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12

 

問曰; 無相是爲有邊!

묻나니, 무상(無相)이란 끝이 있는 유변(有邊, 한 쪽으로 치우친 또는 끝이 있는)의 견해 입니까?

 

答曰; 若無相 卽是無邊。不可說 不可難法 云何言有邊?若無相中取相 非是無相。是無相名爲 不可得空, 是中無相亦不可得 空亦不可得 是故名不可得空。

답하나니, 만약 무상(無相)이라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불가설(不可說)이며, 힐난할 수 있는 법도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끝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무상(無相) 가운데서 상(相)을 취한다면 그것은 무상(無相)이 아니며,

이 무상(無相)을 바로 얻을 수 없는 불가득공(不可得空, anupalambhaśūnyatā)이라 하며,

이 안에서는 무상(無相)도 얻을 수 없고 공(空)도 역시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 佛有二種道, 一者 福德道 有人聞佛十力 四無所畏 四無智 十八不共法等 生恭敬信樂心, 二者 智慧道 有人聞說諸法因緣和合生故 無有自性 便捨離諸法 於空中心不著。

또한 부처님께는 두 가지의 도가 있으니, 첫째는 복덕도(福德道)라,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사무애지(四無礙智)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을 듣고 공경하고 믿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며,

둘째는 지혜도(智慧道)이니, 어떤 사람은 “제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곧 제법을 버리고 여의면서 공(空)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如月能潤物 日能熟物 二事因緣故萬物成就, 福德道 智慧道亦如是。福德道 能生諸功德, 智慧道 能於福德道中 離諸邪見著。以是故 佛雖說諸法畢竟空 亦說三世通達無而無咎。如是等 略說佛十八不共法義。

마치 달이 능히 만물을 윤택하게 하여 주고, 해가 만물을 잘 성숙시켜 주는, 두 가지의 인연으로 만물이 성취되는 것과 같이, 복덕의 도와 지혜의 도도 역시 그와 같으니,

복덕도(福德道)는 모든 공덕을 능히 내고, 지혜도(智慧道)는 복덕의 도 가운데서 모든 삿된 소견과 집착을 여의게 하는 것이라.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비록 “제법은 필경에 공한 필경공(畢竟空)이다”고 말씀하셨으니, “삼세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고 하신 것에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것으로 부처님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問曰; 若爾者 迦栴延尼子 何以言 “十力 四無所畏 大悲 三不共意止 名爲十八不共法”?若前說十八不共法 是眞義者 迦栴延尼子 何以故如是說?

묻나니, 만약 그렇다면 가전연니자(迦栴延尼子, Kātyāyanīputr)는 무엇 때문에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대비(大悲) 삼불공의지(三不共意止)를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 한 것입니까?

만약 앞에서 말씀하신 18불공법이 바로 진실한 뜻이라면 가전연니자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까?

 

答曰; 以是故名迦栴延尼子!若釋子則不作是說。釋子說者 是眞不共法。佛法無量 是三十六法 於佛法中如大海一法亦不少 何以重數爲十八?

답하나니, 그러한 때문에 가전연니자(迦栴延尼子, 나형외도, 자이나교의 교주)라고 이름한 것이다. 만일 석가의 제자인 석자(釋子)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며, 석가의 제자인 석자(釋子)가 설명한 것이 바로 참된 불공법이다.

부처님의 법은 한량이 없으니,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사무애지(四無礙智)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36종의 법은 부처님 법 중에서 마치 큰 바닷물에서 한 물방의 물방울과 같은 것이며, 법(가르침) 또한 적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거듭 18불공법만을 거듭 헤아리고자 하는 것인가!  

 

復次 諸阿羅漢 辟支佛 菩薩 亦能知是處不是處 分別三世業果報 及諸禪定 乃至漏盡智等 云何言不共法?

또한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은 역시 옳은 것과 옳지 않는 것의 시처불시처(是處不是處)를 알며,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의 업과 과보와 모든 선정 내지는 유루가 다한 누진지(漏盡智) 등을 분별하거늘, 어찌 불공법이라 말하겠는가!

 

問曰; 聲聞 辟支佛 菩薩 不能盡知遍知 但有通 明 無有力, 獨佛能盡遍知故言不共 如“十力”中說。

묻나니,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보살은 모두를 다 알지도 두루 알지도 못하는 불능진지편지(不能盡知遍知)이나, 다만 통(通)과 명(明)이 있을 뿐, 역(力, 힘)이 없으니,

오직 부처님만이 모두 다 알고 두루 다 아시는 능진지편지(能盡知遍知)이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 하나니, 이는 +십력(十力)에서 설명한 바과 같은 것입니까?

 

答曰; 佛說十力義 不言“盡知 遍知” 直言“知是處不是處”。言“盡知遍知”者 是諸論議師說。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십력(十力)의 이치를 말씀하시면서 “모두 다 알고 두루 아는 진지편지(盡知遍知)이다”고 하시지 않으셨고 “시처불시처(是處不是處)를 아신다”고 하셨으니, “모두 다 알고 두루 안다는 진지편지(盡知遍知)”는 바로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의 설명인 것이다.

 

問曰; 汝先自言, 摩訶衍經中說 佛爲菩薩故 自說“盡知遍知”。

묻나니, 그대가 앞에서 스스로 설하시기를 “마하연경(摩訶衍經, 대승)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을 위하여 스스로 ‘모두 다 알고 두루 아는 진지편지(盡知遍知)이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答曰; 摩訶衍經中說 何益於汝?汝不信摩訶衍 不應以爲證!汝自當說聲聞法爲證。

답하나니, 마하연경(대승의 경)에서의 설명이 그대에게 어떠한 이익이 되는가! 그대는 마하연을 믿지도 않으니, 드러내어 밝히고자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대는 마땅히 스스로의 성문법(성문의 가르침)에서의 설명을 드러내어 밝혀야 하는 것이다.

 

復次 十力 佛雖盡知遍知 而聲聞 辟支佛有少分, 十八不共法中 始終都無分 以是故名眞不共法

또한 10력에서는 부처님께서 비록 모두 다 알고 두루 아시는 진지편지(盡知遍知)이라 하여도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조금의 분한(한계)이 있지만, 18불공법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분한(한계)이 없으니, 이러한 때문에 진실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 十八不共法 二乘亦應有分, 但佛身口念常無失 二乘身口念亦有無失。如是等 皆應有分。

묻나니,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은 성문과 벽지불의 2승(乘)에게는 마땅히 분한이 있어야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몸과 입과 생각(뜻)에 항상 과실이 없으시나, 2승 또한 몸과 입과 생각(뜻)에도 역시 과실이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러함 등으로 비추어 보아도 당연히 모두에게 분한(한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答曰; 不然。所以者何?常無失故名爲不共 不以不失爲不共, 聲聞 辟支佛 於常無失中無分。

답하나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과실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 하는 것이지, 과실이 조금 밖에 없는 것을 불공(不共)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항상 과실이 없다고는 하나, 그러한 가운데에서 분한이 없을 뿐이다. 

復次 諸阿羅漢說有力 無有處說有不共法。汝不信摩訶衍故 不受眞十八不共法 而更重數十力等 是事不可!如汝所信八十種好 而三藏中無 何以不更說?

또한 모든 아라한에게 역(力, 힘)이 있다고 하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불공법(不共法)이 있다고는 말하나, 그대는 마하연(대승)을 믿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불공법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거듭 10력 등을 헤아리고만 있으니, 이러함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믿는 것과 같은 80종호(種好)는 이  경(經) · 율(律) · 논(論)의 삼장(三藏)에도 들지 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말하고자 하는가?

 

問曰; 我等分別十八不共法 不重數也!何等十八?一者 知諸法實相故 名一切智, 二者 佛諸功德相難解故 功德無量, 三者 深心愛念衆生故 名大悲, 四者 得無比智故 智慧中自在, 五者 善解心相故 定中自在; 

묻나니, 우리들은 18불공법(十八不共法)을 분별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요 거듭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것이 (성문의) 18인가 하면,

하나는 제법의 실상(實相)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라 하는 것이고,

둘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상(功德相)을 이해하기 어렵기 공덕무량(功德無量)이라 하고,

셋은 깊은 마음으로 중생을 사랑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대비(大悲)라 하고,

넷은 비할 바 없는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지혜 안에서 자유자재한 것이고,

다섯은 마음의 상(相)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정(定)에서 자유자재하고, 

 

六者 得度衆生方便故 變化自在, 七者 善知諸法因緣故 記別無量, 八者 說諸法實相故 記別不虛, 九者 分別籌量說故 言無, 十者 得十力成就 智慧無減;

여섯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을 얻었기 때문에 변화가 자유자재하고,

일곱은 제법의 인연을 잘 알기 때문에 기별(記別, 수기授記)이 무량하며,

여덟은 제법의 실상을 말씀하기 때문에 기별(記別, 수기授記)이 거짓되지 않으며,

아홉은 분별하고 헤아리면서 말씀하기 때문에 말씀에 과실이 없고,

열은 십력(十力)을 이루어 얻으셨기에 지혜에 감소함이 없고,

 

十一者 一切有爲法中 但觀法聚無我故 常施捨行, 十二者 善知時不時 安立於三乘 常觀衆生故, 十三者 常一心故 不失念, 十四者 無量阿僧祇劫深善心故 無煩惱習, 十五者 得眞淨智故 無有能如法出其失; 

열하나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 가운데서 다만 법을 취하여  무아(無我)를 관찰하기 때문에 항상 버림의 사행(捨行)을 베풀며,

열둘은 때와 때 아닌 때를 잘 아시며 3승(乘)에 확고히 서서 항상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열셋은 항상 일심(一心)이기 때문에 기억을 잃지 않으며,

열넷은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 착한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번뇌와 습기가 없으며,

열다섯은 진실하고 청정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능히 여법(如法)하며 그 허물이 없고, 

 

十六者 世世敬重所尊故 無能見頂, 十七者 修大慈悲心故 安庠下足 足下柔軟 衆生遇者 卽時得樂, 十八者 得神通波羅蜜故 轉衆生心令歡喜得度故, 如入城時 現神變力。

열여섯은 세상마다 공경과 존중으로 모신 까닭 그 정수리를 볼 수가 없고,

열일곱은 대자대비의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조용히 발을 내려 놓으며 발바닥은 부드럽고 연하여, 만나는 중생은 즉시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이고,

열여덟은 신통바라밀(방편바라밀)을 얻었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움직이게 하고 제도되게 하심이 마치 성(城, 열반)에 들어갈 때에 신변(神變)의 힘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신 것이다.

 

答曰; 如是十八不共法 非三藏中說 亦諸餘經所不說。以有人求索是法故 諸聲聞論議師輩 處處撰集 讚佛功德。如“言無失” “慧無減” “念不失” 皆於摩訶衍 十八不共法中取已作論議。

답하나니, 그와 같은 (소승의) 18불공법은 경(經) · 율(律) · 논(論)의 삼장(三藏)의 말씀이 아니고 또한 다른 어떤 경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법을 구하고 찾았기 때문에 성문의 논의사(論議師)들이 곳곳에서 발췌하여 모은 뒤에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자 한 것이다.

말씀에 과실이 없는 언무실(言無失), 지혜에 감소함이 없는 혜무멸(慧無滅), 기억에 망실이 없는 염무실(念無失) 등과 같은 것은 모두 마하연의 18불공법 중에서 취한 뒤에 논의(論議)한 것들이다.

 

雖有“無見頂” “足下柔軟” 如是甚多 不應在十八不共法中, 不共法皆以智慧爲義 佛身力如十萬白香象力 及神通力等皆不說。以是故 當知十八不共法中 但說智慧功德等 不說自然果報法。

비록 정수리를 볼 수 없는 무견정(無見頂) 발바닥이 부드럽고 연한 족하유연(足下柔軟) 등이 있다 하나, 이러한 것은 아주 많은 다반사이므로 18불공법 안에 포함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불공법(不共法)이란 모두 지혜로써 뜻을 삼는 것이기에 부처님 몸의 힘이 마치 10만 마리의 흰 향상(香象)과 같다거나, 나아가 그 밖의 신통의 힘 등에 대한 것은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18불공법 중에서는 다만 지혜와 공덕 등을 말씀할 뿐, 자연히 있게되는 과보(果報)의 법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次 是十八不共法 阿毘曇分別五衆攝, 身口無失 身口隨智慧行 是色衆攝, 無異想 是想衆攝, 無不定心 是識衆攝, 餘者 行衆攝。皆在四禪中 佛四禪中得道 得涅槃故。

또한 이 18불공법은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 분별하여 말하기를, 5중(衆, 오온)에 포섭된다고 하였으니,

몸과 입에 과실이 없는 것과 몸과 입이 지혜에 따라 행함의 수지혜행(隨智慧行)은 물질= 색중(色衆, 색온)에 포섭되고,

다른 생각이 없다는 무이상(無理想)은 생각의 상중(想衆, 상온)에 포섭되며,

정 아닌 마음이 없다는 무불정심(無不定心)이라는 것은 의식의 식중(識衆, 식온)에 포섭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지어감의 행중(行衆, 행온)에 포섭되는 것이라.

이러한 모두는 사선(四禪)에 드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사선(四禪) 가운데에서 도를 얻으시고 열반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有人言, “四色不共法 色界欲界中攝, 餘九地中攝" 皆是善。皆是無漏法。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색(色)의 불공법은 색계(色界)와 욕계(欲界)에 포섭되고, 그 밖의 나머지는 9지(地)에 포섭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선(善)이요 무루법(無漏法)인 것이다.

 

四色法二緣生; 因緣 增上緣, 餘殘 四緣生。四 無緣, 十四 有緣。四隨心行 不與心相應。十三與心相應 亦隨心行。一不與心相應 亦不隨心行。

4색(四色)의 법은 두 가지는 연(緣)으로 생기는 것인데, 인연(因緣)과 증상연(增上緣)이며,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의 연으로 생기는 것이니,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에서 네 가지는 연(緣)이 없으며, 열네 가지는 연이 있는 것이며,

또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에서 네 가지의 마음을 따르는 수심행(隨心行)은 마음과 상응(相應)하지 않는 것이며,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에서 열세 가지는 마음과도 상응하고

또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에서 수심행(隨心行)의 하나는 마음과 상응하지도 않으며 또한 마음을 따라 행하지도 않는 것이다.

4연(緣)= 인연(因緣) 차제연(次第緣) 연연(緣緣) 증상연(增上緣)

如是等種種 阿毘曇分別說。初如是分別 入般若波羅蜜 諸法實相中 盡皆一相 所謂無相 入佛心皆一寂滅相。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 분별하여 설명하였으니, 처음에는 이와 같이 분별하지만 반야바라밀에서 제법의 실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두가 다 한 모습의 일상(一相)이라. 이른바 무상(無相)이 되며, 부처님의 마음에 들어가게 되면 모두(번뇌)가 고요히 사라진 하나의 일적멸상(一寂滅相)이 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二十六 終 대지도론 제 26 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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