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6

 

問曰; 解脫知見者 但言“知”, 何以復言“見”?

묻나니, 해탈지견(解脫知見)이란 다만 앎의 지(知)만을 말하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생각하는 바 소견의 견(見)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言“知”, 言“見” 事得牢固, 譬如繩 二合爲一則牢固。

답하나니, 앎의 지(知)라 말하고 생각하는 바 소견의 견(見)으로 말하면 그 뜻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두 개의 줄을 합해서 하나가 되게 하면 더욱 견고하여 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 若但說“知” 則不攝一切慧。

如『阿毘曇』所說, “慧有三種, 有知非見 有見非知 有亦知亦見。

또한 만약 안다고만 말한다면 온갖 지혜를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 설한 바와 같이 지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알기는 하나 생각하는 바의 소견을 가지지 못하는 지비견(知非見)과

생각하는 바의 소견은 있으나 알지 못하는 견비지(見非知)와

알기도 하고 생각하는 바의 소견도 분명한 역지역견(亦知亦見)이다.

 

有知非見者 盡智 無生智 五識相應智。有見非知者 八忍 世閒正見 五邪見。

有亦知亦見者 餘殘諸慧。

지비견(知非見)이라 함이란, 일체법이 무소유임을 아는 진지(盡智)와 일체법은 생겨남이 없음을 아는 무생지(無生智)가 오식(五識)과 상응하는 지혜이며,

견비지(見非知)라 함이란, 8인(八忍)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신견(有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의 오사견(五邪見)이며,

역지역견(亦知亦見)이라 하는 것은 그 밖의 나머지 모든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진지(盡智)는 일체법은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을 아는 것이며,

무생지(無生智)는 온갖 일체법의 생겨나는 생법(生法)은 진실하지도 않으며, 일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불생(不生)임을 아는 것이며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3권 9

 

팔인(八忍)= 견도위(見道位)에서 3계 4제(諦)의 이치를 관하고 이것을 인가인증(忍可印證)한 무루심(無漏心)을 말하며, 욕계의 4제를 인가한 것을 법인(法忍), 색계ㆍ무색계의 4제를 인가한 것을 유인(類忍)이며, 이렇게 인가인증은 지혜를 내는 인이 되는 것이므로 8인(忍)은 8지(智)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
① 고법인(苦法忍), 욕계의 고제(苦諦)를 관(觀)하여 생기는 무루심.

② 고류인(苦類忍), 색계ㆍ무색계의 고제를 관하여 생기는 무루심.

③ 집법인(集法忍), 욕계의 집제(集諦)를 관하여 생긴 것.

④ 집류인(集類忍), 색계ㆍ무색계의 집제를 관하여 생긴 것.

⑤ 멸법인(滅法忍), 욕계의 멸제(滅諦)를 관하여 생긴 것.

⑥ 멸류인(滅類忍), 색계ㆍ무색계의 멸제를 관하여 생긴 것.

⑦ 도법인(道法忍), 욕계의 도제(道諦)를 관하여 생긴 것.

⑧ 도류인(道類忍), 색계ㆍ무색계의 도제를 관하여 생긴 것. - 관음사

 

”若說“知”則不攝“見”, 若說“見”則不攝“知” 是故說“知”“見”則具足。

만약 앎의 지(知)라 말한다면 소견의 견(見) 포섭되지 않고 

만약 소견의 견(見)이라고 말한다면 앎의 지(知)에 포섭되지 않나니, 

 때문에 앎의 지(知)와 소견의 견(見)을 함께 말한다면 두루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復次 如從人誦讀 分別籌量是名“知”, 自身得證是名“見”。

또 사람들이 읽고 외우고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을 따라 아는 것을 지(知)라 하고,

스스로 자신이 몸으로 얻어서 깨닫는 것을 견(見)이라 하나니,

 

譬如耳聞其事 猶有疑 是名“知”, 親自目睹 了了無疑 是名“見”。解脫中“知” “見”亦如是差別。

비유하자면, 마치 귀로 그 일을 들었으나 아직도 의심이 있는 것을 앎의 지(知)라 하고,

자신이 몸소 보았고 똑똑히 알아서 의심이 없는 것을 견(見)이라 하는 것과 같다.

해탈에서의 지견(知見)도 역시 이러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復次 有人言; “阿羅漢自 於解脫中 疑不能自了 是阿羅漢 非阿羅漢"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라한이 스스로 해탈한 가운데에서 의심하여 스스로 명백하지 못한다면 이 아라한은 아라한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以是故 佛爲破 如是邪見故 說諸聖人於解脫中 亦知亦見。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견(邪見)을 깨뜨리기 위하여 “모든 성인은 해탈한 가운데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는 견(見)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諸阿羅 漢雖得解脫知見 解脫知見有減, 不得一切智故,

上上智慧根不成就故, 諸法念念生滅時不知別相分別故。

모든 아라한이 비록 해탈지견을 얻었다 하여도 해탈지견에 감소함이 있게 되는 것은 일체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상상(上上) 지혜의 바탕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제법이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질 때의 별상(別相)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나,

 

佛上上智慧根成就 知諸法念念別相生滅故 解脫知見無減。

부처님께서는 상상(上上) 지혜의 바탕(근본)을 성취하시어 생각마다 일어나는 제법의 별상(別相)과 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의 별상을 아시기 때문에 해탈지견에 감소함이 없는 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減)이신 것이며, 

 

復次 法眼淸淨 具足成就故 如“法眼義”中說。

또한 일체법을 명료하게 아시는 법안(法眼)을 두루 청정하게 갖추시어 성취하셨기 때문이니, 이는 법안의 뜻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知是衆生“空解脫門”入涅槃,

사견이 많은 중생은 공해탈문(空解脫門)을 통해서 열반에 들게 됨을 아시고,

是衆生“無相解脫門”入涅槃,

애욕(애착)과 사견을 균등하게 가지고 있는 많은 중생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으로 열반에 들게 됨을 아시며,

是衆生“無作解脫門”入涅槃,

애욕(애착)이 많은 중생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에서 열반에 들게 됨을 아시며,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3 참고

 

知是衆生觀“五衆門”, “十二入” “十八界”, 如是種種法門得解脫。

佛於解脫知見盡知遍知 是故說 佛解脫知見無減。

중생들이 5중문(五衆門)과 12입(入) 18계(十八界)를 관하는 등의 갖가지 법문으로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을 아시는 것과 같의 부처님께서는 해탈지견에 대하여 모두 다 아시고 두루 아시니, 이러함으로 부처님께선 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減)이라고 하는 것이다.

 

佛眼 名一切法 現前了了知, 불안은 눈앞에 펴쳐지는 일체법을 명료하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권 8

 

"一切身業 一切口業 一切意業隨智慧行”者 佛一切身口意業 先知然後隨智慧行。

諸佛身口意業 一切行無不利益衆生 故名先知然後隨智慧行。

일체의 신업(身業)의 ⑬ 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과 일체의 구업(口業)의 ⑭ 一切口業隨智慧行(一切口業隨智慧行)과 일체의 의업(意業)을 지혜에 따라 행함의 ⑮  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온갖 신업과 구업과 의업을 먼저 아시고, 아신 뒤에야 지혜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몸ㆍ입ㆍ뜻의 업으로 인한 일체의 행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먼저 아신 연후에 수지혜행(隨智慧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如經中說, “諸佛乃至出息入息 利益衆生, 何況身口意業 故作而不利益!

마치 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에 이르기까지도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하물며 신업ㆍ구업ㆍ의업을 일부러 지어서 이익되게 하지 않으시겠는가!

 

諸怨惡衆生 聞佛出入息氣香 皆得信心淸淨 愛樂於佛,

諸天聞佛氣息香 亦皆捨五欲 發心修善" 以是故言 身口意業 隨智慧行。

모든 원수나 삿된 중생조차도 부처님의 들숨과 날숨의 향기를 맡고는 모두 믿는 마음이 청정하게 되어 부처님을 좋아하게 되며, 신들도 부처님의 숨의 향기를 맡고는 역시 모두가 5욕을 버리고 발심하여 선(善)을 닦나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수지혜행(隨智慧行)이라 하는 것이다.

 

聲聞 辟支佛無是事。心故作善 然後身 口業善,

意業或時無記 不隨智慧而自生 何況餘人!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이러한 함이 없어서 마음으로 일부러 선을 지은 후에야 신업과 구업이 착해지며, 의업은 간혹 선(善)도 악(惡)도 아닌 무기(無記)이라서 지혜를 따르지 않고 저절로 나기도 하는 것이니,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는가!

 

如憍梵波提比丘 雖得阿羅漢 自食吐而更食 是業不隨智慧。

又如摩頭波斯咤比丘阿羅漢 跳上梁棚 或壁上 樹上。

마치 교범바제(憍梵波提, Gavāṁpati) 비구가 비록 아라한을 얻기는 하였으나 자신이 먹은 것을 토해 놓고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업은 지혜를 따르지 않는 것이며,

또한 아라한인 마두파사타(摩頭波斯咤, mādaVasiṣṭha) 비구가 아라한이 되었으나, 들보나  위나 나무 위로 뛰어올라 머무는 것과 같으며, 

 

又如畢陵伽婆蹉 罵恒神言, “小婢"

如是等 身口業 先無智慧 亦不隨智慧行。佛無是事。

또한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 Pilinda-vatsa)는 갠지스강을 건널 때마다 강의 신= 항신(恒神)을 꾸짖으며 “어린 종년아”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등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은 지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혜를 따라 행한 것도 아니나, 부처님께는 이러한 일이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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