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10
復次 若佛說三種法, 有爲法 無爲法 不可說法 則爲已說一切法竟。
또한 만약 부처님께서 세 가지의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과 말하여서는 안되는 불가설법(不可說法)을 말씀하셨다면 곧 이미 온갖 법을 말씀하여 마친 것이 되는 것이며,
復次 是諸外道依止常見 依止滅見故 問以常滅, 實相無故 佛不答。如外道所見常相 無常相 無是事。何以故, 外道取相 著是常滅故, 佛雖說常無常相 但爲治用故。
또한 모든 외도들은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견(常見)에 의지하고, 소멸하여 없어진다는 소견의 멸견(滅見, 단멸견)에 의지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과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만,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외도들의 소견은 항상하다는 상상(常相)과 항상함이 없다는 무상상(無常相)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니, 왜냐하면 외도들은 모양을 취하여 집착하기에 이것은 항상하다거나, 소멸한다거나 등으로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비록 항상하고 항상하지 않음의 상무상(常無常)의 상(相)을 말씀하실지라도 이는 다만 외도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일 뿐이다.
復次 若人說無者爲有 有者爲無 如是人則是過罪 佛不答則無咎。如日照天下 不能令高者下 下者高 但以顯現而已, 佛亦如是 於諸法無所作 諸法有者說有 無者說無。如說, “生因緣老死 乃至無明因緣諸行。
또한 만약 없는 것을 있다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이러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이므로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니, 이에는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마치 해가 천하를 비출 때에 높은 것을 낮게 하고 낮은 것을 높게 할 수는 없지만, 다만 전부를 환하게 나타나게 할 뿐인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역시 이와 같으시니,
제법에 대하여 조작함이 없이, 제법에서 있다고 믿는 이에게는 유(有)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없다고 하는 이에게는 무(無)에 대하여 말씀하시나니,
마치 태어나는 생(生)은 늙어 죽는 노사(老死)의 인연이 되고, 나아가 무명(無明)은 모든 행(行)의 인연이 되는 것을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有佛無佛 是因緣法相續常在世閒, 諸佛出世 爲衆生顯示此法"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러한 인연의 법은 서로 이어지면서 항상 세간에 있는 것으로,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셔서 중생들을 위하여 이 법을 드러내어 보여 주시는 것이며,
復次 若答常滅 則爲有咎。如問, “石女 黃門兒 脩短 黑白 何類?” 此問則不應答。十四難亦如是 但以“常滅”爲本故問 無“常滅”故 佛不答。如是等 種種因緣故 佛不答十四難 無咎。
또한 만일 항상하다거나 소멸한다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하게 된다면 허물이 있게 되는 것으로, 마치 석녀(石女)나 황문(黃門, 고자)의 아이의 키가 크고 작은지, 그 피부가 검고 흰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14가지의 난문(難問, 십사무기)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니, 다만 항상함과 소멸함을 근본으로 삼아 짐짓 물어보는 질문이라면, 항상함과 소멸함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 14가지의 난문(難問)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14가지의 난문(難問)= 십사무기(十四無記)
•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 3가지
• 세계는 유한(有限)인가, 무한(無限)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3가지
• 여래(如來)는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은가?
•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 2가지
• 목숨과 신체는 같은가? 목숨과 신체는 다른가? - 2가지 - 아미산
“佛處處說有我 處處說無我”者 若人解佛法義 知假名者 說言“有我”, 若人不解佛法義 不知假名者 說“無我”。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나'가 있다는 유아(有我)를 말씀하시고, 곳곳에서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것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불법(佛法)의 이치를 이해하여서 (제법)이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임을 아는 이라면 유아(有我)를 말씀하시고,
만약 어떤 사람이 불법(佛法)의 이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가명(假名)임을 이해하지 못한 이라면 그에게는 무아(無我)를 말씀하셨으며,
復次 佛爲衆生 欲墮斷滅見者 說言, “有我受後世罪福"
若人欲墮常見者 爲說言, “無我 無作者 受者 離是五衆假名 更無一法自在者"
自在자재= 1. 저절로 있음 2. 구속이나 장애가 없이 마음대로임
또한 부처님께서는 중생으로서 아주 없다는 소견의 단멸견(斷滅見)에 떨어지려고 하는 이를 위해서는 “유아(有我)이며, 후세에 죄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시고,
만약 어떤 사람이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견(常見)에 떨어지려고 하는 이에게는 “무아(無我)이며, 짓는 이가 없는 무작(無作)이며, 받는 이도 없는 무수자(無受者)이며, 이 5중(衆, 오온)의 임시 이름인 가명(假名)을 여의면 어떠한 일법(一法)도 자재(自在)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問曰; 若爾者 何等爲實?
묻나니,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진실한 것입니까?
答曰; 無我是實。如法印中說, “一切作法無常 一切法無我 寂滅是安隱涅槃。法印 名爲諸法實相" 若人善根未熟 智慧不利 佛不爲說是深無我法, 若爲說 衆生卽墮斷滅見中。
답하나니, 무아(無我)가 바로 진실이다. 마치 법인(法印) 중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일체의 짓는 법은 무상한 것이고,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며, 고요히 번뇌가 멸한 적멸(寂滅)이 바로 안온한 열반(적멸열반)이니,
이러한 법인(法印)을 제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선근이 아직 성숙되지 못하고 지혜가 영리하지 못하다면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무아(無我)의 깊은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시니, 만일 그에게 무아(無我)의 법을 말씀하신다면 그 중생은 곧 아주 없다는 단멸견(斷滅見)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법인(法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으로 생각생각마다 일어 나고 없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둘째는 일체의 법에는 나가 없는 무아(無我)이며,
셋째는 번뇌의 불이 꺼진 고요한 적멸열반(寂滅, śāntaṁ nirvāṇam)이 그것이라.-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2권 2
問曰; 若爾者, 如“迦葉問”中 佛說, “我是一邊 無我是一邊 離此二邊 名爲中道"
今云何言 “無我是實 有我爲方便說”?
묻나니, 만일 그러한 것이라면 가섭 존자의 질문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유아(有我)라고 하는 것도 한 편으로 치우친 소견이요,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도 한 편으로 치우친 소견이니, 이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의 이변(二邊)을 여읜 것을 중도(中道)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어찌하여 무아(無我)가 진실이요, 유아(有我)는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說無我有二種, 一者 取無我相 著無我, 二者 破我 不取無我 亦不著無我 自然捨離。如先說無我 則是邊, 後說無我 是中道。
답하나니, 무아(無我)의 설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나'가 없다는 상(相)을 취하여서 무아(無我)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라는 상(相)을 깨뜨려서 취하지도 않고, 무아(無我)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앞의 무아(無我)는 바로 치우친 소견이고, 뒤에 말한 무아(無我)는 바로 중도(中道)이다.
復次 佛說有我 無我有二因緣, 一者 用世俗說故有我, 二者 用第一實相說故無我。如是等說 有我無我無咎.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유아(有我)와 무아(無我)에는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세속에서 쓰는 말로써 나타내기 때문에 유아(有我)가 되고,
둘째는 제일의(第一義)의 실상(實相)을 말씀하시는 때문에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유아(有我)와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것에는 잘못 됨이 없는 것이다.
問曰; “佛處處說諸法有 處處說諸法無”者。不應別說有無。有卽是有我, 無卽是無我, 何以更說?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설하시기를 제법이 있다 하셨으며, 곳곳에서 제법이 없다고 하셨으니,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를 따로 말씀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있음이라면 그것이 곧 나가 있는 유아(有我)요, 없음이라면 그것이 곧 나가 없는 무아(無我)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말씀하는 것입니까?
答曰; 不然!佛法有二種空, 一者 衆生空, 二者 法空。說無我 示衆生空, 說無有法 示法空。
답하나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의 법에는 두 가지의 공(空)이 있으니,
첫째는 중생공(衆生空, 인무아人無我, 무아)이요,
둘째는 오온을 포함한 그 모든 것에 실체가 없음의 법공(法空)이라.
무아(無我)라고 함이란 중생공(衆生空)을 보이는 것이고, 법이 없다고 말함은 법공(法空)을 나타내는 것이다.
說有我 示知假名相 不著我者, 說有我 於五衆中著我相者 爲破是著我, 故說 但有五衆 無常 苦 空 無我 寂滅涅槃是名有。
유아(有我)를 말하는 것은 임시로 붙인 이름의 가명(假名)임을 알고 나에 집착하지 않는 이들에게 보이는 것이고,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은 5중(衆, 오온) 가운데서 '나'라는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나에 집착하는 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다만 5중은 무상(無常)하고 괴로운 고(苦)이고, 공(空)이며, 무아(無我)이고, 번뇌가 멸하여 고요한 적멸(寂滅)의 열반이 있을 뿐이니, 이것을 있음의 유(有)라고 하는 것이다.
復次 有二種斷見, 一者 無後世受罪福苦樂者 爲說有我 從今世至後世受罪福果報。
二者 一切法皆空無 著是邪見, 爲是衆生故 說有一切法 所謂有爲 無爲法。
또한 두 가지의 단멸견(斷滅見)이 있으니,
첫째는 후세나 죄와 복을 받음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들을 위하여 '나'가 있는 유아(有我)이며 지금의 세상으로부터 후세까지 죄와 복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해 주는 것이요.
둘째는 일체법은 모두가 공(空)하여 없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삿된 소견이니, 이러한 중생을 위해서는 일체법, 즉 유위(有為)와 무위(無爲)의 법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復次 不大利根衆生 爲說無我, 利根深智衆生 說諸法本末空。何以故, 若無我則捨諸法 如說;
또한 크게 영리한 근기가 아닌 중생에게는, 그를 위하여 무아(無我)를 설하여 주며,
근기가 영리하고 지혜가 깊은 중생에게는 제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空)한 것이라고 말하여 주나니, 왜냐하면 만약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곧 제법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若了知無我 有如是人者, 聞有法不喜 無法亦不憂。
만일 무아(無我)를 분명히 아는,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
있다는 법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없다는 법을 들어도 근심하지 않으며,
說我者 一切法所依止處, 若說無我者 一切法無所依止。
'나'라고 말하는 것은 일체법이 의지할 처소가 되는 것이요
만약 '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일체법이 의지할 처소가 되지 않는 것이다.
復次 佛法二種說, 若了了說 則言一切諸法空, 若方便說 則言無我。是二種說法 皆入般若波羅蜜相中。以是故 佛經中說, “趣涅槃道 皆同一向 無有異道"
또한 불법(佛法)을 두 가지로 설명하셨으니,
만약 분명하게 말한다면 일체의 제법들이 공(空)이라 한 것이요. 만약 방편으로 말씀하실 때이면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러한 이종(二種)의 설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상(相)에 들어가는 것이라.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말씀하시되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들 모두는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요, 다른 방향의 길은 없다”고 하신 것이다.
復次 有我 有法 多爲在家者說 有父母 罪福 大小業報。所以者何, 在家人多不求涅槃故 著於後世果報。爲出家人 多說無我無法。所以者何, 出家人多向涅槃故。求涅槃者 不受一切法故 自然滅是涅槃。
또한 유아(有我)이고 유법(有法)이라 함의 대개는 재가자(在家者)를 위한 것으로, 부모가 있는 것이며, 죄와 복이 있는 것이며, 업의 되갚음에 크고 작음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재가자(在家者)의 대부분 열반을 구하지 않고 후세의 과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출가한 출가자(出家者)들을 위해서는 무아(無我)을 많이 말해주나니, 왜냐하면, 출가한 사람들 대부분은 열반을 향하기 때문이요, 열반을 구하는 이들이니 일체법을 받아 들이지 않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스스로 어긋남이 없이 사라지는 그것이 바로 열반(涅槃)인 것이다.
復次 有人信等諸根未成就故 先求有所得 然後能捨, 爲是人故 佛說諸善法 捨諸惡法。有人信等諸根成就故 於諸法不求有所得 但求遠離生死道, 爲是人故 佛說諸法空無所有。
또한 어떤 사람은 신근(信根) 등을 비롯한 모든 근이 아직 성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먼저 소득이 있는 것을 구하게 하여서 얻은 뒤에는 능히 버리게 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선법(善法)들을 갖추게 되면 모든 악법(惡法)들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신근(信根) 등의 모든 근이 성취된 까닭에 제법에서 소득이 있는 것을 구하지 않고, 다만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는 도(道)를 구하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제법은 공(空)하여 무소유(無所有)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此二皆實。如無名指 亦長 亦短 觀中指則短 觀小指則長 長短皆實, 有說 無說亦如是。說有 或時是世俗, 或時是第一義 說無或時是世俗, 或時是第一義。佛說是有我無我 皆是實。
공(空) 무소유(無所有),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진실한 것이니, 마치 무명지(無名指, 넷째 손가락)는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것과 같으며, 중지(中指, 가운데 손가락)와 비교하면 짧으나, 소지(小指, 새끼 손가락)와 비교하면 긴 것과 같은 것으로, 길고 짧다는 것이 모두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있음의 유(有)와 없음의 무(無)의 설명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라.
있음의 유(有)라고 말씀하신 것은 때로는 그것이 세속(世俗)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제일의(第一義)이기도 하며,
없음의 무(無)라고 말씀하신 것도 때로는 그것이 세속(世俗)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제일의(第一義)이기도 하였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유아(有我), 무아(無我)”도 모두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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