지었다면 죽을 때에 지옥에 들어가야 할 것이나, 이 오역죄에 대한 미래의 업(業)이 없기 때문에 되갚음의 보(報)도 없을 것이요, 현재의 몸으로도 오역죄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가 없으면 오역죄도 없는 것이니, 만약 그 오역죄가 없게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다른 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복 또한 그와 같으니, 만약 죄와 복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삿된 소견이니, 금수와 다름이 없으리라.
復次 我不說, “過去未來 如現在相有" 我說, “過去雖滅 可生憶想 能生心心數法, 如昨日火滅 今日可生憶想念 不可以憶想念故火便有。若見積薪 知當然火, 亦生心想念 明日火如過去火 不可以今心念火火便有, 未來世事亦如是"
또한 나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의 상(相)과 같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나는 과거가 비록 사라졌다 하여도 기억을 통해 생각할 수 있고, 능히 마음과 심수법(心數法)을 생기게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마치 어제의 꺼져 없어진 불을 오늘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또 그것을 생각한다 하여도 지금 불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만약 땔나무를 쌓아 놓은 것을 보면 당연히 불을 피울 수 있음을 아는 것이며, 역시 내일의 불이 과거의 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지금 마음으로 불을 생각한다 하여도 곧 불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미래 세상의 일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現在心 雖一念時不住 相續生故 能知諸法。內以現在意爲因 外以諸法爲緣 是因緣中生意識 用意識自在 知過去未來現在法, 但不自知 現在心心數法 餘者悉知。
현재의 마음은 비록 한 생각도 머무르지 않으나, 서로 계속 이어지면서 상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법을 능히 알 수 있으며, 안(육입)으로는 현재의 뜻으로 직접적인 원인의 인(因)을 삼고, 밖(육경)으로는 제법으로써 간접적인 조건의 연(緣)을 삼아, 이러한 인연(因緣)으로 의식(意識)의 작용이 생기게 되고, 의식이 자재하게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법을 아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알지 못할 뿐, 그 밖의 것은 모두 다 아는 것이다.
問曰; 『般若波羅蜜ㆍ如相品』中, “三世一相 所謂無相” 云何言 佛智慧知三世通達無㝵?
묻나니, 반야바라밀의 여상품(如相品) 중에서는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가 일상(一相)이니, 이른바 모양 없음의 무상(無相)인데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지혜로 삼세를 알며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諸佛有二種說法,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若說三世諸法 通達無㝵 是分別說, 若說三世一相無相 是說畢竟空。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로 설법하시니, 먼저 제법을 분별하고 그 뒤에 필경에는 공이라는 필경공(畢意空)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삼세의 제법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고 말씀 하신다면 그것은 분별하신 말씀이고,
만약 “삼세가 일상(一相)이어서 무상(無相)이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필경공(畢意空)을 말씀하신 것이다.
復次 非一切智人 於三世中智慧有㝵, 乃至觀世音 文殊師利 彌勒 舍利弗等諸賢聖 於三世中智慧皆有㝵。以是因緣故 說佛智慧於三世中通達無㝵 不爲空事故說。
또한 일체지인(一切智人)이 아니라면 삼세의 지혜에 막힘(장애)이 있으니, 나아가 관세음(觀世音)보살ㆍ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ㆍ미륵(彌勒)보살ㆍ사리불(舍利弗) 등의 모든 성현들도 삼세의 지혜에 모두 막힘이 있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의 지혜는 삼세에서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고 한 것이니, 공연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復次 有人於三世中生邪見 謂過去法及衆生有初 無初。若有初 則有新衆生, 諸法亦無因無緣而生。若無初亦無後 若無初 無後 中亦無。初名有中 有後 無前, 後名有初 有中 無後, 中名有初有後。若衆生及諸法無初 亦無中無後, 若無三世 則都無所有。
또한 어떤 사람은 삼세에서 삿된 소견을 내어 “과거의 법과 중생은 처음이 있다, 처음이 없다”고 하나니,
만약 처음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새로운 중생이 있게 되고, 제법도 원인의 인(因)도 없고 조건의 연(緣)도 없이 생겨 날 것이며, 만일 처음이 없다면 또한 뒤도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처음이 없다고 한다면 뒤도 또한 없을 것이고, 만일 처음이 없다면 그 뒤와 중간도 없는 것이다.
처음을 중간이 있고 뒤가 있으나, 그 앞이 없는 것이라고 이름하고,
뒤를 처음이 있고 중간이 있으나 뒤가 없는 것이라 이름하고,
중간을 처음이 있고 뒤가 있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과 제법에 처음이 없으면, 중간도 없고 뒤도 없는 것이며,
만약 삼세가 없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인 것이다.
復次 若無初, 云何有一切智人?破如是等邪見故 說三世諸法一相 所謂無相 不爲破三世佛智慧。
또 만약 처음이 없다면 어떻게 일체지인(一切智人)이 있을 수 잇겠는가! 이와 같은 등의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삼세의 제법은 일상(一相)이어서 이른바 무상(無相)이다”고 말씀한 것일 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깨뜨리고자 한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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