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3

 

復次 佛或時捨衆生 入甚深禪定一月 二月。

有人疑, “佛爲度衆生故 出世 何以故常入定?

佛言, “我種種因緣知故捨 非是無知已捨"

또한 부처님께서는 간혹 중생을 버리면서 심히 깊은 선정(禪定) 들어가 또는 달을 계시기도 하시기에, 어떤 사람은 의심하면서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간에 출현하셨나니, 어떻게 항상 선정에만 들어 계시는 것인가?”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갖가지 인연을 아는 까닭에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으나, 알지도 못하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問曰; 何等是知已捨因緣?

묻나니, 어떠한 것을 아신 뒤에 버리는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 於大衆中疲厭故小息。復次 佛世世常愛遠離行。若菩薩在母胎 母亦樂遠離行 去城四十里 嵐尼林中生, 得道時 漚樓頻螺林中 獨在樹下成佛, 初轉法輪時 亦在仙人住處鹿林中, 入涅槃時 在娑羅林雙樹下。長夜樂行遠離 以是故佛入禪定。

답하나니, 대중 속에 계시면서 사대(四大)의 몸이 고단하시면 잠깐 쉬어야 하며,

또 부처님은 세상마다 항상 멀리 여의는 원리행(遠離行)을 좋아하셨기에, 보살이 어머니의 태 안에 계실 때에는 어머니도 역시 원리행(遠離行)을 좋아하여 가비라파(迦毘羅婆, Kapilavastu) 성에서 40 리(里)나 떨어진 람비니림(嵐鞞尼林, Lumdini) 에서 출산하시게 되셨고,

도를 얻을 실 때에는 구루빈라림(漚樓頻螺林, Uruvilva) 속의 나무 아래에 혼자 계시면서 성불하셨으며,

처음 법륜(法輪)을 굴릴 때에도 역시 선인(仙人)이 머무르는 곳인 녹림(鹿林, Sarnath, 녹야원)에 계셨으며,

열반에 드실 때는 사라림(沙羅林)의 쌍수(雙樹) 아래 계시면서 온밤 내내 즐거이 멀리 여읨의 원리행(遠離行)을 행하셨나니, 이러함으로 부처님께서는 선정에 드실 수 있었으며, 

 

復次 佛常捨心成就 故入禪定。復次 佛遠離憒鬧及雜語處 亦自觀諸佛功德藏 亦受第一淸淨樂 故入禪定。

또한 부처님께서는 항상 버리는 마음의 사심(捨心)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선정에 드시며,

또 부처님께서는 시끄럽고 말이 많은 곳을 멀리 여의시고 역시 스스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의 장(藏)을 관찰하시며 또한 제일 청정한 즐거움을 받고자 하셨기 때문에 선정에 드시는 것이며,

 

復次 佛說法已 常諸比丘當坐禪 無令後悔。口之所說 身亦自行 故入禪定。

또한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신 뒤에는 항상 모든 비구들에게 “마땅히 좌선(坐禪)을 하여 후회함이 없게 하라”고 하셨으니, 입으로 하신 말씀을 몸으로도 역시 스스로 행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선정에 드신 것이며,  

 

復次 厭惡供養故 知衆生應得度者 入禪定作化人往度。復次 有衆生定少慧多者 身示行禪以化之。

또한 삿된 공양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며, 중생으로서 제도되어야 할 이를 아시고는 선정에 드신 뒤에 화인(化人)이 되어 찾아 가서 제도하셨으며,

또한 중생으로서 안정된 마음의 정(定)은 적으나 지혜가 많은 이에게는 몸으로 선정(禪定)을 행하는 것을 보이시어 그를 교화하셨으며, 

 

復次 有人常見 佛生厭想故 小遠離 令其飢虛故。復次 佛欲爲諸天說法 故在閑靜處。復次 佛爲後世作法故坐禪。又佛自轉法輪已 以事付弟子故 入禪定。

또한 어떤 사람은 항상 부처님을 보게 되면 싫증을 일으키는 까닭에 잠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다시 뵙게 되기를 몹시 바라게 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천신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고자 고요한 곳에 계시는 것이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후세의 세상이 본받게 하기 위하여 좌선하여 선정(禪定)에 드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법륜(法輪)을 굴리신 뒤에, 일을 제자들에게 (제도 중생을) 부탁하기 위하여 선정(禪定)에 드신 것이다.

 

復次 現二種道攝衆生故, 一者 禪定, 二者 智慧。佛在大衆說法 爲現智慧, 靜處攝心 爲現禪定。

또한 두 가지의 도를 나타내시어 중생을 거두어 주기 위하셨으니,

첫째는 선정(禪定)이고, 둘째는 지혜이라.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면서 설법하시는 것은 지혜를 나타내신 것이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선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復次 衆生於六塵中三種行. 見好色生喜樂 見惡色生憂苦 見不苦不樂色生捨心, 乃至法亦如是。佛於六塵中自在 於喜樂 苦處能生捨心 如“聖如意”中說。如是等種種因緣故入禪定 非不知已捨。

또한 중생은 색성향미촉법의 6근의 대상인 육진(六塵, 육경)으로 세 가지의 행(업)을 짓나니,

좋은 것의 호색(好色)을 보면 기쁨과 즐거움의 낙수(樂受)가 생기고, 나쁜 것의 악색(惡色)을 보면 근심과 괴로움의 고수(苦受)가 생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것을 보게 되면 버림의 사심(捨心)이 생겨나는 것이니,

나아가 법(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나, 

부처님께서는 육진(六塵)에 대하여 자재하시어 기쁘거나 즐겁거나 근심하거나 괴로운 곳에서 능히 버림의 마음을 내나니, 마치 성여의(聖如意)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며,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요 모르시면서 (고수, 낙수, 불고불락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欲無減“者 佛知善法恩故 常欲集諸善法故 欲無減。修習諸善法 心無厭足故 欲無減。

하고자 함이 줄지않는 ⑦ 욕무감(欲無減)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착한 선법(善法)의 은혜를 잘 아시므로 항상 모든 선법을 쌓고자 하시나니, 이 때문에 항상 하고자 함이 줄지 않으며, 모든 선법(善法)을 닦음에 마음으로 만족함이 없기에 욕무감(欲無減)이라 하는 것이다.

 

譬如一長老比丘目闇 自縫僧伽梨 鍼脫, 語諸人言, “誰樂欲福德者 爲我鍼?” 爾時 佛現其前語言, “我是樂欲福德無厭足人 持汝鍼來"

비유하자면, 마치 한 장로(長老) 비구가 눈이 어두운 데도 스스로 승가리(僧伽梨, Saṃghāti. 비구가 걸치는 세 가지 옷 가운데 겉옷)를 기우려다가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누가 복덕짓기를 좋아하시오? 나를 위해서 바늘에 실을 좀 꿰어 주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되 “내가 바로 복덕을 짓기 좋아하여, 아무리 지어도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대의 바늘을 가져 오너라”고 하시니,  

是比丘 斐亹見佛光明 又識佛音聲 白佛言, “佛無量功德海 皆盡其邊底 云何無厭足?” 斐 아름다울 비, 亹 힘쓸 미, 

이 비구는 아름다운 빛이 나는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부처님의 음성을 알아차리고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의 무량하신 공덕의 바다는 모두 그 바닥 끝을 알 수 없거늘 어떻게 만족함이 없다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佛告比丘, “功德果報甚深 無有如我知恩分者, 我雖復盡其邊底 我本以欲心無厭足故 得佛 是故今猶不息, 雖更無功德可得 我欲心亦不休"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공덕의 과보가 심히 깊은지라 누구도 나처럼 은혜의 한계=은분(恩分)을 아는 이는 없느니라. 나는 비록 그 바닥 끝까지 다하였다 하여도 본래 하고자 하는 마음= 본욕심(本欲心)에 만족해 함이 없었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라. 그러므로 지금도 오히려 쉬지 않고 있으니, 비록 더 이상의 공덕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역시 쉬지 않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으니, 

 

諸天世人驚悟 佛於功德無厭足 何況餘人!佛爲比丘說法 是時肉眼卽明 慧眼成就。

여러 천인(天人)과 세상의 세인(世人)들이 문득 놀라며 깨닫는= 경오(驚悟)하며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공덕에 대해서조차 오히려 만족해 함이 없으시거늘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비구를 위하여 설법하시자, 그 때에 곧 육안(肉眼)이 밝아지면서 혜안(慧眼)을 성취하게 되었다.

 

問曰; 如佛嘗斷一切善法中欲 今云何言“欲無減”?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일체 선법(善法) 중의 욕망을 끊으셨는데, 지금 어찌하여 하고자 함에 감소함이 없는 욕무감(欲無減)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言“斷一切善法中欲”者 是未得欲得 得已欲增, 佛無如是欲。佛一切功德具足 無不得者 亦無增益。

답하나니, 일체의 선법(善法) 중에서 욕망을 끊는다고 함에서의 욕(欲)이란 곧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요, 이미 얻은 것을 더욱 늘리려고 하는 것이지만,

부처님께는 이러한 욕(欲)이 없으시니, 부처님께서는 온갖 공덕을 완전히 갖추셨으므로 얻지 못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늘릴 것도 없으시다.

 

今言“欲”者 如先說, 佛雖具得一切功德 欲心猶不息。譬如馬寶雖到至處 去心不息 至死不已, 佛寶亦如是。

여기서 하고자 한다는 욕(欲)이라 함은, 먼저 설명한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는 비록 온갖 공덕을 빠짐없이 갖추셨으나, 그 하고자 하는 마음은 오히려 쉬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전륜성왕의 마보(馬寶)가 비록 도착할 곳에 이르렀을지라도, 더 가고자 하는 마음이 쉬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달리는 것처럼 불보(佛寶) 또한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又如劫盡大火 燒三千大千世界悉盡 火勢故不息, 佛智慧火亦如是 燒一切煩惱 照諸法已 智慧相應欲亦不盡。復次 佛雖一切善法功德滿足 衆生未盡故 欲度不息。

또 마치 겁(劫)이 다할 때에 큰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모조리 다 태우고도 그 불의 기세는 짐짓 쉬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의 지혜의 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일체의 번뇌를 태우고, 제법을 비춘 뒤에도 그 지혜와 상응하는 하고자 하는 마음의 욕(欲) 역시 다하지 않으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비록 일체 선법(善法)과 공덕을 만족하게 갖추셨으나, 중생은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그 욕(欲)은 쉬지 않는 것이다.

 

問曰; 若佛欲度衆生未息 何以入涅槃?

묻나니, 만약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심에 쉼이 없으시다면, 어찌하여 열반에 드신 것입니까?

 

答曰; 度衆生有二種, 或有現前得度 或有滅後得度。如『法華經』中說 “藥師爲諸子合藥 與之而捨” 是故入涅槃。

답하나니, 중생을 제도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혹은 바로 앞에서 제도될 수 있는 이가 있고, 혹은 멸도(滅道)하신 후에 제도할 수 있는 이가 있으니, 이는 마치 『법화경(法華經)』에서 “약사(藥師)가 자식들을 위하여 약을 지어 주고는 다시 버린다”고 한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때문에 열반에 드신 것이다.

 

復次 有衆生鈍根德薄故 不能成大事 但可種福德因緣 是故入涅槃。

또한 어떤 중생은 근기가 둔하고 덕이 얇기 때문에 큰 일을 성취하지는 못하나, 다만 복덕의 인연을 심는 것은 할 수 있으니, 이러한 때문에 열반에 드신 것이다.

 

問曰; 佛滅度後 亦有得阿羅漢者 何以言 但可種福德因緣?

묻나니,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도 역시 아라한이 된 이가 있거늘, 어찌하여 다만 복덕의 인연만을 심을 수 있다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雖有得阿羅漢者 少不足言。如佛一說法時 十方無量阿僧祇衆生得道 佛滅度後不爾。譬如大國征伐 雖少有所得 不名爲得。以是故 雖衆生未盡而入涅槃。

답하나니, 비록 아라한이 되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 수가 적어서 말할 만하지 못한 것이라. 부처님께서 한 번 설법을 하시면, 시방의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이 도를 얻었지만,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그렇지 못하니,

비유하자면, 마치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정벌(征伐)을 하여 비록 조금 얻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록 중생들을 아직 다 제도하지 못하셨으나, 열반에 드신 것이다.

 

復次 摩訶衍『首楞嚴經』中說, “佛於莊嚴世界 壽七百阿僧祇劫 度脫衆生" 以是故 說佛欲無減。

또한 마하연(대승)의 『수릉엄경(首棱嚴經)』에서는 “부처님은 장엄세계(莊嚴世界)에서 7백의 아승기겁 동안 사시면서 중생을 제도하셨다”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욕무감(欲無減)을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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