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4

 

精進無減 中說, 欲義卽是精進

정진함에 감소함이 없는 ⑧ 정진무감(精進無減)이라 함이란하고자 함의 욕(欲)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고자 하는 뜻의 욕의(欲義)가  정진이다.

 

問曰; 若爾者 無有十八不共法。復次 “欲”以“精進”心數法中各別 云何言“欲卽是精進”?

묻나니,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에는 없는 것이며, 또 하고자 함의 욕(欲)과 정진(精進)은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에서도 각각으로 분별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욕(欲)이 바로 정진(精進)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欲”爲初行 欲增長名“精進”。如佛說, “一切法欲爲根本" 欲如人渴欲得飮 精進如因緣方便求飮。欲爲心欲得 精進爲成其事。欲屬意業 精進屬三業。欲爲內 精進爲外。如是等差別。

답하나니, 욕(欲)은 처음에 시작되는 행으로, 그 하고 싶어 함이 더욱 자라게 되는 것을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일체법은 욕(欲)이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욕(欲)은 사람이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얻고자 하는 것과 같으며,

정진은 인연과 방편을 통하여 마실 것을 구하게 되는 것과 같으며,

욕(欲)은 마음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요, 정진을 그러함을 이루게 하는 것이며,

욕(欲)은 의업(意業)에 속하는 것이요, 정진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속하는 것이며,

욕(欲)은 내(內, 내면)가 되고, 정진은 외(外, 바깥)가 되는 것이니, 

이러함이 서로 다른 것들이다.

 

復次 是精進諸佛所樂 如釋迦牟尼佛 精進力故 超越九劫 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또한 이 정진(精進)은 모든 부처님께서 좋아하신 것이니,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정진(精進)의 힘 때문에 9겁을 초월하여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과 같으며, 

 

復次 如說; 一時 佛告阿難, “汝爲諸比丘說法 我背痛小息"

爾時 世尊四襞鬱多羅僧敷下 以僧伽梨枕頭而臥。

또한 설하여진 바와 같이, 어느 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법을 해설하라. 나는 등이 아파서 조금 쉬어야겠다”고 하시고, 세존은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āsaṅga)을 네 겹으로 접어서 아래에 깔고 승가리(僧伽梨, 겉옷)를 머리에 베고 누우셨다.

 

가사(袈裟 kasaya), 가사(袈裟)에는 삼의(三衣)가 있어 위 가사, 아래 가사, 두 겹 가사입니다.
위 가사는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āsanga)으로 상의(上衣) 즉 윗도리이고,

아래 가사는 안타회(安陀會 antaravāsaka)로 하의(下衣) 즉 아랫도리이며,

두 겹 가사는 승가리(僧伽梨 samghātī)로 추울 때 껴입을 수 있는 두꺼운 옷을 말하며, 상의(上衣)라고도 한다. 또는 3의(衣) 가운데 중간의 가치를 지닌다는 뜻에서 중가의(中價衣)라고도 한다. 구다라승(漚多羅僧)이라 음역하기도 한다.
가사는 사람이 버린 헌옷이나 죽은 사람의 옷을 모아 염색해서 꿰매어 만든 옷으로 출발하였다. (분소의) 이후 일반천으로 가사를 만드는 것도 허용되었는데 그 대신 천을 조각 조각 잘라서 다시 꿰메게 하였다. (할절의)
인도에서는 이렇게 만든 옷이 곧 가사였던 것이 중국에 와서 기후와 풍습에 따라 가사인 편삼을 착용하였으며 한국에 와서는 가사에 장삼을 두르는 형태로 변천하게 된 것이다.  

 

是時 阿難說七覺義 至精進覺 佛驚起坐, 告阿難, “汝讚精進義?”

阿難言:“讚" 如是至三。

佛言, “善哉善哉!善修精進 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何況餘道"

以是義故 佛精進無減 病時猶不息 何況不病!

이 때에 아난이 칠각지(七覺支)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정진각지(精進覺支)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놀라듯 일어나 앉으시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정진의 이치를 정의하고 찬탄하였느냐?”고 물으시자,

아난은 “예, 찬탄하였습니다”고 묻고 대답하기를 세 번을 되풀이 하시고는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구나! 정진을 잘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고 말씀 하셨으니, 

하물며 그 밖의 도(道)이겠는가. 이러한 이치로 보아, 부처님께서는 정진무감(精進無減)이셨으며, 병이 드셨을 때에도 오히려 쉬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병이 없으실 때이겠는가!

 

칠각지(七覺支), 수행 방법을 의미하는 37가지 깨달음을 돕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三十七菩提分法)의 한 범주이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①마음챙김의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ṅga), ②법에 대한 고찰의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ṅga), ③정진의 정진각지(精進覺支, viriya-sambojjhaṅga), ④기쁨의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ṅga) ⑤ 평안의 경안각지(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ṅga), ⑥마음집중의 정각지(定覺支, samādhi-sambojjhaṅga), ⑦평정의 사각지(捨覺支, upekkhā-sambojjhaṅga). 
 

復次 佛爲度衆生故 捨甚深禪定樂 種種身 種種語言 種種方便力度脫衆生。或時遇惡險道, 或時食惡食, 或時受寒熱, 或時値諸邪難聞 惡口罵忍受不厭。

또한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깊고깊은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 갖가지의 몸과 갖가지의 언어와 갖가지의 방편과 힘으로 중생을 제도하셨으니, 때로는 거칠고 험한 길을 다니기도 하셨고, 때로는 거친 음식을 들기도 하셨으며, 때로는 심한 추위와 더위를 겪기도 하셨고, 때로는 여러 삿되고 비난하는 힐문이나 나쁜 말이나 욕설을 만나기도 하셨으나 참고 받으면서 결코 싫어하지 않으셨으니, 

 

佛世尊雖於諸法中自在 而行是事 不生懈怠。如佛度衆生已 於薩羅林中雙樹下臥。

梵志須跋語阿難, “我聞一切智人今夜當滅度 我欲見佛!”

阿難止之言, “佛爲衆人廣說法 疲極!”

부처님 세존께서는 비록 제법 중에서 자유자재하셨으나, 중생을 제도하실 때에는 게으름을 내지 않으셨으니, 마치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신 뒤 살라림(薩羅林)의 쌍수(雙樹) 아래에 누워 계실 때에 수발타(須跋陀, Subhadra) 범지(梵志)가 아난 존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일체지(一切智)를 지니신 분이 오늘 밤에 멸도하신다 하니, 나는 부처님을 뵙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아난 존자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설법하시느라 몹시 피로하십니다”라며 그를 막았다.

 

佛遙聞之 告阿難, “聽須跋入 是我末後弟子"

須跋得入 問佛所疑 佛隨意說法 斷疑得道 先佛入無餘涅槃。

부처님께서 멀리서 그들의 말을 듣고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수발타를 들도록 하여라. 그가 나의 마지막 제자가 될것이니라” 하셨다.

수발타 범지가 허락을 받고 들어가서 부처님께 의심하던 것을 물었고, 부처님은 그의 뜻에 따라 법을 말씀하시어 의심을 끊게 되자 도를 얻고는 부처님보다 먼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버렸다.

 

부파불교에서는 열반이란 번뇌가 소멸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2종열반(二種涅槃)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유여열반은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고도 하며 무여열반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도 한다.

여(餘)는 여의(餘依)의 줄임말이고, 여의(餘依)는 '아직 남아 있는 의신(依身) 즉 소의신(所依身) 즉 육체'를 말하는데, 육체가 존재함에 따라 그에 따라 아직 남아 있는 마음(情)과 형상(形象: 즉 육체)을 뜻한다. 이런 문맥에서, 유여열반 또는 유여의열반은 육체를 지니면서도 번뇌를 끊었을 경우를 의미하며, 무여열반 또는 무여의열반은 육체도 소멸했을 경우를 의미한다.-위키

 

諸比丘白佛言, “世尊!甚爲希有!乃至末後憐愍外道梵志 而共語言"

佛言, “我非但今世末後度 先世未得道時亦末後度。

모든 비구들은 이것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심히 희유하나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범지를 가엾이 여기시어 함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 전생에 큰 사슴, 대녹(大鹿)이었을 때의 이야기) 말씀하셨다.

“나는 비단 이 세상에서만 마지막까지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 아직 도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역시 최후의 순간까지 중생을 제도했었느니라.

 

乃往過去無量阿僧祇劫 有大林樹多諸禽獸 野火來燒 三邊俱起 唯有一邊而隔一水 衆獸窮逼 逃命無地。我爾時爲大身多力鹿 以前跨一岸 以後距一岸 令衆獸蹈背上而渡 皮肉盡壞 以慈愍力 忍之至死。最後一來 氣力已竭 自强努力 忍令得過, 過已背折 墮水而死!

지난 과거 세의 무량한 아승기겁 전에, 큰 나무숲이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삼면으로부터 타 들어왔는데, 오직 한 쪽이 열려 있기는 했으나 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쫓기어 달아나던 짐승들이 피할 곳이 없었느니라. 나는 그때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사슴이었는데, 앞발을 한쪽 기슭에 걸고 뒷발을 건너편의 기슭에 걸쳐서 뭇 짐승들로 하여금 등을 밟고 건너게 하였으니, 가죽과 살이 모두 찢겨지고 부셔졌지만 자민(慈愍)의 힘으로 필사적으로 견뎌 냈느니라. 마지막에 토끼 한 마리가 왔을 때엔 기력이 이미 다 했지만 억지로 힘을 내어 참으면서 그를 건너가게 하고는 등이 부러지면서 물에 떨어져 죽었느니라.

 

如是久有 非但今也。前得度者 今諸弟子, 最後一須跋是"

그러므로 이번의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니라. 앞서 건너간 짐승들은 바로 지금의 모든 제자들이요 맨 마지막의 한 마리 토끼는 바로 지금의 수발타이니라.”

 

佛世世樂行精進 今猶不息 是故言“精進無減”。

부처님은 세세에서마다 즐겁게 정진을 하셨고 지금까지도 오히려 쉬지 않으시니, 이러함을 정진함에 감소함이 없는 정진무감(精進無減)이라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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