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初品中 十喩釋論 第十一卷 第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12. 초품 중 뜻에 걸림이 없다=意無礙(의무애)를 풀이함 2
問曰, 何等甚深法?
묻나니, 매우 깊은 법=甚深法(심심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무엇이 제법의 실상을 깊이 이해하여 불도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일체법입니까?)
答曰, 如先 甚深法忍中說。
답하나니, 앞에서 매우 깊은 법인에 대해 말한 것과 같다.
[대지도론 6권 9에서 '等忍在衆生中 一切能忍, 柔順法忍 於深法中忍' 등인은 중생과 함께하면서 모든 것을 능히 참아 유순하는 것(유순인)이요, 법인은 깊은 법에 대하여 참아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復次 甚深法者, 於十二因緣中 展轉生果, 因中非有果 亦非無果, 從是中出 是名甚深法。
또한 불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매우 깊은 법=甚深法(심심법)이라 함은, 12인연을 따라 전전해서 과보를 내되, 원인=因 가운데 과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과보가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이렇게 12 인연을 따라 나오게 된다고 하는 것을 매우 깊은 법=甚深法(심심법)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 入三解脫門 空 無相 無作 則得涅槃常樂故 是名甚深法。
또한 세 가지 해탈문=三解脫門(삼해탈문)인 공ㆍ무상ㆍ무작에 들면, 곧 열반의 항상한 즐거움을 얻는 까닭에 이를 매우 깊은 법=甚深法(심심법)이라 하며,
復次 觀一切法 非空非不空 非有相非無相 非有作非無作, 如是觀中 心亦不著 是名甚深法, 如偈說.
또한 일체법을 관찰하되, 공도 아니요, 공 아님도 아니요, 상이 있음도 아니요, 상이 없음도 아니요, 작위 있음도 아니요(유위법도 아니요), 작위 없음도 아니니, 이렇게 관찰하는 가운데 마음 또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를 매우 깊은 법=甚深法(심심법)이라 하니, 게송의 말씀과 같으니라.
우리 중생들의 견해에 집착한 고정관념은 있다(有)와 없다(無) 이 두 가지에 박혀 있다.
깨달음이 곧 공(空)이다. 공(空)이 곧 깨달음의 근본 핵심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공(空)을 들으면 공(空)을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여긴다. 깨달음이 전혀 없어 공(空)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다. 공이 곧 지혜이며, 해탈의 뿌리이다.
삼해탈문이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無作)이다. 공하기에 모습이 없고, 공하기에 바람(작위)이 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부처님의 자비로써 중생의 성향에 따라 문을 세 개 열어놓으신 것일 뿐이다.
왜 공(空)인가? 바로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겨났으므로 거기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서 공이다.
왜 무상(無相)인가? 비어 있으니 거기엔 그 어떠한 모양(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무원(無願=無作)인가? 비어 모습이 없는데 뭘 짓거나 뭘 바란다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은 결국 다 같은 뜻이다. 단 하나를 세 가지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해탈의 문은 공(空)을 통해서이다.- 아미산
공 사상은 대승불교 전체의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다.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 서로 의존함)라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하며,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공(空)은 존재에는 자체 · 실체 · 아(我)라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이 교의는 이미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연소생(因緣所生), 즉 인(因)과 연(緣)이 임시로 화합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我)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인 제법무아(諸法無我)에 해당한다.
각 개인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법 法)는 인연에 따라 생기(生起)한 것이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만 그 존재성이 가적(假的)으로(임시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오온의 가화합")이며, 실제로는 거기에는 어떠한 항상불변(恒常不變)한 자아나 실체같은 것이 없는 제행무상 · 제법무아이며, 때문에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공 사상에서는,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보림선원
因緣生法 是名空相
인연으로 생겨난 현상과 작용=法(법), 이를 공(空)의 모습이라 하기도 하고
亦名假名 亦名中道。
잠시 붙여진 이름=假名(가명)이라고도 하며, 중도(中道)라고도 하니,
若法實有 不應還無
만약 법(일체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무로 돌아가지 않아야 하리니,(없어지지 않아야 하리니)
今無先有 是名爲斷。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는 있었다고 한다면, 이를 단견(단멸견)이라 하며,
不常不斷 亦不有無
항상한 것도 아니고, 단절되지도 않으며, 또한 있음(유위법)도 없음(무위법)도 아니니,
心識處滅 言說亦盡。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고, 언설(言說) 또한 다하게 되네.
於此深法 信心無㝵 不悔不沒 是名'大忍成就'。
이러한 매우 깊은 법=甚深法(심심법)에 대하여 믿는 마음에 걸림이 없고, 후회하거나 위축되지 않으면 이를 ‘대인을 성취했다=大忍成就(대인성취)’고 하느니라.
▶ 經. 如實巧度。
▷經.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하다.
(한결같음(如)이라는 실상(實相)에 대해 교묘한 솜씨로 일러주어 무여열반의 나루터로 건네주다)
▶ 論. 有外道法 雖度衆生 不如實度。何以故? 種種邪見 結使殘故。
▷ 論. 외도의 법(가르침)에서도 비록 중생을 제도하나 여실하게 제도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갖가지 삿된 소견과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으로,
二乘雖有所度,不如所應度。何以故?無一切智,方便心薄故。唯有菩薩 能如實巧度。
2乘=성문과 벽지불도 비록 제도하기는 하나, 적절히 제도하지 못하는 것은 일체지가 없어 방편의 마음(힘)이 얇기 때문이나, 오직 보살만이 능히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하나니,
譬如渡師 一人以浮囊 草栰渡之 一人以方舟而渡, 二渡之中 相降懸殊, 菩薩巧渡衆生亦如是。
囊 주머니 낭, 栰 뗏목 벌, 懸 매달 현
浮囊부낭= 헤엄을 치거나 물에 빠졌을 때 몸이 잘 뜨게 하는 물건
懸殊현수= 1. 아주 심하게 다름 2. 거리가 멀어서 멀리 떨어져 있음
사공의 일로써 비유하자면, 한 사람은 공기 주머니=浮囊(부낭)이나 풀 뗏목으로 건네주고, 다른 한 사람은 반듯한 배로 건네주는 것으로, 이 둘의 건네주는 방법이 매우 다르듯이, 보살이 교묘하게 중생을 제도하는 일도 이와 같으니라.
復次 譬如治病 苦藥鍼炙 痛而得差, 如有妙藥 名蘇陁扇陁 病人眼見 衆病皆愈。除病雖同 優劣法異。
聲聞、菩薩教化度人亦復如是。鍼 침 침, 炙 고기구울 적, 蘇 차조기 소, 扇 부채 선, 陁 비탈질 타,
또한 비유하자면, 병을 치료함에 있어 쓴 약이나 침 뜸으로 통증을 통해 차도를 얻지만, 소타선타(蘇陀扇陀, 수다선다, Sudhasyanda)와 같은 묘한 약은 병자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온갖 질병이 모두 낫게 되나니, 병을 낫게하는 것은 같으나 (치료법에) 우열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이, 성문과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 역시도 그와 같으니,
苦行頭陁 初 中 後夜 勤心坐禪 觀苦而得道 聲聞教也。觀諸法相 無縛無解 心得淸淨 菩薩教也。
고행과 두타행으로 초저녁에서 한밤을 지나 새벽까지 부지런히 좌선하면서 괴로움을 관찰하여 도를 얻는 것은 성문의 가르침(교화)이요, 모든 법의 모습이 얽매임도 없고 풀려남도 없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청정하여지는 것은 보살의 가르침(교화)이라.
頭陁(두타 dhūta)=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여의고 최소한의 생활수단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으로, ‘dhu · ta’는 ‘버린다 · 떨어버린다 · 씻는다 · 닦는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두타제일 대가섭(大迦葉).
세부조목으로는 12두타행 · 13두타행 · 16두타행 · 25두타행법이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12두타행법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12두타행은 ① 고요한 곳에 머무르면서 세속을 멀리한다(在阿蘭若處). ② 언제나 걸식하여 신도나 국왕 등의 공양을 따로 받지 않는다(常行乞食). ③ 걸식할 때는 마을의 일곱 집을 차례로 찾아가서 빈부를 따지지 않고 걸식하며, 일곱 집에서 밥을 얻지 못하면 그날은 먹지 않는다(次第乞食). ④ 하루에 한 차례를 한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는다(受一食法). ⑤ 항상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발우 안에 든 음식만으로 만족한다(節量食). ⑥ 정오가 지나면 과일즙 · 석밀(石蜜) 따위도 마시지 않는다(中後不得飮漿). ⑦ 좋은 옷을 입지 않고 헌옷을 빨아 기워서 입는다(著弊衲衣). ⑧ 내의(內衣) · 상의(上衣) · 중의(重衣) 등 세 가지 옷만을 가진다(但三衣). ⑨ 무덤 곁에 머물면서 무상관(無常觀)을 닦는다(塚間住). ⑩ 쉴 때에는 정자나 집을 택하지 않고 나무 밑에서 쉰다(樹下止). ⑪ 나무 아래에서 자면 습기 · 독충 · 새똥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한 데에 앉는다(露止坐). ⑫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다(但坐不臥) 등.
如文殊師利本緣 文殊師利白佛 '大德! 昔我先世 過無量阿僧祇劫 爾時有佛 名師子音王, 佛及衆生 壽十萬億那由他歲 佛以三乘而渡衆生。
문수사리본연(Mañjuśryavadāna)경에서 문수사리 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대덕이시여, 무량한 아승기겁을 지난 과거세에 사자음왕(師子音王)이란 부처님이 계셨는데, 부처님과 중생들의 수명은 10만억 나유타 세(歲)였으며, 그 부처님께서 삼승(三乘)의 법(가르침)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셨으니,
國名千光明 其國中 諸樹皆七寶成 樹出無量淸淨法音, 空 無相 無作 不生不滅 無所有之音, 衆生聞之 心解得道
나라의 이름은 '천광명(千光明)'이요, 그 나라 안의 모든 나무들은 모두 칠보(七寶)로 이루어졌으며, 나무에서는 한량없이 청정한 법음이 나와, 공ㆍ무상ㆍ무작ㆍ불생ㆍ불멸ㆍ무소유의 소리를 내니, 중생들이 그것을 듣기만 하면 마음이 열리어 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時師子音王佛 初會說法 九十九億人 得阿羅漢道, 菩薩衆亦復如是。是諸菩薩 一切皆得 無生法忍 入種種法門 見無量諸佛恭敬供養
이때 사자음왕불의 첫 법회의 설법에서 99억(구백구십만) 사람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며, 보살들 역시 그러하였으니, 이 보살들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갖가지 법문에 들었고, 한량없는 부처님을 뵙고 공경하고 공양올렸으며,
옛날의 억(億)은 십만(十萬)입니다.
能度無量無數衆生 得無量陁羅尼門 能得無量種種三昧。初發心新入道門 菩薩不可稱數。
무량 무수 중생을 능히 제도하였으며, 무량한 다라니문을 얻었으며, 한량없는 갖가지 삼매의 문을 얻었으며, 최초로 발심하여 새로이 불도의 문에 들어온 보살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是佛土無量莊嚴 說不可盡。時佛教化已訖 入無餘涅槃, 法住六萬歲 諸樹法音 亦不復出。訖 이를 흘, 마칠 글
이 불국토의 한량없는 장엄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며, 그때 부처님께서는 교화를 마치시고는 무여열반에 드시니, 6만 세 (6만년) 동안 법이 머물렀으나, 모든 나무에서는 법음의 소리가 다시 나지 않았습니다.
爾時 有二菩薩比丘, 一名喜根 二名勝意。
그 때에 두 보살 비구가 있었으니, 한 사람은 희근(喜根)이요, 다른 이는 승의(勝意)였습니다.
是喜根法師 容儀質直 不捨世法 亦不分別善惡。喜根弟子 聰明樂法 好聞深義, 其師不讚 少欲知足 不讚戒行頭陁 但說諸法實相淸淨。
그 중 희근법사는 용모와 위의가 단정하고 순박 정직하며, 세속법을 버리지 않으며 또한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희근 법사의 제자들은 총명하여 깊은 진리 (참된 가르침) 듣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스승은 욕심이 적음=少欲(소욕)과 만족함을 아는=知足(지족)을 찬탄하지 않고, 계를 지키는=戒行과 두타행도 찬탄하지도 않았으나, 제법의 실상이 청정함만을 설할 뿐이었습니다.
語諸弟子 ‘一切諸法 婬欲相 瞋恚相 愚癡相 此諸法相 卽是諸法實相 無所罣㝵.' 以是方便 教諸弟子 入一相智。
그는 제자들에게는 말하기를 '일체제법에는 음욕의 모습, 성냄의 모습, 어석음의 모습이 있으며, 이러한 제법의 모습이 곧 제법의 실상이며, 걸림 없는 바이다'라고 설하여, 이러한 방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서 차별되 않은 하나의 진리이며 실상=一相智(일상지)에 들게 하였습니다.
時諸弟子 於諸人中 無愼無悔 心不悔故 得生忍, 得生忍故 則得法忍, 於實法中 不動如山。
이때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성내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잘 참는=生忍(생인, 중생인)을 얻었고, 생인을 얻은 까닭에 곧 자연의 모든 흐름을 참아 내는=法忍(법인)을 얻게 되어, 진실한 법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마치 산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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